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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15화

Another - 15

by 김뇨롱

46.


체이스는 필라델피아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참 동안 정신이 없었다.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적어도 그가 프린스턴-플레인즈보로에 당도할 당시에는 이미 진단학과의 모든 인원은 베벌리 씨의 사망 때문에 각자 순서대로 이사진에 끌려갔다 온 후유증 때문인지 아니면 베벌리 씨의 갑작스러운 사망 때문인지 기운이 없어보였다. 하우스가 진단학과 과장 자리를 박탈당하건, 진단학과가 둘로 쪼개지건 상관 없이 베벌리 씨의 죽음은 의사로서도 참담한 것이었기에 체이스 또한 기분이 괜찮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 이유가 하우스가 어떻게든 윌슨을 보기 위해 달려온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윌슨이 그런 하우스를 보자마자 자신에게는 일절 해주지도 않던 애처로운 반응을 보여서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저 멀리 관계자에게 장례 절차에 대해 이야기를 안내 받는 헬렌 씨가 보였지만 체이스는 불쾌한 기분을 뒤로 하고 서둘러 원장실로 향했다.


마무리.


포어맨이 꺼냈던 말은 그것이었다. 체이스가 무심코 꺼낸 말에 포어맨은 과한 의미를 부여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도 베벌리 씨의 죽음을 반갑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크로이츠펠트-야콥 병은 그에 따른 제대로 된 진단은 사후에나 가능할 뿐, 이제까지 있어왔던 증상을 토대로 그가 CJD를 앓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CJD에 대한 제대로 된 치료책도 없거니와 그의 죽음을 서서히 늦추는 정도 밖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으니까. 단지 문제라면 그런 것이었다. 헬렌 씨가 체이스가 만나본 대로의 여성이 맞고 만일 그녀가 손에 닿는 많은 변호사들 중 의학전문 변호사가 있다면 이 CJD라는 질환이 3가지 종류로 나뉘며, 그 중 하나는 iCJD(의인성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는 베벌리 씨의 근무지가 바로 이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병원이며 그의 발병 원인이 만일 근무지일 경우 이 병원이 막대한 책임을 물어야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에게는 나머지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하나는 유전성, 또 하나는 - 체이스는 사실 이 방향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 산발성이다. 이 두 가지 경우의 수를 가지고 병원은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법무팀이 버티고 있는 한 헬렌 씨 혼자서 이러한 복잡한 의료소송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무려 이 일을 계기로 결국 하우스가 직무 해제되고 자신이 그 대리자로 들어서게 되었다.


진단학과 분리 이전에, 진단학과 과장의 자리를 바꿔버리면 그에 서명할 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포어맨의 결정에 체이스는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물론, 베벌리 씨의 사망을 그가 사주했을 리는 없다. 다만 그런 '마무리'를 아무렇지 않게 이행하는 그의 냉정함에 치가 떨렸던 것이다. 어쩌면 결국 윌슨에 대해 체이스가 해온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던 것도 지금의 이런 행동을 위해 저지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체이스는 조금이라도 진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닥쳐온 위기에 모두가 흥분 상태이고 아무리 힘들다 해도 일단 포어맨은 그의 편이다. 아니, 적어도 체이스가 포어맨의 편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병원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일등공신'이라고. 왠지 모르게 뒤통수 맞은 기분이 들었지만 적어도 포어맨의 계획 속에는 그가 있고, 윌슨이 별다른 해를 입는 것이 아니며 체이스 자신이 원하는 계획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는 바탕만 만들어준다면 그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고용계약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여전히 충격이라도 받은 얼굴이군." 평소와 다름 없이 무표정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포어맨이 중얼거리듯 던졌다.


"원장직에 올라가고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었는데...아무래도 제가 그 정도를 가늠하는 데 실패한 것 같네요." 체이스는 말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나는 책임을 묻는 자리에 있잖아. 그게 책임을 다 하는 것이기도 하고." 포어맨은 양 손을 깍지끼며 말하기 시작했다. "난 오히려 자네가 이렇게 반응해서 조금 당황스러운데. 결국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했던대로 되고 있지 않나?"


"진행이라면 그렇죠. 베벌리 씨의 죽음은 제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어요." 체이스는 짐짓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포어맨의 시선이 무심하게 그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그냥 공기 중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받아들이면 곤란해. 난 분명 경고했었어. 자네가 AACR에 윌슨 박사님을 데리고 참석하겠다고 했을 때, 베벌리 씨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물었던 것도 나야. 그 때 자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나?" 포어맨의 말에 체이스는 대답 없이 힘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이봐, 왜 쓸 데 없는 곳에 마음을 쓰는 거지? 나는 최근 자네가 계산적으로 많이 변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포어맨은 깍지 낀 손을 풀더니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 마련된 테라스 쪽으로 서서히 시선을 옮기며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을 때에는 가장 냉정하게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승기를 가져가는 거야. 자네가 제의했고 내가 마무리 지었지. 병원 운영도 비즈니스니 하는 상투적인 말은 하고싶지 않군. 어차피 자네도 그런 건 잘 알테니까. 자, 이제 자네 말대로 자네가 이제 진단학과의 과장이야. 지금 이 상황에서도 진단학과 분리에 대해 더 고려하지는 않겠지?"


"진단학과 분리가 필요한 건 말 그대로 하우스가 여기 있어서였어요." 체이스는 침착함을 되찾고 대답했다. "더 이상 하우스는 이 병원 소속도 아니고, 때문에 진단학과가 분리될 필요도 없다는 게 제 의견이에요."


"뭐, 애초에 문제는 하우스의 인성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싫은데..." 포어맨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고개를 돌려 턱을 만지작거렸다. "자네 정말로 자신이 있나?"


"...무슨 말씀 하시는 거에요? 진단학과 운영이라면 당연히 -"


"...윌슨 박사님 말이야." 의외의 말에 체이스가 잠시 흔들렸다. 물론, 패닉에 빠진 윌슨의 곁을 지키는 것도, 더 이상 하우스가 없는 윌슨의 곁에 서 있는 것도 체이스 자신이지만 어째서인지 혼란에 빠진 진단학과를 운영하는 것 보다도 더 위험한 질문처럼 들려왔다. 동시에 포어맨이 어째서 지금의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건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어서 미묘한 적의가 그의 안에서 고개를 들려 하고 있었다.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하군. 하지만 자네도 옆에서 봐서 알잖아. 윌슨 박사님의 모습이 꽤나 심각하더군. 물론 학회장으로 향하면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그 정도일 줄이야." 포어맨은 다시 자리로 와서 앉았다. "...진단학과 운영이라면 자네가 있지만 암병동학과는 이야기가 달라. 윌슨 박사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인력이라도 어디서 빼오면 좋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AACR에서 강의하는 사람들만 봐도 자네는 눈치 챘겠지."


"...결국 다시 인력 이야기군요." 체이스는 짐짓 새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상적인 진료라면 어려울 수도 있겠죠. 결국 이건 내가 어디까지 참아내느냐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애석하지만 지금 당장은 무조건 괜찮을거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체이스가 그 말과 함께 사무실을 나서려던 때, 포어맨이 대답했다.


"좋군." 포어맨의 대답은 다시 예상외였다. 체이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나와 대화를 하고 어느 정도는 상황에 대해 공유를 해주잖아. 전(前)진단학과 과장은 그딴 것도 없었으니까."


체이스는 그 말에 대답 없이 문을 닫았다. 우스운 일이다. 결국 하우스를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일을 저지른 주제에, 여전히 하우스에게 갖는 저 인정욕구가 애처로울 정도로 우스워서 체이스는 잠시 이마를 쓸어넘겼다.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불가능해요, 하우스는...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거에요?'


윌슨에게 퉁명스럽게 내뱉었던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윌슨의 안에서는 좀 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레고리 하우스라는 인간은 애초에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마음 쓰는 것도, 노력하고 발버둥치는 것도 모두 그 '결과'없이는 인정이라곤 없는 성마른 인간...포어맨도 결국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싶어 체이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당장은 이런 것들이 그가 진단실을 진정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우습게도 자신은 아직 윌슨과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일을 감정적으로 다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순식간에 겸임을 맡아버린 건 때문에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체이스는 몸을 최대한 수그렸다. 그는 마음 속의 모든 절망을 끌어내고 비어 있는 그 마음 깊은 곳에 원하는 야망을 가득 채워넣었다. 물론, 윌슨은 힘들어했다. 그는 하우스를 따라 경찰서로 이동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포어맨에 의해 저지당했다. 슬퍼하는 그를 떠맡아 위로해준 것은 역시나 체이스였다. 그는 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윌슨이 하우스에 대해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 당시라면 모두 흘려보냈으리라. 체이스는 당장은 그릇이 되기로 했다. 윌슨이 가진 슬픔과 눈물과, 걱정을 모두 쏟아부을 수 있는 그릇이. 얼마 전, 하우스가 윌슨에게 다그친 날 밤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아스피린을 먹이고 잠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거의 비슷한 수순으로 흘러갔겠지만 하나가 달랐다. 체이스는 더 이상 황망히 상황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윌슨은 다시 한 번 무너졌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윌슨이 기댈 수 있고 하우스 대신 진단학과 과장을 대리로 역임하며 나아가서는 진단학과 분리에 대처할 역할이 필요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뉴저지로 돌아올 적에도 윌슨은 별다른 말이 없었고 체이스가 제아무리 그를 설득해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그였지만 이제까지 이야기를 들어준 관성으로라도 좋으니 다시금 자신을 찾아주면 좋겠다고, 체이스는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의 마음에 가득 채워넣은 야망이 넘실거리며 은연중 이 병원이라는 공간 안에 하우스가 없다는 사실을 내심 흐뭇해하는 것에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는 끌어낸 절망을 표면으로 모두 내비치며 천천히 진단실의 문을 열었다.


"...그 잘난 학회에서 결국 돌아오셨군. 기념품은?" 생각보다 거센 타웁의 말에 체이스는 부러 슬픈 낯을 하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에요....조만간 저도 이사진에 회부될 예정이에요."


"...겸임이라고 들었어요." 닥터박이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 술을 한 잔 하러 가지 않겠냐고 수줍게 물어보던 얼굴과는 딴판이었다.


"...어디까지나 겸임이야. 진단학과를 분리하지 않는 조건으로." 체이스가 다시금 교묘하게 말을 비틀었다. 물론, 풀고 보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만 묶인 모양 자체로 보면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그 말에 진단학과 팀원들은 조금 동요하는 것 같았다.


"하우스 박사님이 결국 수감되실 예정이라서인가요?" 세번째로 입을 연 사람은 애덤스였다. 체이스는 결연한 표정을 바꾸지도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러 대답을 아끼며 시간을 끌었다.


"...포어맨과 함께 수감되지 않도록 노력해볼 예정이야. 내가 겸임이 된 건 그 과정중에 일처리를 하기 위함이야. 진단학과를 분리하는 명분도 없앨 수 있도록." 당장은 그들과 아군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 어차피 포어맨의 편에 서서, 그가 원하는 진단학과 과장 역할을 해낼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이 거대한 계획의 이면에 존재한 목표는 단지 제임스 윌슨이라는 단 한 사람의 존재와, 그레고리 하우스라는 단 한 사람의 부재일 뿐이다. 불필요한 갈등을 자아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은 적당히 입막음만 해두면 그만인 것이다. 체이스는 짐짓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마치 그의 얼굴을 따라하듯, 세 명의 얼굴도 조금씩 진지해지고 있었다.


"...이번 건이 특수한 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이번에 말을 먼저 시작한 건 체이스쪽이었다. "닥터박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이 병동에서는 '크로이츠펠트-야콥'이 발발한 적 있었고, 그 당시에 뉴저지주에서 지정한 프리온 안전기준을 통과해서 부검이 가능한 상태에요. 제가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아시겠죠."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단 몇 분만에 그들의 적대적인 기운이 조금씩 누그러들고 이제는 체이스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제대로 된 사인을 밝히지 못했으니까요. 물론, 지금 상당히 지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어요. 휴식이 필요하다면 말리지 않을게요. 각자 병동에서 준 연차들을 대부분 쓰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이미 우리 모두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잖아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와중 말을 먼저 꺼내온 건 타웁이었다.


"...얼마 전 볼티모어에 있던 전부인이 연락을 해왔어. 폐암 말기라더군. 이미 우리 병원으로 데려오기에도 너무 늦은 상태여서...아무래도 며칠 간은 가는 길 보살펴주고 와야할 것 같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는지 체이스 뿐 아니라 애덤스와 닥터박도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어째서 지금에야 말한 거에요?' 하고 애덤스가 화가 나서 물었지만 오히려 침착한 상태의 타웁은 그래봐야 이틀 전 정도였다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닥터 타웁. 여기 일은 걱정 말고 다녀오도록 하세요." 고맙군. 하고 짧게 내뱉었지만 평소 하우스가 뱉어대는 퉁명스러운 말이 아닌 따듯한 말에 왠지 모르게 감화되는 것 같았다. 이미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어서 타웁은 그 길로 자신의 서류들을 챙긴 채 자리를 떴다. 그 이후로 닥터박은 이어지는 야근에 부모님의 성화가 심하다며 적어도 이틀이나 나흘 정도는 집에서 쉬면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타웁의 경우만큼 심각한 건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체이스는 그녀에게 상냥한 말로 모든 연차를 소진해도 괜찮으니 마음 놓고 다녀오라는 말을 건넸고, 이내 닥터박도 자리를 비웠다. 불과 며칠 전 저녁처럼, 사무실에는 다시 애덤스와 체이스만이 남았다.


"...자네는?"


"...부검에 참여할게요." 담담한 얼굴의 애덤스가 말하였다.


"쉬고 싶지 않느냐고 묻지는 않겠지만...왜지? 자네야말로 이런 작업에서 바로 손 뗄 줄 알았는데."


"...당신이 아니라, 베벌리 씨와 헬렌 씨를 위해서에요."


"진단학과 분리로 심기가 불편해져 있을 줄 알았는데...그 쪽이었군." 체이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애덤스의 눈빛은 여전히 지난 밤의 것을 닮아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 게임을 이끌어가는지 알아요. 난 당신 말 믿지 않으니까."


"...왜 그렇게까지 열을 올리지? 그냥 자네도 하우스 박사님의 열렬한 신도인건가?"


"하우스 박사님이나 윌슨 박사님을 좋아해서가 아니에요. 당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으니까."


"...오만하다고 했었지." 체이스가 고개를 들어 애덤스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애덤스의 표정을 바라보며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선을 넘었다면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베벌리 씨의 사망을 주도하지도 않았고, 필라델피아로 바이크를 몰고 온 것도 내가 아니야." 체이스의 말에 애덤스의 얼굴이 적대감으로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체이스의 얼굴은 한없이 창백했다.


"...당신이 그 때 필라델피아로 가지만 않았어도..."


"그건 내 실력을 과신하는 평가 아닌가?" 체이스의 말에 애덤스가 굳었다. "어째서 그 변명의 주체가 하우스 박사님이 아닌 거지? 왜냐하면 내가 떠나기 전 까지만 해도 베벌리 씨의 차도가 좋았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의 파놓은 무덤에 갇힌 기분이 되어 애덤스는 저변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우스 박사님은 그런 발산하는 분노 같은 것도 잘 갖고 놀아주지만 애석하게도 난 아니라서. 방향을 잘 정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되지 않으면 지금처럼 갈래길에서 멈추고 마니까. 어때, 닥터 애덤스. 자네가 얼마 전 내게 했던 말 기억 나?" 체이스는 시선을 떨군 애덤스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진단학과가 분리되어도 나와 일하지 않겠다'던 말...그 건은 아직도 유효한가?"




47.


코를 간질이는 깃털에, 하우스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왠지 인형의 집처럼 꾸며져 있는 화사한 방의 침대에서 불현듯 깨어난 침대 맞은 편 화장대 거울을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금발 여성의 뒷모습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대체 뭐야, 이게?"


"숙녀의 방에서 잠들어놓고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실례야." 익숙하지만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앰버?"


"기억력이 좋네...아니면 내 이름이 각인이라도 된걸까? 다른 모든 병명은 잊어버려도 내 이름은 잊어버리지 마."


"...여전히 지독하군." 하우스는 중얼거리며 자신을 덮고 있던 분홍색 시트를 뒤척였다. "끌려나와서 꾼다는 꿈이 기껏 이딴 꿈이라고...잘 하는 짓이다." 그는 그렇게 털어내고는 주변을 바라보더니 앰버를 향해 물었다. "...내 지팡이는 어디 있나?"


"보통은 고맙다는 말 먼저 하지 않아?" 앰버가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확실히 중환자실에서 보았던 병들고, 여기저기 든 멍에 호흡기를 끼우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생기있고 화려한 모습이었지만 하우스는 왠지 모르게 더욱 커다란 절망감을 느꼈다. 그녀의 목께에 빛나고 있는 호박빛 목걸이가 그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 헤집고 들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두뇌를 태워가며 병의 원인을 찾아내던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윌슨의 눈물진 눈동자가 쓰라리게 지나갔다. 하우스는 내색하지 않으려 시선을 돌렸다. "...내가 나 자신에게도 고맙다고 하면 고맙다고 말하다 숨이 막혀 진작 죽었을걸세. 잔말 말고, 지팡이나 내놔."


"골라가. 저기 옷장 보이지?" 앰버가 볼에 분을 토닥이며 가리킨 곳에는 베이지빛 옷장이 있었다. 하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가며 옷장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화사한 베이지빛이나 핑크빛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옆에서 누군가가 그의 옆을 휙 스쳐서 옷걸이에서 옷을 하나 꺼내고 있었다. 윌슨이었다.


"윌슨...!" 하우스가 애타게 윌슨을 불렀으나 윌슨은 말을 듣지 못했다.


"불러봤자 볼 수도 없어." 앰버가 말했지만 하우스는 아랑곳 않고 윌슨에게 다가가 그를 만져보려 했지만 통과만 할 뿐, 만져지지도 않았다. 그 와중 윌슨이 챙기는 건 보아하니 세탁한 하우스의 옷인듯했다.


"결국 난 죽은 건가?" 하우스의 얼빠진 얼굴에 앰버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하며 말하였다.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지? 여긴 네 조그만 전두엽 속이야. 참고로 넌 죽지도 않았고."


"...이제 와서 이런 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야?"


"글쎄...과거의 잔존한 기억,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되감기 하며 정보를 정리하는 일, 트라우마의 재현, 발발...혹은..."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던 앰버가 짐짓 멈추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냥 가장 보고 싶은 모습일지도."


윌슨은 바쁘게 짐을 챙겨 집을 나서고 있었다. 그가 문을 닫는 순간, 다시 주변이 변했다. 장소는 순식간의 하우스의 집으로 변했고 윌슨이 하우스의 집 앞에 그를 찾아와 옷들을 건네고 있었다. 윌슨이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하우스는 냅다 문을 닫아버렸다.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우스는 그 이유가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그 날은 하우스가 콜걸을 불러 진탕 놀고난 뒤, 제대로 입을 옷이 없어서 윌슨에게 그의 세탁한 옷을 부탁한 것이었다. 하우스는 뒤돌아선 윌슨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윌슨에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어."


"...원하는 다른 결말이라도 있어?"


"...바꿀 수 있을 것 처럼 말하는군."


"왜 안 될것처럼 말하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앰버가 말하였다. "아까도 말했잖아. 여기는 네 조그만 전두엽 속이야. 네가 원하는대로 결말을 바꿔보는 건 일도 아니라고."


하우스는 그런 앰버를 바라보더니 윌슨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게 아니었어.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 윌슨이 문을 열었을 때에는 하우스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평소 잘 치우지도 않는 성격이었지만 왠일인지 그날 따라 집 안은 청결하고 포근했다. 하우스는 윌슨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에게 맥주를 권했다. 윌슨은 반갑다는 듯 미소지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날 하우스는 윌슨에 대해 모르던 것들을 잔뜩 알게 되었다. 둘은 미술, 의학, 제멋대로 자신의 병명을 정해서 오는 환자들, 그리고 새롭게 도입되는 수술 전문 의학 로봇에 대해, 자신들이 사귀어본 여자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각자 사랑하는 음악에 대해 자유롭게 영원에 가까운 시간토록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때 즈음, 윌슨은 하우스에게 넌지시 피곤하다는 기색을 비추며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하우스는 자연스럽게 지팡이를 짚고는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현관의 앞에서, 윌슨이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우스는 그 말들을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직 윌슨의 음성만이 마치 음악처럼 그의 귓가를 머물다 그의 저변에서 움트는 낯선 갈증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밤은 아무리 깊어도 초저녁처럼 밝기만 하였고 그게 흡사 하우스의 현관 앞에만 존재한 가로등만 그런 느낌을 자아내더라도 둘에게는 이미 충분했다. 계속해서 비틀거리는 주제에 윌슨은 좀처럼 그 현관 밖을 나서지 않았다. 걸어서라도 데려다주겠다는 하우스의 말에도 해맑게 웃던 윌슨의 웃음이 멈췄다. 하우스는 참지 못하고 윌슨의 얼굴을 붙잡고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목으로 넘긴 맥주의 플로럴 향이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 가장 깊고 진하고 감미롭게 둘을 감쌌다.


두 남자가 새벽 세 시, 베이커가의 한 가정집 현관에서 자취를 감추는 일이란 한없이 평범하고 신속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기분 좋고, 자연스럽고, 신선한 것. 오직 그 감촉과 느낌만이 그가 원하는 결말을 바라보는 하우스에게 전해져 올 뿐이다. 이런 기분 좋은 꿈을 전에도 꾼 일이 있다. 비록 그 때에는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해 고통에 떨었지만 지금의 자신은 어떠한가. 현실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이미 떠나간 그 때의 기회에 회한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당장 눈앞의 가상의 두 사람에게서 행복감이라도 전염된 것인지 하우스는 알 수 없는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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