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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02화

Another - 2

by 김뇨롱

6.



"어때요?"


"뭐가 말이지?"


"리사 커디요. 그녀가 하우스 박사님과 잘 지내고 있잖아요."


"그래. 그리고 바보 같게도 난 한동안 그게 박사님의 환각증상인 줄 알았지."


"요즘은 한가로우시네요."


"그래... 이제 박사님은 커디와 함께 몬스터 트럭을 볼 테니까. 이젠 필요 없어."


"행복해지길 바랐었잖아요." 체이스는 말하면서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 내가 말했었잖아요..."


"아냐. 사실이야. 그는 많이 행복해졌어. 하우스는 분명 그럴 거야. 단지 난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좀 더 남겨두었어야 했던 거야. 그 이상은 나쁘지 않아."


"납득시키려고 하지 말아요." 체이스가 말하였다. "어때요? 오늘은 한 잔 할 수 있지 않아요? 아주 잘 아는 바가 있는데 어때요?"


"그래, 그거 참 다행이네."


윌슨을 바라보며 체이스가 어깨를 잡았다. "이런 거죠. 당신이 힘들면 내가 돕는 거예요. 나쁘지 않잖아요."


윌슨이 고주망태가 되어 체이스에게 들려온 건 새벽 다섯 시가 넘는 시각이었다. 그즈음에 갑자기 하우스에게서 온 메시지가 울렸지만 맥주를 사 오라는 식의 말에 화가 나서 체이스는 그것을 지워버렸다.




7.



"박사님이 결국 잡혀갔어요."


"듣고 싶지 않아." 윌슨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죠? 여길 나갈 건가요?"


"왜지?"


"하우스는 이곳의 실세였어요. 감염의학 권위자로 여기에 군림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죠. 그의 존재 자체가 이곳의 가치를 높여줬었으니까... 더 이상 프린스턴 - 플레인즈보로는 경쟁력 있는 병원이 아니죠. 벌써부터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어요."


체이스가 말하다 그를 바라보았다. 화가 난 듯 하지만 침착한 눈빛, 여전히 잡고 있는 의자 팔걸이가 유난히 신경 쓰였다. "갈 생각이 없군요... 그렇죠?" 그 말에 윌슨이 그를 바라보았다. "구속된 그 시점에서 다시 돌아올 때 즈음이면 가석방 요청서에 사인할 사람이 필요할 거고, 만일 그게 아니더라도 위원회 소집뿐 아니라 나중에 다시 찾아올 적에 주변제한으로 당연히 하우스가 이곳에 다시 자리를 잡을 테니... 당신, 기다릴 생각이군요."


이제 윌슨은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동정이 아냐... 그렇죠? 헛된 희망, 짝사랑이잖아요. 그동안 좋지 못한 것, 상처만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도 모르겠어요? 불가능해요, 하우스는...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제발, 그냥 나가줬으면 좋겠어." 윌슨은 견딜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냥... 나가줘."


"술... 너무 자주 마시지 말아요. 골절된 부위가 다른 곳에 부딪힐지도 모르니까... 풀 땐 나에게 와요." 그 말을 끝으로 체이스는 문을 닫았다.




8.



그 후로 1년간, 두 사람은 자주 왕래했다. 하우스에게 깊이 실망하고 상처받은 윌슨은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고, 똘마니를 비롯하여 체이스도 병원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한 때 진단학과의 짜릿함을 맛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체이스는 사뭇 윌슨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우스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집을 방문한다던가 혹은 그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우스만큼 윌슨도 친구가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체이스에겐 여유가 많아졌다. 적어도 그는 하우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1년이 지났다.. 훌쩍, 두 사람 간의 작은 일도 스쳐갔다. 낯익은 발걸음과 음성이 병원을 증식했고, 곧 윌슨 박사도 동요되었다.


그의 기다림이 끝났다.





8.


하우스가 돌아오게 되면서 그가 가장 먼저 치른 일은 윌슨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커디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고, 더구나 그녀가 아예 병원장직을 내놓고 사라지면서 그가 아는 어느 누구라도 다 윌슨 같을 수는 없다는 소기의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딴에는 잠시 기대도 했었고 꿈에도 얼굴을 본 것 같았지만 면회를 온 차기 병원장이 포어맨이었던 까닭에 병원에 와서 꼬장을 부릴 인간이 없어진 탓이기도 했다.


체이스는 그 소식을 바에서 처음 접했다. 윌슨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는 하우스의 감형과 석방에 다소 도움을 주고 있었고 그 일을 알게 되는 건 다름 아닌 체이스였다. 무엇하나 다를 것 없던 여느 늦겨울의 바에서 스카치를 들이켜다 말고 윌슨이 중얼거렸다.


"... 혹시, 다시금 진단학과에서 일해볼 생각 없어?"


그 말에 잠시 의아해서 잠시 멈췄던 체이스는 다시금 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글쎄요... 근데 그건 왜요?"


"만에 하나... 정말, 만약에 하우스가 돌아온다면... 그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자네도 알다시피 캐머론은 응급실에 있고 포어맨은 현병원장이니 적정 시간을 빼낼 수가 없어. 오래전부터 일해온 동료이기도 하고, 감도 좋으니까. 어떻게 생각해?"


체이스가 딴지를 걸었던 건 하우스의 귀환이 아니라 윌슨의 제안이었다. "동료라... 물론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분명 하우스는 동료였죠... 아니, 그보다 더 높은 직장 선배였죠. 하지만 그는 지금 범법자예요, 윌슨박사님.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일으키고 도주하다 붙잡혔다고요. 그런 사람과 어떻게 일을 하란 거예요? 사라진 진단학과를 회생시킨다면 차라리 제가 이끌 겁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체이스의 말을 들으며 윌슨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물론 윌슨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 상식선에서가 아니라 단지 윌슨의 평소 상태로 보아서 - 그렇다 해도 다시금 그 의사가 병원에 돌아온다는 경우라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잘하면 다음 주 중에 올 것 같아. 물론... 지금 문제로 올라온 폐 때문이기도 하고... 포어맨이 적극적으로 인사에 제출했으니까. 조만간 정말로 진단학과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만일 그가 나타난다면 날 죽일 겁니다." 체이스가 자신의 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댔다. "...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더 무모해지고 더 공격적으로 변할 테니까. 만일 돌아온다 해도 전 투입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던 것이 불과 한 달 전... 체이스가 칼을 맞고, 이전의 모든 상황이 변했다. 그가 며칠째 되지도 않는 원나잇스탠드를 시도한 끝에, 아침부터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하우스였다. 그는 신랄한 말들로 그를 들먹이고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짜증 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체이스를 결정적으로 병원까지 이끈 것은 하우스가 아니라 그의 전화기에 기록된 윌슨의 부재중전화였다.




9.


체이스가 병원에 온 시각은 하우스보다 이른 때였다. 그는 하우스의 될 법도 없는 회유를 뒤로하고 문을 닫자마자 화장실로 향했었다. 그가 마침내 며칠 만에 윌슨의 사무실문을 열고 지팡이를 짚은채 문에 기대었을 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윌슨이 있었다.


체이스가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윌슨 박사님."


"... 닥터 체이스..." 윌슨은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아마도 절게 된 한쪽 다리와 며칠간의 생활을 보여주는 잘은 수염 때문 일 것이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여기에요." 체이스가 X레이 표본을 가져와 택에 꽂아 놓았다. 윌슨은 한동안 그 표본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러나 체이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터라 의식의 반은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저기..." 말을 꺼내온 쪽은 윌슨이 아니라 체이스였다. 윌슨은 그저 바라보았다. "수염 난 게 부담스러운가요?"


아니면 지팡이가...? 윌슨은 그제야 자신이 왜 체이스를 의식했는지에 대해 깨달았다. 정리하지 않은 잔수염과 저는 다리, 그리고 지팡이가 영락없이 하우스를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체이스를 호출할 적엔 이렇게 되어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윌슨은 난감한 표정을 했다. "글쎄... 적어도 그것 때문에 호출한 것은 아니야."


"저도 알아요, 하우스박사님과 비슷해 보인다는 거..." 체이스가 견본으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아시다시피 저도 하우스박사님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네요. 박사님 그런 표정으로 보는 게 처음이니까요." 윌슨은 그 말에 잠시 바라보다가 견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럴 수가, 둘이 어디 있었던 거야?" 언제나 그렇듯 하우스가 능청맞은 말을 늘어놓으며 등장했다. 체이스는 그를 보자마자 말을 정리했다. "윌슨 박사님, 의견 잘 들었습니다. 그럼..."


순간 나가려는 길목으로 하우스가 지팡이를 세워 체이스의 앞을 막아버렸다. 그가 자신의 진단에 대해 의견을 늘어놓았지만 체이스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하우스의 지팡이를 거두고 내실 입구를 거의 벗어났을 즈음에, 자신에게로 쏠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자네 말해보도록 하지." 하우스가 개인적으로 불러내 그를 앞에 두고 중얼거렸다. "그냥 이번 일 때문에 날 원망하던가... 아니면 그냥, 날 치던가."


하우스가 바라본 이 호주 출신 의사는 여전히 처음 봤을 때처럼 외견상 변한 구석이 거의 없어 보였다. 얼치기, 머저리... 삼 남매 중 가장 진단에서 헛발질 잘하고, 헛짓거리 잘하고, 가장 멍청한 의사... 하지만 그는 달라졌다. 하우스도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가장 무식한 방법으로 이 햇병아리 의사는 진단학의 실태를 익히고 있다. 몸으로 느끼고, 본능적으로 감별한다. 오랜 세월 겪어왔던 진단학과에 대한 '경험'이야말로 이 10년 차 의사를 훌륭한 진단학자로 키워낼 밑거름인 것이다. 최근까지의 행보를 보건대 여타 병원의 진단학과 과장자리를 주더라도 손색이 없을 인재감이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무얼 하든, 뛰어나다는 것은 실상 감정적으로 어떤 것도 보상하지 않는다.


"... 사실은, 좀 다행스럽습니다." 체이스의 대답이 일순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었죠. 감염의학에 뜻이 있고, '진단'을 하고 싶다고... 그래서 여기 들어왔죠. 그래서 박사님 아래에서 배웠고요. 어느 순간엔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프린스턴 플레인즈보로의 '진단의학자'를 '진단의학과'로 만든 이유는 결국 그를 대체할 수 있을만한 젊은 의사를 필요로 하는 거라고... 어떠세요? 수많은 시간이 흘렀고 제가 가장 오래도록 머물렀어요. 전 이 병원 내 진단학과의 한 부분이자 시간이죠. 역대 병원장을 지금까지 교체하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수많은 머저리짓을 없앨 수 있는 훌륭한 방책이죠. 권위적이지만 제멋대로인 진단의학자를 대체할 수 있을 젊고, 훌륭한 진단의학자...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한 동안 하우스는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그가 세명의 똘마니를 거느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질책하고, 가르친 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저능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문제는 아까 전 자신이 생각하고 인정했던 체이스의 실력이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체이스는 그보다 젊고 무엇보다 '이성적'이다. 이 호주 출신의 햇병아리 의사가 어느덧 진단의학에서 잔뼈가 굵은 실력자로 변모했다. 가장 무서운 사실은 그 스스로가 의학지식 그대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체이스에게 그의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것이고 그 사실은 어느 순간엔가 그가 필요 없어지게 되는 시점이 찾아오며 언제든 그 자리를 체이스가 대신할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오랜 시간 동안의 사고 끝에 나온 것은 결국 덧없는 헛웃음이었다.


"농이 지나치군." 매끈하게 새어 나온 음성 같지만 사실 하우스는 그 말을 겨우 끌어내야 했다. "진단학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기껏해야 자네가 좀 더 괜찮은 '성품'을 지녔거나 하찮은 의학지식 몇 가지를 안다고 해서 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물론 저 혼자서는 무리겠죠." 체이스가 슬쩍 웃어 보였다.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 절대적인 기운이 체이스 뒤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자신의 혈류를 막아 죽여버리겠다는 것보다는 그보다 더 복잡하고 절대적이었다.


"물론, 진단을 하지 말라시면 안 할 수도 있죠. 저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지금 나하고 거래를 하겠다는 건가? 할 수 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넬 잘라버릴 수도 있어." 하우스가 눈썹을 들썩였다.


"다리가 잘라 늘어지는 건 상관없어. 그건 당신 아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냐." 체이스의 음성이 날카로웠다. "응급실로 좌천되건, 약사가 되건 상관없어... 자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거든. 내가 말했지. 내게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 지금 네가 이렇게 구는 걸 윌슨 박사님이 얼마큼 이해할까? 언제까지 이해할까?"


"윌슨...?" 하우스가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자네 정말 우습구먼... 그러니까, 나처럼 되어서 윌슨과 친구라도 먹겠다 이건가?"


"윌슨 박사님을 좋아합니다. 처음 들어왔을 적부터 지금까지. 친구라면 친구로, 아니면 그 이상으로라도." 너무 멀쩡하게 말해서 하우스는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내가 안 될 건 뭐지? 당신이 지금까지 날 가르쳤고, 또 내가 이만큼 자라났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체이스가 하우스의 귓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 당신이 아니잖아.




"당신은 그 사람을 데리고 몬스터 트럭을 보러 가거나... 아니면... 뭐, 게이 농담을 하거나? 그만하세요, 하우스 박사님... 책임지지 못할 거면 그냥 건드리지도 마세요. 나라면 그렇게 안 해."


순간 하우스가 일어나 체이스에게 주먹을 날려버렸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하우스는 그 자리를 떠버렸다. 옆으로 떨어진 지팡이를 바라보며 체이스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동요시켰다... 저 늙은이, 저 귄위자를. 그의 친구를. 다음은 더 쉽다. 계획대로 되어가는 것이, 체이스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감정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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