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웬일이죠? 별일이 다 있네요."
모퉁이 술집으로 가자고 불러낸 건 체이스가 아니라 윌슨이었다. 그는 여느 때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서 체이스를 찾아왔다. 사실 혈전 문제로 다리를 절고 광대뼈에 타박상까지 입은 환자더러 같이 술이나 먹자고 하는 것처럼 무례한 일은 없겠지만 체이스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유감이지만 전 술은 패스할게요. 그 대신 옆에서 얼마든지 말동무가 되어드리죠."
하우스가 돌아온 지금, 윌슨이 또다시 자신과 바를 함께 가줄 거란 생각은 못 했지만 어떻게 본다면 아까 하우스와의 정면승부로 지금의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하우스는 현재 고뇌할 것이고, 함부로 다가오지도 못할 것이다. 체이스가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내비친 만큼, 윌슨에게 그런 일들을 마음 편히 내비칠 인간도 못 된다. 장난이라면 한없이 부끄럼을 감수할 줄 알면서, 진심이 되면 무엇 하나 감당해내지 못하는 머저리 같으니. 체이스는 윌슨에게 슬쩍 부축을 부탁하면서 그의 체취를 슬며시 맡아보았다.
모퉁이 술집은 평일이라 한산했다. 이내 두 사람의 머리칼이 같은 붉은빛으로 비칠 만큼 어두워졌다. 잔에 담긴 진을 흔들면서 윌슨이 말을 머뭇거렸다. 아마도 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질 게 분명했다. "오전에 있었던 일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체이스는 짐짓 뜸을 들였다. 그는 자신이 술을 먹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술을 마셨더라면 조심성을 잃는 바람에 대뜸 바에서 윌슨에게 속내를 털어놓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제껏 그만큼 흐트러지게 마신 날이 별로 없지만... 오늘처럼 많은 것들을 넘어버린 날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우스 박사님은 뭐라시던가요?"
"사실, 그게..." 어째 아까보다 더 윌슨이 머뭇거렸다. "박사님은 지금 나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아. 자네도 알다시피 진단실에 하루종일 붙어있는 양반인데 내가 갈 때면 늘 자리에 없었어. 그만큼 자네와 나눈 이야기가 심각했다는 거겠지." 그 말에 체이스의 기분이 서서히 침잠하고 있었다. 그래, 역시... 윌슨은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니라, 하우스의 부재가 초조해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게 무슨 내용인지 밝혀내고, 하우스를 찾아가 해결하고 다시 좋은 '친구'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거겠지... 뒷맛이 쓰다는 걸 느끼면서도 체이스는 최대한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최대한 고민했다.
"이야기하기가 어렵네요..." 그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와중에 그를 바라보는 윌슨의 눈빛이 반짝였다. 고약한 생각이었지만 이 타이밍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 "실은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진단학과를 분리하고 싶다'라고."
그 붉은 조명 아래에서도 윌슨의 두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비슷한 여파를 불러오기에 충분한 주제였다. "어째서..? 자네는 박사님을 도우면서 일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갑작스레 그런 이야기를 하면..."
"박사님도 충분히 아시겠죠... 이미 하우스 박사님은 진단학과를 무너뜨린 전적이 있어요. '개인적인 감정'이 대참사를 불러왔고, 이미 그 경력에도 금이 가버렸죠. 박사님이 수감되어 있던 동안 진단학과가 정말 모두 무너졌던가요? 프린스턴 플레인스보로가 문을 닫았나요? 천만에요. 지난 시간 동안 진단실에서 가장 많이 있었던 사람은 저와, 박사님이었어요. 우리 둘 만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해 왔다고요. 그리고..."
체이스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윌슨의 손을 바라보았다. "저도, 감당하기 힘들어요. 이제는 하우스 박사님의 기질이 어디까지 뻗칠지 알 수가 없어요. 아시잖아요..." 말 끝을 흐리며, 체이스는 다시 윌슨을 바라보았다. 설득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그 특유의 표정이 모두 풀린 채 체이스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박사님이라면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시겠죠..." 체이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가져다 윌슨의 손에 포개두었다. 윌슨이 슬쩍 놀랐다.
"하우스에게 이 진단학과가 정말로 맞는 걸까요?" 질문이 너무나 생경해서인지, 윌슨은 손을 빼지 않았다. 체이스는 짐짓 느껴지는 윌슨의 손 감촉에 미묘한 기류가 자신의 몸으로 흐르는 걸 느꼈다. 아까 전 그의 다갈빛 머리에서 나던 향기가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 자네 말은, 하우스가 진단학과랑 맞지 않는다는 거야?"
윌슨이 정신을 차리는 듯한 느낌이 들자 체이스는 짐짓 자신이 먼저 포갰던 손을 떼었다. 윌슨이 손을 뺀다면 너무나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명석하시죠. 뛰어나시고요. 하지만... 그게 정말 하우스 박사님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요?" 윌슨은 그 질문에 동요하고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하우스의 성격과 매번 발생하는 환자들의 알 수 없는 병명, 그리고 무엇보다... 하우스의 부재 동안 윌슨이 봐온 체이스의 실력은 꽤 출중했다. 하우스를 완전히 교체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대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진단학과에서 꼽자면 가장 뛰어날 정도였다. 다른 어느 것보다 그의 뛰어난 실력과 신뢰가 윌슨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하우스를 향해 강렬하게 열망하던 그 마음은 어느새 낡고 나이가 들어서 그저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물고 있었다. 그 옆에 자리할 수 없다는 슬픔이 깊게 박히고 나서는 더 체념하듯이 그렇게 변해갔다. 커디와의 열애도, 그 끝도, 자신의 골절된 손목도... 무엇 하나 지지해주지 않는 이 삶 속에서 그나마 윌슨이 조금 바라는 게 있다면 하우스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반드시 하우스가 진단학과에 있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닐터다.
11.
"하실 말씀이라는 게 그건가요?"
"아니, 일단 요청은 아니야. 단지 그런 계획이라도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뿐이지."
"박사님도... 참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하시네요. 얼마 전에 진단학과에서 소란 난 것은 아실 테고..." 포어맨이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주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니... 실은." 포어맨은 특유의 살짝 터지는 웃음을 내비쳤다. "이사팀이 그 말을 들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겁니다. 어쩌면 진단학과 그 자체도 박사님이 말씀하신 일을 오래전부터 대비하는 장치이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실제로도 이사회에서 진단학과를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건가?"
"말하자면 그런 겁니다 말하자면." 포어맨은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맞잡았다. 신뢰감을 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까지는 언제나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라고 말하는 것뿐이죠. 하지만 전 꽤 괜찮은 일 같습니다. 물론, 분리하는 작업 자체가 골치 아프기 때문에 아까 그런 이야길 한 것이지만요."
"그럼..." 윌슨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만일 진단학과를 분리한다면 과장은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나?"
"정말로 질문하시는 건가요?" 포어맨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당연히 닥터 체이스죠. 지금 그를 따라올만한 진단학자는 없어요.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타 병원에서 세미나 형식으로라도 잠시 닥터 체이스의 도움을 얻으려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어요. 문제는 본인이 그걸 다 내치고 있다는 거죠. 제가 이 병원의 병원장이 아니었다면, 당장 그 친구에게 존스 홉킨스로 가라고 충고했을 겁니다."
"그럼 만에 하나 진단학과를 분리하게 된다면..." 윌슨의 눈빛이 짐짓 아련해졌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포어맨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우스 박사님 말인가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진단학과 '부수고 새로 만들기'가 아니라 '분리'니까요. 아마 박사님도 좀 더 전문적인 영역에 집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포어맨이 그런 말을 해봤자 사실 윌슨이 고민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이 병원은 늘 이런 식이었다. 부서의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거나 감당할 수 없는 인력이 있다면 부서를 둘로 가르고 서서히 한쪽에 힘을 실어주다 힘이 없어진 부서는 알아서 축소시키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아시잖아요, 박사님." 대뜸 포어맨이 말하였다. "저도 여기 있으면서 하우스 박사님이 얼마나 힘이 되고 또 얼마나 짐이 되는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떠나더라도 병원의 인력 구조는 안정되어야 해요. 아무리 저라도 요 근래 일어난 일들을 모두 수습하는 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겁니다. 박사님과 하우스 박사님의 우정은 저도 익히 잘 알지만... 박사님이 말을 꺼내지 않으시더라도 언젠가는 그런 일이 벌어질 거예요. 그리고, 저도 한 병원의 원장으로서 닥터 체이스와 같이 우수한 인재를 외부에 빼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떤 수단이든 동원해야 하니까요. 신규 진단학과 과장이라면 적절할 거라고 봅니다 저는."
"아 그리고." 포어맨이 덧붙였다. "윌슨 박사님도 그 수단 중 하나라고 전 생각해요. 박사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닥터 체이스가 윌슨 박사님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나중에 몬스터 트럭이라도 같이 보려는 건지." 뒷말은 흐리면서 웃어댔지만 윌슨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12.
하우스의 일방적인 주먹다짐이 있고 난 뒤 약 5일 동안, 체이스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하우스가 일방적으로 윌슨을 피해 다니는 만큼 윌슨이 체이스를 찾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만큼 두 사람이 가까워질 일도 많아졌다. 그 시간 동안 체이스는 윌슨과 사흘 정도 늦은 밤 바를 들러 깊은 대화를 나눴다. 체이스는 윌슨이 병원에 도는 소문과 달리 연애경험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3번이나 결혼한 것에 대해 들먹이면 심심찮게 웃어 보이던 그였지만, 앰버 이야기가 나올 때면 조금 숙연해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앰버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내기보다는 도리어 기억해 줘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침에 마신 커피의 원두부터 마음속 깊이 숨긴 이야기까지 모두 꺼내놓았지만 체이스는 부러 하우스의 이야기만큼은 꺼내지 않았다. 하우스가 감옥에 있던 지난 시간 동안 그가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면, 그 단어가 윌슨의 돌발행동을 유발하는 촉발제이고,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들어갈 틈을 만들려면 그런 촉발제는 가장 피해야 할 요소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윌슨이 하우스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그런 일도 있었지.” 윌슨이 추억에 젖어 말하였다. 그는 이미 위스키를 3잔 이상 들이킨 상태였고, 아마 어제처럼 체이스가 그 대신 차를 몰아 자신의 집까지 데려다줘야 할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무척 신이 나 있었다. 아마도 오래도록 하우스와 술을 들이켠 적은 많이 있었겠지만, 그중에 이토록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적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체이스는 가만히 그런 윌슨을 바라만 보았다. 그는 지난번 칼에 찔린 부상과 하우스 박사에게 얻어맞은 타박상 때문에 여전히 술을 한 잔도 하지 못했지만 체이스의 표정은 그다지 지루해 보이지 않았다.
“한 밤중에 연락을 해와서 늘 하던 대로 맥주랑 먹을 것들을 사갔더니, 그냥 돌아가라는 거야. 이유를 물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에서 한 여자가 나오더군.” 윌슨의 표정은 거기서 장난스럽게 일그러졌지만 체이스는 윌슨이 그 당시 어떻게 느꼈을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더니….” 거기서부터는 체이스가 이어나갔다. “또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백인, 흑인, 아시안계 이렇게 세 명 맞죠? 박사님 확실히 취하셨네요. 오늘에만 벌써 이 이야기를 세 번 하셨어요.”
“그래, 근데…. 날더러 음식은 두고 가라는 거야….” 윌슨은 말을 잇다 말고 죽상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저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잠든 거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체이스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윌슨이 나름대로 스스로의 슬픔을 돌보는 자세였다. 윌슨이 말없이 멈춰 있을 때는 그런 때였다. 하우스의 진료실을 나왔을 때, 반대로 하우스가 그의 진료실을 멋대로 나왔을 때, 어떤 때든 하우스가 그를 혼자서 둔 때는 그러했다. 이미 떠나간 아내들을 생각할 때에도 비슷했을 거다. 하지만 체이스는 여기서 더 자신의 이야기를 얹고 싶지 않았다. 체이스는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었다. 체이스 자신의 이야기를 얹지 않아도, 윌슨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윌슨은 자신의 마음을 서서히 체이스에게 열어가고 있다. 그 자신이 눈치도 채지 못한 사이에 하나둘씩 체이스에게 의지하게 되고 기대하게 된다. 이미 그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었다. 하우스가 자리를 피하자, 윌슨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체이스였다.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간다. 체이스가 자신의 마음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은 그 뒤에 하더라도 늦지 않는 것이다.
"또 내 이야기만 잔뜩 해버렸네, 자네도 할 이야기 없어?" 윌슨이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말하였다. 물론, 기회가 생긴다면 체이스도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흘려볼 마음은 있었다.
"음... 전, 박사님이 걱정이에요." 체이스는 가볍게 시작하고 싶었다. "요 근래 많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셔서... 더군다나 포어맨이 이야기해 주더군요, 진단학과를 분리하는 것에 대해서 박사님과 이야기했다고요. 그것 때문에 더 신경 쓰이시는 거 아닌가요? 이야기해야 할 것도 많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자네랑 이야기하고 있잖아." 한 이야기라곤 하우스와의 이야기뿐이면서도 윌슨은 그렇게 읊조렸다. 체이스는 저도 모르게 슬쩍 미소 지었다. "전 박사님이 저와 더 많이 이야기해주셨으면 해요." 체이스는 윌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단학과를 분리하는 데 있어서 하우스 박사님이 걱정되신다면... 얼마든지."
반 협박 같은 문장이었지만 윌슨은 도리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색이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든든한걸... 포어맨은 자네를 차기 부장으로 생각하고 있어. 진단학과를 분리한 뒤 새로 출범하는 쪽 과장 말이야. 지난번 자네가 목격했던 것처럼 하우스는 그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그리고 더 큰 사건들을 일으킬 거고... 난 정말 두 손 놨었어. 정말로... 눈에 밟히지만 않으면..."
"걱정하지 마세요, 박사님." 체이스는 지난번처럼 혼란을 틈타 윌슨의 손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다. "전부 문제없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게요."
윌슨이 놀라며 손을 빼거나 하진 않았지만, 낭패인 점은 체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윌슨이 테이블 앞으로 고꾸라졌다는 것이다. 체이스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전에 바텐더에게 술값을 지불했으니 남은 건 모퉁이술집을 나와 윌슨의 차를 몰고 그의 집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윌슨의 몸에서는 어딘지 모를 건조한 빨래향과 위스키 향이 났지만 체이스는 그 향이 싫지 않았다. 이미 술을 마시기 전에도 윌슨에게 운전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겨우 5일 남짓이지만 체이스는 이제 그의 차를 모는 것에도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체이스는 힘든 몸으로도 윌슨을 부축해 정성스레 그를 태우고 벨트를 매 줬다. 그리고는 운전석에 들어가 차키를 꼽고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3시.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서로 공유하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생각하니 체이스는 별다르게 피곤함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모퉁이 술집은 백미러에서 점점 멀어졌고, 두 사람이 탄 차는 그렇게 길을 벗어나 달렸다.
사실 윌슨의 집은 모퉁이 술집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이것 또한 체이스의 계획 중 하나였다. 맨 처음 윌슨과 갈 바를 고를 때부터 체이스는 윌슨의 편의를 고려했었다. 집에 있다면 나오기 어렵지 않고, 하우스의 집에 있어도 나오기 어렵지 않은 곳이면서 술맛도 적당히 괜찮은 곳을 고르느라 애를 썼다. 하지만 그게 큰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 멀리, 볼보 S80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현관 발코니 앞에 익숙한 한 남자의 그림자가 을씨년스레 비치어 보였다.
처음에 체이스는 자신의 눈을 믿지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양반이 맞았다. 지팡이를 기대 두고, 옆에는 바이크를 둔 채로 으레 입던 그 가죽재킷을 걸친 모습에, 심기가 불편할 때에나 피는 말보로 레드를 한쪽 입에 비틀게 문 채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지만 이 남자는 기다리고 있었다. 윌슨을. 체이스는 갑자기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하우스는 윌슨의 차를 향해 다가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차에 탄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체이스는 그 틈에 얼른 운전석 조명을 꺼버렸다. 밖에서 보았을 때에는 누가 운전석에 있고 누굴 태웠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체이스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하우스가 윌슨에 대해 가지는 '우정'이라는 것의 정체를 조금 알아볼 수 있었다.
하우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윌슨의 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꼬장을 부리는거라 생각했지만 그 마저도 아니었다. 바이크는 지금 체이스가 모는 볼보 세단을 주차하고도 남을 만큼 옆을 넉넉히 비워 세워둔 상태였으며, 시동조차도 꺼져 있었다. 이것은 마치 초대장 같았다. 하우스 스스로가 윌슨의 집 앞에 찾아온 것은 그와 갈등을 풀고 싶다는 표시이자,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을 다 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것은 윌슨을 위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선을 넘는 행위라는 듯이. 하우스는 도리어 초조해하며 윌슨의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찾아온 것에 응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우스의 저런 태도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윌슨이 생각하는 하우스라면 지난 며칠을 비롯해 하우스가 감옥에 끌려간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숱하게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하우스가 생각하는 윌슨은? 알 수도 없고 알 생각도 없다. 그러나 체이스가 긴장을 하게 된 건 바로 이 시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직 윌슨을 향해서 하우스가 보이는 저 '태도'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뭉개버리거나, 무시해 버리면 상관이 없을 텐데... 체이스는 지난 5일 동안 윌슨과 함께 하면서 가끔씩 느꼈던, 뒤통수가 뜨거웠던 기분을 상기시켰다. 아마도 그 기분을 자아낸 주인공이 저 발코니에 머무는 한 체이스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언제든 하우스가 쫓아올 것 같다는 불안과 함께 곤히 잠들어있다시피 하던 윌슨이 잠시 고개를 들자, 체이스는 순간적으로 차를 움직여 주택 진입로에서 도로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하우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체이스는 윌슨이 자신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하우스를 알아보게 될까 겁이 났다. 그렇게라도 된다면, 지난 5일간의 일은 물론 1년간 그가 쌓아온 이야기가 송두리째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 있다. 당장에 하우스가 돌아오고 나서는 보란 듯이 그렇게 되지 않았던가.
마음이 급해진 체이스는 곧바로 방향을 튼 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뭔가 훔치기라도 한 것처럼 연신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윌슨의 현관 발코니에선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칠흑으로 새카맸다. 다만 터무니없이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같던 말보로 레드의 붉은 불빛만이 타오르듯 잠깐 보였을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