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근처에 고급 호텔이 하나 있다.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그 호텔은 언제나 꼿꼿하게 서서 우리 하숙집을 내려다본다. 호텔의 숙박객은 대부분 유럽에서 온 부유한 여행객이고, 그들은 값비싼 차량과 현지인 기사를 대동해 스리랑카를 여행한다. 그 외국인들을 실어 나르는 현지인 기사들은 우리 하숙집의 허름한 지하방에 머무른다.
가끔 호텔 옥상에서 파티를 여는데, 쿵쾅대는 음악 소리는 하숙집까지 크게 울린다. 어젯밤에는 폭죽까지 터트렸고, 그 파편은 우리 하숙집 마당으로 흩날렸다. 파티는 돈 많은 외국인이 즐기고, 그로 인한 소음과 공해는 스리랑카 사람들의 몫이다.
지난밤 호텔의 파티로 인해 잠을 설쳤지만, 이상하리만치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떴다. A 스님의 가족과 한적한 시골 마을에 다녀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A 스님은 한국에서 알게 된 스리랑카 출신 스님이신데, 한국에서 내게 스리랑카 불교 용어를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기도 하다. 언젠가 스님의 가족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바람이 전해져 스님의 남동생 부부와 귀여운 세 자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됐다. 그들은 스님만큼이나 차분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스님께서 스리랑카에 건립하고 계신 절을 보러 갔다. 스님은 지금 한국에 머물고 계셔서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다. 절은 세속의 먼지가 닿지 않을 깊은 산골짜기에 있었다. 자동차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비탈진 산길을 한참 올랐더니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장엄한 풍경뿐이었고, 시야를 가로막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사방이 트인 곳에 살면 시력이 절로 좋아지겠다고 생각하며 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의 천장에는 새들이 벽에 구멍을 뚫고 지은 둥지가 있었고, 바닥에는 새똥과 깃털이 떨어져 있었다. 왜 새를 내쫓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스님이 새들의 터전을 헤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새들에게 기꺼이 공간을 내주게 되었다고 말했다. 새소리가 가득할 절을 상상해 보았다. 스님의 자애를 먹고 자란 새들은 언젠가 절에 복을 물어다 주지 않을까.
절 주변에는 가난한 타밀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스님의 가족과 왕래가 잦아 친밀해 보였다. 타밀족은 스리랑카의 소수 민족이고, 스님의 가족은 스리랑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싱할라족이다. 두 민족 사이에는 26년간의 내전이라는 비극적인 역사가 놓여 있다. 일부 싱할라족은 타밀족을 대놓고 무시하기도 하고, 은근히 멸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님의 가족은 그들을 만만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구태여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함께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중이었다.
타밀 가족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집에도 잠시 방문했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새댁과 두세 살배기 아들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이었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도 있었다. 우리가 강아지에게 관심을 보이니, 아이는 강아지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강아지를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듯 품에 꼭 끌어안고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불안해하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곳에 있는 건 이들의 것이어야 하니까.
스님의 가족은 나의 시주를 극구 사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절이 무사히 완공되기를, 함께하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우리 하숙집이 있는 동네에서는 외지인이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외국인이 마천루에서 즐기는 유흥의 사회적, 환경적 피해를 현지인이 고스란히 감당한다. 그건 공평하지 않다. 이곳은 자연, 동물, 사람 모두에게 공평한 곳이 됐으면 좋겠다. 스님도 그런 뜻을 품고 계시리라 믿는다.
하숙집에 돌아온 나는 A 스님 절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마담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마담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첫째 아들은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브로커에게 속아 이름 모를 공장에 갇힌 채 임금도 받지 못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마담은 인터넷을 수소문해 한국에 있는 스리랑카 유관기관에 전부 연락해 아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마담의 이야기를 믿고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 바로 A 스님이시다. 스님은 마담의 아들을 찾아내 스리랑카로 돌아갈 수 있게 도우셨다. 마담은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지만, 스님은 극구 사양하시며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으셨다. 마담은 스님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 세상에 흔치 않은 성자라고 말했다. 마담과 나는 무슨 인연으로 하숙집에서 만난 걸까. 스리랑카가 좁은 걸까. 아니면 스님의 자비가 널리 퍼진 걸까.
조건 없이 선행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하숙집 식구들은 스님의 넓은 도량에 감동했다. 한없이 이타적인 스님이야말로 살아 있는 부처가 아닐까. 언젠가 스님의 절이 완공되면 마담과 함께 가기로 했다. 공간은 사람을 닮기 마련이다. 그곳은 스님처럼 다정한 빛으로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