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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Dec 12. 2021

민원인과의 만남

사무실 전화가 울렸습니다. 010으로 시작되는 번호라 받을까 살짝 고민했었습니다. 민원인과 전화하면 몇십 분은 금방 지나가거든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제 사무실까지 전화하려면 얼마나 많은 전화를 거쳤을까 생각하니 받아야겠더라고요.


술에 잔뜩 취한 분이셨습니다. 말끝마다 욕설이었습니다. 제 말은 안 들리시는지 계속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정부 때문에 자기 사업이 망했다는 것 같았습니다. 한 30분 들었나, 대화도 어렵고 이젠 그냥 끊을까 하던 찰나에 그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자기는 유서도 써놨고, 이제 죽으러 가는 길이다라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선생님, 그러지 말고 한번 저희 사무실에 오셔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시던 분이 갑자기 또박또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줘서 고맙다고, 내일 세종에 가면 볼 수 있는지, 그럼 그때 보자고. 순간 낚였나 싶었지만 무슨 일인지라도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약속을 잡았고, 다음날 만나서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민원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그분께서는 이렇게 사무관이 직접 자기를 불러서 만나줬다는 점에 만족하시더라고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말이에요. 초임 때 옆자리 주무관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무관님, 민원인이 전화 오면요 잘 들어주십시오. 자기도 안 되는 걸 알지만 하소연이라도 해보자고 전화한 거거든요. 얘기만 잘 들어주셔도 민원의 태반은 다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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