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따뜻해지니 다시 달리고 싶어진다.
벌써 벚꽃은 몽우리가 터지기 시작했고, 살구꽃과 목련은 만개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이 기온의 변화를 먼저 알아채고 주로를 그리워한다. 중랑천변은 분주하다. 가벼운 차림으로 뛰는 사람들, 이어폰을 꽂고 리듬을 타는 발걸음들, 그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봄 기운이 길 위를 가득 채운다. 나는 아직 그 흐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그 풍경을 바라본다. 익숙했던 길 위의 감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도, 쉽게 닿지 않는 거리에서 맴돈다.
그 길 위에 서 있었던 시간을 떠올린다.
자전거의 속도와 산책하는 이들의 대화가 섞여 있지만, 그 속에서 나의 숨소리와 보폭의 리듬에만 집중하는 시간은 고요하다. 도로를 차는 발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나 자신과 마주하는 그 시간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하지만 러닝에 깊이 발을 들이면, 어느 순간 대회라는 무대를 향한 갈증을 품게 된다. 수천 명의 숨소리가 하나로 모이는 그 뜨거운 현장으로 마음이 향하는 것이다.
작년 한 해, 참 많은 대회를 누볐다. 10km의 단거리부터 하프, 그리고 풀코스까지 전국의 주로를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고독하게 달리던 날도 있었고, 이웃과 달리던 기억, 또 친인의 첫 완주를 곁에서 지켜보며 환희를 나눈 순간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5.18 대회는 대회가 지닌 역사적 의미에 더해 딸과 나란히 발을 맞춰 달렸기에 무엇보다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아이의 보폭에 맞춘 10km의 시간은, 평소 집에서 수많은 말로 나누는 대화보다 훨씬 더 깊고 뜻깊은 교감의 순간이었다. 아이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같은 길을 끝까지 완주했을 때 느꼈던 유대감은 마라톤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처음 도전하는 처남과 함께했던 인천하프 역시 그의 시작을 응원하며 나아가는 기쁨을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뒤처지는 이를 기다려주고, 함께 결승선을 통과하는 경험은 기록보다 값진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때로는 시련도 축제의 일부였다. 서울(동아)마라톤에는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다. 출발선에 서 있을 때부터 추위는 몸을 떨게 했고, 달리는 동안 체온은 나를 덥혀주었다. 주로 위에서 몸은 뜨겁게 달궈졌지만, 골인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현실적인 고통이 찾아왔다. 물품 보관함까지 가는 길은 아득히 멀었고, 비에 젖은 몸은 속절없이 얼어붙었다. 결국 만나기로 했던 후배를 챙길 여유조차 없이 서둘러 전철에 몸을 실어야 했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차창 밖의 한강을 보며 느꼈던 그 추위는 지금도 생생하다. YMCA와 서울어스 대회에서는 운영상의 혼란으로 불편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불완전함 또한 함께 견뎌야 할 무게였다. 매끄러운 길만 있는 것이 아니듯, 덜컹거리는 대회의 기억마저 받아들여야 할 모두의 몫이었다.
평소 러닝 때는 보이지 않던 에너지가 대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에서 뿜어져 나온다. 혼자라면 벌써 멈췄을 지점, 포기하고 싶던 오르막에서도 대회에서는 기어이 한 발을 더 내디딜 힘이 생긴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완주’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같은 고통을 견디며 나아가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계를 넘어서는 용기를 얻는다. 앞서가는 이의 등은 이정표가 되고,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채찍질이 된다. 그렇게 모두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결승선까지 서로를 밀어준다.
하지만 올해 허리 디스크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면서 그 모든 활기는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뛰는 것은커녕 1km를 걷는 일조차 힘겨운 현실 앞에서 멈춰 선다. 가볍게 나섰던 중랑천이 이제는 장벽처럼 느껴진다. 움직임이 제한되니 몸에는 살이 붙고 하체 근육은 눈에 띄게 야윈다. 늘어난 체중은 다시 허리에 무리를 주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몸이 묶여버린 지금도, 마음은 자꾸 작년의 그 뜨거웠던 대회장으로 달려간다.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출발 신호를 기다리던 긴장감, 마지막 1km를 남겨두고 쏟아지던 갈채가 사무치게 그립다.
혼자였다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길을, 익명의 우리는 함께 끝까지 나아갔다. 마라톤은 기록보다, 타인의 존재를 통해 나의 한계를 넘게 하는 연대의 장이다. 지금 겪고 있는 이 시련 또한 인생이라는 마라톤의 한 구간일 것이다. 비록 잠시 멈춰 서서 지난날을 추억하며 재활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다시 그 길 위에 설 날을 기다린다.
기록을 세우기 위해 홀로 내닫는 걸음보다, 서로의 속도를 맞추며 끝까지 함께 걷는 걸음이 우리를 더 먼 곳으로 데려다준다. 결국 우리를 멀리 데려가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함께 걷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