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때 뵙고.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아버지는 매주마다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안 보고 싶니? 나는 엄청 보고 싶은데. 버스도 혼자 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한번 내려와~'라고 하셨다.
도대체 결혼한 다른 분들은 부모님들을 얼마 만에 찾아뵙는 것일까? 다른 할아버지들은 손주들을 어느 간격으로 보시는 것일까? 과연 '적당함'이란 무엇일까. 그런 기준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래도 그 전에는, '그게 효도야. 그렇게 살아야지. 부모 얼굴 보는걸 못 하면 다 필요 없지. 애들 그렇게 키우면 안 돼'라고 강요를 하시던 분이. (그러면서 본인은 부모님 제사도 안 지내고 형제분들과도 인연 끊고 사신다)
마흔 넘어서 생전 처음으로 지금 내 상황이 진짜 안 좋다고 말을 꺼내니 그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지금 우리 상황이.. 전세 만기는 다가오고 대출 연장은 불확실했다. 어차피 아무것도 해결해 주시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내가 힘겹게 아버지께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최소한 내가 상황이 이러니 주말에 '그냥' 아버지 보러는 가기가 힘들어요- 라는 뜻을 전하면서 '그러니 나에게 오라고 부담 주지 마세요'라는 마음이 가장 컸고.
그다음에는 급하게 월세라도 구하는 상황이 되면 약간의 돈이 필요하니 내가 대출해서 빌려드렸던 돈이라도 갚아달라- 라는 마음이 두 번째였다.
그거 몇 푼이라고 부모님께 그것도 편안하게 못 드리는 내 상황도 참 짜증스럽지만 그 대출 이자도 계속 우리가 다 부담하고 있었고, 현재 부모님의 상황이 그것을 갚으실 능력이 되고도 남으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시는 것도 화가 났다.
부모 자식 사이에 큰돈도 아닌 걸 가지고 네 돈, 내 돈 하기도 좀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어쨌든 내가 일 한 것도 아니니 다 남편의 돈이고, 그거라도 주셔야 일이 잘 안 되면 제가 당장 월세라도 구할 것 아닙니까.
그것도, 몇 달을 고민하다가 말은 못 하고 아이들이 옆에서 듣게 되는 것이 싫다는 핑계를 같이 설명하며 문자로 간략하게 상황 정리해서 보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지금 마음이 힘들어요. (그러니 건드리지만 마세요.)
그냥 얼굴 보면서 그냥 시간 보내는 것도 약간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렇게라도 억지로 여유를 만들어야 마음도 편안해지고 일도 더 잘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버지를 보는 것이 나에게는 편안함이나 위안과 위로를 얻고 올 수 있는 것은 아니고'숙제'같이 느껴지는 것이었기에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야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가 듣기 싫을 것 같은 말을 해야 할 때면 심장 박동수가 올라간다. 생각만 해도 몸이 움츠려 들고 큰 소리를 듣게 될 것만 같아서 도망가고 싶어졌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소리 지르며 경고를 보내는 것 같다.
그래서 차마 말로 하지 못 한 것이고, 그 몇 문장을 보내는 것도 몇 주를 고민을 하고 망설였다.
내가 뭘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당분간 뵈러 가지 않겠다는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머리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럴 필요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은 반대로만 흘러간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잠식하고 있는 공포심은 지금은 나약해지신 아버지를 여전히 거대하게 만들곤 한다.
그렇게 힘겹게 말을 전하고 한 달쯤 뒤에 나는 또 한 번 듣기 싫으실 말을 전했다.
"올해 김장은 못 가요."
친정 친척들은 매 년 다 같이 모여서 김장을 했고 결혼 16년, 매 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는 참석을 했었다. 김치가 필요하다는 이유보다는.. 그냥 힘들게 일을 하시는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겸, 그렇게라도 체면을 살려드릴 겸.
사실 두 번째 이유가 조금 더 컸던 것 같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 같이 일을 하는 그 시간에 우리 아버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 절대 참여를 하신 법이 없으셨으니까 나라도 나서서 도와주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이 가장 컸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일까? 이런 상황이라 친척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서? 단순히 힘든 일을 하기 싫어서? 아주 오래도록 생각을 했지만 답을 모르겠다.
그냥 지금 내 마음이 그것까지 하고 싶지 않았고, 김장 일에도 가지 않을 만큼 내 상황이 힘들어요라고 알아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마음이 힘들다-라고 백번 말을 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고, 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변화는 필요한데 그렇게 보여주지 않으면 하던 것만 하던 대로 하실 분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길바닥에 나앉을 수 있는 이런 상황이라고 설명을 하고 나니 별말씀 없이 "그래 그렇겠지.."라고 말씀하신다.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에게 설명드린 지금 내 상황에 비해 내 마음은 놀랍도록 편안하다(예전 마음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내 안 좋은 상황을 그저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다만.. 그분도 내 상황을 알고 계시긴 해야 했고 '아버지가 듣기 싫을 말을 한다'라는 큰 산을, 언젠가는 넘어가긴 해야 했던 것 같다.
평생 넘지 못할 것 같던 그 거대한 산 하나.
어릴 때에는 나름 시도도 많이 해봤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다 멈추게 되어 버렸다. 어차피 전달되지 않을 것, 나에게 화를 동반한 '본인 말이 다 옳다'라는 말만 돌아올 것이라 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더 컸기에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적당히 미루면서 적당히 원하시는 대로 움직였는데.
엄마의 체면보다, 아버지의 감정보다
이제는 내 마음이 조금 더 우선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상황 탓'을 하고 핑계를 대며 가지 않는 것이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