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생일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일을 기념한다. 떠들썩한 것을 싫어하는 나는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조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평소처럼 조용히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생일에 친한 친구들과 밥 한 끼 먹거나, 가족들과 집에서 조촐하게 케이크 초를 부는 정도가 전부였다. 지인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 SNS 생일 알림도 꺼놓았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에게 스리랑카에서 생일을 보내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다. 스리랑카에서 조용한 생일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선 생일을 감추는 게 아니라 드러내야 한다. 내가 태어난 날이라고 당당히 말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먼저 베풀어야 한다. 생일자가 케이크를 잘라 손으로 사람들 입에 넣어줘야 진짜 생일이 된다. 집 근처 보육원이나 장애인시설에 가서 학용품이나 간식을 나눠주기도 한다. 나도 스리랑카에서 여러 번 케이크를 얻어먹었고, 그만큼 내 생일에 많이 베풀어야 했다.
6년 만에 또 한 번의 생일을 스리랑카에서 맞았다. "오늘은 내 생일이야!"라고 사방팔방에 알리며 단골 가게, 동네 이웃, 친구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초콜릿을 나눠주었다. 오전에는 옆집 할머니가 찾아와 나의 생일을 축복한다며 전통복 흰 사리를 선물로 주셨다. 할머니는 종종 우리 하숙집의 저녁 식탁 모임에 놀러 오셨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절에 갈 때 흰옷을 입는데, 내가 절에 가는 것을 좋아하니 앞으로 흰 사리 입을 일이 있을 거라며 준비해 주셨다.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일지 신중히 고민했다는 게 느껴져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았다.
사리를 입으려면 사리 블라우스가 필요하다. 마담이 블라우스를 골라주겠다며 내 손목을 잡고 시내로 향했다. 마담은 아들만 둘이라 딸이 있었으면 했는데, 하숙집에 딸 같은 친구가 생겨서 좋다고 했다. 가끔 내 옷매무새를 고쳐주면서 내게 사리를 입혀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 소원을 성취할 날이었다. 마담은 흰 사리에 어울리는 블라우스와 팔찌를 선물해 줬고, 사리 판매원에게 사리를 예쁘게 입혀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오늘 당장 사리를 입을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마담의 간청으로 사리를 입었다.
마담과 모녀처럼 사이좋게 시내를 걷는데, 시선이 불안정한 남자가 우리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에서 외국인으로 살다 보면 미행을 가끔 겪게 된다. 대개 악의는 없다. 순전한 호기심인 경우가 많다. '저 외국인은 어떻게 우리나라 말을 하는 것일까?', '어디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생길 만하다. 하지만 당하는 처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자꾸 뒤를 따라오면 오싹하다. 어린아이들은 적당히 타일러서 보내는데, 성인일 경우 눈길을 주지 않고 인적이 많은 곳에 가서 따돌린다. 같이 있는 마담이 미행 사실을 알면 놀랄까 봐 걱정됐는데, 마담도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 우리 뒤를 따라오는 남자가 있어."
"저도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저 남자를 따돌려야 할 것 같구나."
마담은 조용히 내 손을 잡고 출입문이 여러 개 있는 번잡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거기서 음료 한 잔 마시곤 들어간 문과 다른 문으로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더 이상 우리를 따라오는 발길은 없었다. 낯선 이의 시선이 두려워 움츠러들 뻔했던 순간, 마담의 따뜻한 손이 나를 이끌었다. 말 없이 건네는 온기 속에서 함께라는 사실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사리는 눈에 띄니까 평상복으로 갈아입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늘은 나를 숨기기보다 꺼내놓기로 용기 낸 날이니까 계속 걷기로 했다.
마담과 나는 불치사 앞에서 헤어졌다. 마담은 남편을 간병하러 하숙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곳에서 지인을 만났다. 이전에 봉사했던 장애인 학교의 재봉 선생님 가족과 전기 선생님 가족이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불치사에 왔다. 재봉 선생님의 두 딸은 나의 행복을 빌기 위해 집에서 예쁜 공양 꽃을 준비해 왔다. 그들의 축복을 받으며 불단에 꽃을 올렸다. 불치사 직원들에게도 초콜릿을 나눠주다가, 직원들만 받을 수 있는 귀중한 팔찌를 선물 받기도 했다. 축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하얗게 빛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캔디 시내에 있는 전통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전기 선생님이 임불 끼리밧(Imbul Kiribath)을 사주셨다. 스리랑카에는 생일에 끼리밧을 먹는 풍습이 있다. 오늘은 특별히 하꾸루가 들어가 달달한 임불 끼리밧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내 생일을 축하해 주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와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케이크를 대접했다. 우리는 빵집에 둘러앉아 초콜릿케이크와 과일주스를 나눠 먹었다. 어여쁜 사리를 입고 손으로 케이크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는 달짝지근한 크림이 묻었고, 사리 자락에는 끈적거리는 주스가 흘렀지만 그런 순간마저 달콤한 추억으로 안았다.
저녁이 되자 하숙집에서 깜짝 생일 잔치가 열렸다. 하숙집 식구들은 내 생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매년 내 생일에 캔디 인근 호텔에 온라인으로 케이크를 주문해 하숙집으로 보냈는데, 엄마가 그동안 생일 케이크를 얻어먹었으니 이번에는 직접 케이크를 주겠다며 내게 절대 케이크를 사 오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게다가 방에서 나오지 말고 쉬고 있으라고 강조해 말한 탓에 이들이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동분서주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로꾸 두워, 엔느(큰 딸아, 이리 오렴)" 엄마의 부름에 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연습하며 식탁으로 나갔다. 바닥에는 알록달록한 풍선이 흩어져 있었고, 테이블에는 별 모양의 귀여운 케이크가 올려져 있었으며, 벽면에는 생일 축하 문구와 불빛 전구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하숙집 식구들이 다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한 명 한 명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케이크 조각을 먹여줬다. 별채 손님들에게도 케이크를 나눠주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도 밝게 웃으며 내 생일을 축하해줬고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줬다.
축하는 거룩한 의식이었다. 예전에는 축하받는 일이 어색하고 민망하게 느껴졌는데, 막상 받아보니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이만큼이나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생일을 핑계로 사람들을 품에 안고, 음식을 주고, 선물을 나눈 날이었다. 누구 하나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나 또한 그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혼자였다면 두려웠을 미행의 순간도 마담이 손을 잡아준 덕분에 별일 없이 지나갔다. 생일이란 혼자 태어났지만 결국 함께 살아가는 삶의 축복을 알려주는 날인가 보다.
방에 들어와 오늘 받은 선물의 포장을 하나씩 풀었다. 반짝이는 리본보다, 곱게 접힌 포장지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손에 잡히는 듯했다. 선물을 고르느라 망설였을 모습과 포장에 정성 들인 손길이 고이 전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형체 없는 이들의 마음이야말로 세상이 건넨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무엇보다 기쁜 건 포장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스리랑카에서, 선물 같은 하루가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