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체이스가 병원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근무 시간이 다 지날 무렵이었다. 진단학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애덤스의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야?"
"다시 출근이라도 한 건가요? 아니면 무슨 일로 온 거죠?" 애덤스가 반문했다. 체이스는 순간에 애덤스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적의를 알아보았다. 어떤 일인지 모르겠지만 애덤스는 뭔가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이 체이스에게 적의를 보이는 단계까지 퍼져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대화를 더 이끌어가야 좋을까, 아니면 좀 더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좋을까...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윌슨을 찾아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체이스는 일단 분위기를 좀 더 풀고 싶었다.
"내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건가? 데이트라면 선약이 있어서..."
"하우스 박사님에게 들었어요."
애덤스의 대답에 장난스레 올라갔던 체이스의 눈썹이 순간 슬쩍 내려왔다. 애덤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체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죠? 진단학과 분리는 목적인 건가요, 아니면 수단인 건가요?"
"...박사님이 어떤 말을 했을지 나는 제대로 모르지만...한 쪽 이야기만 들어보고 속단하는 건 좋지 않잖아."
체이스의 말에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애덤스는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박사님은 혼란스러워하고 계세요...진단학과 분리보다, 윌슨 박사님 때문에요...두 분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여기 있는 누구보다 더 잘 알텐데...굳이 그렇게까지 관계를 망가뜨려야 했나요?"
그 말에 체이스는 도리어 표정이 풀어졌다. 보기 드문 얼굴에 애덤스는 잠시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렇게 만든 건 내가 아냐, 애덤스. 그건 두 사람의 일이지. 그래, 맞아. 나는 윌슨 박사님을 지켜봐오면서 많은 감정이 생겨났고 그걸 가지고 하우스 박사님에게도 솔직히 털어놓았지. 진단학과 분리? 수단이라기에는 너무 크잖아. 그렇지 않아?"
"그래서 더 윌슨 박사님은 두려웠던 거겠죠." 애덤스는 이제 체이스를 노려보았다. "자칫하면 하우스 박사님과 잘못될지도 모르니까...당신은 하우스 박사님만 이용한 게 아니에요, 결국 윌슨 박사님까지 이용한거죠. 진단학과 분리도...마찬가지 아니에요? 이 게임에서 이기는 사람은 로버트 체이스, 당신 뿐이잖아요."
"지난 10년 넘게 져왔으면 한 번 쯤은 이길 수도 있어야지." 체이스가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유머러스하진 않았지만 새삼 내비치는 차가운 모습에 애덤스는 자칫하면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자네가 봐온 건 아마 그 정도겠지. 수감실에서, 입원실에서 머리를 굴려가며 진단을 내리는 하우스 박사님 말이야. 내가 봐온 건 그 이전의 모습부터 수만가지의 것들이었어. 왜 하우스 박사님은 지금이라도 윌슨 박사님과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는 걸까? 그렇게 고통에 차서 자네에게까지 난리를 부리고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않았나?"
애덤스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대답하기 시작했다. "...두려웠으니까요."
체이스의 눈빛이 조금씩 변했다.
"윌슨 박사님 뿐 아니라 하우스 박사님도 마찬가지에요...결국 모든 게 틀어지는 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에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망가트렸는데도, 더 손을 대면 댈수록 잘못되어버리니까요."
"...그게 '잘못된 관계'라는 거야." 체이스가 대답했다. "어떤 사람들은 며칠만 같이 있어도 지겹고 고통스러우면 관계를 끊어버려. 벌써 몇 년이나 함께 했는데도 둘은 행복해질 수가 없어. 그게 과연 멀쩡한 관계인걸까?"
체이스는 애덤스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수평이 되었다. 체이스의 표정은 어느새 간절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사랑에 절절히 목을 멘 청년의 모습 그 자체였다. 수염기 없는 말끔한 얼굴선에 떨리는 눈빛이 그를 더 애처로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애덤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 오만하시네요." 애덤스의 말에 체이스가 살짝 흔들렸다. "두 분의 관계가 어떤지를 결정하는 건 당사자인 두분이지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어떤 감정으로 둘 사이에 끼여들건, 그게 결과가 될 수는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오만하죠? 하우스 박사님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것 때문에 자신감이 솟아올랐나요?" 거친 어휘에도 체이스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진단학과를 분리하게 되면 당연히 이전 인력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진단학과를 체계적으로 나누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새로 들어올 인재보다 기존에 남아있던 인재들이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도록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애덤스는 분명 중요한 인재였다. 이 점 때문에 애덤스와 감정적인 걸 풀고 싶었지만, 체이스는 이 기점에서 해결책이 없을 수도 있다는 소기의 결론에 도달했다.
"두 분의 관계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와 윌슨 박사님의 관계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체이스는 가볍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야기를 이어간다고 한들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방금 전 애덤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힐끗 바라본 진단실 너머 암병동 과장 사무실의 불이 꺼져 있는 게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윌슨과 어느 시점에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체이스가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지팡이 없이 걸어서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건 그 누구도 아닌 윌슨이었기 때문이었다. 애덤스가 말하는 것들이 조금씩 성가시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만일 진단학과 분리가 된다고 해도, 저는 당신과 일할 생각은 없어요." 애덤스의 단호한 말에, 체이스는 이제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서며 말하였다. "그것 참 유감이야, 닥터 애덤스. 앞으로 만나게 될 환자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체이스는 동요하지 않으려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당장은 애덤스와의 충돌보다, 윌슨이 지금 이 시간 어디에 있는지가 그에게 더 중요한 문제였다.
35.
숨쉬지 않았다.
마치 그 콧구멍 입구에서 들어가지 못해 공기가 계속 되밀려 나오는 기분마저 들었다. 감각은 희미해졌고 새내기 인턴시절처럼 가슴이 부러져라 CPR을 하려는 열정도 없었다. 대부분 존스홉킨스에서의 인턴시절처럼 -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은 유치한 메디컬 드라마에서처럼 소생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들은 갈비뼈가 한 두개 정도 부러져서 묻히거나 불태워지는 것이다.
"...시간은 누구든 기다려주지 않아요."
저 멀리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도 구분 가질 않았다. 지팡이를 짚은 곳부터 한기가 서서히 퍼져나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수없이 가혹한 실험들, 수많은 투약들...인간은 실험쥐가 아니다' 한 기자가 내뱉은 철없던 말도 이런 시점에서는 제기능을 하곤 했다. 진단이란 그런 것이었다. 의학만큼 이 세상에 무식한 것이 없었다. 상처가 있으면, 그리고 그 상처에 뭐라도 묻어 있다면 거칠게라도 뜯어내고 약을 퍼붓는다. 답은 없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더없이 나약했다. 한 번에 치료할 수 있는 병이란 없다. 그 가벼운 감기마저도 매년 바뀌지 않던가. 철을 다르게 해서 다가오는 녀석들의 몸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음에도 몇번이나 다른 약을 투여해야 하는 현실이다. 손등에 꽃혀 있던 링거를 빼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우스는 생각했다. 어떤 상처도 - 자신이 맡고 있던 진단마저도 - 다 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시대가 만들고 목숨이 만들어낸 고귀함. 그것은 결국 신분귀천이나 직업귀천에 얽매일 얇은 천막에 불과했던 것인가. 사람을 배우기 위해 걸리는 시간에 비해 그 보답은 충분치 못했다. 죽은 숨을 들이키며 '인간은 죽는다'는 절대명제를 이렇게 되새기고 있는 와중에도 그렇게 느껴갔다.
늘어진 몸이 순간적으로 의자에 주저앉혀졌다. 지팡이는 손에서 흐느적거렸고, 손잡이를 바투 잡을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 흠씬 두들겨 팬 것 처럼 온 몸이 너절했다. 그보다도 더욱 죽음에 익숙한 똘마니들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외부인들이 쉽게 말하는, '실험쥐'가 죽기라도 한 날이면 그는 쉽게 그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능력상에 금이라도 갔을까봐 그런 거죠?' 그 말이 생각나자 피식 -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번 그 얼굴에서는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청년의, 마치 의사만 된다면 모든 사람을 다 살릴 수만 있을 것 같던 철없던 시절 말이다.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그 묘한 사명감에 불타올랐던, 뭣모르던 시절. 이유를 알 수 없다. 병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감염이나 다른 병이 나타내는 징후가 흥미로워 수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때문에 새로운 증상은 더없이 흥미로운 셈이고. 하지만 그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전제되었을 때의 일이지, 이런 실패를 두고는 결코 즐거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마 옆을 긁적이던 손도 다시금 휘청이며 떨어져 나갔다. 마치 햇살이 떠오르는 새벽녘의 햇살 아래에 두 눈을 드러내 놓은 듯 밝게 빛나는 무언가의 광채를 느꼈다. 순간 눈이 타들어갈 정도로 뜨거웠다가 점점 더 가라앉아서는 따스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눈을 떴을 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윌슨이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묘한 기분과 감각이 손끝에서 발끝까지 오가는 기분이었다. 뭔지 모를 짜릿함이 몸 속속들이 가득 질주했다. 관절은 천년이나 묵은 자연 속의 계곡처럼 시원해졌고, 팔은 대양위에 누워 있는 해변가와도 같아졌다. 두 눈은 달과 태양이 되었다. 어디선가 묘한 기타음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그 안에 가사도 담겼다. 전주가 끝나고 나온 음성은 자세히 들어보니 윌슨의 것..
얼굴을 감싸는 손을 뿌리칠 힘은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희석된 사이의 알코올처럼 다가오는 차갑고 시원한 입맞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건 여지껏 내보이질 못하고 입안에서 감정으로만 맴돌던, 잊혀져 버린 유년기의 수많은 노래들. 음성이며 노래며 스며드는 사이 기타음만이 선명하게 드럼의 휠을 보채며 귓가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피아노의 선율도, 바이올린의 선들도, 여가수의 음색도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윌슨의 얼굴로 회귀되고 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끝은 언제나 그 남자였다. 소년시절, 하나로 존재했던. 그것은 어머니였다가, 유명한 TV의 여배우였다가...결국엔 누군가가 마지막 바통을 이어갔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린...추억속의, 여인. 가슴 가득 깊이 안고 있던 흰 몸뚱이의 여인도 결국 윌슨의 얼굴이 되었다. 후퇴하듯 사라졌던 얼굴은 윌슨으로 다시 돌아왔다. 푸근한 웃음 아래에서 알 수 없이 퇴폐적인 기색이 되살아났다. 푸른 열대잎 사이로 스치는 붉은 난소화를 보는 기분처럼 붉고 아름답고, 키도 크고 잎도 화려한...그러나 더없이 순수한 자연에 서식하는 그 식물의 퇴폐와 상쾌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짙어오는 기타음. 리듬을 타고는 있지만 가사는 어물어물거렸다. 속삭이는 그 음색은 마치 신음하는 것도, 환희하는 것도...웃고 있는 것도 같아서 이해할 수 없으나 마치 술이나 쾌주처럼 싱그럽기 그지 없는 것이다.
'시간은 누구든 기다려주지 않아요.'
웃는 얼굴, 코, 입...모두 한 장의 사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으리라. 지친 육신이 대양이나 바다처럼 눕혀지는 순간. 그리고 그렇게 크게 늘려지는 순간 하우스는 더 없는 평안을 맛보았다. 그것은 어떤 '위험'이 자리했기에 더욱 안성마춤이었다. 윌슨의 웃음은 그런 구석이 있었다. 아래 저변에 숨어있는 야릇한 감각이 가끔 입술을 타고 넘어오는 느낌. 그것은 붉고 푸른 감각으로 뒤에서 깃털을 세우듯 피어났다.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 것 처럼 느껴졌다. 다채로운 색상 안에 자리잡고 있는 윌슨의 모습은 그다지 어색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는 그 안의 주인이 된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하우스를 이끌었다. 입맞춤은 이제 더 이상 꺼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달콤하고 상큼하고, 또 어린시절의 자신처럼 더 없이 원하게 되는 사탕과도 같은 무엇.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모든 감각이 손과 발로 윌슨으로 되살아났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처럼. 누구든 사랑할 수 있을 것 처럼...바닥을 걷는 것도 윌슨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마치 청정수처럼 윌슨의 손은 시원했다. 동시에 너무도 부드러웠다. 이끌때마다 미끄러지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로.
환상속으로, 윌슨은 그를 이끌었다. 드러나는 어깨, 휘는 기타음과 동시에 잦아드는 드럼소리. 그리고 몰두하는 자신. 앞의 사람을 사랑하는 데 주저 없는 자신. 그리고 바라보는 눈길은 더 없이 부드럽고, 평안하고 한 편으로 상당히 늘어져 있었다. 부드러운 감각은 멈추지 않았다. 그 이유도 알 수 없이 모든 걸 놓은 감각이었다. 순간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푸른 트리였고, 또 어느 순간은 녹음 같던 청년시절의 졸업날이었다. 어느 날은 학교를 빼먹고 집에 가는 오후의 늘어진 나날이었다. 어느 적은 해변의 여름. 사랑하는 여자아이에게 고백했던 유난히도 밝았던 날. 큰 성과를 거두던 푸른 비가 내리던 밤. 행복한 순간들이 스쳐갔다. 마치 그 장소에 있었던 것 처럼 세심하게도 지나갔다. 윌슨의 눈동자에 입술을 대었을 때, 그의 추억은 전염되듯 행복하게 날아왔다. 웃음소리는 상쾌했고, 문득 말이 없는 윌슨의 모습에서도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스치는 옷깃 소리. 환희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수도 없는, 상큼한 향의 바람들...언뜻 보일 것만 같은 푸르고 하얀 지붕과 집들...위에서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은 태양....또 어디선가 시원한 꿈을 전해줄 달까지. 뭐든 하나도 놓치지 않은 채 그 속에 존재하는 기분. 나태한 기타음 사이로 춤추듯 스며들어가는 드럼의 가벼운 지저귐 소리....
36.
윌슨이 포앤포에서 행오버 세트 2를 사서 하우스의 집으로 가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다 떨어진 뒤였다. 꽤 오랜만의 방문에도 포앤포의 린다는 윌슨을 금새 알아보았고, 그 고집불통으로 보이는 의사 양반은 대체 뭘 하고 지내느냐는 말에 윌슨은 쓰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그 어느때보다 더 많이 생각했으면서 정작 린다가 하우스의 이야기를 꺼내가며 음식을 준비해주자, 윌슨은 새삼 하우스에 대해 더 많이 떠올리며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양손 가득 포장 음식을 들고 손도 부족해서 겨드랑이에 서류가방을 낀 채 낑낑대며 하우스의 집이 있는 베이커가까지 오는데도 윌슨은 힘든 것 하나 느끼지 못했다. 어느덧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하우스의 집이 보였다. 가로등 불 아래에서도 윌슨은 용케 하우스의 부엌 쪽 창가에 희미한 빛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마치 오랜 여행 뒤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윌슨은 그저 하우스의 집에 가고만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그 하우스의 집이 그리웠다. 하우스의 집 앞 제멋대로 난 풀도, 그의 현관 앞에 작게 들어와 있는 전등도, 그의 문패인 베이커가 221B도...모든 것이 그저 하우스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난 며칠간은 그게 마치 죄악처럼 느껴져 불안했지만, 지금의 윌슨은 그런 것들을 좀 더 내려놓았다.
녹색 현관문 앞에 서서, 잠시 윌슨은 고민했다. 늘 그렇듯 하우스를 찾아오는 편에 익숙했지만, 사실 이 장소에 오면 지난 번의 사건을 완전히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다. 호통을 치고 그의 마음을 내밀어 모두 찢어내며 소리치던 하우스의 모습. 그게 윌슨이 기억하는 하우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병원 어디에서든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곤 했지만 그건 모두의 앞에서 내비치는 사무적인 태도일 뿐, 윌슨이 암병동 과장이 아닌 제임스 윌슨으로서 그레고리 하우스를 마주치는 일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죽음과도 같은 그 끝. 윌슨은 지금 그 끝을 풀어내려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땀이 나서 손을 닦아내렸다. 린다가 정성스레 덤까지 넣어 포장해준 음식들이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하우스가 번뜩, 눈을 떴다. 상황 파악을 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발치에 널부러진 맥주병을 보고 애덤스가 요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것을 기억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었다. 지금 당장 그의 집 앞에서 현관 초인종을 누르고 특유의 다섯 박자로 현관문을 두들겨대는 남자가 제임스 윌슨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지금의 그레고리 하우스에게는 무척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의 텁텁하고 거친 입술의 표면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스쳐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언뜻 윌슨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것만 같은 두 손도 이상했다. 그가 꾼 꿈은 너무나 생생하면서 동시에 포근해서, 분명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님에도 한동안 하우스를 붙잡아두고는 놓아주질 않았다. 윌슨이. 그 윌슨이...윌슨이 지금...? 하우스는 몸을 움직여 일어나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죽은척하고 누워 있어야 할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사이, 문 너머에서 오랜만에 들려오는 맑은 중년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우스, 거기 있어요...?"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이름을 부르는 것 뿐인데도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 당장 윌슨은 하우스가 집에 있는지도, 하우스가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게 분명하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굴면 그만이고 지난 번처럼 윌슨에게 멋대로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소리를...아니, 그 생각을 하게 되니 갑자기 꿈 속에서 그토록 싱그럽게 웃어 보이던 윌슨의 얼굴이 어지럽게 겹쳐지며 고통이 밀려왔다. 심장을 조이는 것만 같은, 뭉근하고 미묘한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처음 맛보는 것이 아님에도 지금 당장은 속단하고 싶지 않아진다.
"하우스..." 그 음성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듣기를 바라고 말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어째서 지금 이토록 그의 음성들이 날카롭게 심장에 박히는 걸까.
"...나를...역겹게 생각하는 거, 알아요." 거의 울먹일듯한 소리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뛰쳐나가서 토닥여주고, 안아주고 싶어지는 목소리다. 순간 하우스의 품에 다가선 윌슨의 머리칼이 그의 콧등을 간지럽히던 것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망할 꿈 같으니...대체 뭘 가지고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낸 거지? 그래서...그래서...
그래서, 지금 당장 뛰쳐나갈 수 있겠어? 윌슨에게 뭐 할 말이 있다고?
차갑고 냉철하게 베어들어온 자신의 말들이 그를 다시 묶어둔다. 아니, 그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우스는 마음 한 켠에 숨겨져 있는 페이지를 찢을 듯이 펼쳐내기 시작한다. 어떤 것은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버리고, 포기하게 된다.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시도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은 완전해진다. 떠나가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게 된다. 수없이 많은 기회를 져버린 윌슨처럼. 그는 두려웠다. 윌슨이. 윌슨의 마음이. 윌슨의 마음에 답하는 것이. 윌슨에게...
"...애덤스에게 들었어요. 저와 얼굴 보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윌슨이 조금씩 코막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안쓰러운 마음이 저변에서부터 올라오는데, 어째서인지 하우스는 일어서지를 못한다. 온 몸이 들썩이고 눈물이 날 것 처럼 몸이 저리는데도...그나마 들 수 있는 오른쪽 손을 들어본다. 윌슨의 집에 찾아갔다가 도망쳐 나오면서 난 생채기에 휘감긴 붕대가 망가져있다. 무서운 일이다. 뒤도 없이 달려오고 보니 처음 시작한 곳으로 돌아갈 길조차 알 수 없어져버려서,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그는 늘 기다리기만 하였다. 기다리면 윌슨은 어떻게든 길을 찾아왔으니까.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물어보고 싶어도 당사자는 지금도 자신의 집 앞 현관에서, 거의 울먹이듯 하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이제는 체이스의 그 말들이 하우스를 붙잡고 있다. 윌슨을 위한 선택을 해볼 수 없겠냐는 말. 윌슨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그 말...그딴 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윌슨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겠냐는 생각 말이다. 체이스는 자신보다 해준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체이스는 윌슨에게 말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아무리 힘들어도 밥이라도 챙겨먹어요. 포앤포 린다가 박사님 소식을 궁금해 하네요...바보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요, 지금...그럼 갈게요." 끄트머리에는 급하게 도망치듯 말하고 윌슨이 떠나갔다. 윌슨의 발자국 소리가 쓸쓸하게 들려왔다. 하우스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우스는 이제는 거의 찢을 듯이 자신의 마음 속 페이지를 들춰내고 있었다. 윌슨에게 힐난하듯 내뱉었던 그 말들은 진짜가 맞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겨울 정도로 오래 전부터, 윌슨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한 페이지가 찢어진다. 그의 마음 속 주변 사방으로 찢어진 조각들이 흩어지며 부유한다. 그 사이 사이로 비추어 보이는 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과, 부담스러울 정도의 기쁨과, 징그러울 정도의 수줍음과...
아니, 그것은...
하우스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 윌슨을 마주칠 자신이 없다. 윌슨이 짜증나서, 윌슨이 싫어져서, 윌슨이 미워서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모두가 맞았다. 하우스는 윌슨을 마주치는 게 두려울 만큼, 윌슨에 대한 어떤 감정이 미칠듯이 폭주하고 있었다. 하우스가 내내 이름 붙이기도 꺼려하던 그 감정이, 지금 당장 하우스를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힘들게 만들고 있다. 어떻게 풀어나갈지, 어떻게 이야기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마치 몹시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 것 처럼, 하우스는 당장에 윌슨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 채로, 하우스는 윌슨이 떠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그 자리에서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감정인데도 당황스러울만큼 낯설어서, 하우스는 어떤 말들도,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당장은 이 감정들을 차분히 만드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몇 분이나 지났을까. 하우스가 뒤늦게 현관을 열었을 때에는, 이미 윌슨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식지 말라고 옹기종기 모아둔 포장봉투 옆에 몇 방울 떨어져 있는 눈물자욱이 지나치게 신경쓰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체이스 때문에, 상황 때문에, 아무튼 그 어떤 것 때문에라도 윌슨을 만날 수 없게 되었노라고. 하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자신을 가로막고 있다. 그것은 '진실'이었고, 자기 자신 그 자체였다. 너무도 멀리 떨어져 나온 외딴길에서, 희미한 빛을 벗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저 기다리기만 하던 입장이었던 주제에. 하우스는 텅 빈 눈동자로 그 음식들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들어서는 집으로 들어갔다. 베이커가 221B의 볼품 없는 담장 너머로, 한 남자의 눈동자가 그 모습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