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짐이 생각보다 적네요." 체이스는 트렁크에 짐을 실으며 말하였다. "며칠 안 되니까." 윌슨이 대답했지만 체이스는 트렁크를 닫을 때 까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차에 앉아 시동을 걸면서 그는 뒤늦게 대답했다.
"더 필요해질지도 모르잖아요."
가을, 메타세콰이어가 노을빛으로 물든 도로를 지나고 모퉁이 술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윌슨을 곁눈질하며, 체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담했다. 아마 어제의 일들은 그의 마음에서 쉽게 떨쳐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계속해서 되뇌어보았다. 그럼에도 그런 그의 슬픔이 저변에서, 근처에서 소리로, 향기로, 모습으로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체이스는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어느 것보다 윌슨의 그의 옆에 있다. 물론 모퉁이 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그를 태우고 집에 데려다 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 기껏해야 요근래 두 달 남짓한 시간임에도 - 이렇게 밝은 오전에 빛나는 거리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은 무척이나 생경했다. 윌슨은 이런 광경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는 하루로 치자면 오전이고 빛깔로 치자면 따뜻하고 밝은 색이었으며 표정으로 치자면 웃음과 미소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 반대편의 것들이 궁금하지 않느냐고 하면 짖궃은 마음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런 그가 가장 어두운 새벽에 헐레벌떡 밖을 나서게 만들고 눈물이나 고통, 쳇바퀴처럼 반복되어 넌더리나는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슬픔을 절절하게 느끼기만 하게 만드는 인간은 그에게 결코 필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체이스는 그에게, 그가 좋아하며 그와 어울려 마지 않는 것들을 줄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본래 떼어내는 게 어려운 법이다. 잠깐 손에 붙였던 스티커도 떼내려 드면 달라붙어 통증이 느껴진다. 하물며 사람일까. 체이스는 되도록 크고 넓게 이해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가 윌슨을 향해 느끼는 서운함이 크고 깊을수록, 그만큼 그가 윌슨을 사랑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했으므로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더 길을 내어주고 윌슨을 보채보려는 마음도 가지게 되었다. 포어맨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당장 지금 이 순간, 윌슨과 단 둘이 동떨어진 목적지로 갈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사실이었다.
"...요즘은 우리 둘 다 정말 힘들었네요." '우리'라고, 부러 체이스가 말하였다. 이미 모퉁이 술집은 한참 지나와 고속도로를 타고 있는데도 별 말 없는 그에게 슬쩍 던져보았다. 윌슨이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 윌슨은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그러다 대뜸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는 그냥, 하우스 박사님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더군." 왠지 모르게 체념하는 듯한 말투로 윌슨이 말해왔다. 분명 슬픔을 담은 말인데도 체이스는 어째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윌슨의 체념은 그에게는 기회와 같았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체이스는 부러 물어보았다. 윌슨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윌슨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윌슨의 마음을 더욱 제대로 듣고 싶어서였다.
"하우스 박사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더군. 애덤스가 찾아간 뒤에 나도 잠시 찾아갔었어." 윌슨이 덤덤하게 말하려 애쓰는 것이, 체이스에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당신 같이 속이 빤한 사람을 어떻게 이끌어야할지 모르겠다고, 체이스는 속으로 깊이 고민했다. 그 떨리는 모습이 마음에 정점으로 찍혀 주변이 아무리 흩날려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있는대로 던져버리면 오히려 다음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고민해야 하는 건 늘 상대인 체이스의 몫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쓴 웃음을 흘렸다. "...그러셨군요." 체이스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 윌슨의 시선을 즐기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다. 그는 그 시간을 조금 더 길게 늘리고 싶어졌다. 그는 늘 윌슨을 기다리기만 했지 윌슨이 자신을 기다려준 적은 손에 꼽았었다. "실은 걱정했었어요. 어제 연락도 없으시고, 전화도 안 받으셔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전에도 그토록 풀이 죽었던 주제에, 윌슨은 그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아마 그 마법같은 날 저녁에 그의 이마에 입맞춤했던 사건이 그토록 강한 주술을 가진 모양이었다. 체이스는 그 때 보았다. 자신이 윌슨의 안쪽으로 좀 더 내디딜 공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조금 더 그에게 너그러워지고 싶어졌다. 어차피 둘은 따로 동떨어져 먼 필라델피아의 숙소로 향하고 있고,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든 다른 모습을 가져볼 수 있을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그거 아세요, 박사님?" 체이스가 선뜻 웃으며 윌슨을 불렀고, 윌슨은 풀죽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 박사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그리고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41.
'...시간은 누구든 기다려주지 않아요.'
하우스가 눈을 번쩍 떴을 때에는 이미 응급실이었다. 캐머론은 그의 기척을 느끼고 바로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캐머론의 말에도 하우스는 잠시 눈을 뜬 채 멍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다리 통증이..."
"일단은 저희가 응급 처치했어요. 지금은 수액을 맞고 계시고요." 캐머론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늘상 있어왔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는 하우스의 반응에, 그녀의 기분은 한층 더 씁쓸해졌다.
"...윌슨이 날 데려왔나?"
"또 윌슨 박사님 이야기를 하시네요..." 캐머론이 옆의 집기들을 정리하며 말하였다. "아쉽게도 아니에요. 닥터 타웁이 발견했고, 전화를 걸어왔어요. 듣기로는 닥터박과 애덤스, 그리고 닥터 타웁이 3교대로 돌아가며 박사님 댁에 찾아갔었다는군요. 열쇠공까지 부를 생각을 한건 닥터 타웁이었고요."
"...그렇군." 왠지 모를 허전함에 하우스는 곧바로 고개를 떨궜다. "실망한 눈치네요." 캐머론이 자리를 나가며 말하였다. "...그럴 리가." 하우스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텅 비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캐머론이 정리하던 것을 거두고 그의 옆으로 간이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괜찮으세요?"
"뭐가?"
"어떤 말인지 아시잖아요." 캐머론은 하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숨이나 붙어서 살아있느냐고 물으면 괜찮은 게 맞다네.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어느 정도는 맞는 거 같군. 아니면 내 삶에서 봉착한 거대한 문제가 얼마나 제대로 나를 망가뜨리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는 충분히 괜찮아 보이지 않은가?"
"괜찮지 않잖아요."
"괜찮지 않은 거야 늘 괜찮지 않았단 말일세."
"평소랑 똑같이 괜찮지 않은 거 맞나요?" 캐머론의 말에 하우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캐머론이 말을 이어 나갔다.
"애덤스에게 들었어요. 윌슨 박사님과 일이 있으셨다면서요."
"결국 그렇게 조롱새처럼 날아가 금새 불어버렸군. 둘만의 상담시간 같은 건 없었던 거야."
"...결정짓지 않으면 늘 똑같을 거에요."
"오히려 똑같지 않으니까 문제인거지."
"...윌슨 박사님의 꽃구경이 끝나지 않을까봐서요?"
하우스는 캐머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변하지 않는 게 변하는 건 정말 기분 더럽더군."
"박사님이 원해서 변한 게 아니니까요. 그게 불쾌하신 거죠." 캐머론은 손에 든 것들을 정리하며 말하였다. "박사님이 원하는 방향이라도 있으신 게 아닐까요? 아니면...시간이 너무 촉박하다고 느껴서 그런걸까요?"
"자네 언제부터인가 수수께끼처럼 말한단 말이야. 그거 너무 재수없는데."
캐머론은 짜증 대신에 웃어보였다. 그녀의 넉살에 놀란 건 오히려 하우스쪽이었다. "수액 다 맞으시면 다시 복귀하셔야 해요. 생각 같아선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박사님 상태를 보아하니 무조건 쉰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실 것 같지도 않아보여서요. 그래도 제가 말씀드린 건 기억하세요. 시간은 누구든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캐머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자리를 나서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하우스는 생각하며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응급실 안에서도 하우스가 바라보는 하얀 천장은 무척이나 말끔했다. 물론 그 주변 시야에 들어오는 몇몇 조명이나 설치물들이 신경쓰였지만 당장에 그 하얀 천장은 하우스 본인이 생각하지도 않던 것들을 조금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대체 며칠이 지난 지도 알 수 없던 지난 날. 한밤중에 찾아온 윌슨이 울먹이며 했던 말들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얄궃게도 그 시점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하우스는 차마 일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그 '더러운 페이지'를 기어코 열어버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형용할 수 없을만큼 간지러운 그 꿈 속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에 압도당한 채 그저 울먹이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대뜸 자신의 눈가를 만져보았다. 눈물자국 같은 게 남았을까. 그런 생각에 순간 스쳐지나가는 것은 그의 현관 앞, 멋대로 놓아둔 포앤포 음식봉투 옆에 몇 방울 떨어져 있던 윌슨의 눈물.
우스운 일이다. 어떤 걸 빌미로 생각하더라도 그 끝은 늘 그렇듯이 윌슨이 된다. 자신의 마음을 죽여도 보고 그 이름을 담은 이에게 맥주병을 던져도 보고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되는 건 모두 해봤지만 돌아오는 자리는 늘 그 자리. 절망과 한숨과 고통, 짜증과 분노, 10년 간의 지독한 관계를 넘어선 그 끝에서, 하우스는 하얀 천정 너머 자신의 감정 끝에 자리한 그 더러운 페이지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는 그 페이지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넘겨붙은 더럽고 치사하고 부끄러운 감정...북받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겉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지만 이내 하우스의 마음 속에 자리한 그 더러운 페이지가 그의 손에 잡혀 이리저리 찢겨나갔다. 페이지들은 그의 마음 속을 부유하며 눈처럼 흩날렸다. 차라리 할 거라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펼치지 못할 거라면 누구에게도 펼치지 않기를 바랐었다. 사랑할 거라면 자신 말고는 누구라도 -
하우스는 눈처럼 흩날리는 페이지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윌슨을 사랑하는 자신이 있다. 윌슨을 사랑하는 데에 거리낌 없는 자신. 그간 자신이 윌슨의 마음을 있는대로 밀어내며 웅켜왔던 것과 반대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윌슨에 대한 그의 마음이 저변에 흩어진다. 그는 알고 있다. 윌슨은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도, 윌슨을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내 두려움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낯선 수줍음과,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과 그 모두로부터 그저 도망치고 싶다고 여기는 비열한 마음이 그 페이지에 끈덕지게 붙어 모든 것들을 저 멀리 밀어넣은 채 마음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 윌슨이 그의 마음을 건드리고 윌슨이 그의 마음 속에 들어오려 할수록, 하우스는 윌슨을 밀어왔었다. 우습게도 그게 그가 표현하는 마음의 방식이었다. 윌슨이 보니와의 데이트를 선언한 그 날, 하우스는 윌슨을 시켜 음식을 사오게 한 뒤 잠들어 버렸고, 윌슨이 보니와 결혼한 날에는 아무 연락도 없이 홀로 몬스터 트럭을 보러 가기도 하였다. 윌슨이 앰버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았던 그 날 밤에는 돌연 윌슨을 불러놓고는 부러 콜걸을 세 명이나 부른 뒤 진탕 놀다가 그를 마중나오기도 했다. 이 고약하고 유치한 짓거리 뒤에는 그만큼 윌슨을 향한 유치한 소유욕과 비틀어진 감정들이 미친듯이 엉켜서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방법이 아니라면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왜 제대로 거절하는 방법은 생각하지 않으시는거죠? 왜 꼭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거에요?'
...거절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시금 미친 듯이 흔들리는 심장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건 설렘과는 달랐다. 그 두근거림은 이내 미친듯이 요동치더니 더욱 안으로, 깊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저변에 도착한 것은 마치 불에 달군 쇠구슬처럼 그의 마음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녹여가며 계속해서 심연으로 떨어졌다. 마음에 멍울지는 것들이 마치 아래로 난 동굴에 피어난 불꽃들처럼 그의 마음을 슬픔에 요동치게 만들었다. 하나 하나 멍울이 되어 그의 가슴에 난 상처 안에서 살을 에일 듯이 흔들리며 울어댔다. 자신의 마음 속 소리가 두려워 하우스는 눈을 감았다. 시야를 막았음에도 이미 그걸 막을 수는 없었다. 안타까움...아니, 그것은 안타까움이 아니다. 윌슨을 향한 감정은 이미 그것을 넘을 정도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짙어져서 자신 스스로가 입술을 대어 맛을 보기에도 어려울 만큼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이내 그것은 대양이 되어 그의 온 몸을 덮쳐왔고, 그는 이내 견디지 못하여 그 안에서 흩어지고 다시 기워졌다. 그것은 자기 자신.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렇게 거대한 자신을 인정하고,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이상한 일이다. 이렇게나 커다란 감정에 그는 굴복할 수 밖에는 없다. 10년 동안 묵혀온 것들을 성토하듯, 10년 동안 묵혀온 윌슨을 향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미칠듯이 그의 몸을 헤집고 찢고 다시 붙여놓기를 반복했다. 그 쇠구슬과도 같은 '진심'이 대양 아래 해저 바닥에 닿는 순간,
그가 다시 눈을 떴다.
42.
"...5성급 호텔이라니." 윌슨이 당황한 얼굴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도어맨에게 안내를 받은 체이스가 윌슨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가 출장을 잘 가지 않는 거 아시잖아요." 아마 출장 한 번에 들이는 비용이 그만큼 늘어났다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사실 윌슨은 믿지 않는 듯 했다. 이번 출장에서 이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체이스가 출장에 오르기 때문이었다. 체이스는 분명 포어맨과 이런 것까지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회 측에서 추가 접수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이 호텔로 예약을 진행했고, 이는 체이스에게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체이스는 윌슨과 함께 예약된 21층으로 향했다.
211호와 212호, 짐을 옮겨 준 벨보이에게 간단히 팁을 건네 준 윌슨은 이내 습관처럼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어 보았다. 5성 호텔에 걸맞게 페어마운트 공원이 한 눈에 펼쳐져 있었다. 센트럴 파크의 2.5배에 달하는 크기...윌슨은 이 말을 기억하는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 말은 하우스와 자주 보러 가던 몬스터 트럭의 진행자가 곧잘 하던 말이었다. '페어마운트 공원처럼 거대한 녀석인데, 옆에 있는 녀석보다 적어도 2.5배 크기에 달하지요' 너스레를 떨던 진행자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윌슨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음이 원하는대로 행동해도 결국 얻어지는 것도, 변하는 것도 없었다. 체이스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진단학과 분리가 결국 어떻게 진행될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이미 정해진 것 처럼 보였다. 페어마운트 공원에 난 여러 갈래의 길들도 결국은 사람들이 가기 편하려고 내어놓은 것 처럼...이미 그도 알고 있다. 하우스가 만들어 둔 게임의 룰을 한참 벗어난 지금.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노라고 스스로에게 조금씩 인정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게 자신의 마음을 접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윌슨은 자신의 감정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어요?" 바로 그의 뒤에서 들려오는 체이스의 말에, 윌슨은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쳐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호실로 돌아와 창문으로 다가간 탓에 윌슨은 현관을 채 닫지 않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생각보다 여유 있는 모습의 체이스가 보였다. 페어마운트 공원에 흐드러진 가을 낙엽만큼 햇빛을 받은 체이스는 한 병원의 의사라기보다는 차라리 모델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체이스는 변했다. 윌슨은 은연중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마법같은 날 밤에 그가 느꼈던 감정의 일부는 체이스의 수염과, 저는 다리와, 막힌 혈류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것은 속으로 삼킨 독마냥 꺼낼 수 없는 것이었다. 체이스가 그 사실을 스스로 밀어내려는 것 처럼, 윌슨도 그 사실을 밀어내려 했다. 분명 지금 그가 느끼는 이 낯선 감정은 체이스의 변한 모습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다. 윌슨은 저도 모르게 전신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만난 사람처럼 구시네요." 체이스의 표정이 다소 슬퍼졌다. 윌슨은 왠지 모르게 낯선 기분이 느껴져 다시금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미안한데 지금은 이야기하기 어려워서, 닥터 체이스. 괜찮다면 잠시 후에 보도록 할까?"
아마 기분 탓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체이스 자신이 면도를 하고 지팡이를 짚지 않은 후부터 차가워 보이는 윌슨의 반응에 체이스는 더욱 더 조급해지고 있었다. 윌슨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구조가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서 그의 행동이나 사고도 점점 더 이성을 잃어갔다. 아니, 어떻게든...체이스는 그렇게 믿고 이행하고 기다리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물론, 그는 알고 있다. 늘 그렇듯 그는 지나칠만큼 많이 기다리고, 지나칠만큼 많이 바라왔고, 지나칠만큼 윌슨을 사랑했으니까. 그 마음이 체이스를 자신도 모르게 윌슨의 뒤로 다가가 그를 두 팔로 안게 만들었다. 품 속에 윌슨이 당황한 건 윌슨의 몸에서, 머리칼에서, 향기에서 모두 느껴졌다. 그럼에도 체이스는 두 팔을 거둘 수가 없었다. 절절한 슬픔, 그리고 기다려온 순간...체이스는 이미 이전에 윌슨에게 자신을 드러냈을 때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고 있다. 어쩌면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이미 체이스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도 모른다. 윌슨은 당황해서 움직이며 뭔가 말하려 했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체이스의 말에 윌슨의 표정이 변하였다. 정확히 어떤 걸 알고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는데도 윌슨은 체이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그와 나눴던 스킨쉽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음에도 순간 윌슨은 체이스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어졌다. 체이스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윌슨을 더욱 끌어안았다. 떨리는 그의 가슴이 윌슨의 등에 그대로 전해졌다. 여유 넘치던 모델과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상처 입고, 슬픔에 가득 찬 청년이 자신의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그를 보고 싶은대로 본 것도 윌슨 자신이었다. 이렇게 있어봤자 다른 사람들과 자신이 다를 게 무엇일까. 결국 얼마 전 체이스를 받아들여보고자 애쓰던 것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실책을 찾아보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윌슨은 견딜 수 없어졌다. 다른 어느 순간도 아닌, 체이스가 자기 자신처럼 변해버리는 순간을.
체이스의 목이 멘 음성이 들려왔다. "박사님은, 참...어쩔 수 없게 만드네요." 그는 이제 반은 체념한 것 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학회 행사가 있는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어요. 근데 그게 쉽지 않아요, 박사님은... 매번 저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시네요." 체이스는 말하며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간에 체이스는 늘 그의 곁에 있었다. 윌슨이 스스로 잠시 거리를 두자고 했을 때 그 시간을 기다린 것도, 그의 마음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 병원의 누구에게 퍼뜨리거나 말하기는 커녕 우두커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체이스였다. 윌슨은 당황한 기색을 거두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해. 체이스."
그렇게 적극적인 사과의 제스쳐는 아니었지만, 체이스는 여울지는 마음을 숨기려 애를 쓰고 있었다. 윌슨은 더 이상 잡힌 몸을 비틀어 나오려 하지 않는다. 체이스의 손이 가둔 그대로, 자신에게 기대어 서 있는 것 만으로 체이스는 조금 더 안심하고 싶었다. 적어도 그래야 했다. 오늘은 겨우 출장에서 숙소로 돌아온 첫날이고, 그 자신이 포어맨에게 했던 말대로 '제대로 시작'하려면 고통스럽지만 조금은 더 기다려야 했으니까. 그런 체이스의 손 안에 갇혀서 윌슨은 아까 전 바라본 페어마운트 공원에 산들거리는 정경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정경 속에서 점처럼 움직이는 차들,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과 많은 것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 여기서 1시간 남짓 거리에는 여전히, 하우스가 있다. 이제껏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이 먼 곳에 와서까지도 윌슨은 그 사람이 그리워졌다. 그 사람의 체취, 모습, 기억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과 같이 보러 갔던 몬스터 트럭의 진행자가 대뜸 던졌던 대사에 있는 공원을 본 것 뿐인데도. 그럼에도 그의 어깨를 압박하고 그의 앞에 감겨 있는 청년의 팔이 지닌 온기와 열정, 뒤에서 끼쳐오는 체이스의 숨결과 셔츠에서 풍기는 향기는 어딘지 모르게 갈수록 윌슨에게 휘감겨 오는 것만 같은 기분을 던져주었다. 속에서 숨킨 독이 스멀스멀 기어나와 윌슨의 세세한 부분까지 끼쳐오고 있었다. 지난 밤의 마법같은 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페어마운트 공원이 하우스를 불러일으킨 것 처럼, 그날 밤의 체이스도 어김없이 하우스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는 소름끼치는 사실이, 정경을 바라보는 윌슨의 마음을 붙잡은 채 놓아주질 않았다. 뜨거우면서도 덧없는 시간이 둘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