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브 어페어(1994, 1957)
TV 리모컨을 내내 붙잡고, 돌리고 돌려도 볼 게 없는 날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한 영화, 러브 어페어.
바람둥이 워렌 비티(1937~)와 그를 사로잡은 아네트 베닝(1958~)이 키스하는 포스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네트 베닝은 당시 모든 남성들의 이상형이라고 할 정도로 분위기 있고 성숙한 아름다움을 가진 배우다.
실제로도 부부인 두 사람은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가 나는데, 그녀를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의 소문난 바람둥이였던 워렌 비티가 정착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의 스토리 못지않다.
그 워렌 비티가 <초원의 빛(1961)>에서 나탈리 우드(1938~1981)의 상대역이었던 건 최근에야 알았다.
이 영화는 내가 영화가 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만큼 어렸을 때 TV에서 엄청 자주 방송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영화 속에서 윌마(나탈리 우드)가 낭송한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의 동명의 시 '초원의 빛'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막상 윌마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버드(워렌 비티)를 연기한 배우가 누구였는지는 수십 년이 지난 이후에야 알았지만.
엄마는 <러브 어페어(1994)>를 모른다고 하셨다.
거의 30년이 다 된, 꽤 오래된 영화이고 주인공도 모두 엄마가 아는 배우들이라서 '왜 모르지? 이상하다.' 란 의문이 들었다.
"이 영화 엄청 유명하잖아."
"그래? 엄마는 잘 모르겠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여자가 교통사고 나서 못 나간 거."
"아, 그 내용은 알지. 영화 리뷰 기사에서 본 적도 있어."
"응, 그거야 그거."
"근데 엄마가 아는 영화는 더 옛날 영화인데. 데보라 카 나왔던 거 같아."
데보라 카(1921~2007)라니, 어릴 때 봤던 엄청 오래된 영화 <왕과 나(1956)>에서 왈츠를 추던 그 배우가 아닌가.
이 영화 <러브 어페어(1994)> 뿐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나름 많이 알려진 영화를 엄마는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까지 영화를 고를 때, 엄마도 봤을 거라고 목록에서 제하고 넘어갔던 영화들이 종종 있었다. 내가 본 영화는 으레 엄마도 본 영화일 거란 생각을 무의식 중에 했나 보다.
'내가 마지막으로 영화관 간 건 언제더라' 되돌아보니, 마동석 윤계상의 <범죄도시(2017)>가 마지막이었다. 무려 5년 전이다. 나이 들고 이래저래 현실에 쫓기면서 예전만큼 영화를 안 보게 되었는데, 엄마도 그랬겠지.
우리를 키울 때는 친구들도 잘 안 만나고 그야말로 하루 종일 혼자 아이들 돌보면서 가정을 최우선시한 엄마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한 개인, 인간으로서의 시간은 전무한 채 엄마로, 아내로 보냈던 그 오랜 시간을 고마운 줄 모르고. 물과 공기처럼 당연시했던 엄마의 존재를 새삼 깨닫는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된 <러브 어페어(1994)>는 거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처음부터 보고 싶은 마음에 영화가 끝나자마자 얼른 찾아보았는데, 마침 이보다 30~40년에 제작된 <러브 어페어(1957)>가 무료였다. 영어 제목인 <An affair to remember>를 번역한 <잊지 못할 사랑>이라는 제목이었다.
"이건 옛날에 엄마가 봤던 거라며.
좀 전에 보던 거 다시 보자."
"오래전에 봐서 기억 잘 안 나.
옛날 것부터 보자."
무료라서 선택한 건가 싶어서 1994년작을 보자고 했지만 엄마를 이길 수는 없었다.
진짜 기억이 잘 안 나고, 다시 보고 싶었을 수도 있겠지 뭐. 생각해보면 나도 몇몇 영화는 봤던 건지 안 봤던 건지, 유명한 영화라서 스토리만 아는 건지, 아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만 본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결말이 기억이 안 나기도 한다. 하물며 몇십 년 전에 본 영화라면 어느 정도 기억이 난다 한들 다시 한번 보는 것도 괜찮겠지. 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 더는 우기지 않고 1957년작을 보기 시작했다.
워렌 비티가 맡았던 역할은 캐리 그랜트(1904~1986)가, 아네트 베닝 역은 데보라 카가 연기했다.
니키(캐리 그랜트)는 세기의 바람둥이로, 엄청난 재력가 여인과 결혼하러 가기 위해 배에 탄다. 테리(데보라 카) 역시 오랜 인연을 이어온 남자가 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빠져들고, 6개월 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잠시 헤어진다. 테리는 약속 장소로 가던 중 사고를 당하고, 두 사람은 어긋난다. 이후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니키는 테리를 찾아가고, 우여곡절 끝에 오해를 풀고 사랑의 기적을 믿으며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캐리 그랜트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나는 결백하다(1955)>,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등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한 미국의 배우이다. 캐리 그랜트라는 이름도 워낙 많이 들어봤고, 얼굴도 익숙해서 그의 출연작을 상당히 많이 봤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최근에 본 <주교의 부인(1947)>,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가 전부였다. 옛날 미남 배우들의 느낌은 왠지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 다른 배우와 착각했었나 보다. 큰 키에 능글맞고 유들유들한 유머러스함이 밉지 않은, 멋진 배우였다.
데보라 카는 <왕과 나>에서의 모습만 어렴풋이 생각났는데, 그녀가 풍기는 우아함이 인상적이었지만 인형처럼 예쁜 배우는 아니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이 영화 속에서는 당돌함이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잘 표현해냈다. 데보라 카의 매력에 빠져 그녀가 나오는 영화를 더 많이 찾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테리를 기다리는 니키의 모습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에서 샘(톰 행크스)과 그의 아들 조나가 애니(멕 라이언)를 기다리는 장면과도 비슷하다. 또한 이 영화에서 애니가 보낸 편지 사연이 <러브 어페어>의 영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때는 멕 라이언(1961~)이 그렇게 요정같이 귀엽고 예뻐 보인데 반해, 아네트 베닝은 인상이 흐릿한 것이 어떤 얼굴이었는지도 금방 떠오르지 않는 배우였다.
지금의 모습은 오히려 아네트 베닝이 자연스레 나이 드는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 그때도 지금도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취향이지만 말이다.
내가 학창 시절에는 한참 어른으로 보이던 배우들이 실제로는 나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새삼스럽다. 하지만 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간접적으로 나의 세월을 느끼는 것도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다.
이제는 함께 나이 들어가는 배우들을 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초원의 빛>은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이다.
열 살도 되기 전에 본 영화라서 드문드문 기억이 나긴 하지만, 그때는 당최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가고 너무 이상했다.
잘생긴 부잣집 소년 버드(워렌 비티)와 착하고 모범적인 소녀 윌마(나탈리 우드)가 분명 서로 사랑하는데, 결국 각각 딴 사람과 이어지는 결말은 왠지... 화가 났다. 육체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싶은 남자가 그냥 나쁜 늑대 놈인가 싶었다가, 그러기엔 여자도 계속 남자를 좋아하니 뭐가 뭔지 원.
혼자 마음고생 끝에 정신병원까지 가는 윌마가 그저 나약해 보이고 안타까웠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만난 두 사람의 마음에는 여전히 사랑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함께 할 수는 없고.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고 사랑도 경험한 지금에 와서야 '아, 이 영화가 그런 의미였구나' 싶다.
아마 다시 영화를 보면, 그때의 엄마처럼 펑펑 울 것 같다.
그건 아마 나 역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초원의 빛과 꽃의 영광'에 대한 아쉬움을 알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찾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