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장소 - 공공시설 예찬
나는 공공시설을 참 좋아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 그러나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지 않는, 한 발짝 물러서면 숨을 고를 수 있는 그런 공간.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바람이 여유롭게 지나다니는 곳. 낯선데 낯설지 않고, 익숙한데 또 익숙하지 않아서, 그 모호한 경계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학교의 드넓은 잔디밭. 시험이 끝난 뒤 친구들과 뒹굴던 공간.
동네 어르신들이 유자 빙수와 단팥빵을 나누던 이층 카페. 그 웃음소리에 내가 괜히 보호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던 곳.
몽골 울란바타르의 광장. 생전 처음 보는 언어와 표정 속에서도 묘하게 고향 같은 온기를 느꼈던 곳.
손님 없는 전철역 앞 작은 카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 오히려 내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공간.
아이들과 새들이 함께 뛰놀던 아파트 스케이트 광장. 여름이면 아이스크림, 겨울이면 숨이 흰 연기로 피어오르던 기억.
노을이 지던 보령 문화의 전당 앞마당. 붉은 빛 속에서 혼자 앉아 있던 시간조차 외롭지 않았던 자리.
배가 천천히 떠다니던 충청수영성의 강가. 강물에 반짝이던 햇살이 내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주던 순간.
그리고 최고네 된장찌개집. 늘 누군가와 함께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주던 소소한 평안.
그곳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오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서는 ‘나만의 장소’가 되어 주었다.
모두의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것이 되는 공간. 그것이 내가 공공시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런 기준으로 정해졌다.
부동산 매물 사진을 보며 눈이 번쩍 뜨였다.
“도서관과 수영장이 한 건물에 있다고? 게다가 앞에 문화센터와 카페, 넓은 광장까지 있다니!”
내가 원하던 삶의 조건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순간, 여기가 바로 내 삶의 자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난해 나는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와 어려움 속에 있었다. 아이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고, 그들이 최대한 변화의 충격을 덜 느끼도록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부동산 사이트를 열고 또 열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가격은 감당할 수 있을지, 학교는 가까운지, 생활은 편리할지. 수많은 고민 속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지금의 집이다.
어울림문화센터, 스포츠센터, 도서관. 이 세 공간이 한 동네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나를 단숨에 안심시켰다. 초등학교에서 걸어서 5분. 아파트는 오래되었지만, 우리 층만 유독 외벽 창이 나 있어 겨울에도 춥지 않았다. 깨끗하게 리모델링이 되어있고, 중간라인, 중간층이라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삶은 정말로 풍요로워졌다.
문화센터에 들어서면 언제나 그림과 글, 음악이 흐른다. 복도에는 주고 받는 웃음소리와 다양한 수업들이 이어지고, 1충에는 여러 전시물들이 주제에 따라 계절에 따라 걸려 있다. 도서관에서는 책장 사이로 빛이 흘러내리고, 수영장에서는 물이 주는 고요와 물방울 튀는 소리가 울린다.
나는 아이와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거나 레고를 만들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며 하루를 채운다. 그리고 카페에 들러 젤라또 한 컵을 나눠 먹는다. 광장에서 자전거와 킥보드를 타고 씽씽 달리는 아이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배드민턴을 치며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가끔은 남편과 함께 도서관을 찾아 서로 책을 고르기도 한다.
집이 넓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건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누릴 수 있느냐였다. 문화와 지식, 여유와 웃음이 흐르는 공공기관이 있는 한 집이 좁든 넓든 상관없이, 언제나 풍요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러면서도 개인의 다양성과 자유가 존중되는 곳,
누구라도 올 수 있고, 누구라도 쉬어가며 사유할 수 있는 큰 마당이 있는 곳.
내집 마련에 실패했다 좌절하며 주름이 늘어가는 시대 속에서
공공시설은 마치 전래동화 속 '젊어지는 샘물'과 같은 그런 장소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