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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두랑거와 대장금

by 미누리

스리랑카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하숙집 생활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이제는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 보려고 한다. 오래전부터 스리랑카를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 창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스리랑카 장애인이 정성껏 만든 수공예품과 여성 생산자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차(茶)를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 우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창업 준비를 구체화하려고 한다.


먼저, 장애인을 만나기로 했다. 스리랑카에는 정부 사회서비스 부처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직업 훈련원이 있다. 예전에 캔디 장애인 학교에서 봉사하기 위해 스리랑카 수어를 배운 적이 있는데, 그때 과외를 해준 수어통역사 니샤니 선생님이 캔디 외곽의 한 장애인 직업 훈련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니샤니 선생님께 장애인 훈련생을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더니, 선생님은 너무 반가워하시며 마침 졸업식이 있으니 훈련원에 와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렇게 그들 곁에 앉았다. 지난 일 년간 수십 명의 남자 장애인이 자동차정비, 목공, 건설 등의 직업 훈련 과정을 마쳤다고 했다. 어느 훈련생의 졸업 소감을 듣다가 울컥해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동안 함께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평생 잊지 않겠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정하게 이별 인사를 전했다. 떨리는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아마 그에게 직업 훈련보다 더 값진 건 우정이었으리라. 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정책적 지원보다는 사회적 지지가 아닐까.


'여러분 모두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지길 바랍니다.' 나는 전교생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마음으로 간절히 빌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많은 질문을 준비해 두었다. 스리랑카 장애인 일자리 현황, 직업 훈련 소감, 사회에 바라는 점, 앞으로의 꿈과 기대 등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나 졸업에 대한 기쁨과 이별에 대한 슬픔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그런 무거운 질문을 하는 건 실례 같았다. 두 손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들은 충분히 수고했고, 박수받을 자격이 있었다.


졸업식이 끝난 뒤, 직업 훈련 교사들에게 정부에서 제공하는 장애인 서비스와 장애인 취업 현황을 물어보았다. 우수 훈련생에게는 지역 일자리를 연계해 준다지만 기회가 많지는 않아 보였다. 훈련원의 알선을 통해 장애인을 한 번이라도 채용한 적이 있는 사업주는 장애인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기에 재차 고용하려 하나, 한 번도 고용한 적이 없는 사업주를 설득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역시 함께해 보는 경험만큼 강력한 설득은 없다. 나 역시 장애인 학교에서 봉사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하숙집으로 돌아온 나는, 닐루 이모와 마두랑거가 묵는 방에 찾아갔다. 닐루 이모에게 장애인 직업 훈련원에서 있었던 일을 공유하며, 마두랑거를 그곳에 보낼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닐루 이모는 고개를 저었다. 마두랑거의 자폐증이 심한 편이라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어 단체 생활이 어렵다고 말했다.


마두랑거는 내가 이곳에서 지낸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올 수 없었다. 하숙집 별채 끝방에서 그는 문을 굳게 닫은 채 우두커니 스마트폰 화면만 보고 있었다. 사람들과 식탁에서 밥을 먹지도 않았고, 마당을 걷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방문마저 거부한 건 아니다. 내가 방에 놀러 오면 그는 인터넷에서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찾아 재생했다. 그건 아주 오래전에 방영이 끝났지만, 여전히 스리랑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 중 하나다. 마두랑거는 내 눈을 보지 않았고 말 한마디 걸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가 한국 드라마를 트는 방식으로 나를 환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아 <대장금>을 보았고, 주제곡이 나오면 따라 부르기도 했다. 마두랑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외부와의 단절은 장애인의 현실이고, 모두가 알아야 할 진실이기도 하다. 마두랑거가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마두랑거의 장애 때문이 아니라, 사회에서 상처받고 닫힌 마음 때문이다. 반복되는 불편한 시선에 아무도 자신을 반기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나는 닐루 이모에게 마두랑거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사람들과 조금씩 교류하게 해야 한다고 조심스레 말했으나, 닐루 이모는 마두랑거가 겁을 먹으면 뒤로 고꾸라져 바닥에 눕는데, 체구가 큰 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외출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돌봐주고 싶어." 닐루 이모는 마두랑거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스리랑카에도 보호자가 없는 장애인을 보살펴주는 장애인 거주 시설이 있고, 언젠가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 마두랑거는 그곳으로 보내질 것이다. 닐루 이모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아들을 직접 보살피겠노라 결심했다. 그리고 아들 마두랑거처럼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공유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도 두 손 모아 약속했다. 기꺼이 봉사자로서 당신의 꿈에 보탬이 되겠다고.


그녀는 엄마이기 전에, 꿈이 많은 여성이었다. 닐루 이모가 보여준 젊은 시절의 사진에는 해맑게 웃는 소녀가 있었다. 수도 콜롬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모두가 알만한 은행에서 유능한 직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정한 남편을 만났고, 종종 가난한 아이들에게 주판을 가르치는 교육봉사를 했다. 그러나 마두랑거를 낳은 후에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그를 돌보는 데 전념해야 했다. 닐루 이모는 지금도 성인이 된 아들을 두고 멀리 떠날 수 없다. 두 사람에게는 자유가 필요해 보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 이들이 있었다. 하숙집에서 장애 당사자와 같이 살게 된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새삼 깨닫는다. 장애인이 마주한 현실과 그 가족으로 사는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듣는 이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나는 이곳에 자폐 가족과 은퇴한 특수교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왔다. 우리는 어쩌다 이곳에 모이게 되었을까?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마두랑거는 조용히 <대장금>을 틀었다. 그렇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결되고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다정하고 서글픈 연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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