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 초대받았다. 한국에 사는 데우미와 사말카 자매가 친오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는데, 마침 스리랑카에 머무르고 있던 나에게도 청첩장을 보냈다. 결혼 당사자와는 친분이 없지만, 동생들과 각별하게 지내온 터라 두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다녀오기로 했다. 예식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전날 파나두라(Panadura)에 있는 그들의 집에 미리 도착해 하루 자기로 했다. 스리랑카 결혼식은 워낙 성대한 행사라 한 번 다녀오면 며칠을 앓아누울 정도로 기운이 다 빠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결혼식이 성대한 만큼 전야제도 분주하다는 것이었다.
파나두라에 가는 방법은 하숙집 식구들이 알려주었다. 캔디에서 파나두라는 버스로 다섯 시간이 걸리고, 하숙집에서 시외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 정도 걸린다. 정류장까지 걸어가려고 했는데, 마담이 직접 뚝뚝을 호출해 데려다주었다. 외국인 아가씨가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낯선 도시로 홀로 떠난다고 하니 불안했나 보다. 버스에 타기 전, 마담은 내게 세 가지를 신신당부했다. "버스에서 사람들과 말 섞지 말 것! 가방은 무조건 껴안고 있을 것! 그리고 절대 자지 말 것!" 특히 마지막 사항을 강조했다.
내가 탄 버스가 출발하려는 찰나, 차장이 다가와 과자를 하나 건넸다. 알고 보니 마담은 하숙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 가게에서 과자를 사와 차장에게 전했고, 버스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갔단다. 어제 하숙집 어른들이 "스리랑카는 슈퍼가 없는 길이 많고, 길거리 음식은 위생을 믿을 수 없어. 그러니까 물이랑 간식 꼭 챙겨."라고 말했지만 나는 원래 군것질을 안 하고, 가방이 무거워지는 것이 싫고, 위생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 비상식량을 준비하지 않았다. 마담은 쓸데없이 배포가 큰 내가 굶을까 봐 걱정됐나 보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했는지 마담은 여러 번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며 내가 깨어있는지 확인했다. 나는 버스에서 자본 적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싱할라어로 통화했더니 옆좌석에 앉은 남자가 흥미를 보이며 귀찮게 말을 걸어왔다. 싱할라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어디에 사는지, 누구랑 사는지. 점점 사적인 질문을 하길래 싱할라어를 잘 모르는 척하며 얼버무렸다. 목적지에 곧 도착할 것 같아 잠깐만 눈 감고 자는 시늉을 하려고 했는데, 연기에 너무 몰입했나 보다. 그만 진짜 잠들어버렸다. 그것도 목이 꺾인 채로 정신없이 꿀잠을 잤다.
누군가 날 흔들며 깨웠다. "이봐요, 파나두라예요. 얼른 일어나요!" 눈을 떠보니 옆좌석의 그가 웃으며 날 깨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승객들은 모두 하차하고 없었다. 그는 내가 짐을 다 챙기고 무사히 내리는 모습을 확인하곤 여행 잘 다녀오라고 덕담까지 해줬다. 우려와 달리 친절한 사람이었다. 괜히 혼자 오해했다는 걸 알고 나니 미안하고 민망했다. 그나저나 마담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세상모르게 잠들어 버린 나. 이럴 줄 알고 마담이 자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나 보다. 혼자 탄 버스에서 잠에 든 건 처음이었다. 그건 밤에 못 잘 테니 미리 자놓으라는 섬의 계시였던 건지도 모른다.
파나두라 역에 내리자 나를 반긴 건 무덥고 습한 바닷바람이었다. 역시 해안 지역이 덥긴 덥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를 마중 나온 자매와 그들의 아버지를 만났다. 반갑게 맞아주는 세 사람을 보니 모든 피로가 사라졌다. 아무리 더워도 아무리 멀어도 친구를 보러 파나두라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낯선 골목을 지나 처음 방문한 집에는 외할아버지, 어머니, 예비신부, 예비신부의 여동생이 있었다. 신랑이 될 오빠는 결혼식 준비할 일이 있어 외출했다고 했다. 장거리 이동으로 지친 나는 잠시 등을 기대고 앉으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자, 이제 결혼식 준비하러 나가자."
다 함께 움직여야 하니 어서 나갈 채비를 하라는 게 아닌가. 하객에게 대접할 간식도 사야 하고, 의상실에 들러 혼례복도 입어봐야 하고, 친지분들에게 드릴 선물도 고르고 포장해야 한다고 했다. 스리랑카에서는 결혼식에 필요한 거의 모든 준비를 양가 가족이 책임진다. 그래서 식전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을 예식 전날에 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스리랑카에 준비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결혼처럼 큰일을 앞두고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당장 내일이 예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는 집에 남으셨고, 외지인인 나는 당연히 친구를 따라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파나두라에 막 도착한 나는 또 하나의 여정을 떠났다. 파나두라에서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신부의 고향 호라나(Horana)까지 여섯 명의 사람과 함께. 여섯 시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하객 간식으로 제공할 캐슈너트 찾는 데만 세 시간 정도 허비했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고, 내 낯빛도 그에 못지않게 어두워졌다. 캔디에서부터 거의 열 시간 가까이 차에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릿저릿했다.
스리랑카 결혼식에는 신랑 신부 양측에 들러리가 서너 명씩 선다. 데우미와 사말카도 들러리에 서게 되어 의상실에서 옷맵시를 점검해 보고 추가 수선을 했다. 그리고 신부와 들러리는 자정부터 화장을 받는다며 미용실로 향했다. 스리랑카는 꽃단장도 오래 걸리는 모양이다. 이렇게 바쁜 상황에서 초조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결혼식도 아닌데 나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했다. 이쯤 되면 스리랑카는 느린 나라인지 급한 나라인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느긋함 속에 여유 부리는 걸 보면 느린 나라 같지만, 하루에 모든 걸 몰아서 해치우는 모습을 보면 급한 나라 같기도 하다.
집에 돌아와 좀 쉬나 했더니 집안은 저 너머 인도양의 파도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신랑과 친구들은 신부와 들러리들이 미용실에서 곱게 꾸미는 동안 집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오늘처럼 기쁜 날, 그냥 잠들 순 없다며 밤을 새울 거라고 했다. 시곗바늘은 새벽 2시를 가리켰고, 어머니는 본식 때 하객들이 먹을 전통 음식을 손수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쁜 마당에 외국인 손님까지 있으니 더 정신없으실 것 같아 죄송해 어슬렁거리며 뭐라도 도와드리겠다고 말했더니 가족들은 "네가 푹 자는 게 도와주는 거란다."라며 나를 안방으로 보냈다.
친구 없는 친구 집에서 염치없이 가장 큰 방을 차지해 버린 나는, 얼른 자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그런데 천장에 달린 선풍기는 덜덜덜 소리를 냈고, 가족들은 수시로 방을 들락날락하며 짐을 꺼내 갔다. 이 정신없는 축제 속에서 잠을 자긴 글렀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누군가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이토록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묘하게 설레기도 했다. 그리고 문득 나의 파나두라행을 도와준 하숙집 식구들이 떠올랐다. 타인의 여정을 함께 준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지 그리고 그 따뜻한 연대가 얼마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지 새삼 깨닫는 밤이었다.
결혼식에서는 또 어떤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까. 모두가 한마음으로 준비한 만큼 그 기쁨도 오래가지 않을까. 느긋하지만 지루할 틈이 없는 스리랑카에서, 어쩔 수 없이 깨어 있는 밤도 감사하게 느껴지는 결혼 전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