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10여 년의 공직 생활 중에 가장 운이 좋았던 순간을 뽑아보라면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첫 과장님을 만난 것입니다. 6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그분께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보고서 쓰는 법, 보고 하는 법과 같은 것은 당연히 잘 가르쳐 주셨고요, 무엇보다 저에게 공직자로서 갖춰야 하는 마음가짐을 알려주셨습니다.
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청문회 전날에 부서 직원들은 모두 대기를 합니다. 장관 후보자께 할 질의를 사전에 입수하게 되면 그에 대한 답변자료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죠. 저희는 이를 '국회 대기'라고 부르는데 늦을 땐 새벽까지 국회 대기가 계속됩니다.
제가 처음 겪게 된 국회 대기였습니다. 과장님께서는 제 업무와 관련된 질의가 나오면 제가 직접 답변을 적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제 업무도 파악이 안 되어 있는데 청문회 때 장관님이 답할 내용을 제가 적어야 한다니 무척 떨렸습니다. 질의가 안 나오길 기도하며 국회 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먹히지 않았는지, 결국 질의가 나왔습니다. 과장님은 저보고 초안을 써보라고 하셨고, 저는 전임자들의 과거 자료를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장관 후보자의 답변을 작성했습니다. 처음에 떨렸던 것보단 글이 매끄럽게 잘 나온 것 같아 만족해하면서 과장님께 당당하게 자료를 내밀었습니다.
과장님께서는 천천히 제가 쓴 답변을 읽어보시더니 물으셨습니다.
"여기 보면 '질의하신 사항에 대해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 적은 부분이 있는데, 이 사무관은 정말로 이걸 검토할 계획이 있는 거야?"
"아니요, 당장은 검토할 계획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왜 그렇게 적었나?"
"과거 답변을 참고하다 보니 그렇게 적게 되었습니다."
"이 사무관, 장관 후보자께서 지금 우리 업무에 대해 무엇을 아시겠나. 우리가 적어드리는 답변을 참고해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고. 자네가 적은 내용으로 장관님이 국회, 국민을 상대로 말씀하신다고 생각해 봐. 별생각 없이 그렇게 쉽게 과거 답변을 참고해서 작성할 수 있겠어? 담당자라면 그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서 우리 부처가 할 수 있고 꼭 해야 하는 것을 적어야 하는 거야."
일하다 보면 가끔씩 사무관이 생각보다 영향력도 없고 위에서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기만 하는 것 아니냐며 자조감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그래도 그때 과장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제 역할을 되새깁니다. 제 손으로 쓰는 글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겁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ㅇㅇ기금을 총괄할 때였습니다. 연초에 기금 운용 계획을 세우면서 뭔가 개선할 게 없나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기금을 받아 직접 사업을 담당하고 집행하는 직원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라면 저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회의를 소집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과장님께 간단하게 상황을 말씀드리고 회의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금 사업 담당자들은 대부분 주무관들이었습니다. 거기다 내부 직원들의 회의이기도 하니깐 마음 편하게 회의를 준비했죠. 회의 시간이 다 되자, 저는 과장님께 회의에 다녀오겠다며 회의 자료를 보여드렸습니다. 과장님께서는 저보고 자료 준비가 부실한 것 아니냐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저는 실무자들끼리 가볍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라서 이 정도면 문제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랬더니 과장님께서 버럭 화를 내셨습니다.
"이 사무관, 20명의 1시간은 총 20시간이야. 너 편하자고 회의 준비도 제대로 안 해놓고 바쁜 사람들을 모으면 되겠어? 이번 회의는 취소시키고 다시 제대로 준비해서 나한테 확인받아!"
제가 주재하는 첫 회의는 시작도 못하고 무산되었습니다. 사유는 준비 미흡으로요. 사업 담당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회의가 취소되었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쪽팔렸습니다. 그리고 회의 참석자들의 직급이 저보다 낮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직원을 대할 때 직급과 상관없이 존중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과장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사진: 분임 동기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