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윌슨이 모퉁이 집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밤이 되어가는 10시 30분이었다. 사실 갑자기 체이스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늘 하던대로, 그는 자신의 사무실 안에서 잠시 눈물을 훔치고 있었을 것이다. 체이스가 느꼈을지는 모르지만 윌슨은 조금씩 하우스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와 마주치는 모든 순간들에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서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의 앞에서 갑자기 내보여지고 여기저기 잘려서 흩어졌음에도 - 어째서인지 그는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새삼 윌슨 자신도 그 점에 놀라고 있었다. 이렇게 다 보여버리고 무시당하고 뭉개져버리면 끝이 날 줄 알았는데...버리기도 어려울 만큼 붙여놓은 마음이라, 이제는 윌슨이 그런 마음을 떼어놓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버렸다. 하우스의 술을 가져다주거나 자신의 샌드위치를 하우스에게 빼앗기거나 자신의 일정은 하나도 존중받지 못한 채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아침 늦게 출근해서 포어맨에게 한 소리를 듣는 일이 없음에도, 체이스가 내린 커피를 마시고, 체이스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그가 대접하는 요리를 먹게 되거나 오직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체이스가 그와 함께 해주는데도...그는 하우스가 그리웠다. 물론,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하우스는 모를 리가 없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좋은 친구, 허물이란 허물은 모두 짊어지고 옆에서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친구. 친구가 없는 자의 친구. 그리고 마음이 조금 남았을 적에, 그 변방만 조금 내어줘도 괜찮은 친구. 언제든지 어떻게든지 버려지고 없어질 수 있는 친구. 친구라기에도 어려운 친구. 그래도 괜찮았다. 그걸로 괜찮았다. 마음을 더 내밀 공간도 생각도 있었지만 그건 늘 하우스의 뒷걸음질에 멈췄다.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선택했다.
그는 '슬퍼하기로' 했다. 그 자신을 애도하기로.
그러니까 그 대신으로도 좋았다. 낡은 마음은 옆에 자리한 작은 의자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럼에도...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윌슨은 결코 체이스 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윌슨을 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우스에게 악감정이 있더라도 마음을 들키기 위해 차를 몰고 가자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윌슨 그 자신이었다. 지금의 자신을 추스려준 것도, 하우스에게 보일 수 없던 마음의 빈틈을 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아준 것도 체이스였다. 아직 그 마음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지만 체이스는 그런 것들을 상관 하지 않고 영원에 닿는 시간이라도 충분히 기다릴 수 있는 무서운 남자이다. 그가 오래도록 시간을 들여 환자를 진단하고 무식하게 익혀왔던 것과 마찬가지로...그의 야망과 욕망의 한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윌슨은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포어맨은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체이스가 신규 과장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실력자라고. 어쩌면 그런 그를 여전히 오래 전, 하우스의 똘마니 중 하나로 보고 있던 건 오히려 윌슨 자신은 아니었을까. 그는 조심스레 되짚었다.
스카치 한 모금을 들이키고 다음 잔을 시킬지 아니면 집으로 먼저 들어가버릴지 고민하던 중 체이스가 그의 옆에 자리하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부터인가 그가 풍기는 머스크향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윌슨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이 안심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이 술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체이스가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 준 일도 부지기수다.
"다행이네요. 세이프인가요?" 술집에 어울리지 않는 상쾌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윌슨은 빈 잔을 만지작거리다 물끄러미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약속했었죠. 나와 다시 이야기하는걸로."
이번에는 맞지 않고 잘 다녀왔어요.
마치 둘만의 소굴에서, 뭔가 큰 일을 해내고 온 것 마냥 그가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체이스는 빠르게 윌슨의 잔이 빈 것을 눈치 채고는 바텐더에게 같은 것으로 한 잔 더 주문함과 동시에 자신이 마실 주스도 주문했다. 윌슨은 이제 그를 바라보며 턱을 괴고 있었다.
"앞에 놓인 잔은 하나인데, 생각보다 많이 풀어지셨네요." 체이스가 윌슨을 따라 턱을 괴고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아니면 술이 오랜만인가요? 저와 이야기하지 않을 때에는 마시지 않았고요?"
"오늘따라 말이 많네..." 윌슨이 흘리듯 말했다. 체이스의 눈이 한층 더 그윽해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풀어진 건 오히려 체이스쪽이었다. 그는 새삼 윌슨을 이렇게 가까이 본 일이 얼마나 더 있었던가 생각했다. 오늘 오후에 사무실에서 볼 때에도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던 둘이다. 그나마 가까웠던 건 공교롭게도 하우스가 윌슨에게 윽박지를 때, 그를 부축하면서였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딴에는 가장 의미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체이스는 그 시간을 생각하며 윌슨의 모습을 훑었다. 언제나의 같은 베이지 톤의 셔츠와 포인트를 준 네이비 타이. 그 몸을 감싸고 있는 댄디 브라운 컬러의 양장. 체이스는 그 모든 의복의 구석 구석 형태를 이루는 윌슨의 몸을 떠올렸다. 아니, 더 진행하면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거 같았다. 체이스는 대뜸 자신 앞에 놓인 주스 대신 윌슨의 잔을 가져다 한 모금 들이켰다. 윌슨이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은 거야?"
"아, 그래....이 맛을 잊고 있었네. 이제 딱지도 앉앗으니 꼭 술을 마시지 말라는 법은 없겠죠." 체이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바텐더는 눈치껏 둘에게 한 잔씩 만들어 내놓았다. 윌슨은 그 잔을 잡고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하우스는...괜찮은 거야?"
"뭐..." 체이스는 부러 시선을 피했다. 지금 자신이 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과 질문에 대한 답을 분리하려면 그게 가장 확실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미 이전에 포어맨이 이야기했고 저도 그에 조금 더 얹어서 이야기한 정도이니까...그리고..." 체이스는 조금씩 물을 흐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상태는 좋지 않더군요. 사실 이제 저도 좀 화가 나는 거 같아요." 부러 정확한 말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체이스가 윌슨의 표정을 살폈다. 윌슨은 미동도 없이 체이스를 응시한 채 걱정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상대가 다른 상대를 향해 갖는 감정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며 태연하게 말을 흘릴 수 있는 자신이 이제 체이스 스스로도 무서울 지경이다. "박사님에게, 아직도 뭔가 많이 꼬여있는 거 같았어요. 물론...이건 진단학과 분리 건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더 화가 난다는 거죠. 아시다시피...그 동안 박사님이 어떻게 했는지 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윌슨은 말없이 잔을 어루만졌다.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잔 속에 무엇이 있는지만 살피듯 바라보고 있었다. 체이스가 자연스레 윌슨의 등을 어루만졌다. 위스키 향에 조금씩 어지럽다. "박사님이 걱정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요...하지만 그런 일은 없어요. 절대로요." 체이스는 조금 고개를 숙여 윌슨의 얼굴을 살폈다. 일단 곧바로 하우스를 찾아가자고 말할 것 같지는 않은 표정이다. "더 이야기할까요?"
"아니, 괜찮아." 윌슨이 바로 대답했다. "나는...나로서는..." 그리고 이내 참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체이스는 다시 등을 토닥였다. "제가 말 했었잖아요...하우스 박사님도, 박사님도 시간이 필요해요."
그 후의 시간이 있기는 할까. 윌슨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26.
하우스는 자신의 바이크에 시동을 걸면서,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도달한 뉴저지의 오랜 고가도로에서 보이는 전경에 잠시 한숨을 돌렸다. 분명 그의 의도는 자신의 집을 향해 달리는 것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지막 꺾어야 할 길에서 자꾸만 눈이 밟히는 것이었다. 하우스는 이게 망할 습관의 힘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는 - 그는 자꾸만 윌슨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꺾어야 할 길에서 꺾지 않고 그대로 죽 나아가면 - 빌어먹을 윌슨의 집이 나온다. 하지만 더 빌어먹을 기분은 바로 자신의 생각이었다. 그는 윌슨을 찾아가서 윌슨을 만나게 되는 것에 짜증이 난 게 아니었다. 그렇게 그가 찾아갔음에도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짜증이 났다. 막상 열어보려 페이지를 들어보니, 그 페이지는 뒷장과 심하게 붙어 있어서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한 번도 보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엉겨붙었는지, 뭐가 적혀있는지도 당연히 알 수가 없다. 윌슨을 본다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아니, 애초에 왜 윌슨을 보려 하는가? 하우스는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고 이럴 거라면 차라리 술잔이나 기울다가 적당히 타웁이나 끌어내서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 거라는 소기의 결론에 도달했다.
다시 헬멧을 쓰고 바이크에 올라타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술을 몇 갤런 들이부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짜증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불과 한 달 전. 그는 자신이 윌슨을 위해, 윌슨에게 사과를 받기 위해 그의 집 앞으로 향했던 것을 상기했다. 아니, 멍청한 일이야. 속으로 그렇게 되뇌였다. 이제 와서 집으로 간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그게 윌슨을 위한 일이야?
갑자기 마음 속에서,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하우스는 재빨리 그 생각을 없애려 노력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생각은 다른 생각의 끝에서 다시 튀어나오곤 했다. 배려, 친절이라는 토악질 나오는 말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넘겨붙은 페이지의 몫이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페이지의 주인은 하우스 자신도 아니었다. 전적으로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그 페이지의 저자라는 인간은 이제 그 책을 두고 영영 떠나가서 자신에게 다가오지도, 말을 걸어오지도 않는다. 그 대답 없는 자의 집을 찾아간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까? 뭐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
달라지기를 바라는 건가?
또 하나, 알 수 없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빌어먹을, 알 게 뭐야. 무시하려고 애를 쓸수록 그 생각이 더욱 더 커지기만 했다. 반복되는 질문에 넌더리치던 감정이 잠시 멈춰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달라지기 바란다고, 그게 달라질 수 있을까? 끝까지 이기적이군.
어떻게 생각해보면 잘 된 일이다. 하우스에게 있어서 윌슨은 짜증나는 고통 그 자체였으니까. 그걸 스스로 감내하고 참아내고 삼키고 있을 때에는 아마도 최고의 친구였지만, 그것을 풀어놓아 버리면 수습할 수도 없는 골칫덩이 그 자체였으니까. 이 상황까지 치달은 마당에 더 나은 방향 같은 거 기대해줄 수 있을까? 그건 전적으로 윌슨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는 사안이고 윌슨만이 알 수 있는 사안이다. 만일 그가 윌슨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결코 좋은 쪽으로 대답해줄 수 없을 거다. 이제까지 자신의 감정 끄트머리만 가지고 장난을 쳐댄 남자에게 다시 기회를 줄 수 있느냐고, 다시 생각할 수 있느냐고 말해봤자 그간의 설움과 고통으로 대답할 지언정 좋은 답을 할 리 만무하니까. 하지만 윌슨은 하우스가 아니다. 하우스도 그걸 믿고 있다. 현관에서 고통스럽게 그를 내치고 난 지금. 윌슨이 다시 전처럼 하우스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페이지는 힘겹게 조금씩 그 내부를 보여주고 있었다. 들여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좁은 틈으로, 하우스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윌슨을 위한다는 명분을 세우는 것도 낯설고, 자신의 의지로 윌슨을 보러 간다는 건 더더욱 인정하기가 싫었다.
윌슨의 집으로 바로 가볼까? 아니, 그건 너무 멍청하잖아. 윌슨이 있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아니, 윌슨이 없으면 더 나은 거 아냐? 윌슨이 보면 어쩌려고? 윌슨이 봐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 아냐. 아니 윌슨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아. 아니 윌슨을 안 보면 왜 윌슨의 집으로 가려는 거야? 여기저기서 다른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이야기하는 동안, 하우스는 미친듯이 달려댔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하나의 음성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냥, 윌슨을 만나야겠어.
망할 진단학과 분리건, 아니면 체이스와의 염문설이건 옷을 거꾸로 입고 온 일이건 뭐건 상관 없이 일단 윌슨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이미 너무나 쌓인 이야기가 많았다. 왜 이런 상황이 온 것인지, 망할 체이스는 얼마나 버릇이 없었으며 포어맨 또한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윌슨에게 낱낱이 이야기하고 술을 들이켰어야 했다.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윌슨이 자신에게 갖는 감정이 무엇인지, 윌슨을 위한 결정이 무엇인지 또한 어떤 게 이기적인 선택인건지 알 방법도 없고 알 도리도 없었다. 단지 멍청하게 질주하는 것만이 남았다. 지금 자신을 잠식하는 이 거대한 짐을 어떻게든 윌슨의 위에 던져놓고 싶었다. 그게 윌슨을 죽게 할지 어떻게 할지는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망할, 하지도 않던 짓을 하면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는 간만에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제멋대로 해서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윌슨을 본다는 게 기분이 좋은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하우스는 서둘러 길을 가로질렀다. 그 어떤 때보다 바이크가 빠르게 움직였다.
27.
체이스가 윌슨과 다섯 잔 째 마시기 시작했을 때, 새삼 윌슨은 체이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요근래 들어...특히나 오늘 오후부터 시작된 이상한 습관이었다. 체이스가 어떤 말을 하건 어떤 표정을 하건 체이스를 바라보게 된다. 그건 아마 그의 수염과 여러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올곧게 꺾는 그의 악센트만 아니라면 영락없는 하우스의 모습이었다. 술기운인지 분위기인지 몰라도 윌슨은 저변에서부터 뭔가가 점점 풀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힘들면 말해요, 언제라도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체이스의 말에도 바텐더는 별 말이 없었다. 그는 이미 체이스가 윌슨을 데려다주는 것을 하도 많이 봐서, 그는 이제 윌슨이 웬만한 고주망태 상태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윌슨은 잔을 만지작대다 말고 체이스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체이스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아무래도 집으로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 윌슨은 여기서 더 이야기를 꺼내기가 두려워졌다. 지난 며칠 동안, 하우스와 그 일이 있고 나서 가장 그를 괴롭혔던 건 다름이 아니라 하우스와 있었던 일이었다. 그에게 어떤 심한 소리를 들었던 것 보다도 그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숨겨왔던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찢겨내진 것 같아, 윌슨은 견딜 수 없어졌고, 그에 따라 체이스가 자신에게 갖는 감정이건 뭐건 돌볼 새도 없었다. 휴가를 내볼까도 생각했지만 오히려 시간이 비어있는 만큼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일이라도 이어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아까 전, 오후에 체이스가 자신의 방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윌슨은 혼란스러워졌다. 이렇게 금방 누군가에게, 그것도 자신이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마음이 기울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며칠 간의 극도의 외로움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전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수가 없었다. 뭔가, 변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깊고 갑작스러워서 윌슨 본인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체이스는 전처럼 기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윌슨이 차고 넘칠만큼 받아온 그 동안의 호의를 보자면 전적으로 그러했다. 그는 부러 스스로 일어나 발을 디뎠다. 체이스는 그를 부축하려고 뒤에서 그를 뒤따랐다. 윌슨은 빠르게 주인에게 계산을 부탁한 뒤, 체이스가 손을 댈 것 같은 타이밍이 없도록 서둘러 차로 향했다. 체이스는 그 모습을 보며 낭패라고 생각했다. 윌슨 앞에서 자신의 성미를 참아내느라 무심코 들이킨 위스키 때문에 자신도 윌슨의 차를 운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체이스는 그 낭패감을 떨쳐내고 싶었다. 그는 윌슨의 뒤에서 다가와 그를 붙잡고 말했다.
"술도 깰 겸...우리 걸어서 갈까요?"
일순에 윌슨은 다소 귀찮아 보였지만 체이스가 하는 말을 그냥 넘기지는 않았다. 차라는 공간에 단 둘이 있는 것 보다는 트인 공간에서 적당히 떨어져 길을 걷는 게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고, 윌슨은 곧 수긍했다. '모퉁이 술집에 있는 차는 제가 아침에 가져갈테니까.' 이걸로 구실을 하나 더 만든 체이스는 곧바로 윌슨의 옆에 나란히 서서 윌슨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체이스의 존재감이 전과 다르다는 걸 느끼면서 윌슨은 부쩍 말수가 줄었다. 체이스는 윌슨이 많이 취해서 그런 거려니 하고, 그가 혹여라도 발을 잘못 디디지 않을지를 살펴가며 걷고 있었다.
하우스가 윌슨의 자택에 도착한 시점은 그보다 멀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미 도착하기 전부터 저 멀리서 저택에 불이 들어와있지 않은 걸 보고는 윌슨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어째서인지 하우스는 그 자리에서 발을 빼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자신이 비슷한 공간에서 말보로 레드를 피워댔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그 때의 맛, 향과 함께 빠르게 빠져나갔던 윌슨의 차도 생각이 났다. 왠지 모르게 뒷맛이 씁쓸했다.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몰라도 하우스는 이번 만큼은 윌슨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좀처럼 자신이 마음 먹은대로 되는 것도 없는 마당에 하나라도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는 이상한 심통이 작용한 탓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몇 분 지났을까, 까맣게 꺼둔 오토바이와 자신을 무시한 채 저 멀리서 가로등을 벗삼아 걸어오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하우스는 잠시 이를 갈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제는 집에 가는 길 마저도 서로 의지를 해가면서 초등학교 등교하는 이웃소녀들마냥 지내는 건가? 욕지기까지 올라왔지만 하우스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얼마 전까지 둘에게 윽박지르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건 결코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체이스와 함께 하더라도 윌슨 혼자 집으로 돌아갈테니...하우스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금방 도착하네." 윌슨은 조금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밤바람이 서늘해서 위스키로 일어난 발열은 조금 식혀주었지만 평소보다 많이 걸은 것 같아 조금 숨이 차고 있었다. 체이스는 그런 윌슨에게 대답 대신 작게 웃어 보였다. 윌슨이 현관에 다다랐을 때에도 체이스는 쉽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윌슨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려 현관 열쇠를 찾다가 그만 열쇠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지친 기색을 보이며 허리를 숙여 열쇠를 집어든 윌슨에게 체이스가 달려든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갈 뻔한 것을 꾹 참고 충혈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윌슨은 현관 앞에서 체이스에게 가로막힌 채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어쩔 줄 모르고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위스키의 어지러운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체이스의 덥수룩한 수염과 지팡이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가 그토록 외면하고 모른 체하고 있었던 그의 갈증에 찬 눈동자 때문인지 몰라도 윌슨의 손짓은 체이스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곧이어 체이스는 윌슨을 밀어붙여 입맞춤을 마친 뒤 그를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체이스가 맨 먼저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이제는 지팡이도 없이 그저 윌슨에게 기댄 것처럼 그를 안고 있는 체이스가 윌슨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그렇게 말했다. 마치 어떤 죄라도 저지른 것 처럼, 체이스의 음성이 속수무책으로 떨리고 있었다. "박사님은 알고 있겠죠...맞아요, 저는 박사님에게 마음이 있어요. 어쩌면 지금 이것도 술김에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지난 며칠 간, 박사님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게 견딜 수 없이 힘들었어요." 체이스가 중얼거리는 음색이 하우스의 핏줄기를 하나 둘 터뜨리는 기분마저 자아냈다. 하우스는 이제 그 분위기에 압도당해 앞으로 나설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윌슨은 그저 체이스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말을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아니...대체..."
"다음 날부터 다시 모른 척 해도 상관 없어요. 지금은 이만큼만 해도 충분해요. 화가 나서 저에게 따지러 와주면 더 고맙겠지만." 체이스는 자신이 말해놓고 허탈하게 웃고는 윌슨을 다시 꼭 안았다. "나도 역시 어른은 못 되네요. 이렇게 멋대로 될 줄은 몰랐거든요." 체이스는 윌슨의 두 얼굴을 잡고 말했다. 그 와중에 체이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왔던 계획, 윌슨을 구슬리고, 그에게 이야기하고, 그의 말들을 받아주는 것 이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친구 이상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여러 가지 구실을 가지고 윌슨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결국 이렇게 힘들어진 자신에게 남은 거라곤 솔직함 뿐이었다. "닥터 체이스..." 윌슨은 그런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고 짜증도 일었지만 이렇게 체이스가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자신보다 훨씬 어린 체이스 앞에서 눈물을 보이거나 무너지는 건 늘 윌슨이었지,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갑자기 가슴 한 쪽이 무시하지 못할만큼 아려오는 게 느껴졌다.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건 체이스가 아니라 마치 또 다른 자신 같았다. 하우스에게 이용당할대로 이용당하다 버려져서 우는 자신 처럼, 체이스 또한 윌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의 곁을 지켰지만 돌아오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문득 윌슨의 마음 속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너라면 너를 구해주지 않을 거야?
윌슨은 그 말에 바로 응수했다. 그는 체이스를 안아주었고, 그의 얼굴을 잡아 이마에 입맞춤했다. "아...제발, 이렇게 하면 저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체이스는 울면서도 웃으면서 윌슨의 손을 붙잡았다. "나도 미안해." 윌슨은 체이스가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하우스가 더욱 충격을 받은 건 이 부분이었다. 그는 왜 자신이 이곳에 더 있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어졌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로 했던 결정부터 자신이 프린스턴 플레인스보로에 돌아오기로 한 결심, 심지어 그곳에 처음 취직하려던 그 순간까지 모두 머저리에 멍청이들이나 할법한 짓거리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바이크 시동을 걸고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빌어먹을, 손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주택가의 한 거리, 불빛이 훤하게 들어오는 가운데 현관에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둘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자랑스럽고 대단하다고, 어째서 저렇게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는 걸까. 하우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체이스는 윌슨의 반응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응수해주는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윌슨이 다음 날부터 다시 자신을 모른척 할거라는 불안감은 종식되었다. 아무리 뭐라 해도 윌슨은 정이 많은 남자였고, 체이스가 그토록 자신의 곁을 지켜준 것도 모를 사람은 아니었다. 누구처럼, 늘 받아만 오다가 냉정하게 차버릴 위인도 아니었다. 물론, 이 점을 잘 알고 이 틈을 비집고 틀어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장본인은 다른 사람도 아닌 로버트 체이스 그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윌슨의 올곧은 속내를 직접 경험하고 나니 머리로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놀라고 있었다. 그렇게 넘치는 응수를 받고 나니 도리어 체이스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윌슨이 자신에게 준 호의만큼, 체이스도 윌슨을 기다려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이성을 잃었던 스스로를 놓아두고 체이스는 다시금 이성적이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어떤 쓴 말도 삼킬 줄 아는 로버트 체이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 체이스는 윌슨의 손에서 키를 가져다가 현관을 열어 그를 들여보냈다. 현관 부의 차단한 등불이 들어오며 둘을 더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요. 차는 제가 내일 가져다 둘게요." 윌슨이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체이스는 서둘러 작별인사를 마치고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주택가를 나섰다. 위스키에 취하거나, 차를 운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거나...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경찰을 마주치면 곤란해질 게 뻔했지만 적어도 체이스는 윌슨만큼 지쳐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짚고 다시금 거리로 나오며 어딘지 모르게 상쾌한 기분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하늘은 유난히 밝고 아름다웠고, 눈을 조금만 더 크게 뜨면 저 멀리 떠 있는 별들도 몇 가지 더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뉴저지 도심 한복판에서 그런 하늘이라니, 누가 들으면 정신 나간 줄 알겠지만 적어도 체이스의 마음 속은 그러했다. 누군지 모를 바이크가 자신의 옆을 마치 칠듯이 빠르게 지나가긴 했지만, 체이스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오늘이 밤이야말로 그가 윌슨을 만난 이래 가장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