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산책을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마담이 방에서 나와 나를 불렀다. 시내에 볼 일이 있다며 같이 나가자고 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마담과 함께 하숙집을 나서며 나란히 걸었다. 마담은 은행 두 군데에 들러 본가 전세금을 이체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런 큰돈을 소지한 채 혼자 이동하는 건 위험할 것 같아 괜찮다면 나도 따라가 돕겠다고 말했더니, 마담도 사실 혼자 가는 게 걱정이었다며 동행을 청했다.
길을 걷던 마담은 이 근방에 금목걸이, 휴대전화, 가방 같은 개인 소지품을 순식간에 훔쳐 가는 도둑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며 말했다. 마담도 소매치기에게 금목걸이를 눈뜨고 도난당한 적이 있고, 다른 마을에서는 휴대전화를 훔치려고 뚝뚝 기사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며, 요즘 스리랑카는 사람보다 돈이 귀해진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런데 내게 주의하라던 마담의 가방 지퍼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의 지갑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길래 일단 마담의 가방 문부터 닫으시라고 말했다. 마담은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며 "네가 날 살렸어! 역시 같이 가니까 너무 재미있고 안심된다."라고 말했다. 마담은 젊은 시절부터 교단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어린아이처럼 순수할 때가 있는데, 나는 마담의 그런 허술하고 엉뚱한 면을 좋아한다.
옆 동네 은행에 들러 일을 마쳤다. 마담이 이 주변에 새로 지은 불교 사원이 있다며 구경하러 가자고 했다. 사원을 찾아간 우리는 구석에 신발을 벗어두고 고요한 경내를 걸었다. 스리랑카 사원에서는 겸허한 마음으로 맨발로 걸어야 한다. 사원에 커다란 망고나무가 있었는데, 마담은 그 아래 떨어진 연두색 망고 하나를 줍더니 나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망고가 뭔지 아니?"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게 뭐냐고 묻자, 마담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바로 땅에서 주워 먹는 망고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망고를 내게 건넸다.
"아무리 땅에 떨어진 망고여도 사원의 것인데 허락 없이 먹어도 되는 거예요?"
"외국인인 네가 스리랑카 망고를 맛있게 먹는다면 부처님도 기뻐하실 거야."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손으로 껍질을 벗겨주었다. 일부러 망고를 훔친 게 아니니 외국인에게 이 정도 아량은 베풀어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망고를 베어 물었다. 마담의 말대로 주워 먹는 망고는 내가 여태껏 먹어본 망고 중에 최고로 맛있었다. 노란 속살에서는 구름 한 점 삼킨 듯한 부드러움이 물씬 느껴졌고, 입안에서는 대지가 빚어낸 자연스러운 단맛이 가득 풍겼다. 갑작스러운 행운이라고 생각하니 더 맛있었다. 마담이 건넨 망고는 마담처럼 달착지근하고 간드러졌다. 불어오는 바람마저 달게 느껴졌다.
사원에서 나와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스리랑카 버스에서는 차장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요금을 낸다. 내가 차장의 눈을 똑바로 보며 목적지를 말했더니, 마담이 낯선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 말라고 내 귀에 속삭였다. 내가 "눈앞에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그 눈을 안 보고 대화해요? 나는 누가 말 걸면 눈을 열심히 쳐다봐요."라고 말했더니, 마담은 "그럼 그 사람은 네가 자기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네 뒤를 따라올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는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하지 않았다.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화자를 보지 않아도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싱할라어는 모국어만큼 편하지 않다 보니 상대방의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말의 속뜻을 이해하려고 얼굴을 빤히 보게 된다. 아무래도 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의 표정을 읽어내기 쉬우니까 눈빛에 의존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마담은 남편을 간호하러 하숙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혼자 불치사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캔디 호수를 걷다가 어느 노스님을 마주쳤다. 인자한 미소로 "Good Afternoon."하고 인사를 건네시기에, 싱할라어로 "쑤버 샌대왁 웨와(좋은 오후 되세요)."라고 답했더니, 스님은 내가 싱할라어를 할 줄 아는 거에 놀라워하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셨다. 매일 호수를 산책하시는데, 그동안 내가 호숫가를 걷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고 하셨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불치사에 불공을 드리러 캔디 호수를 거쳐가는데, 그 모습을 보셨나 보다.
스님은 캔디 호수 근처의 말와뚜 사원(Malwathu Maha Viharaya)에 거처 중이라고 하셨다. 말와뚜 사원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절이다. 그 절에 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고 말씀드리자, 스님은 지금 절을 보여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하셨다. 기쁜 마음으로 절에 입장했다가, 주지실에 걸린 사진에서 스님의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말와뚜 사원에는 총 33개의 절이 있는데,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스님이 그중 한 절의 주지 스님이셨다. 큰스님을 미처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드렸다.
더 놀라웠던 건 다른 스님들과 종무원들도 나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분이 "너 매일 흰 치마 입고 호수 걸어 다니잖아. 이 동네에 너 모르는 사람 없어."라고 말하며 웃었다. 스리랑카 절에 갈 때는 흰옷을 입는 게 예의라서 불치사에 갈 때마다 흰옷을 입었다. 누가 봐도 외국인이지만 일반적인 여행자의 차림은 아니다 보니 눈길이 갔나 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니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안도감이 들었다. 자비로운 눈들이 이방인을 지켜주지 않을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마음속에 고이 담고 싶어졌다. 어쩌면 나는 스리랑카 사람들의 다정한 마음을 잘 기억하기 위해 눈을 마주 보게 된 게 아닐까.
절에는 유난히 모기가 많았다. "스님들이 살생하지 않으시니, 캔디에 있는 모기들이 다 여기로 모였나 봅니다."라는 내 말에 스님께서 말갛게 웃으셨다. 모든 생명은 자기 마음이 편한 곳에 있고 싶기 마련이다. 내게는 캔디가 그런 곳이다. 그리고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모기처럼 성가신 존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고 다짐했다.
절에서 홍차를 한 잔 내주셨는데, 차와 같이 먹으라고 주신 하꾸루(hakuru)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하꾸루는 야자수 수액으로 만든 설탕 덩어리다. 스님께서 스리랑카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맛있는 하꾸루'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운 좋게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망고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하꾸루를 먹었다. 하숙집 식구들에게도 이 맛을 알려주고 싶어 스님께 허락을 받고 몇 개 포장해 가기로 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하꾸루를 들고 신나게 집으로 달려갔지만, 기대와 달리 가족들의 환영은 받지 못했다. 쫓겨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호수에서 우연히 만난 스님을 따라가 차를 마시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엄마는 깜짝 놀라며 나를 호되게 혼냈다.
"스리랑카에는 스님 행세하는 사기꾼도 많아. 그 사람이 가짜 스님이었다면 너는 오늘 집에 못 돌아왔을 거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네 마음이지만 낯선 사람을 따라가는 건 절대 안 돼. 그리고 그 절에 가고 싶었으면 우리한테 말하지, 뭐가 급해서 혼자 갔다 왔니?"
엄마는 내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개방된 공간에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절에 다른 재가자도 있기는 했지만, 모르는 스님을 따라간 것도, 비구 스님을 여성 신도 혼자 친견하러 간 것도 경솔한 행동이었다. 엄마가 한 말이 다 맞기에 반성하는 티를 팍팍 내며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말했다. 염치없이 주지 스님께 하꾸루를 얻어왔다고 하면 더 혼날 것 같아서 하꾸루는 별채 손님들에게만 조용히 나눠주었다.
밤이 되자 모두의 식탁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어른들은 내가 스리랑카에서 경계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 걱정됐는지 나의 안전을 위한 특별 싱할라어 수업을 열었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새침하게 대답하는 방법, 버스에서 변태를 만나면 쌀쌀맞게 대처하는 방법을 직접 시범까지 보이며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들이 알려주는 싱할라어를 최대한 못되게 구사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자 따라 해 봐. 손 치워!"
"송 치워"
"손! 치! 워!"
"손! 찌! 워!"
"그렇게 귀엽게 말하면 발도 주겠네."
마담은 나의 미숙한 발음을 계속 고쳐주다가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급기야 비속어를 알려주었다. 나중에는 외국인이 싱할라어로 어눌하게 욕하면 무섭기는커녕 집에 데려가고 싶어진다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옷핀으로 변태의 손을 찔러버리라고 했다. 마담의 무시무시한 농담에 모두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오늘도 식탁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모두의 걱정과 달리 나는 경계심이 높은 편이라 아무나 쉽게 따라가지 않는다. 위험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에서 경고음이 울리는데, 오늘은 경고음이 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하숙집에는 좋은 사람들만 있어서 화낼 일이 없던 것뿐이지, 필요한 상황에서는 단호하게 화를 내기도 한다. 그래도 외국인에게 화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깔깔대는 하숙집 식구들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 그들의 특별 수업에 열심히 협조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좋은 친구를 '망고 프렌즈'라고 부른다. 망고나무의 한 가지에서 여러 개의 망고가 붙어서 자라는 것처럼, 언제나 곁에 있는 친한 친구를 망고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캔디에서 곁에 오래 두고 싶은 망고 친구들을 만났다. 나의 망고나무들은 여기저기서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나의 실수를 부드럽게 감싸주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나를 따뜻하게 지켜봐 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곳. 이토록 다정한 캔디를 만나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