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대화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아, 그런 일 하시는구나.”
짧은 한마디지만, 그 안에는 이미 무언가를 판단한
눈빛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그 일이 곧 나를 대신해 말해주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산다.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는 뒷전이다.
대신 겉으로 보기에 ‘괜찮은가’, ‘체면이 서는가’를 먼저 따진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말들이 있다.
“공부 안 하면 저런 일 해야 해.”
“힘든 일은 못 배운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 말들은 단순한 훈육이었는지 몰라도, 머릿속에는 분명한 구획을 만들었다.
머리를 쓰는 일은 상층, 몸을 쓰는 일은 하층이라는 식으로.
그런 인식이 깊어질수록, 막상 내가 그 일을 해야 할 때 자괴감이 커진다.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닌데.”
하지만 그 괴로움조차도 편견이 만든 것이다.
일이 나를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를 작게 만든다.
나이가 들수록 ‘하고 싶은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해야만 하는 일’이 전부일 때도 있다.
그럴수록 편견은 더 깊은 상처가 된다.
‘지금 하는 이 일이, 과연 내 인생에 어울리는가’ 같은 생각들이 자존감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건 삶이 잘못된 게 아니다.
우리가 직업을 기준 삼아 사람을 평가해 온 관성이 문제일 뿐이다.
더 안타까운 건 이런 편견이 자녀에게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부모가 특정한 직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자녀가 그 일을 꿈꾸는 순간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그걸 왜 하려고 해?”
“그 일은 힘들고 미래 없어.”
“우리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 말들은 걱정이지만, 결국은 부모가 가진 직업에 대한 위계의식이 아이에게 투영된 결과다.
자녀는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거나, 반대로 부모의 반대를 꺾으려 더 강하게 부딪친다.
그렇게 되면 꿈이든 관계든 하나는 잃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편견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그 편견이 나도 모르게 내 기준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나는 왜 이 일을 부끄러워하지?”
“나는 왜 저 직업에 선을 긋고 있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부끄러운 직업은 없다.
부끄러운 건, 누군가의 삶을 단순한 직업으로만 판단하는 시선이다.
직업은 내 삶을 지탱하는 도구일 뿐, 나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일이 나를 대신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