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 날 밤
모든 것이 이지러지듯 무너졌다.
윌슨의 마음 뿐 아니라, 체이스의 것도.
그 날 밤
체이스가 부리나케 윌슨의 집 앞까지 윌슨을 데려와 현관을 열고 그를 부축해 침대에 그를 눕혔을 때에도,
잠들지도 깨어 있지도 않은 윌슨이 숨쉬듯 조용히 흐느끼며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체이스에게 잠시만 곁에 있어달라 부탁했을 때에도...참다 못한 체이스가 윌슨의 어깨를 붙잡고 가만히 안아주다 이마에 키스를 했을 때에도.
순간 윌슨의 목멘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나를 왜 좋아하지?"
체이스가 놀라 윌슨을 바라보았다. 윌슨의 말보다도 자신이 한 행위에 놀란 모습이었다. 사실 체이스는 자신이 이토록 성급하게 행동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하우스의 행동은 체이스 자신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사이가 틀어지겠다는 바람만큼은 확실히 이루어졌지만 그에 대한 쾌감보다는 고통 받는 윌슨을 바라보는 아픔이 더 컸다. 온전히 외사랑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하우스가 조금이라도 자제해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감정에 먹혀서, 앞에 보이는 것 없이 비난하고 힐난하고 자신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관계를 틀어버리는 모습은 체이스 자신도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윌슨을 태우고 집으로 오면서, 체이스는 이제 정말로 자신만이 윌슨의 곁에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위태로움이 미묘하게 달콤해서, 체이스는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잠시 의심해야 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한다 해도, 박사님이 기억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체이스는 윌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해요'나 '사랑해요'는 아니었지만, 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금 더 길게 빼는 답변이었다. 윌슨에게 더 겁을 먹게 하고싶지 않았다. 체이스 입장에서는 이미 그에게 스킨쉽을 하면서 선을 넘어버렸으니까. 체이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윌슨이 자신을 피하는 것이었다. 윌슨이 하우스를 좋아하고 열망하는 것 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우스로부터 도망쳐서 도달할 피난처가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체이스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현재 그 피난처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지금은 좀 잠드려고 해봐요...아스피린이라도 가져올까요?" 체이스는 윌슨을 옆으로 뉘였다. 눈물자국이 볼에 묻은 그대로 윌슨은 시트에 얼굴을 비벼댔다. 체이스는 바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정말 많은 걸 알고, 탁월하고, 내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갑자기 윌슨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체이스가 화장실에서 약을 찾다 말고 나왔다.
"내가 점심을 주문하면 옆에서 빼앗아 먹고, 커피도 빼앗아 먹고, 가끔 오토바이를 타고 사고를 치고, 사람들과 싸워대고..."
"박사님..."
"몬스터 트럭이나 보는 유치한 성향에, 여자는 또 얼마나 밝히는지..."
체이스는 주방으로 가 물을 떠와서는 윌슨의 옆에 앉았다.
"웃을 때 바보 같고, 식사 때 피클을 빼먹는 것도 웃기고, 나를 바라볼 때 눈빛이 깊어서...나는 그래서 하우스를 사랑해."
체이스는 잔에 아스피린을 떨어트렸다. 탄산의 소란이 윌슨의 말들을 삼켜대는 것만 같았다.
"잘 들었어요. 박사님은 하우스 박사님을 사랑하는 게 확실하네요. 제가 증인이 될 수도 있겠어요." 체이스는 반 체념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윌슨을 일으켜 잔을 건넸다. "마셔요. 그리고 일단은 잠을 좀 자둬요."
윌슨은 잔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윌슨의 두 눈은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나도...알고 싶어서 그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 나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나도, 사랑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싶어."
"그거 알아요, 박사님? 박사님도 정말 유치하고 어린애 같아요." 체이스의 말에 윌슨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사님은 하우스 박사님이 고주망태일 때나 언제든 그런 고백을 직접 해본 적 있으신가요? 아마 없을거에요. 두렵고, 슬프니까...물론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제 마음도 그만큼 깊고 넓어요. 박사님이 위로가 필요하다면 밤새도록 옆에 있을게요. 하지만 박사님이 제 마음을 듣고 싶으시다면...그건 박사님도 어느 정도 멀쩡했을 때 들어주셔야 해요."
윌슨은 눈썹을 찡그렸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래..." 아스피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윌슨은 잔을 대충 체이스에게 넘기고 뒤로 나자빠졌다. 체이스는 잔을 침대 옆 협탁에 두었다. 그리고는 윌슨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오늘 밤은 저도 박사님도 너무나 힘들었네요." 체이스가 말했지만 윌슨은 대답이 없었다. 곧이어 규칙적인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눈물자욱이 덕지덕지 붙은 채 윌슨이 잠을 자고 있었다. 체이스는 윌슨이 내는 호흡소리를 한동안 듣다 잠시 몸을 일으켜 윌슨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체이스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윌슨은 그 사이 잠시 눈을 떴다. 공허하고, 텅 비어 있는 눈동자였다.
20.
저 멀리 볼보 세단이 급하듯 미끄러지며 떠나가는 걸 바라보자, 마침내 하우스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팡이도 저 멀리로 던져버린 채, 하우스는 벽에 잠시 몸을 기댔다. 망할, 대체 지금 뭘 한거지? 대체 뭘 저지른거야?
본래 자신이 생각하던 그림은 아니었다. 그가 문을 열어주면 윌슨이 들어서고, 마침 하우스가 선심을 써서 준비한 퀘사디아와 샐러드가 있는 그들만의 던전으로 들어서면, 정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서로 지정석에 앉아 맥주캔을 부딪히며 지난 일에 대해 간단하게 뇌까린 다음 슈퍼볼 경기를 볼 예정이었다. 그 뇌까림조차도 윌슨이 하우스에게 사과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될게 뻔했고, 하우스가 준비해 둔 음식들과 맥주에 윌슨은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할 터였다. 그러나...
하우스가 눈만 감으면 윌슨의 그 경악과 고통이 섞인 두 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게 원하던 방향이었나? 속이 시원하기라도 했냐면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반응을 바라고 있던 게 아니었다. 다만 체이스를 보자마자 떠오른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윌슨을 향해 뻗쳐 올라간 것 뿐이다...하지만 그럴수록 윌슨에 대한 감정도 나빠지기 일쑤였다. 이미 윌슨은 자신이 만들어 둔 게임을 빠져 나간 지가 한참이었다. 자신이 만들어 둔 궤도를, 그것도 기껏해야 저 조무래기 때문에 이 정도로 벗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우스 자신이 보기에는 기껏해야 몇몇 사건을 같이 이야기하고, 논의한 것 정도일텐데...체이스가 그런 감정을 가진 것도, 그런 체이스의 감정에 윌슨이 이토록 동요하는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서히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면서 하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창문 너머로 빠르게 이동하는 볼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무너지는 윌슨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그 정도로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치 거짓말이나 만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언제나의 궤도를 벗어난 1량의 초라한 차는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계속해서 빨려들어가듯 나아갔다. 하우스는 이 다음을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알 수 없어졌다. 당장에 필요한 건 원하는대로 내지르고, 짜증을 내는 것 정도였으니까. 원하던 결말은 아니었지만 윌슨과는 결국 더 멀어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내심 마음 한 켠에서는 그렇게 상처를 안고 도망치듯 떠나간 볼보 안에서, 체이스와 윌슨이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둘이 어떤 일들을 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보두 들여다 볼 자신이 있느냐고 하면, 그레고리 하우스는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윌슨이 입고 온 낯선 의상들을 보며 느꼈던 메스꺼움이 다시 그를 잠식하려 했다. 하우스는 지팡이도 짚지 않고 대충 일어서서 소파로 기어가듯 간 다음 자신이 준비해 두었던 버드와이저 캔을 딴 뒤 냅다 들이부었다.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원하지 않는 일들만이 그의 곁에서 망령처럼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21.
체이스가 정신을 차린 건 늦은 오후였다. 윌슨을 재우느라 부러 거실에 있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고, 불편한 소파 쿠션에서는 늦게 잠들 수 밖에 없었다. 곁에는 윌슨이 남긴 듯한 쪽지가 미풍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마 윌슨은 잠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한 체이스가 몸을 추스려 일어나며 쪽지를 집어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쪽지를 입가로 가져가 향기를 음미했다.
[고마웠어, 닥터 체이스. 한 동안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희미한 우드 향과 그 향기의 주인이 적어둔 아쉬운 내용에, 체이스는 서둘러 자켓을 챙겨입었다. 어제 입었던 옷이건 옷에 뭐가 묻었건 상관하지 않았다. 현관에 나와보니 역시나 볼보는 주차장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차로 서둘러 달려갔고, 윌슨이 어디에 있건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제의 그 아픔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더 자신에게 기대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윌슨은 늘 이렇듯 자신이 한 발 다가서면 조금씩 도망치기 바빴다. 당장에 하우스가 잡혀간 뒤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와 가까워진 거리도 그리 좁지는 않았으니까. 아니면 어제 그가 주정 비슷하게 해댄 소리에 답변한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걸까. 생각 같아서는 두 팔을 잡고 얼굴을 바라보며 제발 도망치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체이스는 그 상상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늘 그런 상상을 하게 되면 윌슨의 얼굴에 입맞춤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육체적인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건 늘 체이스를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아니, 모든 것들은 자그마한 위로와 경험에서부터.
체이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윌슨이 하우스를 오래도록 짝사랑했던 것. 그 자신도 윌슨에게 오래도록 감정이 있던 것.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 어제의 일은 그런 흐름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윌슨이 동요하는 것 만큼 같이 동요해서는 그를 잡아줄 수 없다. 체이스는 자동차 앞의 미러를 통해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그는 하우스가 아니다. 그는 하우스처럼 윌슨을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했던 안정감과, 푸근함을 주고 싶었다. 하우스가 줄 수 없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적기는 지금일 것이다. 사실 가장 걱정스러운 건 어제의 일에도 불구하고 윌슨이 하우스를 다시 찾아가는 것일 뿐이지만. 체이스는 다른 변명들을 모두 붙여서라도 빠르게 윌슨을 찾고, 그 이유를 윌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체이스가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병원에 당도했을 때, 윌슨은 아무렇지 않게 병원 로비에서 외래 환자를 보고 있었다. 체이스는 무심코 달리듯 해서 윌슨의 눈길을 끌었지만, 이내 웃옷을 추스리며 그의 눈빛을 받아내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당장 윌슨은 하우스와 있지는 않았다. 휴가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여기에 있고, 체이스가 병원에 온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은 이 만큼으로도 충분해, 체이스는 자신을 달랬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체이스는 하우스를 봐야 할 마음의 준비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정작 어제 가장 큰 갈등을 겪은 건 하우스였음에도 체이스의 마음 속에서 그런 일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역시나 진단학과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그는 가볍게 그걸 무시했고, 하우스가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오히려 사무실에 들르는 윌슨과 하우스의 묘한 기류가 흐르지나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철저하게 서로를 무시하고 있었다.
어제 있었던 일이래봤자 아는 건 하우스와 윌슨, 그리고 체이스 뿐이었다.
그러나 가끔, 체이스는 윌슨이 있는 곳으로 눈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흩뿌리고 다니는 향기나 모습, 모양, 손짓 등등 체이스는 그것들이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던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가장 마음이 급한 건 체이스였다. 어젯밤 윌슨이 자신의 침대에 누웠을 때,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체이스는 무심결에 그 모든 걸 수포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윌슨을 안고 싶었다. 자신이 가진 강렬한 욕구가 풀리지 않은 채 체이스의 안을 휘저었고, 윌슨은 그 존재 자채로 그의 욕구를 건드리는 가장 강력한 유혹이었다. 하우스와 윌슨의 갈등이 분명했고 치명적이었음에도 체이스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욕구를 추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딴에는 그게 윌슨과 가까이 있을 때 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병원 3층에 수없이 가로놓인 유리창 사이로 비추는 윌슨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만으로, 그의 욕구는 견디기가 너무도 힘들어진다.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애틋한 눈빛을 윌슨에게 던지고 있었고, 타웁의 아이 문제를 가지고 비아냥대던 하우스 또한 옆눈길로 그것을 온전히 인지하고 있었다.
22.
"잠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포어맨이 하우스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 것은 오후 6시가 넘어갈 시점이었다. 매번 이 시간이면 병원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윌슨의 샌드위치를 빼앗아 먹거나, 일찍 퇴근해서 몬스터 트럭을 볼 때 즈음이면 딱 이맘때였는데...하우스는 그 생각에 잠시 멍해져 있었고, 포어맨은 이 때문에 몇 번 더 문을 두드려야 했다. "감히 병원장 주인님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하우스가 비아냥대자, 포어맨은 들어오며 두 손을 들어보였다. "죄송한데 오늘 진짜 힘든 날이었거든요. 박사님 아니어도 충분히 힘드니 오늘은 그 만큼만 하시죠."
"병원 외부로 1km 벗어나면 쇤네가 잡혀가서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던 하우스는 포어맨을 지나치며 말하였다. "짧게 끝내도록 하지."
포어맨은 자리에 앉아서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 하우스와 체이스, 윌슨간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했다. 다만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타웁, 닥터 박, 애덤스까지...아무리 생각해도 체이스에게 그 일을 캐묻게 될 경우 포어맨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이사진에게 '진단학과 분리'에 대한 미끼를 던져버린 이상, 그는 그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심지어 그 이사진 중 몇몇은 포어맨이 언제 어디서 하우스와 접촉하는지조차 기록할 정도였으니까. '보통 큰 일은 한 번에 빠르게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죠.' 포어맨이 달래듯 그렇게 말했지만 그들에게 들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난생 처음 맡아보는 병원장직이지만, 레지던트 1년차는 초보 대우를 해줘도 병원장은 초보 대우조차 없다. 포어맨은 잠시 깍지 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준비가 필요했다. 감정 싸움이건 사랑 싸움이건 그는 일을 진척시켜야 했고, 가장 큰 열쇠인 하우스의 대답이 필요했다.
"짧게 끝내라고 하신 건 박사님이니까, 짧게 말씀드리죠." 포어맨이 말문을 열었다. "최근 잡지 '더 큐어' 보셨나요? 이미 알려진 병보다 알려지지 않은 병명이 훨씬 많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는 최근 늘어나는 신소재로 인해 사람들의 알러지 반응이 극단적으로 치솟으면서..."
"짧게 말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우스가 한 마디 내뱉었다. 포어맨은 자신도 모르게 손짓을 해대다 말고 잠잠해졌다. "막상 말씀드리자니 어렵군요."
"걱정 말라고. 최근에 내가 겪은 것에 비하면 뭘 내밀더라도 별 일 아닐테니까 말이지."
"진단학과를...분리할 생각입니다." 하우스의 두 눈이 커졌다. "아까 말씀드린 것도 잡소리는 아니에요. 지난 3개월 간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병원을 찾는 환자의 60% 이상이 원인 불명의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중의 80% 이상은 박사님의 공로로 치유가 되었죠. 하지만 이건 정상적인 상태라고 보기는 어렵죠. 박사님의 역할도, 병원의 수용량으로도요." 포어맨은 하우스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박사님의 역할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박사님의 역할을 '분리'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하, 이거란 말이지." 하우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우스의 시선은 간만에 자신의 두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단학자를 진단학과로 만들었던 이유...' 체이스가 운운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말과 달리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달라 보였다. 그러나 하우스는 그 내부에 든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지금 이토록 짜증나는지도 알고싶지 않았다. 진단학과 분리건 파괴건 망가뜨리기건 간에, 당장에 포어맨이 이 시점에 자신을 찾아와 이런 일을 의논한답시고 늘어붙는 것까지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자네 말로는 나를 잘게 다져서 여기 저기로 흩뿌리거나, 아니면 뒷방 늙은이 대우를 해서 전시회에 내놓은 침팬지로 만들 셈이군." 아래로 향했던 시선이 점점 더 포어맨을 향해 올라갔다.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강한 어조에 포어맨의 표정이 금새 굳어버렸다. "명성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업무는 원하는대로 진행하겠다 이거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포어맨이 말을 잇기도 전에 그의 책상 앞으로 하우스의 지팡이 끝이 난폭하게 내리쳐졌다. 하우스는 어느새 일어서 있었다. "망할 통보를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자네도 알다시피 모두 거짓말을 하지. 이렇게 속이 다 내비치는 역겨운 소리는 거짓말 축에도 끼워줄 수가 없군. 내 동의라도 얻기를 바랐나? 그랬다면 자네도 감이 훨씬 떨어졌군. 할거라면 멋대로 해. 어차피 이제 아빠의 동의나 응원 같은 건 필요 없잖아?" 하우스는 그대로 지팡이를 다시 바닥에 짚은 채 사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
"체이스가 차기 과장이 될 겁니다." 포어맨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우스가 잠시 멈췄다. "맞아요. 박사님의 의견이 필요했습니다. 더하자면 '동의'가요. 하지만 그건 어려워 보이는군요. 이사진은 이미 이 뜻에 동의했습니다. 전 단지 말씀드리고자 했을 뿐이니까요."
하우스는 그에 대답도 없이 문을 열었다. 바깥으로 나온 뒤 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쇤네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요'라고 말한 뒤 문을 닫아버렸다. 유리에 비친 하우스의 옆모습을 보면서 포어맨은 생각에 잠겼다. 파워 게임, 권력 다툼, 위력, 정치...많은 말들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은 이 일련의 사건에서 정작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은 그런 차가운 말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건 저 멀리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하우스에게서 너무나 명백하고 분명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