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beginning, there was ROCK
엊그제 나와 함께 일하는 치위생사 훌리오 (Julio)가 나에게 물었다.
"Dr Kim, why did you choose to become an orthodontist?"
"닥터킴, 선생님은 왜 교정전문의가 되길 선택했나요?"
매우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었다.
교정전문의 수련 (레지던시) 인터뷰 준비할 때 자다가 벌떡 일어나도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달달 외웠었던 그 질문. 대학교, 치대 후배들이 나에게 해오던 그 질문. 심지어 가족들도 나에게 했던 그 질문.
의사를 꿈꿨던 내 몇몇 친구들과 치대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달리 어렸을 때 나는 한 번도 의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때 존경하던 인물은 뉴턴, 아인슈타인, 퀴리부인, 슈바이처도 아닌 기타 치는 수염 난 아저씨 에릭 클랩튼 (Eric Clapton)과 곱슬머리 장발에 마술사 모자를 쓰는 터질듯한 근육맨 락밴드 건즈 앤 로지스 (Guns n' Roses)의 기타리스트 슬래시 (Slash)였다. 내 방에는 이들뿐만이 아닌 내가 좋아하던 락밴드 포스터로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장을 보러 갔을 때는 엄마 몰래 카트 안에 좋아하는 앨범 시디를 하나씩 넣기 시작했고, 장을 보러 가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시디 앨범 컬렉션은 점점 늘어났다. (미국에 있는 대형 마트 안에는 식품뿐 아니라 책, 음반, 게임, 장난감 등 여러 코너가 있기에 가능했다)
중학교 때 우연히 에릭 클랩튼의 뉴욕 메디슨 스케어 (Madison Square) 공연장에서 한 콘서트의 일부분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특히 그의 히트 곡 레일라 (Layla)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날 밤 나는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기타를 사야 했다.
그 다음날 아빠에게 기타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는 단칼에 거절하셨다. 예술을 사랑하는 아빠이지만 박사학위에만 자그마치 8년을 쓰신 문학 교수인 아빠는 만약 '천하제일 교육열 끝판왕 부모 대회'가 열린다면 아주 거뜬히 (베지터가 보지도 않고 주먹 한대로 일반인을 기절시켜 천하제일무술대회에서 기권시키듯) 1위를 하고도 남을 분이시다. 그런 아빠가 나에게 기타를 사줄 확률은 거의 0.1%에 가까웠다. 아빠의 주장은 간단했다. 기타 치면 공부 안 할게 뻔하다. 그러니 안 사준다.
어린 나이라 돈이 없어서 기타를 사지 못하는 거에 서러워 며칠을 눈물로 보냈다. 갖고 싶은 장난감 혹은 게임기를 살 수 없을 때 느꼈던 슬픔과는 사뭇 달랐다. 기타를 사고 싶은 마음은 단순히 물질적인 욕망이 아니었다. 그 물건이 주는 만족감보다는 기타를 배우고 싶고 직접 치고 싶은 욕심이 컸다. 에릭 클랩튼이 오만가지 인상을 써가며 레일라의 일렉기타 솔로를 치는 걸 나도 똑같이 치고 싶었고, 슬래시가 오른팔을 360도 회전하며 스윗 차일드 오 마인 (Sweet Child O'Mine)의 코드를 내리치는 걸 더 이상 허공에서 기타를 들고 시늉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기타에 내리치고 싶었다. 나에겐 꿈이고 열정이며 영감이었다. 그렇게 13살의 나는 내가 직접 돈을 벌어 기타를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당시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서 매 주일마다 하시던 작은 이벤트가 있었는데, 교회 도서관에 있는 위인전을 한 권씩 읽고 독후감을 써오면 1 달러를 준다는 거였다. 내가 사고 싶었던 기타는 자그마치 200불이었지만 (대충 현화로 20만 원)이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던 가? 뭐라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교회 어린이실 한 구석에 배치되어 있던 낡은 책장 안에 있던 위인전을 미친 듯이 읽고 독후감을 썼다. 책 읽는 걸 즐겨하는 타입이었지만 연달아 위인전을 읽는다는 건 고문이었다. 더군다나 재미로 읽기보다는 수단과 목적을 갖고 독서를 했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유난히 학교에서 필수로 읽게 하는 책들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는 것처럼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나는 10권의 독후감을 제출했고 만원을 벌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19만 원을 더 모았어야 했다...
보통 미디아에 나오는 목사님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우리 교회 목사님은 작은 키에 통통한 체구, 거친 피부에 두꺼운 손과 팔뚝을 갖고 계셨다. 피부는 항상 태양에 그을렸는지 꽤 꺼무접접했다. 내가 아는 그 어떠한 어른보다도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목사님은 원칙과 교리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분이었다.
목사님의 작은 이벤트의 참여자는 여러 명이었지만 꾸준히 두 번 이상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당연히 목사님은 나에게 열심히 하는 이유를 물으셨다. 본능적으로 에릭 클랩튼, 건즈 앤 로지스, 지미 헨드릭스 (Jimi Hendrix), 제프 백 (Jeff Beck) 등등의 기타리스트의 얘기는 일제히 하지 않았다.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나의 음악 세계와 락에 향한 이 열정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굳이 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며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주 간결하게 "기타를 사서 배우고 싶어요"라고 했고, 그 순간 목사님의 푹 꺼진 검은 두 눈동자에 갑자기 생기가 돌더니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우리 교회 중고등부 찬양팀에 안 그래도 기타가 필요했는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쓰이는 교인이 되길 위해 벌써부터 이렇게 준비하다니 너무나 기특하구나!"
그렇게 대화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목사님은 내가 얼른 기타를 사길 바랐는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나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하셨다. 돌이켜보니 락 음악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던 게 신의 한 수였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악마의 음악이고 우상을 섬기는 인간의 잘못된 욕망에서 나온 음악이라며 절대 나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을 게 확실했다 (여담으로 나중에 힙합, 록 음악으로 구운 시디를 교회에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다가 걸렸을 때 이건 지옥행이라고 혼이 나기도 했다). 마지막 열 번째 독후감을 제출하던 그 순간, 나는 내 인생의 첫 오피셜 일자리 제의 (job offer)를 받았다.
목사님의 피부가 왜 항상 까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목사님은 전원주택에 사셨었는데, 뒷마당은 온톤 푸른 잔디에 온갖 꽃과 식물들로 가득한 온실이 있었고 온실 옆에는 꽤 큰 텃밭이 있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주택 앞 차에서 내릴 때부터 잔디와 흙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텃밭은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했다. 고추, 깻잎, 부추, 가지, 등등이 예쁘게 맺어있었다.
"잘 부탁할게요 목사님!"
엄마는 저 말 한마디를 하시고 차에 올라타 내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 뭐 힘들게 있겠어? 그냥 채소만 따면 되는 건데. 별생각 없이 나는 머리를 질끈 메고 누가 봐도 나에게 맞지 않은 큰 목장갑에 한 손에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텃밭에서 목사님의 지시를 기다렸다.
나에게 주어진 내 인생 첫 직업의 임무는 이러했다:
첫 번째, 텃밭에서 자란 채소들 중 잘 자란 얘들을 골라오기
두 번째, 온실에 있는 화초들 물 주기
세 번째, 텃밭/잔디밭에 자란 잡초 뽑기
시급은 시간당 4불 (대략 4천 원)이었다. 그때그때 나의 실적에 따라서 보너스를 받는 제도였는데 아쉽게도 돈이 아닌 그날 내가 딴 채소들이었다.
위인전 읽고 독후감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사실 온실 화초 물 주기는 식은 죽 먹기였지만 가장 어려웠던 건 아무래도 잡초 뽑기였다. 우선 잡초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데도 몇 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잡초 중에서도 잔디랑 비슷하게 생긴 애들도 많아서 자칫 잘못하면 멀쩡한 잔디를 뽑기도 하기 때문에.
그다음으로 필요한 스킬은 바로 잡초 뿌리까지 제대로 뽑기. 최대한 땅에 가까이 뿌리 쪽으로 잡고 강약 힘조절을 하며 뽑아야 뿌리채로 잘 뽑힌다. 어금니를 발치할 때와 꽤 비슷하다. 힘을 조절해서 치아를 좌우로 서서히 움직이며 뽑는걸 luxation이라고 한다. 너무 성급하게 혹은 최대한 가까이 치아뿌리 쪽을 잡지 않고 치아를 발치할 경우 치아의 뿌리가 부러질 수가 있다. 남겨진 뿌리를 꺼내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피범벅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발치구멍 안에 남겨진 2-3mm 뿌리를 찾는 건 의사도 고생이지만 (심리적 스트레스와 신체적으로 허리와 팔이 아픔) 계속 입을 벌리고 있어야 하는 환자도 죽을 맛이다. 그래서 최대한 처음에 발치를 할 때 뿌리까지 예쁘게 싹 뽑는 게 의사도 환자도 너도 나도 행복한 길. 웃기게도 치아 발치와 잡초 뽑는 것과 별반 다른 게 없다. 아니 더 심각한 거 일지도 모른다. 남겨진 잡초 뿌리를 내버려 둘 경우엔 그 뿌리가 다시 자라나서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혹은 더 무성한 잡초가 재발하니까... 남겨진 치아 뿌리가 재발한다 상상하니 참 끔찍하긴 하다.. 여하튼 날이 거듭될수록 나는 척하면 척 잡초 뽑기 마스터의 경지에 다 달았다.
뜨거운 태양아래 나와 목사님은 땀을 닦기 위한 수건을 목뒤에 걸친 채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또 뽑고 또 뽑았다. 힘겹게 잡초 뽑는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뒷마당 숲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풀벌레가 정적을 매웠다. 목사님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지 않으셨다. 나도 말이 많지 않아 그저 묵묵히 잡초를 뽑았다. 정적을 먼저 깬 건 목사님이었다. 그리고 그때 하셨 던 그 말은 아직도 종종 생각이 난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잡초를 뽑는 거랑 비슷해. 살면서 불필요하고 해를 끼치는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서슴없이 뿌리부터 뽑아버려야 돼 이렇게 잡초 뽑는 것처럼"
잡초를 뽑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 싫고 따분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겐 하나의 게임 같았고 이 퀘스트를 완성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고 또 이 퀘스트를 통해서 내가 성장해지는 거 같아 재밌었다. 부추를 캘 때는 무릎을 꿇고 낫으로 잘라야 해서 무릎이 흙으로 시커멓게 뒤덮여도 마냥 즐거웠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물은 에어컨으로 시원한 집 소파에 앉아 마실 때가 아니라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고 나서 벌컥벌컥 들이켜는 물이라는 걸 처음으로 배웠다. 흙냄새를 맡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고 지금도 여름에 비가 내린 그다음 날 나는 흙과 잔디 냄새를 맡으면 그때 텃밭에서 일했던 기억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부추를 캔날에는 그날 보너스로 부추를 받아왔고, 깻잎을 딴 날의 보너스는 깻잎이었다. 시중에 파는 깻잎의 반의 반도 안 되는 크기의 깻잎이었지만 맛이 기가 막혔다.
나의 13살 여름방학은 자본주의 사회의 향한 첫걸음을 시작으로 값진 경험과 순수 나의 힘으로 난 결국 200불을 모았다. 그리고 그 해 여름방학의 끝날 때 무렵 내가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기타를 손에 얻었다. 그 후 매일매일 나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 기타를 독학했다. 어느덧 꽤 그럴싸하게 나는 에릭클랩튼의 레일라 언플러드그 (통기타 버전의 레일라)를 칠 수 있게 되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마치 뿌연 안갯속에서 예언의 오라클 세마녀를 마주하고도 자기의 운명을 알지 못했던 맥베스처럼. 내가 기타리스트가 아닌 교정 치과의사가 될 거라는 걸..
덤:
References for photos:
https://guitar.com/news/music-news/slash-new-gnr-album/
https://www.rockarchive.com/artists/e/eric-clapton
https://www.illust-box.jp/sozai/174922/
https://www.tbsdental.com/what-is-an-atraumatic-extraction/
https://www.tumpik.com/tag/the%20tragedy%20of%20macbeth%2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