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가 될까요. 한도 끝도 없을 만큼 크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사실 어떤 감정들을 담고 있기에는 그다지 크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의 감정도 때로는 가슴이 벅차게 느껴지고, 슬픔도 외로움도 고통도 다 담아두기에는 역부족인지라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감정들로부터 헤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게 아닐까요. 그런 작은 공간에 미움이라는 감정까지 담아두려 한다면 얼마나 갑갑하고 감당하기가 어려울까 생각됩니다. 더구나 사랑과 미움의 감정은 서로 상반된 것이기에 우리의 마음 안에서는 함께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해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오랫동안 미워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나 자신이 너무나 힘들고 괴롭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듯합니다.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한 순간 너무나 미웠던 사람도 결국엔 흐지부지해지면서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과연 내가 저 사람을 정말로 미워했던 게 맞나 싶어질 정도로 무감각해져 버리기도 합니다.
사람을 잠시라도 미워하는 동안에는 나의 마음의 평정이 우선 깨어져 버립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는 호흡도 몹시 불규칙해집니다.
자주 웃고 싶은데도 미움 때문에 저절로 굳은 표정이 되어 버립니다.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성격의 탓도 있겠지만 미움의 독소가 나의 안면 근육을 마비시켜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뭔가에 화가 난 사람의 표정이 되어버립니다.
미소가 사라진 나의 얼굴로 인해 마음은 더욱 무거워지고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두통이 심해지기도 하고 위장병이 도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 몸을 아프게까지 하면서 미워해야 할 만큼 그는 나에게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나도 모르게 살며시 미움의 팽팽한 줄을 놓아버립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뜻밖의 평화가 내게 찾아옵니다.
어쩌면 그게 바로 용서라는 것이고, 용서란 미워하던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그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동안, 막상 미움을 받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은 아무런 마음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상대방이 알도록 감정을 표시한다고 해도 그때뿐이고, 그 사람이 되받아 새로운 미움을 만들기 전에는 오히려 미워하고 있는 사람 자신만이 그 미움으로 인해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왜 그런 어리석은 감정의 게임에 휘말리려 하는 것일까요.
미움은 우리의 육체를 서서히 좀먹게 하는 독소를 지니고 있어서 평생을 누군가를 미워하며 산 사람은 거의 확실하게 어떤 병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미워하느라고 불안정하고 편치 못한 삶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고 나면, 그다음엔 미움으로 생긴 병 때문에 나머지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움이란 것은 도대체 누구를 죽이는 일이 되는 걸까요. 상대방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일까요.
미움은 두려움과 욕심 다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가장 치명적으로 갉아먹는 감정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지닌 채로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을까요. 먹구름이 낀 것처럼 미움이 시야를 가리고 귀를 막아 버립니다. 영혼 가꾸기를 할 여유조차 갖기 어렵습니다. 산소결핍으로 뇌가 손상되듯이 영혼도 좋은 기운의 유입을 가로막는 미움의 영향으로 탁해지고 찌들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혼의 이끌림으로 차원이 다른 여러 갈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니까요. 몸을 관리하는 것처럼 영혼도 맑게 지킬 수 있도록 잘 관리를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미움은 자기를 향한 증오심이기도 하기에 자기 안에 있는 온갖 부정적인 사고들과 뭉쳐지고 또한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요인들을 끌어들여 나쁜 일들만 일어나게 합니다. 미움은 싸움을 만들기도 하고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조화로울 수 있는 모든 관계를 깨버리기 일쑤입니다.
미움을 가진 사람은 독기를 뿜어내기도 해서 옆에 있는 순수한 사람까지 나쁜 기운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아이의 엄마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이는 나쁜 기운 속에서 자란 것과 같아서 몸도 정신도 건강하기 어렵습니다. 기운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해도 아이는 엄마를 닮게 되어 있으므로 엄마처럼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아이로 자라거나 엄마처럼 역시 남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옛말에, 뱃속에 아이를 가진 엄마가 예를 들어 남편이나 시어머니를 몹시도 미워하면 태어나는 아이의 모습은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을 닮아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만큼 미움의 전파 속도와 힘은 가히 위력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상대방이 자꾸만 미운 짓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미워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 안에 미움을 쌓아두지 말고 지혜로운 화법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보십시오.
서로의 마음에 감정의 골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사사로운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태워 버리는 겁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상태라면 차라리 한동안 그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보는 극단 적인 방법도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대방보다 자신에게 더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피한다고만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미움이 생기는 대부분의 이유는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거나 서운하게 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도 없었는데 그냥 무작정 미운 것이라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자신의 사상과 맞지 않아서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라면,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주의 때문인 것이고,
누군가 너무 튀는 것이 싫어서 미워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실제로는 열등감에 젖어 있거나 시기심이 팽배해서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음이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일수록 미움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그 누구도 모두 이해가 되는 존재들뿐이기에 아무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가 힘이 들거나 용서하기가 어렵다면, 억지로 미움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미움이 깃들려고 하는 마음의 자리에 다른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서 미워할 수 있는 마음의 틈을 조금도 주지 않으면 됩니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사랑과 미움은 함께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함께 존재하는 듯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다 강한 감정이 나머지 한쪽을 점령하게 됩니다.
사랑의 감정이 더 크면 미움이 차차 사라지게 될 것이고 미움의 감정이 더 크면 사랑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씀을 행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고는 절대로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원수의 모습이 떠오르면 그를 상쇄시켜버릴 만큼의 사랑하는 사람을 혹은 어떤 대상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미움의 상대를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버리거나 무심하게 받아들이기만 해도 그를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 미운 감정이 생기게 되었던 사건에 대한 기억마저도 희미해지므로 그러다가 마침내 망각해버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찾아오는 평화를 만끽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사람을 보게 되었을 때 이미 그를 용서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거나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해도 좋고, 사랑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마음속에 가득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움 대신 사랑을 간직하는 훈련을 많이 한 사람은 그의 뇌 속에 <미움>이라는 단어의 기억조차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오직 사랑의 마음만이 그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녀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만을 하며 사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