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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가 좋아요

by 미누리

해외 봉사는 나의 오랜 꿈이었다. 메마른 땅에서 귀여운 아이들을 두 팔로 품어 안는 모습을 상상하며 꿈을 키웠다. 학부 때, 마침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해외 봉사에 합격했다. 그리고 파견기관을 확인하자마자 눈물을 터트렸다. 그건 기쁨의 눈물이 아닌 실망의 눈물이었다. 내가 봉사할 곳은 스리랑카 장애인 거주시설이고, 나도 그곳에서 기숙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장애인과 살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고등학생 때는 특수학급 친구들의 도우미를 자원할 만큼 장애인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자기 공부하기도 바쁜 고 3 시절, 전교에서 도우미 활동을 자처한 건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지적장애 친구의 지나친 집착을 겪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을 안게 되었다. 그래서 스리랑카에서 장애인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기 싫어 대성통곡했다. 비행기 타러 가는 발걸음은 돌덩이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고, 봉사활동 전 필수로 참여하는 현지적응교육에서는 하루 종일 사형선고받은 사람처럼 어두운 표정만 짓고 있었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 삶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내가 봉사한 곳은 백여 명의 장애인이 기숙하며 일상생활 수행과 직업 기술을 훈련하는 학교였다. 여기서 손이 제일 많이 가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나였다. 도움을 주러 간 곳에서 오히려 도움을 받으며, 장애인에게 세우고 있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졌다. 나중에는 무엇이 '장애'인 지 구별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가기 싫어했던 곳을 이제는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다. 누군가의 결정이 아닌 온전한 나의 선택으로 향한다. 스리랑카는 마음속 깊은 편견과 오래된 상처를 이겨낼 용기를 주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방문했던 게 2019년이었으니, 6년 만에 학교에 돌아온 셈이다. 아쉽게도 방학이라 학생들을 만날 순 없지만, 관사(교직원 숙소)에 사는 선생님들이 남아있어 그들을 보러 갔다. 학교는 캔디 구석 외진 곳에 있다. 학교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예전에 살았던 기숙사에서 자도 된다고 허락받았지만, 정든 동료들과 북적댔던 기숙사에서 쓸쓸하게 자는 것보다, 재봉 선생님이 묵는 관사에서 가족들과 도란도란 자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 선생님께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드렸다.


재봉 선생님은 세 자녀와 함께 관사 생활을 하고 있다. 수줍음 많은 첫째 아들 이쑤루, 똑 부러지는 둘째 딸 하시니, 그리고 사랑스러운 막내딸 세우미. 선생님의 남편은 막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시니가 끼리떼(밀크티)를 만들어 줬는데, 익숙한 손놀림을 보니 한두 번 만들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학교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개구쟁이 하시니가 어느새 의젓한 소녀로 자라 차를 우려 주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가슴이 뭉클했다. 하시니의 끼리떼는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만큼 진한 맛이었다.


재봉 선생님 옆집에는 전기 선생님이 살고 있었고, 앞집에는 컴퓨터 선생님이 살고 있었다. 관사 식구들은 학교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학교가 많이 변했냐고 물었는데, 시끌벅적했던 아이들의 소리가 사라진 게 제일 크게 느껴졌다. 그 시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자동차 정비 실습실에는 새로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여러 개의 손이 하나의 촛불을 감싸고 있었고 '어둠에 침묵하지 말고, 촛불 하나라도 밝히자.'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되뇌었다.



관사 식구들과 학교 밖 산책을 다녀왔다. 우리 학교는 산 중턱에 있어 상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냇물을 끌어다 쓴다. 비가 내리지 않을 때는 물이 끊기기 일쑤였다. 며칠씩 씻지 못하는 날도 허다했다. 단수가 한동안 지속되던 때, 여학생들과 단체로 양동이를 들고 냇가에 가서 물을 길어온 적이 있다. 그때는 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해 예민했으니 주변 풍경에 눈길조차 주지 못했다.


다시 만난 계곡은 우리의 단수 소동을 잊은 듯 평화로이 흘러가고 있었다. 군데군데 밝은 빛을 머금은 꽃들과 그 사이로 졸졸 흐르는 맑은 물소리에 내 마음도 청정하게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다. 문득 우리 아이들이 떠올랐다. 손에 양동이를 들고 있던 소녀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높은 산꼭대기에서 시작된 냇물이 작은 물줄기가 되어 각자의 길로 흘러가듯 우리 아이들도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을까.


이쑤루가 학교 나무에서 올리브 열매를 따서 양념을 해줬다. 조금 매웠지만 달큼하면서 쌉싸름한 맛에 묘한 중독성이 있어 자꾸 손이 갔다. 전기 선생님의 부인은 카사바를 쪄줬는데, 막 쪄낸 뜨끈뜨끈한 카사바를 곱게 간 코코넛 가루에 찍어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그리고 재봉 선생님이 내어준 저녁도 배불리 먹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잊은 적이 없지만, 가족처럼 반갑게 맞아주는 환대에 다시금 감격하고 말았다. 역시 이곳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먼 나라 한국에서 손님이 왔는데 이 밤을 조용히 보낼 리 없다. 마치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관사 공주들의 실력 뽐내기가 시작됐다. 전기 선생님 딸은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재봉 선생님 딸들은 춤을 췄고, 컴퓨터 선생님 딸은 앞구르기를 선보이며 웃음을 자아냈다. 그리고 누군가 블루투스 스피커와 마이크를 가져오더니 한 명씩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한 곡 불렀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장기자랑은 막을 내렸다.


관사 실내에는 화장실도, 세면대도 없다. 관사 뒤편에 임시로 만든 수도꼭지 앞에 쭈그려 앉아 세안해야 한다. 씻기 위해 나무가 우거진 낭떠러지로 나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맨발 밑으로 달팽이들이 기어다녔고, 밤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졌다. 별을 세며 이를 닦았다. 수림에 양칫물을 뱉으려는 순간, 내 눈앞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반딧불이였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반딧불이를 마주 보며 하는 양치라니. 이토록 낭만적인 양치가 또 있을까. 뒤에는 내가 수풀 속으로 넘어질까 봐 걱정되어 지켜보고 있는 재봉 선생님이 있었고,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외쳤다.


"저는 반딧불이가 좋아요.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우리 학교가 좋아요.

이 학교에 사는 다정한 사람들이 좋아요."


방에 들어와 몸을 뉘었다. 시골의 밤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하고 조용한 방에서 낯선 손님의 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더니, 반딧불이 하나가 어둠 속을 유영하듯 날아다녔다. 문득 낮에 학교 외벽에서 읽은 문구가 생각났다. '어둠에 침묵하지 말고, 촛불 하나라도 밝히자.' 반딧불이는 어둠에 지지 않겠다는 듯 자신의 존재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그 빛은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빛이었다.


"선생님, 제가 반딧불이 좋아한다고 한 거 쟤가 들었나 봐요. 그래서 방에 놀러 온 것 같아요."


"그러네. 미누리는 반딧불이에게도 사랑받는구나. 여기 있는 모두가 너를 사랑하고 있어."


스리랑카에서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오랜 벗들은 내게 잊지 않고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나는 그들에게 돌아오고 싶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건, 그곳에 사랑하는 존재가 있거나, 사랑받은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친구들은 온 힘을 다해 나를 사랑해 주었고,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 주었다.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잔뜩 겁을 먹고 웅크리던 어린 날의 나는, 이곳에서 자신의 빛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그 빛을 이어갈 차례다. 나 또한 어둠에 침묵하지 않고, 밝은 빛을 건네는 반딧불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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