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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14화

Another - 14

by 김뇨롱

43.


애덤스가 충혈된 눈의 하우스를 만난 것은 그 날 저녁 여섯 시 즈음이었다. 베벌리 씨의 증상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하자 닥터박과 타웁은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체이스가 아니면 말하지 않겠다던 베벌리 씨의 보호자 헬렌도 슬슬 나머지 똘마니들과 대화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애덤스는 볼에 붙여둔 반창고를 갈아 붙이고는 차트를 가지러 나서던 참이었다. 진단실 문을 가로막은 지팡이를 따라 시선을 올리자 다름아닌 하우스가 수척한 몰골로 - 그러나 형형한 눈을 하고선 -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용건이시죠? 이제 와서 베벌리 씨 진단이라도 참여하시려고요?" 애덤스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왠지 모르게 방금 전 붙인 그녀의 반창고 속 상처가 따갑게 느껴졌다.


"...윌슨 말일세." 하우스가 꺼낸 말에 애덤스는 질렸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또 윌슨 박사님 이야기에요? 이번에도 윌슨 박사님 이름을 말하면 뭘 던지실거죠? 지팡이라도 던지실건가요?"


쏘아대는 그녀의 말에도 하우스의 표정은 전처럼 자극을 받는 것 같지 않아보였다. 도리어 그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슬프고, 진중해보이기까지 했다. 애덤스는 화를 내는 와중에도 그런 하우스의 태도가 생경해서 잠시 할 말을 잃을 뻔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하우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미안하네. 자네 뺨에 자상 말이야."


"...그게 대체..." 애덤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지며 말을 잃었다.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았다고는 들었어요. 근데...뭐 잘못 드시기라도 하신 거에요?"


"부탁인데," 사과를 하는 사람 치고는 그닥 여유가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하우스가 말을 이었다. "윌슨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캐머론에게 물어봤지만 도통 모른다는군." 이미 몰골을 봐서는 얼마 전 사고로 생긴 크고 작은 상처에, 과음으로 인한 수액까지 맞은 상태로 무엇을 한다는지 알 수 없기에 애덤스는 잠시 할 말을 골랐다. 어떻게 이야기하건 그가 애덤스의 말을 들을 리는 만무했지만. "이제야 윌슨 박사님과 이야기하실 마음이라도 생기신 건가요? 정말로 뭐 잘못 드시거나 잘못 맞으신 것 같네요..."


"뭘 갖다 붙여도 상관 없으니까 윌슨이 어디 있는지나 말해주게." 하우스의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이미 휘젓는 손만 봐도 힘이 없어 보였지만 그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서 애덤스는 슬슬 자신이 장난스레 던진 말이 진실이지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해서 하우스가 윌슨의 행방을 찾는 데에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내 그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타웁이나 외래 진료를 보고 있는 닥터박을 괴롭힐 생각에 이르니 애덤스는 한숨을 쉴 수 밖에는 없었다. "...윌슨 박사님은 멀리 떠나셨어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우스가 놀라서 바라보며 물었다. 진중한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한 정도로까지 짙어져 있었다. 말이 너무 짧았다는 걸 깨달은 애덤스가 사과하며 내용을 정정했다. "아, 죄송해요. 그게...윌슨 박사님은 지금 출장으로 필라델피아에 가 계세요."


"필라델피아라면...AACR이군. 가지도 않던 암학회에 무슨 일로..."


"닥터 체이스요." 애덤스가 뻔하다는 얼굴로 말하였다. "AACR에 두 분이 다녀오는 일정이에요. 저도 어처구니가 없었다고요. 박사님 뿐 아니라 체이스까지 공석이라서 지금 베벌리 씨의 상태는 아무도..." 애덤스가 말을 이어나갔지만 이미 하우스는 대화의 영역을 벗어나 저 멀리 길을 나서고 있었다. 애덤스는 말하던 것을 거두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망할, 하우스는 속으로 작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어째서 마음을 알기 전에는 그토록 가깝게 있었으면서,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끌어안을 정도로 가까웠으면서 이렇게 마음을 알게 된 후에는 빌어먹을 정도로 멀리 떨어지게 된건가? 늘 그렇듯 윌슨은 자신의 속내에서 벗어나 달려나가는 얼치기같은 구석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터다. 단지 그 판이 너무 커진 것 뿐이지..하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해진 지금, 그로서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지난 오랜 시간을 참아온 것의 배로 윌슨이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그를 홀로 둔 시간의 배로 그를 끌어안고 싶어졌다. 사랑, 기다림, 외로움, 고독, 슬픔, 아픔, 위로, 다정함, 우수, 부끄러움, 시간...그 어떤 말을 들여서라도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우스는 윌슨으로부터 듣고 싶어졌다. 윌슨이 자신을 기다려주기를 바라게 되면서 처음으로, 윌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의 좋아하는 취미는 무엇이고 그가 어떤 음악을 사랑하는지도 알고 싶어졌다. 어깨 너머로 보고 귓등으로 들어온 이야기 따윈 모두 집어치우고 갈아치워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는 윌슨이 무척이나 그리웠고 그와 동시에 윌슨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바이크가...망할." 병원 입구에 도달한 그는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환자들과 병원 사람들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바이크를 찾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바이크는 얼마 전, 윌슨의 집에서 도망치듯 타고 나오다 보기좋게 망가뜨리지 않았던가. 차를 타고 갈까 하면 사실 마땅히 빌릴 곳도 없었다. 대놓고 타웁에게 태워달라기도 그렇고 캐머론에게도 부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석방을 조건으로 걸어둔 반경 1km의 제한이 그를 막고 있는 한 누구라도 그를 쉽게 도와줄 수는 없을 터였다. 지팡이를 짚은 채 절뚝거리던 그는 이내 놀라운 기억을 하나 찾아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한 달 전, 닥터박이 낑낑대며 끌고 온 모터사이클이 생각났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일 선물인 그 모터사이클을 겨우 끌고 온 닥터박은 그 날 아침에 온 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그게 마지막 주행이 되고야 말았다. 그런 닥터박이 그대로 주차장에 방치해두었던 보급형 모터사이클이 기가막히게 떠올랐던 것이다. 하우스는 바로 그 닥터박의 모터사이클이 병원 주차장의 끄트머리에 아무렇지 않게 주차된 것을 찾아냈다. 이내 절뚝거리던 그는 기어코 그 모터사이클의 시트에 몸을 앉혔다. 꽂혀 있던 열쇠를 돌려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뒤 핸들을 굴려보았다. 평소 타고 다니던 것 보다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건 상관 없었다. 지금 당장 윌슨을 보러 갈 수만 있다면 그 어느 수단이든 상관 없었다.


아담한 사이즈의 모터사이클이 신속히 프린스턴 플레인스보로를 벗어나 달려나갔다. 모퉁이 술집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이내 큰 도로에 진입하면서, 하우스는 알 수 없는 쾌감을 맛보았다. 물론 그가 타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느껴졌다. 윌슨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66.8마일


필라델피아를 가본 적이 처음이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는 몇 번이나 필라델피아를 가본 적이 있었다. 막상 윌슨을 처음 만난 것도 이런 세미나 형식의 모임에서였다. 클럽에서 몇 번이나 누군가가 빌리 조엘의 'Leave a tender moment alone'을 틀어대는 바람에 윌슨이 화가 나 그 자와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되었고 그 길로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작부터 특별했다. 하우스는 윌슨의 보석금을 내주고 그와 처음 대화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그 당시에 하우스는 윌슨이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화가 나고 팔팔하고 활기찬 상태의 윌슨을 목격했던 참이었으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미 그 시점에서 윌슨은 이혼을 준비중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이혼을 준비중이라고 했을 때 가슴 저변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 기억났다. 윌슨이 보였던 그런 행동에는 이혼으로 인한 고통도 한 몫을 했을 터다. 하지만 당시 하우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흥미로울 뿐이었다. 초면에 그런 심각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돌아이에, 그토록 선한 미소를 짓는 인물도 드물었으니까.


이상한 일이다. 지금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그의 사랑스러운 점을 찾아가는 자신이, 너무나 낯설고 신기하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의 과거에서부터 찬찬히 사랑하게 되는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윌슨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것일까. 저무는 노을 너머로 흐릿해져가는 라이트를 바라보며 하우스는 그런 생각들을 이어나갔다. 넓은 도로, 어두워지는 공기 속에서도 하우스는 더 없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 자신은 더 이상 흔들리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 그 마음에는 깊은 고요함과 그 고요함 위를 뒤덮는 사랑이 깃털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이내 계기판을 확인하고 근처 눈에 들어오는 주유소로 무조건 빠져나갔다. 주유소와 식당을 겸한 곳이어서 그는 바이크에 기름을 넣어두고 적당히 근처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발목에 차고 있었던 경보 장치가 반응하고 있었다. 이미 연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옆집에 경력 좀 있다던 '빌리'는 이 잠금장치를 잠시 비활성화 시키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하우스에게는 그런 장치도, 그런 걸 해낼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가석방 조건을 어긴 일은 전에도 있었다. 없었더라도 상관 없었다. 어떻게든 하우스는 필라델피아에 가야했다.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더라도...그는 이내 경보 장치를 끊어내고는 다시 모터사이클로 다가갔다. 그가 잠시 모터사이클을 세워둔 이곳은 반경 1km는 물론, 한참 벗어난 구간이다. 이미 그를 수색하는 움직임이 있을 터였다. 이내 그가 머물고 있는 주유소 옆으로 경찰차가 한 대 빠르게 지나갔다. 하우스는 좀 더 서두르기로 하였다. 이제 완연한 밤이 되어가는 풍경 속에서, 모터사이클의 헤드라이트가 밝게 반짝이고 노란 줄을 그으며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44.


"...입에 맞지 않아요?" 체이스의 말에 윌슨은 잠시 식기를 내려놓았다. 학회의 일정이나 내용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신소재로 인한 암이나 암과 암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내용은 늘 있었던 주제였고, 윌슨도 다른 학술지를 통해 접하고 있던 주제였다. 급하게 잡은 출장 일정이라 그 자신이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하려 해도 새로울 것이 없을 만큼 지루했다. 그런 지루함 속에서 체이스가 건네는 친절함과 이따금씩 보이는 그의 갈증은 윌슨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와 나누었던 사소한 스킨쉽이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다. 하우스에게 부딪힐만큼 부딪힌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유일한 인물은 체이스 뿐이었다. 동떨어진 필라델피아에 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가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체이스의 매끈한 얼굴과 밝은 눈동자, 반듯한 걸음걸이를 보면 더욱 그런 것들이 끼쳐오듯 윌슨을 괴롭혔을 뿐이다.


"생각보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보군." 윌슨이 일축했다. 체이스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목을 축였다. 그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윌슨에게 전달될 정도였다. 체이스는 얼마 남지 않은 출장 기간 동안 윌슨과 어떻게든 다음 스텝을 밟고 싶었다. '자신만이 만드는, 자신만의 시작'으로서 윌슨은 그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딴에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윌슨이 기어코 하우스의 집을 찾아가긴 했지만 결국 하우스로부터 그 어떤 답장도 듣지 못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말이다. 그 틈을, 체이스는 다시 비집으려 하고 있었다.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체이스는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의 수염이나 지팡이, 혈류 등을 핑계삼고 싶지 않았다. 윌슨을 마음 깊이 사랑했던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로버트 체이스. 그 자신이었으니까.


"...상관 없어요." 체이스는 슬쩍 미소지으며 말하였다. 마치 물수제비를 뜨듯 산뜻한 반응에 윌슨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오늘 저녁에는 이 호텔의 바를 가볼까요? 당장 내일에라도 떠나야 하니까 기회는 오늘 밖에 없어요."


우리 모퉁이 술집에서 먹던 것 처럼요.


왠지 모르게 이 곳에서 더욱 강해진 체이스의 갈증에, 윌슨은 조금 더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곳이 타지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진실로 그러한건지 알 수 없지만...유난히도 고통스러웠던 그 날 밤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 날 밤 윌슨이 스스로 내뱉은 말들이 그의 마음에 물을 퍼뜨리듯 퍼져나갔다. 그 자신도 사랑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다는 말. 지금 그의 그런 마음을 들어주고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유일하게 그의 눈앞에 있는 로버트 체이스. 이 남자뿐일 것만 같았다. 조금 더 흐트러지고 어질러진다고 해서 체이스는 그를 져버리지도, 그를 범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그럴 수 있는 기회란 충분히 많았지만 체이스는 늘 그렇듯 윌슨을 보듬어주지 않았던가. 윌슨은 그런 체이스를 믿어보기로 하였다. 딴에는 그 자신이 체이스의 외견에서 하우스가 지워진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애써 부정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방향이건, 체이스에게 유리했던 것만큼은 틀림 없었다.


그 날 밤


체이스는 마음을 먹고 방을 나섰다. 그가 다짐한 만큼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학회에 참석할 때 입은 것 보다는 더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지만 눈길을 끄는 옷이었다. 낮에 보았던 모습과 사뭇 다른 체이스의 모습에 잠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내려가는 도중에 윌슨은 자조하듯 자신의 차림새를 탓했지만 체이스는 그런 그를 오히려 다독여주었다. 자연스러운 게 가장 멋있어 보인다며 체이스는 윌슨의 어깨를 슬쩍 터치했다. 왠지 모르게 그 부분에서부터 열이 나는 것 같아 윌슨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호텔의 바는 호텔의 다른 서비스만큼이나 친절하고, 술의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괜찮았다. 체이스도 사뭇 이전의 갈증을 드러내던 기색을 뒤로 하고 친근하고 친절한 말들로 윌슨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런 윌슨도 어느덧 자신이 겪었던 감정적인 멍에를 벗어던지고 오래 전으로 돌아온 것 처럼 체이스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끔, 체이스는 윌슨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고는 그에 대답하는 윌슨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흘렸다. 모퉁이 술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척 생경한 모습에 윌슨은 대답하면서도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체이스는 유독 그 날따라 윌슨에게 질문을 자주 던졌다. 윌슨도 체이스에게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윌슨이 자신의 이야기를 체이스에게 해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바텐더는 윌슨과 체이스를 연인으로 오해해 커플 칵테일을 준비해주기도 하였다. 윌슨은 놀라서 한사코 거절했지만 체이스의 기세에 못이겨 각자 잔을 든 채 팔을 교차해서 잔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떨리는 기분이 들어 윌슨은 빠르게 잔을 들이켰다. 이내 체이스가 그의 볼에 입맞춤하는 감촉이 느껴졌지만 그는 바로 거기서 어떤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체이스는 무척이나 밝게 웃으며 윌슨과 잔을 나눈 뒤 바텐더와 자연스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윌슨은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다시 체이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밝은 체이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윌슨은 다시금 체이스가 하우스와 다르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체이스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윌슨에게 부축당한 채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지막 위스키에서 생각보다 많이 취한 체이스는 대뜸 윌슨에게 기대기 시작했고 윌슨은 그런 체이스를 부축한 채 위층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내 엘리베이터는 21층에 도달했다. 체이스가 기댄 팔, 어깨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풍겨오는 고급 위스키 향이 윌슨을 어지럽게 했다. 이렇게 취한 체이스를 부축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힘든 일을 체이스는 별말 없이 해오고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윌슨은 212호의 문을 열었다. 체이스의 평소 성격처럼 잘 정돈된 방을 보니 막상 윌슨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지금의 체이스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윌슨은 겨우 침대까지 체이스를 끌고 와 눕혔다. 반동으로 윌슨마저 침대 위로 널부러졌고, 이내 체이스는 옆으로 돌아 윌슨을 두 팔로 가득 안았다. 체이스의 주정이라고 생각한 윌슨이 그대로 팔을 거두려던 찰나, 체이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지 않을래요...?"


위스키로 짙어진 낮은 음성이 떨리듯 전해오는 소리에 윌슨은 물끄러미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취기에 그대로 젖은 얼굴이지만 분명히 체이스는 윌슨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체이스가 취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올바른 정신으로 술의 기운을 빌려 말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윌슨은 일단 그를 제대로 침대에 눕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체이스의 팔을 벗어나려 조금 힘을 쓰자, 체이스가 더욱 팔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가지 말아요..."


이제 완전히 끌어안은 모습이 되어서, 윌슨은 체이스의 품 안에 갇히고 말았다. "두렵네요...참 쉽지 않아요." 체이스의 음성은 이제 완전히 평소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난 번처럼 취한 척 하고 입맞출까도 생각했거든요." 체이스의 품 안에서, 체이스의 심장박동 소리와 더불어 그의 고백을 듣는 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윌슨은 이 순간에 몸에서 땀이 날 것만 같았다. "매번 그렇듯이 박사님이 도망갈까봐...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전 그게 가장 두려워요."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듯, 체이스가 중얼거렸다. "알았으니까...일단 놔줘. 도망가지 않을테니까." 윌슨은 말하며 거의 반쯤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체이스는 이내 힘없이 손을 놓았다. 윌슨은 체이스를 그대로 끌어다 침대에 제대로 눕히기 시작했다. 그가 체이스의 발치를 정리하고 있을 때, 문득 짙은 그림자가 윌슨을 덮쳤다. 체이스였다.


침대에 거꾸로 엎어진 채, 윌슨은 다시금 체이스에게 갇혀버렸다. 이번에는 완전히 포개어진 상태였다. "왜 항상...혼잣말하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체이스는 입맞출듯이 윌슨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방금 전까지 웃으며 들이켰던 위스키의 향이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박사님은 분명 제 앞에 있고, 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어째서 늘 혼자인 기분이 드는 거죠...?"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체이스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있었다.


'동정이 아냐...헛된 희망, 짝사랑이잖아요.'


오래 전 체이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건 정 반대의 경우였다. 윌슨은 늘 체이스가 자신을 향해 품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체이스에게 품는 감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체이스가 가진 것과 같은 모양을 지닐 수 있을까? 그럴 리가...애초에 그가 체이스의 이마에 입맞춤한 것도, 그의 응석을 받아주고 싶어졌던 것도 모두 '사랑'이 아닌 '동정'이었을 뿐...그조차도 체이스가 하우스와 닮았을 때를 제외한다면 윌슨에게는 무척이나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다.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답을 해줄 수 있는 입장임에도 윌슨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과 같은 것들을 사랑해왔다. 체이스 또한 자신과 닮아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갈수록 느끼는 것은 그가 하우스와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윌슨은 말없이 체이스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여기서 더 어떤 행동을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기분이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체이스가 보인 반응은 조금 달랐다. 그는 다시 윌슨에게서 내려와 옆으로 누워버렸다. 침대 위에 사이 좋게 누운 모습으로, 체이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거 알아요, 박사님?" 얼마 전 내뱉은 말이었지만 전과 다른 느낌이 느껴졌다. 바에서 보였던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모습이 아닌 평소의 로버트 체이스의 모습. 방금 전까자 눈물을 글썽였던 주제에, 체이스는 새삼 소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윌슨은 잠시 안심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배려할 거라는 걸 은연중 느끼고 있어서일까. 체이스의 얼굴은 그런 윌슨에게 약간 슬퍼보이기도 했다. "...박사님이 절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는 거." 체이스 본인의 입에서 새어나오자 윌슨은 더 할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 점은 체이스 본인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점이었다. 윌슨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도, 그의 어깨를 가득 감싸 안아도 체이스 자신이 원하는 온기는 전혀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소탈해지기로 했다. "제가 면도한 이후로...박사님 절 대하는

게 조금은 차가워졌어요. 그래서 제가 더 조급한가봐요." 말하면서 체이스는 숨을 가다듬었다. "며칠 전의 박사님 시선을 다시 가지고 싶어서...변한 박사님 눈빛 때문에 무척 서운했거든요."


당장에 윌슨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스스로의 약한 모습만 더욱 내비칠 것 같아서 그는 바로 누워버리기로 했다. 눈물이 눈가 사이로 스며들기를 바라면서, 체이스는 적어도 자신만의 그 '시작'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실패로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토록 윌슨의 호흡이 느리다는 것을 재차 상기했으면서도 혼자만의 시작을 위해 내키지 않는 면도까지 하고 이 먼 필라델피아로 윌슨을 끌고 온 것은 체이스 자신이지 않은가. 되도록 자신을 책망하며, 체이스 자신이 가진 냉정한 이성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곳에서 프린스턴 플레인즈보로로 돌아온다 한들 윌슨과의 관계는 이어나갈 수 있다. 무엇이라도 처음이 어렵고 낯선 법...적어도 윌슨은 이제 체이스의 마음을 알고, 그의 포옹이나 입맞춤에 몸을 빼내지는 않는다. '반응' 해준다면 그야말로 좋은 일이겠지만 적어도 도망가지 않는 것 또한 응답의 일종은 아닐까.


그 사이 옆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윌슨이었다. 윌슨은 천천히 체이스의 손을 잡았다. 이제껏 체이스가 보인 거친 포옹이나 입맞춤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더 소박하고, 작고 다정한 것이었다. 아까 그토록 어깨동무를 하고 볼에 입맞춤까지 저지른 주제에, 체이스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참느라 곤란해졌다. 윌슨은 새삼 다정한 음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부디 그 입술에서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기만을 체이스는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아마 자네가 가장 잘 알겠지. 이제껏 나를 지켜봐왔으니까."


눈물을 숨기기 위해 침대에 누웠으면서,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윌슨을 바라보았다. 윌슨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그건 그가 이번에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거절의 동의를 내비치는 대신, 윌슨은 지금의 있는 그대로를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말하고 싶은 거야. 조금이라도 천천히 가줄 수 있느냐고." 윌슨이 누운 채 체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새삼 그는 나머지 손을 들어 체이스의 눈물을 훔쳐냈다. 떨어져나가는 윌슨의 손에 가득 담긴 체이스의 눈물이 침대 옆면에 방울지듯 흩뿌려졌다.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박사님은 정말 개자식이네요." 체이스가 대뜸 던진 말에 윌슨이 놀란 눈치였지만, 체이스가 말을 이어나가며 표정이 풀려나갔다. "정말 그 점 때문에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렇게 자꾸 희망을 주는 게...지난 7년 가까운 시간 동안...이렇게 제가 움직이는데도 제대로 응해주지 않았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저를 매달리게 만드는 거...정말 못된 거에요."


"...그거라면 나도 할 말이 많지. 나도 비슷했으니까."


영락없이 하우스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윌슨을 바라보며, 체이스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나마 하우스의 이미지를 빌려 그에게 다가선 것들이 모두 허사였을테지만 지금 당장 윌슨의 앞에 있는 건 있는 그대로의 로버트 체이스 자신이며 이것만으로도 그 '시작'은 충분하노라고.


"우리 둘 다 만신창이네요..." 적어도 그가 지니고 있는 사랑의 상처만큼은 윌슨과 무척 닮은 것이었다. 언제 들었는지 모를 말이지만 문득 떠오른 말 그대로 체이스는 대답하듯 윌슨에게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선택할 수 없으니까요."



45.


"다음 발표 장소가 꽤 멀어서 좀 걸어야 할 것 같네요." 체이스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주최측이 아닌 참여한 팀 중에서 근처 연구소의 결과를 함께 발표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장소를 옮겨달라는 부탁을 받은 터였다. 꽤 번거롭지만 주제가 흥미롭기도 해서 윌슨은 그 짧은 시간 학회 참여 준비를 하면서도 이 발표는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터라 체이스는 이 세션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윌슨은 체이스의 말에 수긍하며 이내 간단히 짐을 챙겼다. 학회장을 벗어나려던 찰나에, 바깥이 잠시 소란스러웠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는 학회장이라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유난히 그 소란스러움이 윌슨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기분이 이내 그를 흔들어버리고 말았다.


'멋대로 학회장에 침입하시면 안 됩니다!' 경비로 보이는 사람의 말이 이어졌지만 그 침입자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이 학회장 안에 진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 윌슨은 자신이 환청이라도 듣는건가 싶었지만 이내 익숙한 마찰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분명 그건 지팡이를 짚는 소리였고 윌슨이 놀라서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윌슨과 함께 길을 나서려던 체이스가 잠시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윌슨을 바라보고서는 이내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하우스였다. 대충 주변에서 주워 듣기로는 연차를 쓴 이유도 가벼운 접촉 사고같은 거 때문이라고 들었는데...다리와 팔에 붕대는 그렇다 쳐도 흡사 걸인의 몰골을 하고 휘어진 지팡이를 열심히 재촉해가며 걸어오는 꼴이라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체이스의 마음에 더욱 걸리는 건 대뜸 학회장에 나타난 하우스가 아니라 바로 윌슨이었다. 그는 벌써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하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이 자리가 학회장이며 어떤 발표를 들으러 가야 하는 등의 정보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윌슨을 살피며 그의 옷깃을 잡아 이끌었다. 그대로 이끌리면서도 윌슨은 하우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쓰러움과 경악이 그의 얼굴에 피어나고 있었다.


윌슨은 천천히 자신과 체이스를 향해 다가오는 하우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지난 번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문전박대 당했던데다 캐머론에게서 소식을 전해듣고 그의 상태를 보고 싶었지만 이미 필라델피아 출장이 결정난 뒤였기에 사고 후의 하우스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뺨과 팔, 심지어 다리에까지 상처를 치료한 흔적에 주인을 닮아 여기 저기 까지고 살짝 휘기까지 한 지팡이하며,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한 듯 움푹 패인 뺨이 너무도 마음 쓰였다.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윌슨의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박사님..." 체이스가 시선은 하우스에 고정한 채 윌슨에게 속삭였으나 윌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분 안에 나가주시지 않는다면 지원을 요청할겁니다." 하우스를 뒤따라 오던 경비는 이내 하우스가 시선을 던지는 윌슨과 체이스 쪽을 바라보며 무전기를 들고 질문했다. "아는 사람입니까?" 윌슨만 없다면 얼마든지 아니라며 내쫓아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체이스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인 출입시에는 메뉴얼 지침을 따라주십시오.' 어딘지 모르게 행색이 초라한 하우스의 몰골을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경비는 간편한 언급만 던지고는 자리를 나섰다. 그가 떠나가는 것도 아랑곳 않고 하우스를 그대로 바라보고 있던 윌슨이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박사님...괜찮아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에요...? 상처는...식사는..."


"윌슨." 하우스는 지친 몸을 이끌고 윌슨의 옆에 있는 체이스가 새삼 이토록 신경질적으로 거슬리는 것에 놀라며 견디듯 말하고 있었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죄송하지만 저희는 일정이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체이스가 끼여들어 말하기 시작했다. 하우스는 거기에 시선도 던지지 않았지만 윌슨이 놀라서 잠시 체이스를 바라보다 하우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어째서 67마일 남짓 날아오며 하고 또 했던 생각이고 말들인데 한 마디도 꺼내기가 어렵기 그지 없었다. 망할, 윌슨은 대체 어떻게 자신에게 이런 저런 말들을 했던걸까.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내 필라델피아로 날아오며 받아온 바람들과 풍경, 사람들, 모든 것들이 울렁거릴듯이 하우스의 안에서 뒤섞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그걸 꺼내놓는 건 그에게 무척이나 낯선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체이스가 슬쩍 윌슨의 팔을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나중에 따로 말씀하시죠."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체이스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윌슨을 당기는 힘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 윌슨이 어떤 행동을 하건간에 당장 하우스와 만나는 게 체이스에게는 더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하우스에게도 이 순간은 중요했다. 언제 어떻게라도 가석방 제한을 어긴 게 들켜서 지금이라도 당장 경관들이 자신을 잡으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시죠, 윌슨 박사님." 뜸을 들이다 못한 체이스가 바로 윌슨을 낚아채듯 이끌었다. 윌슨은 자신의 가방에서 호텔 열쇠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필요하면 제가 조치하죠. 박사님 숙소에 머물게 할 필요도 없어요." 체이스가 그렇게 말하며 윌슨을 그대로 끌고 가려 하자, 하우스가 입을 열었다.


"...제임스, 자네가 필요해."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하는 결정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윌슨이 체이스의 손을 뿌리치고 하우스에게 다가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넘칠만큼 충분했다. 적어도 그가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윌슨에게 온 것이고, 적어도 지난 번 그를 지독하게 내친 것과 반대로 그와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윌슨의 마음은 열리고도 남았다. 윌슨은 천천히 하우스에게 다가갔다. 하우스는 쓰러지듯 지팡이를 놓치고 윌슨을 끌어안았다. 프린스턴 플레인스보로가 위치한 뉴저지에서 이 먼 필라델피아까지 단숨에 날아온 그의 숨냄새와, 바람 향기, 그가 잠시 머문 주유소의 기름 냄새들이 윌슨의 코를 찔러댔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윌슨에게 왔다. 그 먼 길과 고통과 짜증을 넘어서 기어코 그에게 다가왔다. 그 사실이 윌슨의 마음을 벅차게 만들었다. 학회장 한 가운데에서 두 남자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란 다소 생경했지만 윌슨은 그런 사실을 신경쓰지 않았다.


윌슨의 머리칼과 그의 향기가 자신의 숨으로 들어오자, 하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상기되는 기분을 느꼈다. 애초에 윌슨을 안아볼 일이 있기야 하겠냐만 이토록 윌슨의 향을 가까이 맡아본 일이 있었던가? 그것은 설렘을 담고 있지만 분명 안정감을 주고 있었고, 포근함과 익숙함을 던지고 있었다. 오래도록 잊고 미뤄왔던, 윌슨과의 대화란 것이 이토록 보잘 것 없는 잘은 말들 사이에서도 그에게 쥐어주는 충만함은 놀라울 정도였다. 하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윌슨의 체취를 가득 느끼며 그를 끌어안았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이만큼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이라면 너무나 많아서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 모습 그대로 윌슨을 끌어안고 싶었다.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주변이 다시금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체이스는 자신의 핸드폰에 온 연락을 보고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현관에서부터 경찰을 대동한 무리가 그들이 있는 학회장 로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우스가 그 무리를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무리는 점점 더 모습을 분명히 했다. 연방 보안관과 가석방 담당자,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포어맨이었다. 포어맨이 대동하고 온 현지 경찰들 중 두 명의 경찰이 다가와 하우스를 결박했다. 윌슨은 자연스레 하우스에게서 멀어졌고, 이내 체이스가 그 뒤로 다가와 윌슨을 잡아 자신쪽으로 이끌었다. 아까의 일로 충격을 받아 윌슨을 붙잡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포어맨의 연락을 받은 그의 입장으로서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결박된 채로 하우스가 내뱉듯 말했다.


"가석방 제한 범위를 넘은 데다 경보 장치까지 제거한 부분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겠습니다." 연방 보안관이 그를 향해 말하였다. 하우스는 한숨을 쉬어가며 포어맨을 바라보곤 말했다. "병원 직원 관리는 원장의 책임도 있지 않던가?"


"이게 끝이 아닙니다, 박사님." 포어맨의 대답은 예상 외였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더 경직되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베벌리 씨 말입니다.” 포어맨의 말에 하우스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체이스 또한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이내 불길한 예감이 그들을 휘감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포어맨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박사님의 담당 환자가 사망했습니다. 진단학과 인원들은 모두 이사진에 회부됐습니다. 송치되기 전에 박사님을 향한 청문회도 있을 예정입니다.” 하우스의 눈동자만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옆의 윌슨은 그보다도 더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포어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포어맨의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병원의 진단학과 과장 직급을 박탈합니다. 대리 권한은 닥터 로버트 체이스에게 일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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