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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07화

Another - 7

by 김뇨롱

22.



체이스가 직접 윌슨을 찾아온 것은 사흘 정도가 지난 어느 저녁이었다. 그 와중에 체이스는 자신의 감정을 더욱 더 벼리듯 날카롭게 다듬고 있었고, 그가 윌슨에게 했던 행동이나 말들 중에서 무엇이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게 있었는지 한참 찾았다. 그러나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체이스가 그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윌슨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체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시금 윌슨이 자신을 찾아줄 때까지 안정적으로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한 편으로는 체이스 자신이 가장 큰 벌을 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그가 견뎌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윌슨이 찾아야지만 그 자신이 윌슨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이일 뿐이고 체이스 자신이 원해서 윌슨을 자발적으로 찾을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하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체이스와 함께 평소의 윌슨을 몇 번이나 눈짓으로 쫓았지만 결국 그 동안 아무 말도 붙이지 못했다.


사실 가장 놀라운 건 윌슨의 행동이었는데, 그는 하우스를 제외하고 체이스에게 어떤 것을 부탁할 때마저도 다분히 사무적이었다. 체이스는 현재 윌슨이 대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언제즈음 그 사슬을 풀고 자신의 마음을 터놓을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마치 내기를 하는 것 처럼, 경주를 하는 것 처럼 하우스와 체이스의 눈길이 윌슨을 쫒고 있었다. 승리 기준은 간단했다. 윌슨이 누구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가가 승리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 점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진단학과 과장 자리에 있는 지팡이 짚은 절름발이 양반은 말이다. 체이스는 자신의 말 그대로 '하우스'가 아니었고 그는 행동할 용의가 분명히 있었다. 모든 것은 경험과 작은 위로에서부터.


"...시간 있어요?" 아까 전에도 같이 이야기를 나눈 주제에, 윌슨은 체이스의 모습을 보고 새삼 놀라고 있었다. 복부에 생긴 상처가 그의 걸음 걸이를 편치 못하게 만들었고 이내 그 통증은 그의 팔에도 영향을 미쳐 그가 수염을 깎는 데에 게을러지게 만들었다. 그 수더분한 수염과 저는 다리가 갈수록 하우스와 닮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체이스의 눈에는 언제나 감정적인 확신과 갈증이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간단하게 내치고 말았을테지만 왠지 모르게 윌슨은 체이스의 그 갈증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글쎄..." 한동안 체이스를 바라보던 윌슨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자신이 검토하던 논문을 집어 들었다. 대화하기 어렵다는 제스처였지만 체이스는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까지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체이스가 느낀 '거절감'이란 이런 것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타이밍이 중요했다. 어딘지 모르게 뒤통수가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 하루 종일 암병동과장의 사무실 문을 응시하고 있는 어느 노친네 때문이겠지. 체이스는 속으로 일갈했다.


"수련의들 숙제 봐주시는 거라면 시간은 충분하시다는 거겠죠." 체이스는 자리에 앉기 전 문을 닫기 위해 바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갈했던 그 '노친네'가 지팡이를 짚은 채로 마주하고 있는 환자의 보호자는 철저히 무시한 채 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새삼 지난 번 응시했던 말보로 레드의 새빨간 불빛이 생각나 체이스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나는 자네가 내 쪽지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윌슨이 여전히 논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아주 짧았죠. 너무 짧아서 끝이 없었어요." 체이스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저녁의 부드러운 햇살이 붉은 빛을 발하며 사무실을 비추고 있었다. "걱정한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 다음날부터 계속 이런 방식이잖아요."


"나는 괜찮아, 보다시피." 윌슨의 말이 짧아졌다. 체이스는 지팡이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윌슨의 은밀한 시선.


"지금 괜찮은 게 아니잖아요. 저도 박사님을 보아온 게 하루 이틀은 아니라서 잘 알아요. 언제든지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했었잖아요...아니면 기한이라도 알려줄래요? 이렇게 숨 빠진 것처럼 지내는 게 답답해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에요."


체이스의 말을 들으며 윌슨은 서서히 논문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체이스는 언제라도 그 대답을 기다릴 의향이 있었다. 사실, 이건 반은 퍼포먼스이기도 했다. 하우스는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그 와중에 체이스는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윌슨을 찾아갈 줄 알고, 이렇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했노라고. 사실 아까 보여준 찾아가고 문을 닫는 행위 만으로도 단절감과 놀라움을 전해주기에는 충분했을 거다. 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갈증'도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전에 들먹였던 진단학과 분리건 하우스 박사의 건이건 상관 없이 윌슨과 얼굴을 맞대고 조금이라도 업무 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말을 고르는 윌슨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체이스의 머릿속에서 그게 조금 더 지나쳐서 다른 것으로까지 번지는 게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사실은 고통스러워." 윌슨은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 날 저녁에 나는 마치 모든 게 드러난 기분이 들었어. 마치 병원 사람들까지 알게 된 것 처럼 느껴져서 그 다음 날 아침에 급하게 사무실로 출근했지. 모두가 나를 전과 같이 대해줬지만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고 있었어. 이미 나는 변해버렸던 거야.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어. 그런데도 떠나지 못하는 건..."


"떠나고 싶으면 떠나게 도와줄게요. 내가 함께 하게 해줘요." 체이스는 말을 덧붙였지만 윌슨은 더 대답이 없었다.


"아, 그래...그렇죠. 그렇겠죠. 하우스 박사님 때문이겠죠." 체이스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낭패라고 생각했다. 윌슨은 다르게 부정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내 이야기를 퍼트릴 수도 있어. 그리고 무참히 짓밟겠지."


"그럴 일은 없어요." 체이스는 좀 더 윌슨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마치 상담사가 어린 아이를 상담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박사님이 얼마나 힘들었고 어려웠는지 알아요. 다만...왜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거죠? 저는 유일하게 그 문제를 아는 사람이에요. 물론, 저도 알아요...그 날 밤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이 시간만으로는 부족한가요? 제가 얼마나 더 박사님을 모르는 척 해야 하나요?"


"아냐, 그건..." 윌슨이 서서히 무너져간다. 그 터무니 없는 침식을, 체이스는 속으로 흐뭇해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짧아지고 문장의 구성요소가 줄어들수록 체이스 자신이 개입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은 더 많아진다. 그는 조금씩 체이스에게로 기대고 있다. 하다 못해 나중에 극단까지 치밀어서 점심 메뉴까지 그에게 기대도 좋으니 체이스는 윌슨이 조금만 더 넘어져서 자신에게로 무너져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우스는 한 번도 자신이 '알아서' 윌슨을 찾아온 적이 없었고 윌슨 또한 그런 '하우스'를 기다려보거나 받아들여본 적이 없었으니까. 둘은 서로를 향해 무너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 전에 포어맨과 이야기하셨다면 아시겠죠. 이사진이 움직이고 있어요." 체이스는 거기에 쐐기를 박을 만한 이야기를 던졌다.


"진단학과 분리 건 말이군." 윌슨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포어맨이 말하더군요. 하우스에게 진단학과 분리에 대해 동의해달라는 요청을 했었다고...물론, 좋은 반응은 아니었겠죠."


윌슨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견딜 수 없을텐데...내가 가서 뭐라도 한 마디..." 윌슨은 말을 잇다 말고 반쯤 일어섰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체이스는 그걸 알고 있었다. 상황이 이 정도로 치달아버린 지금, 이 단절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체이스 자신뿐이라는 것을.


"괜찮아요, 박사님. 제가 전달해도 괜찮아요." 체이스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잠깐의 망설임으로 떨어져 있던 윌슨의 시선이 똑바르게 체이스를 향한다. 그 사이에 그의 바뀐 모습과 지팡이가 왠지 모르게 시선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자네는 얼마 전까지..." 윌슨은 말끝을 흐렸다. 아마 그 뒤의 내용은 뻔한 것 같아 보였다. 체이스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일어섰다. "걱정하지 말아요." 체이스는 부러 몸을 기울여서 윌슨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의 터치였는데도 거친 가운 너머 따뜻하게 숨쉬는 육신의 온도가 전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체이스는 얼굴을 감추려 빠르게 문으로 다가갔다. "대신, 내가 이야기를 전달하고 나면 다시 나와 이야기하는 거에요."


윌슨은 아무런 대답 없이 멍하니 체이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에도 체이스는 별다른 요구 없이 문을 닫았다. 사무실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23.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정신 나간 방법 같은데." 포어맨이 말하였다. 체이스는 포어맨의 앞에서 잠시 그 너머의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이스의 시선에서 몇 개의 벽을 넘어서면 윌슨의 사무실이 나올 것이다. 최근 며칠간 윌슨과 말을 하지 않게 되면서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병원의 구조에 대해 빠삭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내 그 특별한 경험이 윌슨의 사무실로 가기 위해서 어느 각도로 길을 꺾어야 하고, 정면에서 돌파하면 어디서 어느 지점이 보이는 등의 쓸데 없는 것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마 그가 스스로 윌슨과의 침묵을 깨야한다고 느꼈던 데에는 이러한 정신 나간 생각들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주먹다짐하고 싸웠던 진단학과 과장을 찾아가서, '진단학과 분리'에 대해 더 논의하는 게 말이 되나? 지난 번에는 주먹으로 끝났어도 이번에는 아닐텐데." 포어맨은 두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간단해요." 체이스는 저 멀리 발코니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저 멀리 공원 벤치에 놓인 불꽃무늬 지팡이가 유난히 신경쓰였다.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죠."


"그게 무슨 소리야?" 포어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말 안 하면 그만이에요. 난 말 해보겠다고 했지 뭔가를 장담하지는 않았어요."


"제길, 시간이라도 벌 생각이군." 포어맨은 손을 풀고 몸을 뒤로 젖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툭하면 루푸스 진단을 해대던 햇병아리 같던 녀석이 이제는 이런 정치질에 도가 틀 정도로 닳고 닳았다니...아니 어쩌면 이건 정치질이 아니라 다른 행위에 속할지도 모르지만. 포어맨은 기가 차서 잠시 웃었다. "하우스 박사님이 서명하지 않고 버티면 나나 자네가 힘들어질텐데.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이사진이 필요한 건 단 하나. 그것 뿐이야."


"윌슨 박사님이 바라는 건 그런 서명이 아니라 감정 정리겠죠. 제가 약속한 건 그 정도였던 거에요." 체이스는 말하기 시작했다. "서명이라면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결국 당신과 내가 바라는 건 같은 거니까요. 하우스가 서명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방법이야 다양하겠죠. 주립 법원이라던가..."


"전과를 걸고 넘어질 셈이군. 이사진에서도 그 이야기는 나왔었어." 포어맨이 말하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같은 편이었다고 조사를 해댄 거죠? 그래도 아주 녹슬지는 않았네요." 이번에는 체이스가 코웃음 쳤다.


"어차피 언제 어떤 사건을 일으킬지 모르는 인간이고, 그 인간이 부재했을 때 병원을 책임져 줄 기관은 반드시 필요해. 이런 압박이라면 하우스도 어쩔 도리가 없겠지."


"그러니까 부탁하려고 찾아왔잖아요. 제도적인 건 어디까지나 당신에게 맡길게요. 저는 감정 정리를 해야 해서." 체이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포어맨이 잠시 그를 불러세웠다. "그나저나 괜찮은 건가? 자네가 두 사람을 모두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어. 자네가 생각한 대로 진행될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그건 그렇죠. 하지만 아시잖아요?" 체이스가 뒤돌며 말했다. "만일 그런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면 하우스는 전과가 없었을 거고 윌슨 박사님도 지금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겠죠. 자그마치 10년 넘는 시간 동안...저는 거기에 작은 돌 하나를 얹는 것 뿐이에요. 통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넘지 못하는 장애물을 방치하는 것 뿐이죠."


"자네도 알고 보면 지독한 구석이 있다니까, 꼭..."


"나머지 말은 아껴두시죠. 제가 과장이 되면 말씀하셔도 괜찮고요." 체이스는 말하며 문을 닫았다.




24.


오후 10시.


체이스는 윌슨이 어디로 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 전부터 암병동 과장실의 불이 꺼져 있었고, 오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때에는 논문 옆에 모퉁이 술집 쿠폰이 놓여 있었다. 물론, 이전부터 윌슨을 찾아 그 모퉁이 술집을 들를 수도 있었지만 이제까지 체이스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윌슨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오늘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윌슨의 반응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았고, 윌슨 또한 체이스와 한 번 벽을 허물면 그가 다시 찾아온다 한들 내치지도 않을 것 같아 체이스는 오랜만에 그 그리운 모퉁이 술집에서 윌슨을 찾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가지 짐을 챙기면서 -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형외과 사무실이 가로막고는 있었지만 엄연히 진단학과 사무실은 불이 켜져 있었으며 - 그 옆의 진단학과 과장의 개인용 사무실도 당연히 불이 켜져 있었다는 사실을. 저 멀리서부터 어둠을 벗삼아 다가오는 형체를 체이스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불현듯 들려온 음성에 체이스가 힘없이 바라보았다. "신규 진단학과 과장님이라고." 점잖게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말 끝은 마치 짐승이 목을 긁듯이 거칠어졌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더군요. 어차피 제 의견도 아닙니다." 체이스는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하려 애썼다. "포어맨 말로는 소식을 듣고 뛰쳐나가셨다고요."


부러 과장해서 말했지만 하우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볼만했겠지. 그게 자네 목적인가? 겨우 그것 때문에?" 하우스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체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체이스의 눈빛은 미동도 없었다.


"저와 마지막 대화에서 이성을 잃은 탓에 내용을 모두 까먹으신 모양이네요." 체이스가 대답했다. "저에게 그런 목적 같은 건 없어요. 오직 윌슨 -" 하우스가 바로 손사래를 쳤다. 윌슨의 이름조차 듣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단시간에 그런 반응 하나 내비쳤다고 저런 행동을 보인다고? 체이스는 이해할 수 없어졌다.


듣기 거북해하는 건지, 참지 못하는 건지.


"그나저나 잘 되었네요. 어차피 한 번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체이스는 요전에 세워둔 계획을 말끔히 지우고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짐을 챙기던 걸 그만 두고 책상 바깥으로 나왔다. 마치 젊은 시절의 하우스와 현재의 하우스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같았다. 신경쓰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자네야말로 지난 번 일을 까먹은 모양인데...내가 자네 말에 동의라도 해줄 줄 아나?"


"제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윌슨 박사님이라면 다르겠죠." 체이스가 일순 노려보았다. 하우스의 말문이 막혔다.


"자네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군..." 하우스 또한 체이스를 노려보았다. "자네 목적이 그거라고. 겨우 그거 때문에, 진단학과 분리니 뭐니 저지른다 이 말인가?"


"그거라고 하지는 마시죠." 그 말에 하우스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럼, 자네 말해보도록 하지." 하우스가 말하였다.


"진단학과 분리를 하지 않는 대신에 내가 윌슨과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자네는 그 제안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말인가?" 이 말에 체이스가 놀랄 거라 예상했지만 체이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단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일 뿐이었다. 하우스의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지난 번에 그렇게 윌슨 박사님을 내쳐놓고, 다시 보기라도 하시겠다는 건가요?"


하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제 조금 알겠죠?" 체이스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장애물을 놓았을 뿐이에요. 넘어가는 건 박사님이라고요. 윌슨 박사님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제가 지켜보고 있겠지만." 체이스의 말에 하우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진단학과 분리에 동의하건 말건 어차피 박사님과 윌슨 박사님은 멀어지고 있었어요. 그 날 그렇게 윌슨 박사님을 쳐낸 건 박사님이지 제가 아니에요."


...더 이상 윌슨 박사님을 힘들게 하지 마세요.


하우스는 그 말에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체이스의 눈빛에 약간이 미동이 일었지만 그건 망설이거나 걱정하는 게 아니라 승리에 잠시 도취되는 것 때문이었다. "이미 답이 나왔잖아요. 윌슨 박사님은 지금도 고통스러워하고 계세요. 여기서 더 건드리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너 따위가 -"


"저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요." 지난 번 같았으면 한 대 쳤을텐데, 이상하게 주먹이 나가질 않았다. 체이스는 말을 이었다. "분명해요. 약속할게요. 박사님이 바라시면 바라시는 만큼. 윌슨 박사님에게 진심이에요. 지금 윌슨 박사님에게 필요한 건 저에요.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만나본다 한들 돌아오는 건 없어요. 윌슨 박사님에게 어떤 게 더 나을지도 가끔 생각해주세요. 지난 번에는 어쩔 수 없이 지나갔지만, 다음 번에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 땐 저도 가만 있지 않을 거니까요." 체이스는 말하며 멋대로 자신의 짐을 챙겨 어깨에 들쳐맸다. 그리고는 하우스를 지나쳐 사무실 문을 향해 성큼 성큼 걸어갔다.


"부탁입니다, 닥터 하우스. 한 번이라도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윌슨 박사님을 위한 선택을 해주세요." 부탁조로 말하는 투였지만 결국 속내용이나 모양이나 반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우스의 두 눈이 충혈되고 있었다. 체이스는 그대로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이내 진단학과 사무실을 제외한 사무실이 모두 점등되며,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하우스의 두 눈이 일그러졌다.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상황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윌슨을 더 괴롭게 한다는 일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다.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진단학과 분리를 빌미로 체이스가 윌슨의 곁을 맴도는 게 짜증나고, 보기 싫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착각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건 자신이라는 듯이. 체이스는 엄연히 진단학과 분리를 주장하면서 그 안에 윌슨을 끼워넣었다. 하우스가 마치 이기적으로 굴기라도 하는 것 처럼. 그러나...하우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런 개같은 소리임에도 어째서 반박하지 못했을까. 멍청하게 이야기나 듣고 고개나 들어 응시하기만 할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아마 그 이유는 체이스가 말한 것 중 일부가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우스는 자신만의 게임을 하며 늘 이기기만 원했지, 윌슨이 이기도록 도와준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은 결국 근본적인 것에 도달했다.


체이스보다 더 윌슨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이미 알고 있다. 지긋지긋할 만큼 잘 알고 있는 답이라 입을 열어 대답하기에도 피곤해진다. 아마도 그 때문이다. 아까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던 건, 단지 그 자리에서 바로 인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체이스가 했던 말의 일부는 분명한 진실이고, 그건 하우스 자신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아 늘 미뤄온 오래 전의 눅눅한 페이지, 그 뒷장이었다. 기막힐 노릇이었다. 며칠 전에는 체이스에게 한 방 먹인 걸로 윌슨을 보기 어려워지더니, 그 다음에는 자신이 대뜸 성질 부리고 소리친 걸로 더욱 윌슨을 보기 어려워졌고 기어코 오늘, 체이스와 나눈 몇 마디로 더욱 윌슨에게 말을 걸기 어려워졌다. 어째서 갈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걸까. 적어도 감옥 안에서 예상했던 생활의 일부는 아니다. 물론 감옥에서 가장 그리워하던 존재는 누구도 아닌 커디 원장이었지만...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현실의 바닥은 차갑기만 하고 계속해서 스쳐 지나가는 자들만 기억하고 머리를 감싸쥐다 보면, 어느새 정신 차리고 눈에 밟히는 건 오히려 주변에서 계속 자신을 기다려준 존재들이다. 하우스는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미뤄왔던 눅눅하고 축축한 페이지의 끝을 기어코 열어볼 때가 오고 말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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