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윌슨이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너무나 낯선 환경에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처음 몇 분간은 이곳이 도무지 어느 곳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그가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그의 겉옷가지가 전부 벗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반팔티와 트렁크는 무사했지만 나머지는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당황한 그가 거실로 나섰을 때에는 어디선가 맛있는 향이 코를 찌르고 있었다. 윌슨이 코를 킁킁대며 다가가자 거실 한 복판 테이블 위에는 방금 구운 것처럼 보이는 토스트와 블랙커피가 한 잔 놓여 있었다.
'간밤에 구토를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양복을 세탁했어요.
오전 외래 진료는 저에게 돌려놨으니 걱정 마시고 제가 입던 거라도 입고 출근하세요.'
무심한 듯 신경 쓴 말투. 갈겨쓴 듯한 글씨가 토스트나 커피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 윌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체이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면서 - 물론 한 편으로는 알 수 없이 미묘하게 불안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 윌슨은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시선을 조금 더 던지자 그곳에는 체이스가 입으라고 개어둔 그의 옷이 있었다. 윌슨의 취향을 따로 잘 아는 것도 아닐 텐데 묘하게 마음에 드는 색상의 옷이었다. 베이지톤의 치노팬츠와 회색 맨투맨, 그리고 무채색에 가까운 푸른 계열의 재킷이었다. 체이스가 이런 옷을 입은 적이 있었던가...?
윌슨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하우스가 떠올랐다. 물론, 어제처럼 심하게 취한 적은 1년에 꼽을 정도였지만 그 옆에는 늘 하우스가 있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하우스가 이렇게 해준 적이 있던가? 요 몇 년 전, 그가 피곤함에 취했을 때 오히려 장난을 친답시고 그의 손을 물에 담근 적은 있어도 그가 취했을 때 이토록 돌봐준 적은 없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돌봐주는 건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 그런데 뒤돌아 생각해 보면, 자신은 몇 번이고 그런 적이 있지 않던가.
'친구라는 건 참 좋은 핑계 같아요.' 언젠가 체이스가 그렇게 말했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친구 이상이면서 연인 미만이라고. 옆에 있기 위해서 댈 수 있는 가장 좋은 핑계잖아요. 만일 이루어지지 않아도, 언제나 옆에 있으니까.' 그러더니 더 덧붙여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서로가 대칭이면 연인이 되지만, 비대칭이면 친구로 남는 거죠. 한쪽은 받기만 하고 한쪽은 주기만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결국 주는 쪽은 지치게 마련이죠.'
물론, 윌슨도 알고 있다. 체이스가 그에게 보이는 것은 '우정'그 이상이었다. 언제나 조심스러웠지만, 체이스가 보이는 우정에는 늘 그런 구석이 있었다. 자신을 과도하게 배려하고 모르는 사이에 젖어들게 하는 그런, 계략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체이스는 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일까? 직접적으로 묻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새 윌슨이 생각하는 체이스와의 관계는 그런 걸 물어보기에도 너무 어려운 관계가 되어버렸다. 하우스가 자신을 피하고 있는 지금, 그에게는 이 상황을 헤쳐갈 동반자가 절실했다. 하우스는 늘 그런 점에서 배려가 없었다. 아니, 차라리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여차 하면 보지도 않을 사이. 하우스가 보이는 태도는 그러했다. 장난을 치고 놀리고 우습게 만들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지만 그 외의 타이밍에서 그는 늘 능구렁이같이 상황을 빠져나갔다. 자신도 차라리 체이스처럼 용의주도하기라도 했다면 하우스로부터 결단을 지을 수 있었을까. 윌슨은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지나치게 쓴 맛이 났다.
프린스턴 플레인스보로의 진단학과 사무실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진료실엔 겨우 똘마니와 체이스뿐이었지만 그런 기류가 흐르는 주된 이유는 하우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뻔했다. 체이스는 속으로 천천히 웃으며 아까 전 내린 블랙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애덤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늘 윌슨 박사님 보신 분 있어요?"
"아니, 전혀." 타웁은 관심 없다는 듯 커피를 들이켜다 곁눈질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좀 아는 거 있어?"
"저요?" 체이스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물었다. 시선은 타웁에게 돌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야 윌슨 박사님과 제일 친한 사람이 자네니까 그렇지. 하우스 박사님 다음으로 자네가 가장 잘 알잖아?"
"무슨 말을..." 말을 흐리면서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체이스가 슬쩍 웃어 보였다. 다행히 그가 커피를 들이켜던 중이라 그 미소를 알아챌 사람은 없었다. "혹시 어디로 훌쩍 떠나버리신 거 아닐까요?" 닥터박이 은근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그런 게 안 된다니까." 타웁은 닥터박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예전에 '죽음의 기사들'이란 영화 봤어? 그 영화에서 나오는 죄수들은 죄다 전자팔찌 같은 걸 차고 있었잖아. 그리고 감옥 영역에서 벗어나면 전자 팔찌가 터져서 죽어버린다고. 윌슨 박사님은 그런 존재야. '하우스 영역'을 벗어나면 죽어버린다고.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죽음의 기사들이 뭔데요?"
"아, 그래... 이렇게 나오시겠다. 세대 차이가 확 느껴지게 해 줘서 고맙네." 타웁은 한심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이 주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체이스는 그 와중에 남아 있는 똘마니들의 표정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다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마 상사인 하우스의 심기가 조금 나아지기만 기다리겠지. 그는 속으로 알 수 없는 충만함을 느끼며 커피 향을 즐기고 있었다. 오늘 새벽, 윌슨의 옷을 벗겨내고 - 사실 그가 구토를 했다는 건 거짓이었다. 물론, 체이스는 그가 좀 더 편하게 잠들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 그의 양복을 빨래하고 - 이것은 윌슨이 또 한 번 자신의 집을 들러주길 바라서였다 - 윌슨이 곤히 잠든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음식을 준비하고... 사실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체이스는 잘 알고 있었다. 윌슨은 결코 가벼운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돌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윌슨이 자신의 집에서 깨어나 당황하거나 화를 내길 바라지 않았다. 요컨대 이런 신호였다. 당신이 힘들 때 내가 얼마든지 받쳐줄 수 있다는. 한 편으론 어제 하우스가 보인 태도를 어느 정도 벤치마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외래 진료를 보면서, 체이스는 내내 윌슨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 시간 자체가 그에게는 즐거운 것이었다. 자신이 준비한 편지는 보았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토스트와 커피는 들었을까. 윌슨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옷을 잘 입고 와줄까... 병원에는 언제 즈음 도착할까. 무엇보다...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 윌슨에 관한 하나하나가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흐뭇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 와중에 하우스가 윌슨의 사무실을 찾아간 이유는 명백했다. 하우스는 어제 분명 윌슨 박사가 자신을 피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그 세단 안에 자신이 운전하고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겠지... 자신이 내치고 버릴 땐 언제고, 한 번의 거절로 감정이 휘몰아쳐서는 어리광이라도 부리려고 그의 사무실을 찾아간 걸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라도 있는 걸까. 그래봤자 윌슨 박사님은 여기 없지만. 체이스는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문득 어제 보았던 그 말보로의 타들어가는 붉은 불빛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체이스가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진단실 문 밖에는 익숙한 남자가 낯선 차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윌슨이었다. "... 박사님?" 닥터박이 놀라서 바라보았다. 윌슨과 어울리지 않는 옷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윌슨이 입고 다니는 스타일과 달라서인지 사람들은 은연중 윌슨에게서 낯선 느낌을 받는 모양이었다. 체이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윌슨을 구슬려서, 윌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보듬어주어서 그가 조금씩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는 게 너무나 기특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잠시 그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의 즐거움도 잠시,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그 와중에 또 한 남자가 진단실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저 멀리서부터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방금 전, 윌슨의 사무실로 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굳어보이고 화가 나 보이던 얼굴이 이제는 뭔가 잃은 듯한 표정이 되어있다. 하우스는 기어코 문을 열고 진단실 안으로 들어섰다. 똘마니들과 이야기를 하려던 윌슨이 그들의 기색을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불과 5일 전까지만 해도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이, 너무나 낯선 공기 속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하우스..."
".. 못 보던 옷이군."
하우스는 그 말과 함께 다시 사무실을 나섰다. 어째서인지 윌슨은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다만 똘마니 중 애덤스가 그를 뒤따라갔고, 나머지는 영문도 모른 채 황당하여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윌슨은 뭐라도 잘못한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무도 윌슨에게 쉽게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윌슨은 어딘지 모르게 망연자실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체이스와 있을 적에는 그런 기분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하우스가 자신에게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었던가..? 그동안 자리를 피한 건 어느 정도 이해한다 쳐도, 이 정도였던가...? 생각할수록 가슴이 조여 오는 것처럼 아파왔다. 손 발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마저 들자 윌슨은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타웁은 바로 눈치를 채고 체이스의 등을 쳐준 채로 닥터 박을 데리고 진단학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내 사무실에는 체이스와 윌슨, 두 사람만 남았다.
14.
"이유라도 말해주셔야 하지 않나요?" 애덤스가 하우스를 뒤따라가며 말했다. 하우스가 열심히 지팡이질을 해가며 도착한 곳은 기껏해야 병원 내의 카페테라스였다. "왜, 여기서 바로 외래진료실로 바람이라도 피우러 들어가자고?"
"농담은 그만하시고, 이야기 좀 해주세요." 애덤스가 보챘다. 하우스는 자연스레 그녀를 옆으로 끌어들여 카페테리아의 블랙커피를 주문한 뒤에야 하우스는 말문을 열었다. "저기라도 앉을까?"
"이제 이야기 좀 해주시겠어요? 제가 커피 값까지 내드렸으니까 해주셔야 해요." 애덤스는 커피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자네 눈에는 내가 윌슨과 한 판 한 것처럼 보이나?"
말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애덤스는 일단 이유가 알고 싶어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네, 정정하자면 한 판 '싸우신 것'같아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난 윌슨하고 싸운 게 아냐." 하우스가 말했다. 보통 이런 말을 할 때였다면 그는 입술을 비죽이며 상황을 조롱하듯 비웃었겠지만 이번엔 그러질 않았다. 말을 듣던 닥터 애덤스는 갸우뚱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왜 피하시는 건데요?"
"내가?" 하우스가 놀란 듯 말했다. "농담 그만하시라니까요..." 애덤스는 옆에 있던 설탕을 집어다 자신의 커피에 부었다. "요 며칠간 박사님이 명백하게 피해 다니셨어요. 윌슨 박사님이 저희 사무실에 얼마나 자주 찾아오셨는지 아시잖아요..."
"내가 보기엔 체이스랑 놀러 다니느라 코빼기도 안 보이던걸."
"설마.. 지금.." 애덤스는 하우스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애덤스가 비웃을 차례였다. "질투... 하시는 거예요?"
"와, 드디어 나왔네, 어머 몰라. 자기도 알았구나?" 하우스가 오버액션을 하며 자신의 손을 가슴에 얹고는 애덤스에게 손짓을 해댔다. "재미없어요." 애덤스가 금세 표정이 풀어지며 말했다. "근데 정말 그런 생각 안 해보신 거예요?"
"뭐, 내가 윌슨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환상 말인가?"
"아니요... 제 말은..." 애덤스는 잠시 조심스러워진 듯 고개를 죽 빼며 말했다. "그... 닥터 체이스랑... 윌슨 박사님이랑..."
이번엔 하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그..." 애덤스가 말을 이으려다 하우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거의 요추천자급의 불만이 찬 얼굴이었다. 아니면 루푸스가 맞다고 할 때의 얼굴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하우스의 심기가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더 이야기하다간 제가 힘들어지는 전개네요, 그렇죠?" 애덤스가 말했고, 하우스가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대신 전 포어맨에게 갈 거예요. 원장님에게 가는 건 아무도 막을 수 없으니까요." 애덤스가 말을 남기고는 커피를 내려 둔 채로 떠나가버렸다. "자네 월급에 내가 어느 정도 꽁칠 수 있는 거 알지?" 하우스가 외치듯이 말했다. 닥터 애덤스도 참 성가신 존재였지만 그 조차도 사라지니 소란과 허전함이 그를 감싸왔다. 이렇게 되면 늘 하우스는 진실에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요전에는 쉬웠다. 윌슨이 늘 가져다 보여주던 그것은 피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버리면 그만이었다. 마치 꿈속의 일처럼, 윌슨은 늘 그런 일이 있고 다음날부터는 다시 전처럼 하우스를 대해줬다. 도망칠 때에는 불안한 마음이지만, 늘 그런 윌슨의 반응을 보면 안도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흔해지면서 별 것 아니게 되어버렸다. 단순하고 변치 않는 루틴.
윌슨의 마음을 모른다고 하면 지능이 떨어지는 거다. 한참 전부터, 지긋지긋할 만큼 오래전부터, 하우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은? 없다. 그 마음을 알아챈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우스는 한 발 자국도 그 생각을 진전시키지 않았다. 이유라면? 그래도 되었으니까. 그래도 윌슨이 곁에 있고 그렇더라도, 하우스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찾아 사랑을 하거나 콜걸을 부르거나 때로 윌슨을 시켜서 맥주나 먹을거리를 사 오게 할 수 있었으니까. 모두 다 가진 채로 가운데 눌러앉아서 보내는 삶은 꽤 괜찮았다. 원하는 치밀함이야 진단을 하고 나면 기진맥진할 정도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으니까. 기껏해야 늘 곁에 있는 친우 마음 같은 걸 들여다봐서 골치 아파지는 것 말고 무엇이 더 있을까? 거기서 늘 생각은 끝이 났다. 그 책의 페이지는 거기가 마지막이었다. 더 풀거나, 더 써볼 마음조차 없었다. 불편하고, 더럽고 축축하고 상해버린 마음. 그 끝 페이지.
하우스가 이렇게 홀로 있는 때면 늘 그렇게 된다. 그 책의 오래도록 닳고 닳아 상할 대로 상해버린 마지막 페이지를 기어코 들춰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무엇이 들었을까. 그 안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슬픔과, 부담스러울 정도의 기쁨과 징그러울 정도의 수줍음과 그 외의 수만 가지 것들이 들어있겠지... 자신이 그동안 누리면서 미뤄온 책임감 같은 것들이 말이다. 짊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사람은 불붙은 돈이라도 꼭 손에 쥐고 버티는 법이다. 윌슨은 그런 존재였다. 하우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 역할'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머지 칸들은 다 저마다의 위치가 있었고 커디도 그러했다. 하우스가 늘 바라던 '여자친구'의 칸에 딱 걸맞은 여성. 물론 자신의 마음처럼 되진 않았지만. 세상 누구라도 윌슨처럼 쉽게 다룰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들춰보지 않는 그 '더러운 페이지' 덕분인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는 더 알 수가 없었다. 늘 그랬듯 어차피 하우스는 그걸 들춰보기 전 능구렁이처럼 빠져갔으니까. 물론 이 시점에서는 윌슨이 자신에게 늘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고, 다시 관계가 시작되는 패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둘 사이에 빌어먹을 체이스가 끼어들고 말았다.
하우스가 요 며칠간 윌슨을 피해 다녔던 것은 사실이다. 체이스가 한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걸 왜 체이스가 신경 쓰느냐였다. 체이스가 윌슨에게 그렇고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동안 자신이 그런 체이스의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하우스에게는 더욱 충격이었다. 분명 이때만 해도 윌슨을 찾아가 체이스에 대해 한껏 뭉개며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빌어먹을 호모 자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다음날, 하우스가 윌슨을 찾아갔을 때 뒤늦게나마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 하나는 하우스의 충격이 체이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어느새 카페테리아에 체이스와 다정하게 앉아 심각하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윌슨을 보았을 때 하우스는 알 수 있었다.
윌슨에게 자신 외의 다른 남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윌슨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물론, 하우스가 윌슨에게 체이스가 개자식이라느니 빌어먹을 호모자식이라느니 내뱉어도 윌슨은 얼마든지 들어줄 터였다. 그러나 늘 하던 일을 반복한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터였다. 윌슨에게 누군가가, 특히 다른 남자가 생긴다는 걸 신경 쓰는 자신도 짜증 났고, 윌슨의 옆에 끈덕지게 붙어서 가끔씩 훔쳐보는 자신에게 눈길을 던지는 체이스는 더 짜증 났다. 그래서 하우스는 늘 하던 대로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시간이 흐르고 나서 하우스는 윌슨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니, 더 정확히는 - 늘 하던 패턴대로 윌슨이 자신을 찾아오는 시점에 그가 더 편할 수 있게 그의 집 앞까지만 가준 것뿐이다.
하지만 그날 밤. 이상할 만큼 윌슨이 모는 볼보 세단은 차갑고 냉정했다. 한 동안 갈등을 하듯 자신을 노려보고 헤드라이트만 켠 채로 기다리더니, 창문을 열거나 문을 열고 내리는 것조차 없이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화를 내고 받아줄까 하는 마음으로 불을 켠 말보로 레드가 성급하게 타들어갔다. 방향을 비틀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세단을 쫓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문짝을 열고 흠씬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 수록, 어째서 윌슨에게 말을 걸기가 더 힘들어지는 걸까.
자신을 무시하고 떠나간 것도 모자라 오늘은 못 보던 옷까지 입고 왔다. 분명 체이스가 마련해 준 옷이겠지. 그렇다면, 설마...
하우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어딘지 모르게 깊은 구덩이가 한없이 깊어지면서 날카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축축하고, 더럽고 낡아버린 페이지. 그 안에서 숨어있던 절망이 슬금슬금 기어 나와 자신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것만 같았다. 온통 윌슨의 바람으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던 그 페이지를 조금 들춰보자 나타나는 것은...
순간 하우스는 자신의 저는 다리를 세게 내리쳤다. 카페테리아의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의 소음과 분위기가 다시 하우스의 곁으로 돌아왔다. 허전함은 그대로 남았지만, 이럴 때만큼은 빌어먹을 다리 통증이 그가 도망치는 걸 도와주기도 한다.
15.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포어맨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였다. "내 말은, '오래된 의사 선생님들 보모노릇' 이야기하는 거야."
"장난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애덤스가 말하였다. "저희 이러다간 정말로 진단업무를 손에서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대충 짐작은 가는데 어, 음..." 포어맨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이마를 긁으며 말했다. "당장 꺼내려는 이야기가 하우스 박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1시간이라도 들어줄 의향이 있거든?"
애덤스가 말이 없자 포어맨은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 쓸어내렸다. "하긴, 진단실에서 하우스 박사님 빼고 자네들이 무슨 짓인들 저지르겠어. 대부분은 그런 걸 우리가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잖아?"
"문제는 그게 '개인적'으로 처리가 되고 있지 않다는 거죠." 애덤스가 반박했다. "잘은 몰라도 하우스 박사님과 윌슨 박사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정 진단에 어려움이 있다면 자네들끼리라도 진행을 해보는 게 어때? 당분간 외래진료라도 빼줄 테니 말이야." 어깨를 들썩이며 포어맨이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당장 '진단학과 분리에 대해 발설하지 말 것'이라는 것만 들어있었다. 분명 하우스와 윌슨 두 사람은 그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일 테고 이런 상황까지 이들에게 이야기해 줬다가는 분란만 더 일어날 뿐이었다.
"원장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는데..." 애덤스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한 가지는 확실해." 포어맨이 팔짱을 끼며 말하였다. "자네들이 고생하는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을 거야. 이것 하나만큼은 장담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애덤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리더는 실력만 갖고는 안 되거든. 그동안 누적된 문제로라도 우리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설마 하우스 박사님을 내치려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하우스 박사님이야말로 이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의 가장 주요한 자산이야." '자산'이라는 말에 애덤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아, 그래요. '자산'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런 말을 하신 이유가 뭐죠?"
"뭐 조치를 취한다는 것뿐이야. 어쨌든 하우스 박사님도 범법자이긴 하니까."
"제가 원하는 건, 중재예요. 그냥 하우스 박사님과 윌슨 박사님 사이를 중재해 달라는 거라고요."
"자넨 모르겠지만 저 둘 사이는 내가 이 병원에 오기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어. 내가 한 번 중재한다고 달라질 문제가 아니야."
"부탁이니 한 번이라도 이야길 해주세요."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하지..." 포어맨은 다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따로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