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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10화

Another - 10

by 김뇨롱

31.


"잠깐, 상황 정리를 좀 해볼게요." 애덤스가 마시던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미 그녀는 하우스로부터 드문드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지 벌써 3시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몇 번이나 타웁과 닥터박으로부터 호출이 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환자의 크로이츠펠트-야콥병으로 인해 생기는 부수적인 질환을 늦추기 위해 어떤 게 필요했고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대충 하우스의 부엌에서 되는대로 커피를 한 잔 타서 들이키던 그녀였으나 하우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맥주를 들이키지 않고는 못 베기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특히나 체이스가 하우스에게 대뜸 윌슨의 이야기를 꺼내며 이야기를 걸어온 일과, 가장 막바지에 하우스가 윌슨의 집을 찾아갔을 때 목격한 바를 전해 들었을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닥터 체이스가 오래 전부터 윌슨 박사님에게 마음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박사님에게 이야기를 했어요...그리고, 박사님은 윌슨 박사님이 찾아왔을 때 모진 말들을 해대면서 윌슨 박사님을 내쳤고요. 그리고...그래요, 불과 어제 그런 장면을 보셨단 말이죠." 어떻게든 정리를 해보려 했지만 자신이 말하는데도 하나도 정리가 안 되는 낭패감을 느끼며 애덤스가 말하였다. 그러나 하우스의 반응은 단순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아마 하우스는 자신이 느끼는 전부나 목격한 전부를 애덤스에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건 윌슨 박사님에게나 하는 일이니까. 애덤스도 그 정도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어...사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애덤스는 자신 쪽에서 먼저 솔직해지기로 했다. "처음에는 진단학과 분리 건이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체이스가 윌슨 박사님과 유독 친근해지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그것도 결국 진단학과 분리로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건 막상 듣고보니 다르네요."


"망할, 체이스에게는 그게 수단에 불과할테지. 진단학과 분리로 나를 떨어트려놓고 윌슨에게 수작이라도 부려보는 걸 테니까.."


"네, 그래요...맞네요." 애덤스는 대답하며 다시금 맥주를 들어 한 모금 삼켰다. "근데...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뭔가?"


"박사님이 고심하시는 게 진단학과 분리라면, 그 건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지금은 분명히 윌슨 박사님이 신경쓰이고 있다는 건데...왜 윌슨 박사님과 이야기하지 않는 거죠?"


"...뭐? 그게, 대체...자네 제정신인가? 그게 된다고?" 하우스는 과도할 만큼 소리치며 말했다. 반 쯤은 우스꽝스럽게 과장하려던 행동이었지만 전혀 그가 의도한대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어스름이 내려오는 공간에 차단한 등불 속에서 하우스의 얼굴만 크게 보일만큼 과도한 반응이었다. 애덤스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지금 이 모든 게, 그거에요. 윌슨 박사님과의 관계 때문이라고요. 진단학과 분리가 아니라." 애덤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 때 그렇게 내치셨다면 신경쓰지 않으시던가, 아니면 다시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에요."


"자네 생각에는 그런 게 될 거 같나? 학예회에서 다툰 유치원생들이 선생님 앞에서 사과하고 포옹이라도 하듯이?"


"적어도 윌슨 박사님은 가능하실걸요." 애덤스는 맥주병을 든 채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박사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유치원생이 되어줄 거에요."


그 말에 하우스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앞으로 한껏 내밀던 고개를 뒤로 젖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파의 끼덕이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쓸쓸한 바람소리처럼 들려왔다. 애덤스는 왜 그런지 물어보려다 이내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이미 포기했군요, 그렇죠? 다시 되돌릴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는 거네요."


"나였다면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을거야. 나였다면 이미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는 물론 뉴저지라도 벗어나서 아예 다른 병원으로 이직을 했을걸세. 그만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말들을 해댔으니까."


"...윌슨 박사님은 박사님이 아니잖아요."


"...그거 참 재미있군." 하우스는 애덤스를 노려보다 한 마디 내뱉었다. 차단한 등불은 그가 들고 있는 맥주병만 덩그러니 비추고 있다. 애덤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윌슨 박사님에게는 그 정도가 아니었나보죠." 애덤스는 맥주를 들이키며 말했다. "아마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고, 내키면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는 물론 뉴저지를 벗어나 아예 다른 병원에 이직하고 싶었을테지만...그 마음을 이길 만큼 박사님을 - "


하우스가 병을 집어던져 깨트린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하우스가 던진 버드와이저 병은 그대로 날아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애덤스 뒤편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애덤스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맥주병을 놓치며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날아온 파편에 그녀의 오른 뺨이 얇게 베였다. 그녀가 놓친 맥주병이 바닥의 더러운 러그에 부딛혀 데굴데굴 구르며 몇 남지도 않은 맥주거품을 흘려대고 있었다. 병을 던진 인간 치고는 하우스는 무서울 만큼 침착했다. "오냐 오냐 받아주니 여기까지 치고 들어오는군. 할 말은 다 끝났나?"


그러나 침착한 건 하우스 뿐만이 아니었다. 애덤스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녀의 머리에서 반짝이가 떨어지듯 파편들이 떨어져나갔다. 애덤스는 하우스를 노려보았다. "아뇨. 생각보다 정말 실망스러운 분이네요. 윌슨 박사님에게 아까울만큼."


"내가 바란 게 아니야. 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내가 생각한 모양도 아니야!" 하우스는 급기야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애덤스는 그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게 전부에요? 겨우 그게 이유에요? 왜 남이 박사님 마음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애덤스는 이제 어이가 없어 웃기까지 했다. 뺨에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우스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망할,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내가 윌슨의 마음을 받아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왜 제대로 거절하는 방법은 생각하지 않으시는거죠? 왜 꼭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거에요? 그게 더 이상해요. 그거 아세요, 박사님? 우리들, 저와 타웁과 닥터박까지...우리 모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이미 박사님은 윌슨 박사님과 친근했고 너무 오래된 사이였으니까...근데, 지금 제가 보고 있는 박사님은 확실히 이상하네요. 남들과 소통하는 걸 싫어하실 망정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분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요, 아마 그 상대가 '윌슨 박사님'이라서 그런 거겠죠. 아닌가요?" 애덤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얼굴을 쓸어넘기고는 질렸다는 듯 일어서서 현관을 향해 움직였다. "...박사님만 모르고 모두가 알고 있어요. 단지 받아들일 준비만 되지 않았던 거 뿐이에요...박사님이 저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도 박사님이 훌륭한 의사라고 생각했어요...이제 보니 도망만 치는 비겁자네요. 그래요, 참견하는 망할 브루주아라 죄송했어요." 애덤스는 하우스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바로 현관을 닫고는 나가버렸다. 하우스는 일순 화가 치밀어올라 짚고 있던 지팡이까지 현관을 향해 집어던졌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지팡이가 튕겨 떨어지는 소리와 집기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뿐, 단지 적막 뿐이었다. 망할...하우스는 작게 욕지기를 내뱉고는 아까 그녀의 모습과, 윌슨의 모습을 떠올렸다. 방금 전 있었던 긴박한 상황과 별개로 이 일 또한 다른 사람들과 윌슨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계기처럼 느껴져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째서, 왜...굳이 그렇게까지 윌슨을 끌어들여 고민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윌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이토록 짜증이 솟구치는 걸까.


'하우스만 모르고 모두가 알고 있는 일...' 하우스는 그 자리에 고꾸라지듯 널부러졌다. 밀려오는 취기와 던져버린 지팡이 때문에 뭘 더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대로 널부러지자 러그에 굴러다니는 것들이 그의 온몸에 눌려 신음했다. 발치에는 아까 애덤스가 놀라 떨어트린 맥주에서 흘러나온 맥주까지 있어서 찝찝하기 그지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애덤스가 제멋대로 지껄이며 하우스를 극도의 분노 상태로 끌어올린 그 말들...그 말들의 끝에는 늘 수간호사들의 수근거림과 주변 동료 의사들이 농담 삼아 건네는 것들이 들어 있다. 하우스만 모르고 모두가 아는 그 일...그래, 하우스와 윌슨의 지독한 친분의 끝에 견디는 윌슨이 있고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하우스가 있다는 말...그게 대체 어때서, 그게 뭐가 그렇게 새롭고 대단하다고...늘 그 시점에서 하우스는 시시함에 모든 걸 던져버리곤 했었다. 하지만...


정말 시시해서 그랬던 걸까? 정말로 그 모든 것들이 별 것도 아니라서 그랬던 건가...?


'그렇다'고 말하면 될 것을. 애매모호하고 어중간한 그 구석에서 자신은 굳이 윌슨의 뻗어나가는 관심과 뒤틀리는 사랑까지 받아내가며 이 시점까지 관계를 끌고와버렸다. 그래, 체이스. 망할 로버트 체이스가 지금 이런 난리까지 피워가며 둘의 사이를 이렇게 벌려놓지만 않았어도 이 우스꽝스러운 행진곡은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우정'이라는 것은...얼토당토 않은 우정이란 것은 그런 모양을 가지는 법이다. 시간이 지나서 각자가 나이가 들고 힘도 없어지면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노친네들처럼 수그러들고 상해버리는 게 어쩔 수 없는 수순인 것이다. 하우스가 바란 건 거기까지였다. 윌슨의 그 오묘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 하우스의 무관심과 시간 속에 침잠하고 가라앉고 급기야는 가루가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가 되어 가는 것...그리고 그 가루의 표면을 스치는 희미한 희망만을 조금씩 던져주며, 그 관계의 끝을 하릴 없는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그 와중에, 애덤스가 갑자기 가장 큰 오류를 들고 와버렸다.


'정중한 거절'과 '대화' 그리고 '이해'를 통해서 하우스는 얼마든지 윌슨과 다른 형태의 '우정'을 가질 수 있었을 터다. 무서운 일이다. 단순하고 변치 않는 관계에 현란한 말들과 고통, 슬픔과 시간이 쳐들어온다. 그 시간을 메워나가는 것은 곧 두 사람의 '고통'이다. 이해될 수 있을거라는 믿음과 뒤틀리고 말 것이라는 절망감, 그리고 그 사이를 시간이 흐르며 견뎌내고 이어지고 재회하고 나서야 그러한 새로운 형태의 '우정'이 만들어진다. 물론, 이는 오랜 시간을 고되게 견딘 만큼 견고하며 더욱 '편안'한 관계를 보장한다. 그러나 하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성마른 성격으로 윌슨에게 그런 정중하고 자세한 거절을 건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레고리 하우스 자신도 그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 그는 '손해'를 보는 성격이 아니며 필요하다면 어떤 섬세한 작업이라도 착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어째서 윌슨의 '마음'을 그토록 방치했던 건가? 결국 그렇게 방치한 '사랑'이 지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진 데다 빌어먹을 로버트 체이스까지 끌어들여서 더할나위 없는 '손해'를 그에게 끼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도 그런 '거절'을 정중하게 해낼 자신이 있는가?


날카롭게 벼려온 칼과도 같은 자신의 질문에, 하우스는 온갖 생각을 정지시켜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괴사하는 다리가 더 썩어들어가 흔적도 없이 다리를 잘라내버렸으면 좋겠다고, 게다가 지금 자신의 발치를 적시고 있는 맥주가 미친듯이 흘러넘쳐서 바닥을 모두 적시고 썩게 만들어 자신을 있는 그대로 6피트 아래까지 파묻어버리고 자신은 이 자리에서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열어보지 않았던 그 페이지를 들추고, 반쯤을 열 수 있었을 때 드러난 것은 끝없는 무저갱과 깊은 절망, 그리고 앞페이지에서 제멋대로 선언해버린 골치 아픈 수식어들과 심한 상처를 쑤시는 말들,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 처럼 드러나는 고통과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옅은 빛깔들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는 뜨지 않을 것 처럼, 하우스는 두 눈을 감았다.



32.


"간단한 소독인데 나한테 부탁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이럴거면 윌슨 박사님에게..."


"바쁘시잖아요." 체이스가 일갈했다. 타웁은 그 말에 상처받았다는 제스쳐를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는 지금 크로이츠펠트-야콥 병 환자 하나 진단한다고 이 난리란 말이지. 말해줘서 고맙네. 근데 그거 알아? 여기 지금 과장님이 연차시거든? 게다가 그 과장님 때문에 애덤스도 아침부터 연락이 없거든?" 그는 소독하던 솜을 정리하면서 말을 이었다. "닥터박은?"


"...닥터박에게 요청하고싶지는 않아서요. 얼마 전에 어색했던 것도 있고..."


"닥터박이 자네에게 호감이라도 있어보인다는 건가? 이상하지는 않지만."


"...불편하니까 그렇죠. 그냥 그 뿐이에요." 체이스는 들추었던 웃옷을 정리했다. "그래...자네같은 미남이야 그런 불편함은 견디기 힘들겠지." 타웁은 진단서에 싸인을 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체이스는 슬쩍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많이 호전되었네. 어차피 그런 거야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지팡이도 안 짚고 다녀도 될 거 같은데..." 타웁이 체이스 옆에 놓여 있는 지팡이를 보았다. "맞아요. 내일부터는 편하게 다니려고요."


"정리하는 김에 수염도 좀 깎는 게 어때?" 타웁이 고갯짓하며 말하였다. "좀 소름돋아서. 그 꼴로 과장님 의자에 앉으면 어때 보이는지 알지?" 타웁의 말에 체이스가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어느덧 짧게 깎은 머리도 슬금슬금 자라나고 있었다. 상태가 호전되어 감에 따라 체이스 자신도 조금 더 정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포어맨과 이야기했던 진단학과 분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그 자신도 좀 더 말끔한 모습으로 윌슨에게 자신의 첫 출발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가 처음 며칠간 출근하지 않다가 오랜만에 윌슨을 만났을 때 그가 보였던 반응이 거슬렸다. 윌슨이 체이스를 바라보는 눈빛은 분명 전과 다르다. 전보다 더 길고, 깊다. 그러나 그 눈빛에 비치는 모습은 이전과 다른 모습의 체이스이다. 마음 속 막연한 곳에서, 체이스는 자신에게 묻고 있다. 지금의 이 모습들을 성급히 지워나가도 괜찮은걸까?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접어 정리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덥수룩한 머리야 나중에 샵에 가서 해결하고, 일단은 수염부터...체이스는 반신반의하는 감정으로 거품을 만들어 얼굴에 묻혀나갔다. 이번만큼 면도에 자신이 없었던 적은 없다. 미묘한 불안감이 거울 속 그의 눈빛에 스쳐갔다. 물론, 그는 믿고 싶다. 그리고 그 믿고 싶다는 마음이 이내 물에 면도칼을 헹구고, 구렛나루부터 천천히 거품과 함께 수염을 걷어가는 것으로 이어졌다. 체이스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하우스가 될 수 없다. 아니, 하우스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 윌슨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윌슨이 봐주는 것도 분명 자신일 것이다. 그는 윌슨을 속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좀 더 침착하게 면도를 진행해 나갔다. 이내 세수를 하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봤을 때, 그 앞에는 늘 윌슨에게 술약속을 요청했으나 곧잘 거절당했던, 어딘지 모르게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는 모습의 체이스가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달라져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분명한 목적과, 동기와 무엇보다 '희망'이 있다. 그는 접은 지팡이를 수납장에 넣고서는 마음을 다잡은 듯 화장실을 나섰다.



33.


"...바쁘세요?" 캐머론의 말에 윌슨이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방금 출근한 듯 유니폼 위에 가벼운 자켓을 걸친 캐머론이 서 있었다. "아니...무슨 일이야?" 윌슨이 반색하자 캐머론이 가볍게 대답했다. "커피 한 잔 사주실래요?"


병원 바깥의 카페테리아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은 커피를 받아 들고는 잠시 최근 일에 대한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캐머론은 야간 당직에 4중 추돌로 연달아 실려온 5명의 환자를 맡았던 이야기를 하며 온통 정신이 없었다고 고통을 토로했지만 진단학과 재직 당시에도 볼 수 없었던 활기찬 그녀의 모습에, 윌슨은 내심 그녀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캐머론이 그 다음에 꺼낸 이야기는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하우스 박사님이 사고로 어제 응급실에 오신 건 알고 계신가요?" 캐머론의 말에 윌슨의 안색이 금새 어두워졌다. "모르실 리가 없겠죠...다만 하우스 박사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 같아서요."


"...말하자면 길어서." 윌슨이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다 이야기 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캐머론이 대답했다. "...박사님이 너무 힘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아까는 놀랐거든요. 전 당연히 박사님이 하우스 박사님을 보러 가신 줄 알았어요."


"지금은 바로 얼굴을 보기가 힘든 상태라..." 윌슨은 거의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대신 진단학과의 닥터 애덤스에게 부탁해서 하우스의 상태를 봐달라고 했지. 적어도 나보다는 불편해하지 않을 거 같아서."


"...왜 애덤스였나요?" 캐머론의 질문은 다소 생경했다. "그야...타웁은 너무 바쁘고, 닥터박도 너무 지쳐보이고..."


"체이스는..."


"체이스는, 얼마 전에 박사님과 크게 다퉜었으니까." 윌슨은 그렇게 말했지만 체이스만 따로 거론하는 캐머론의 말에 뭔가 가시가 있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캐머론은 거기서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보다 더 놀라운 말을 꺼내왔다. "닥터 애덤스는 가장 매력적인 '여자'잖아요? 박사님은 은연중에 애덤스를 하우스 박사님에게 보내신 거군요."


"그럴 의도까지는..."


"...괜찮아요." 캐머론은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그게 박사님이 하우스 박사님에게 비춰지고 싶은 모습이라도...이상하지 않아요." 윌슨은 그 말에 놀라서 캐머론을 바라보았다. 캐머론은 생각보다 놀라울 정도로 침착해보였다.


"그건..."


"제가 너무 많이 추측해서 나갔다면 죄송해요." 캐머론은 정중히 말했다. 아니, 라고 윌슨이 짧게 끊었다. 가볍게 시작한 티타임이 생각보다 곤란한 구석으로 향하고 있어서 윌슨은 잠시 진땀을 뺐다. 하지만 캐머론과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박사님도 아시잖아요. 애덤스는 박사님이 아니에요."


"그래도 닥터 애덤스가 하우스 박사님에게는 더 편안할테니까..."


"애덤스는 결코 박사님만큼 하우스 박사님을 돌봐줄 수는 없을거에요." 캐머론이 재차 말했다. "물론,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적어도 지금 어떤 상태인지라도 알면, 조금이라도 박사님이 나아질 수 있게 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 주제 넘은 소리일지도 모르지만...이제까지 제가 봤을 때, 하우스 박사님을 가장 잘 챙겨주셨던 건 박사님이니까요."


"불편해하더라도 괜찮은건지 모르겠는데.." 윌슨은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 정도는 '조금 멋대로'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캐머론이 커피를 들이키며 말했다. "부딪혀서 부서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적어도 지금 하우스 박사님이 바라는 건 윌슨 박사님과의 대화 같아 보여서요. 어제 사고로 저를 찾아오셨을 때, 무척 쓸쓸해보이셨거든요..."


"...항상 그런 식이지." 윌슨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커피 향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윌슨의 핸드폰이 울렸다. 윌슨은 양해를 구하고 바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닥터 애덤스였다.


[박사님, 정말 죄송한데 저는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하우스 박사님은, 그냥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요, 한심한 애처럼 변해버렸다구요.]


"...지팡이는 제대로 있고? 밥은 먹은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제가 박사님 이야기를 하니까 벽에 맥주병을 던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 말에 흠칫 놀랐지만, 윌슨은 반대로 다짐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닥터 애덤스...다친 데는 없고?"


[뺨에 긁힌 상처가 생기긴 했는데...일단 저는 가서 좀 씻어야 할 거 같네요...]


"정말 미안해, 애덤스...그리고 연락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오히려 지금 이 상태에서 하우스 박사님을 만나러 가달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네요...]


"...그건 알아서 할게. 그럼..." 윌슨은 전화를 끊었다. 맞은 편에 있던 캐머론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어, 그럼..." 윌슨은 캐머론과 눈이 마주쳤다. 캐머론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지만 수긍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윌슨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의 가슴이 과할 정도로 빠르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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