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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달 Jun 22. 2022

자주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

성인이 된 금쪽이들.


대략 결혼 10년 차 즈음,


그의 어머님의 옆에서 가게를 하던 때에 내가 시어머님에게 가장 많이 들었다고 기억되는 말은 "넌 왜 이것밖에 못 하니?"였던 것 같다.


물론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니셨다.

그의 어머님은 본인 아들인 그에게 그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지만 그 말은 고스란히 같은 공간에 있던 나와 내 동생에게도 전달이 되었기에, 어느 순간부터 이것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 싶기도 했었다.


실제로 시어머님이 그에게 그 말씀을 '가장 많이'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잘 못 저장된 내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결혼 초반부터 종종 만나던 자리에서도 시어머님은 아들인 내 남편에게 그런 뉘앙스의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저, 당시에는 내가 자각을 하지 못 하고 있었을 뿐.



처음에는 본인 아들이 밖에서 보기에 그리 든든하고 능력 있어 보이지 않는 가장이라.. 나에게 민망하셔서 일부로 본인 아들에게 더 그러시나 생각했었다.


그는 종종 직장을 그만두었거나 혹은 직장을 다니면서 게임에 빠져 있는 시간이 길었고, 그때마다 시어머님은 "그래도 시부모님이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라는 위로를 하시곤 하셨다.


그래도 그것은 시어머님이 나를 챙겨 주시는 방법이었기에, 감사하다 생각을 할 때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결혼 전 아이 때부터 남편은 끊임없이 그 메시지를 듣고 자랐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 역시 끊임없이 '내 남편은 못났다'라는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는 책임감 없는 철없는 가장이었겠으나, 그 오랜 시간 그는 좋은 감정이 채워지는 것 하나 없이 '못났다'라는 말과 가장이라는 무게감 사이에서 점점 무너지는 시간이지 않았을까.






내가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던 가장 많은 말은 "네가 그걸 어떻게 해"였던 것 같다.


물론.. 마찬가지로 정말 '가장 많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내 아버지는 예민하고 불안도가 높은 분이었다. 예측할 수 없이 널 뛰는 본인의 감정을 가족들에게는 고스란히 격하게 표현하시면서 또 늘 무언가를 두려워하시는.. 그릇이 아주 작은 분이셨다.


좋은 온실 속 화초처럼 어여쁘게 키워주시는 것도 아니시면서 나와 내 동생을 밖으로 내보내지도 못하셨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다"와

"바깥세상은 무서워, 네가 그걸 어떻게 해, 넌 못 해"라는 이중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하시던 분.



내가 조금 이른 나이에 결혼을 결정했을 때도 그러셨다.

"결혼? 해야지. 그런데 그건 너무 큰 일이니 조금 뒤로 미루고, 지금은 아빠가 수입이 없어서 힘드니까 집안 좀 도와주고 난 뒤에 하면 어떻겠니."


(참고로 아버지는 그 뒤로 계속 안정된 수입이 없으시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결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과 실행이었고, 그때 아버지의 말처럼 했더라면 어땠을까?를 종종 생각한다.


나는 그 뒤로 십여 년을 밑 빠진 독에 물만 계속 들이붓다가 결혼 같은 건 포기 한 삶을 살게 되진 않았을까.






그와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망설이고 주춤하며 많이 두려워하면서 살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에너지가 바닥나서 그저 무기력해 보이는 시간이 많았다.


'넌 왜 그것밖에 못 해'와,  '내가 그걸 어떻게 해'는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의 안에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그것이 현재는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작아져라 작아져라 아주 많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찾을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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