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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는 마히양가나

by 미누리

스리랑카 이주민 지원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 계신 몇몇 스리랑카 스님과도 인연을 맺었는데, 그중 한 스님께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연락을 주신 분은 한국에서 박사과정 유학 중 잠시 고국에 방문한 B 스님이셨다. 스님은 가족들과 함께 고향 라트나푸라에서 캔디 불치사로 순례를 가고 있는 길이라고 하셨다. 감사하게도 내가 불치사 근처에서 지낸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안부차 연락을 주셨다.


스님이 캔디에 도착할 무렵에 맞춰 나도 카메라를 들고 불치사로 향했다. 스님께 인사도 드리고, 가족사진도 찍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에 내가 먼저 불치사에서 뵙자고 청했다. 언제나 참배객으로 북적대는 불치사지만, 그 안에서 스님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국에서만 뵙던 스님을 먼 나라 스리랑카에서,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불치사에서 다시 만난다니. 너무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걸음에 달려가 "스님!"하고 외쳤다.


스님 가족분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무려 열두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었는데, 처음 뵙는 분들이라 모두의 이름을 외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스님이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따라 불렀다. 스님의 어머니는 내게도 엄마, 삼촌은 내게도 삼촌. 스리랑카에서는 혈연이 아니더라도 가족처럼 호칭을 부르며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자연스럽다. 그래서 나 같은 낯선 이방인을 스스럼없이 품어줄 수 있는 것 같다.


불치사 순례를 마친 일행은 마히양가나 친척 집에 가서 잔다고 했다. 부처님께서 스리랑카에 세 번 방문하셨는데, 첫 발을 디딘 성지가 마히양가나라고 전해진다.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히양가나 사원에 꼭 가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스님이 지금 같이 가자고 흔쾌히 권해주셨다. 마히양가나에서 캔디에 가는 버스가 자주 있다고 해서 돌아올 때는 혼자 버스를 타기로 하고 망설임 없이 마히양가나 여행을 따라갔다. 다행히 가족들이 타고 온 봉고차에는 내가 끼어들 틈이 있었다.


마히양가나는 캔디에서 차로 두 시간쯤 떨어져 있다. 마히양가나 가는 길은 고층 건물 하나 없는 첩첩산중이었다. 산을 타고 내려가는 18개의 급경사 커브 길이 이어지는데, 한 굽이를 돌 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다음 장면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하며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알고 있는 모든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자주 보는 풍경이라 그런지 무심했다. 이런 풍경에 질릴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먼저 향한 곳은 마히양가나 사원(Mahiyangana Raja Maha Viharaya)이었다. 부처님은 성불 후 9개월이 되셨을 때, 스리랑카의 야카족과 나가족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마히양가나에 오신 적이 있다. 야카족의 수장이었던 사만은 부처님의 설법에 감동해 스리랑카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고, 부처님이 남기신 머리카락을 마히양가나 불탑에 안치했다고 전해진다. 그 전설의 장소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게다가 법당에서 울리는 B 스님의 염불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국내에서 이주민 지원 활동을 하면서 힘든 일이 참 많았지만, 그래도 그 인연이 이렇게 마히양가나까지 닿았다.


순례를 마치고 사원 밖으로 나오니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 주신 스님과 가족들의 공덕에 보답하고자 아이스크림을 샀다. 그들이 베풀어 준 친절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초라하다. 그래도 하늘이 아주 맑고 햇빛이 쨍쨍해 아이스크림 먹기 딱 좋은 날씨였다. 봉고차 옆에서 어른, 아이 나눌 것 없이 다 같이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사실 나는 아이스크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혼자였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여행하다 보면 평소에 하지 않던 것들을 하게 된다. 이런 예상치 못한 달콤한 시간이 결국 특별함을 선사하는 게 아닐까.


이어서 도착한 곳은 소라보라 호수(Sorabora Wewa). 마히양가나의 오래된 저수지라고 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호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마히양가나에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침까지만 해도 캔디에 있었는데, 나는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걸까. 자비의 물결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게 아닐까. 호수의 물은 하늘빛을 담아 반짝였다. 마히양가나에서의 시간도 내 마음속 호수에 오래도록 반짝이며 남으리라.


친척 집에 들러 따뜻한 집밥까지 얻어먹었다. 갑작스럽게 오게 되어 선물 하나 챙겨 오지 못한 불청객이었지만 집주인 가족들은 오히려 먼 길을 와줘서 고맙다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마을 친척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나중에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내가 떠날 때 모두 마당으로 나와 손을 흔들어줬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정겹던지. 처음 만난 가족들의 애틋한 배웅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즉흥적으로 떠나는 여행이 이토록 재밌을 줄은 몰랐다. 그저 사람들을 믿고 따라다니는 여행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원래 계획 없이 갑자기 떠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스리랑카에서는 나도 모르게 과감해져 안 하던 선택을 하게 된다. 하나라도 더 보고, 더 느끼고,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내 안의 울타리를 조금씩 뭉그러트린다. 앞으로도 스리랑카에서 무작정 찾아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음에 인연이 닿는 곳은 어디일까.


사람들은 내가 스리랑카를 자유롭게 누비는 것을 보고 용기가 대단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그만큼 용기를 주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더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낯선 길을 용기 내어 걸을 수 있는 건, 스리랑카 사람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들의 자비를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더 좋은 길을 만난다. 내가 스리랑카에서 가지고 있는 건 용기가 아닌 신뢰다.


마히양가나 사원(Mahiyangana Raja Maha Viharaya)
소라보라 호수(Sorabora We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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