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Another 01화

Another - 1

by 김뇨롱

1.



체이스가 다리를 절게 된 것은 너무도 우연한 일이었다. 의도치 않은 일은 분명 하나 - 물론 그 누가 스스로 의도해서 다리의 혈관을 막히게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 적어도 한 가지 더 충격적이고 당황스러운 것은 - 그의 외형과 생각이 급속도로 하우스와 닮아간다는 점이었다.


물론 다리 괴사(혹은 그 위험성)에 대한 스타트 포인트가 오묘하게 혈관이 막히는 쪽으로 흘러간 건 민망할 정도이나 이 또한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일 뿐, 하우스로 귀결될 이유는 없었다.


윌슨의 존재가 하우스로 하여금 그러한 느낌을 갖도록 좀 더 부추겼는데, 혈류가 막히고 그다음 날 - 그러니까 하우스가 굳이 집 앞으로까지 가면서 대면한 일은 없다 치고 - 아침인사를 나누던 공간에 윌슨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수녀의 증상이 종양에 관련 있는 데다 외래진료라 해도 다른 누구와의 마주침도 없이 윌슨을 찾아간 것은 다소 독단적이었다. 하우스는 당시 체이스와 윌슨의 부재를 동시에 꼬집었는데, 그건 그도 모르게 자신으로 하여금 체이스와 윌슨이 서로 의도적으로 어떤 특정 공간에 함께 있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을 거라 여겼음을 보여주었다. 체이스가 칼에 찔리고, 한쪽 다리에 마비가 올 때부터 하우스는 세 똘마니 중 가장 멍청하고 오래 넘겨 붙은 그 호주 출신 의사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다. 체이스의 다리가 마비되고 어느 일천분의 일이라던가 천문학적 확률로 가늠되는 가능성으로 머지않아 다리를 절며 지팡이를 짚고 좌절하여 면도도 하지 않고 다닌다 하면, 그건 분명 그가 하우스화된다 해도 어색할 건 없지만 그 과정을 예상하는 하우스 본인도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제삼자에게 있었다.


바로 윌슨이었다.





2.



체이스가 처음 자국인 호주에서 나와 미국에 체류하기로 마음먹었을 즈음에, 윌슨은 하우스로 인하여 또 한 번 차기 이사장이 퇴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프린스턴 - 플레인즈보로 병원의 이사장은 레이 헉스턴이란 중년의 백인 남성이었는데, 의사 출신은 당연하거니와 유명한 존스홉킨스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가 비정식으로 퇴임하는 불명예를 얻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는데, 문제는 역시나 하우스였다. 그의 핑계는 악순환의 고리를 돌고 있었는데, '가면 갈수록 이사장의 상태가 저능해진다.'가 그 이유였다. 순전히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이전의 이사장이 더 나으니 현 이사장을 쫓아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후에 올 차기 이사장은 전보다 더 못하다. 당연히 빈틈이 큰 길바닥논리이므로, 단순히 하우스가 이사장의 떵떵 거림이라던가 요추천자에 대한 엄격한 검토 및 경영권 장기집권으로 인해 허술해진 의학지식으로 잣대를 대는 행위 따위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윌슨은 더욱 중요한 인재였다. 이사장에게 있어 유일하게 하우스를 통역할 수 있는 디코더가 윌슨뿐이며 또한 하우스를 설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간도 윌슨이니, 오죽하면 병원 이사장 자리를 해 먹기 전에 윌슨에게서 자문을 얻는 사태까지 만들게 되었다.


물론 이처럼 윌슨에 대한 조언이라던가, 하우스의 만행을 바라보는 이들의 살 떨리는 공포 가운데에는 항상 하우스에 대한 경외가 깔려 있었다. 다른 의사들 같으면 아침에 내보내고 점심에 면접을 봐서 오후에 일을 하게끔 시킬 수도 있지만 그레고리 하우스는 불가능하다. 그는 감염의학자다. 그것도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 소위 '권위적'이다. 개 같은 성품의 이면에는 실시간으로 함께 어우르는 천재적 데이터베이스와 검색엔진, 그리고 그 모두를 주무를 놀라운 의학적 추론능력이 있는 것이다. 병원의 실세로서 그러한 자산을 내키는 대로 처벌한다는 것은 감히 이사장으로서도 할 수 없는 -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때문에 하우스가 아니라 이사장이 바뀌어야 했다. 언제나, 그게 순리처럼 이어지자 학교 측에서도 촉을 세우고 적절한 인재를 찾기 시작했다.


하우스가 처음 커디를 만난 게 그 시점이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호적수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무엇보다 처음에 윌슨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분명 그 시점에 윌슨은 리사 커디라는 이 아름답고 결단력 있는 여성이 잘만 하면 하우스를 휘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소 맞아 들어갔다. 단 그녀는 이제 시작이라 윌슨의 도움이 필요했다. 윌슨은 언제나 그러하듯 도움 주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조언에 따라 1인 1과 체제와 그때그때 잡히는 레지던트나 인턴 대신에 전문적으로 육성하며 일할 수 있는 팀을 꾸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체이스가 발을 들였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3.



윌슨이 체이스를 처음 만난 것은 의외로 하우스보다 이르다. 커디가 그와 전화통화를 하고 난 후 그녀는 그 일을 보고하듯이 윌슨과 공유했다. 하우스를 잘 알고 있던 일등공신인만큼 실제로 인터뷰를 할 적에 그의 밑에서 일할 수 있는 전반적 능력과 성품을 봐야 했기에 그는 하우스보다 먼저 그를 만났다. 커디의 옆에 나란히 앉아서, 그는 웬 풋풋하고 밝은 금발 청년이 숫기 없이 들어와 의자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아...?"


그가 체이스를 다시금 만난 것은 바로 그날 오후였다. 문을 내밀고 들어온 그를 보고 윌슨은 조금 당황했다.


"무슨 일이죠? 만일 그... 인터뷰 때문이라면 지금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어요. 그리고 실은 지금 이렇게 학생을 보는 것도..."


"아뇨, 그냥...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일이 아니라 선생님에 대해 궁금해서요."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서 두 시간 내외로 이런저런 말들을 나누게 되었다. 체이스는 호주에 있을 적부터 감염의학자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그 때문에 하우스를 알게 되었단다. 한 가지 더 인상 깊은 것은 윌슨에 관한 것이었다.


"하우스 선생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신다고 들었어요. 만일 제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거나 난관에 부딪히게 되면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야 당연하죠." 윌슨은 능숙하게 말했다. "언제든, 의학도로서 궁금한 게 있다면 말해도 좋습니다. 그렇잖아도 여러 친구들과 메일을 주고받아요."


"하우스 선생님은 어떻죠? 두 분은 친구이신가요? 아니면... 궁금한데요, 선생님께서 친구가 많으신지... 그리고 좀 더 다르게 생각해 보세요. 만일 제가 선생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건 그저 선생님이 절 돕는 게 아니라, 제가 선생님을 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이요."


그 말에 윌슨은 순간 멈췄다. 어린 친구가 그렇고 그런 친구의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뿐인데도 왠지 그 말들이 건방져 보이기보다는 그의 마음에 희미하게 감돌았다. 물론, 이제까지 그런 말을 들어온 경우는 숱하게 많다. 대체 어떻게 저런 괴물과 친구가 되었냐는 둥, 저런 고집쟁이와 왜 시간 낭비하며 돌아다니냐는 둥... 정작 생각해 보면 대화의 중심은 늘 하우스였는데, 지금 그가 내뱉은 말의 중심은 자신이다. 매번 장막 뒤로 숨어있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조명을 비 춘 사람.


"흐음... 글쎄." 침착하려 애쓰며 장시간 멍하니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게 확신에 가득 찬 푸른 눈빛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친구라는 건 무엇보다 시간이지... 물론, 일을 떠나 자네가 언제든 찾아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 조언을 얻어가면 당연히 친구가 될 수 있겠지만."


체이스가 대답 없이 바라보았다. 표정은 다소 무미건조했지만 그의 눈빛은 긍정과 호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4.



"이번엔 뭐야?"


"열여섯 살 여자애예요. 줄넘기를 하다 갑자기 기절을 해서 실려왔는데...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요. 살이 찐 게 대뇌부 종양 때문이라니... 박사님은 계속해서 그렇게만 말씀하세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거짓인 건 아니야. 박사님을 믿어보는 것도 좋아. 너무 이상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아뇨. 납득할 수 없어요." 체이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종양이라면 박사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죠?"


"음... 아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뇌에 대해서 모든 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니까. 아, 또 실제로 어떤 특정 부위에 대한 자극만으로 사람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연구결과가 있어."


"근데 박사님께선 전혀 말씀을 못 들으신 건가요?"


핸드폰을 열어보던 윌슨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건 잘 말하진 않지만 저녁 약속은 칼이지. 원래 의학적으로 도움 받는 걸 싫어해."


그 말을 끝으로 윌슨은 실험실을 나섰고, 체이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5.


"아, 닥터 체이스."


사무실에 들어온 그는 윌슨 앞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말하였다. "아직도 느낌이 이상하네요. 여기 앉으면 자연스레 그때 인터뷰가 생각나서요."


"그래, 근데 무슨 일이지?"


"시간 있어요...? 괜찮으면... 저기, " 체이스는 어쭙잖게 뒤로 엄지를 가리켰다. "제가 잘 아는 레스토랑이 있어요. 음식도 잘하고..."


"오, " 윌슨은 그저 그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말은 짧지만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 오늘은 곤란하겠는걸. 박사님과 몬스터트럭을 보기로 했거든."


"그래요?" 체이스가 눈썹을 들썩였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박사님 정말 몬스터트럭 좋아하시나요?"


"나 말이야..?" 잠시 당황해서 윌슨이 말하였다. "... 아니." 그리고 그는 웃어 보였다. "박사님은 그런 걸 좋아하지만 난 영 아냐. 그래도 중요한 건, 이상하게도 그 옆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거지. 물론, 그 와중에 샐러드를 만들던가 혹은 맥주를 사 온다던가 이런 일이 있긴 하지만... 봐. 자네도 알다시피 박사님은 친구가 많지 않아."


"예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해요?... 친구라는 건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란 거요... 그때는 제가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네요." 체이스가 윌슨을 바라보았다. "박사님도 분명 하우스 박사님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있다는 거요. 아니면... 다른 건지도 모르죠. 예컨대 희망이라던가."


윌슨은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지 말고..."


"제가 하우스 박사님의 직장동료로서 말씀드리자면... 박사님은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예요. 어떤 대가도 없으니까요. 만일 지금의 이 생활 자체가 대가라 해도... 하우스 박사님은 변할 거예요. 그게 누구든, 어떻게 되든 간에..."


보상받을 수 없어요.


체이스의 차가운 말에 윌슨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이내 두 눈이 아래로 향하고 그는 얼굴에 가둔 옅은 가식을 모두 풀어냈다. "... 그런 게 아냐. 어쩌면... 자네가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에겐 엄연히 내 영역이 존재해. 하우스 박사도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이... 다른 말로는 사생활이라고 하지. 신경 써주는 건 고맙지만 이건 내 사생활이야. 대화할 수 있는 주제란 게 정해져 있으니까... 미안한데 이만 가줬으면 좋겠어."


체이스는 답답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문을 나서기 전 마주편에 서서 윌슨을 바라보았다. "... 그거 알아요...? 제가 이곳에 들어오고 박사님을 본 지도 벌써 5년이 넘어가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직도 여전히, 박사님은 저와 한 번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어요. 대신 매번 카페테리아나 야외 테라스, 벤치까지도 박사님은 언제나 하우스 박사님과 함께였죠. 그때 분명 박사님은 저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결과는 이대로예요. 제가 뭘 잘못한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단순히 친구라고 하는 걸 이상하게 보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체이스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윌슨은 그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