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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09화

Another - 9

by 김뇨롱

28.


윌슨이 길을 걷고 있다. 검고 어둡고 빛으로 물든 밤거리를.

윌슨이 무심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그의 왼쪽 손바닥에 생채기가 생겼다.

윌슨은 잠시 자리에서 옷을 털고는 다시 갈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심하게 넘어졌다.

윌슨의 오른쪽 뺨에 생채기가 생겼다.

윌슨은 잠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일어나 털고 다시 길을 걸었다.


이번에도 여지 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거의 한 바퀴 굴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몸을 추스리느라 앉아있는 그의 입술이 터져버렸다. 붉게 물든 입술을 스치는 것은 그의 눈물이다.

윌슨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다.


그리고 그 망할 돌부리를 걸고 넘어지게 만든 원흉은 바로 하우스 자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다.

그는 있는 대로 지팡이를 붙잡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윌슨을 도와주려 뻗으면 뻗을수록 지팡이는 윌슨의 발목을 낚아챌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둠을 벗어나 윌슨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냐면 그 또한 어렵다. 그는 한 번도 그 어둠 바깥을 나가본 일이 없다. 우스운 일이야. 언제라도 시간이 지나면 윌슨이 곁눈질로라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을까? 하우스는 그 때를 대비해 할 말을 준비해둔다. 기약도 예정도 없는 작은 한 마디.


그러던 것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

넘어져 울고 있는 윌슨의 곁에 한 남자의 손이 슬며시 내려온다.

윌슨은 올려다본다. 하우스도 그를 올려다본다. 그 곳에는 체이스가 있다. 하우스가 있는 어둠을 향해 잠시 시선을 돌렸지만 이내 아무것도 모르는 양 미소를 지으며 윌슨을 바라본다. 그는 슬쩍 손을 흔들어 보인다. 언제든지 잡아주겠다는 듯이. 윌슨은 눈물을 훔치고는 이내 그의 손을 잡는다. 윌슨의 시선이 체이스에게 집중되고 있어 하우스를 바라볼 새도 없다. 하우스는 어둠 속에서 지팡이를 짚고 그 광경을 목도한다. 이내 그는 깨닫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두 손발이 묶여서 움직일 수조차 없다. 그 와중에 윌슨은 체이스를 따라 저 멀리, 자신이 넘어졌던 곳들을 넘어 하얀 빛이 새어나오는 곳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영영 잡을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으로 아스라히 사라져간다.


하우스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영혼이 저변에서부터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자신의 침대가 땀으로 흠씬 젖을 만큼 엉망이 된 뒤였다. 옆에는 '제니'라는 이름의 여성이 두고 간 명함이 있었다. 유난히 다갈빛 머리가 빛나던 그녀가 착용했던 빅토리아 시크릿 티팬티가 이불을 뒤적이는 그의 손끝에 걸려 나부끼고 있다. 망할, 하우스는 손을 털고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별다를 것도 없는 콜걸들의 애프터 사인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짜증이 솟구친다. 이상한 일이다. 더러 여자를 불러서 진탕 놀고 난 밤에는 꿈도 꾸지 않았었다. 아니, 꿈이라는 것 자체를 잘 꾸지 않는 편이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를 괴롭히는 건가? 아는데도 물어보는 거라고, 자신 속의 자신이 힐난한다. 하우스는 마음에 있던 지팡이를 후려쳐 그 대상을 죽여나갔다.


빌어먹을 아침이 오면 어젯밤을 상기할 수 밖에는 없다. 멀쩡히 집에 왔느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사실상 그는 자신의 집으로 가면서 우회전 하는 틈에 제발로 굴러 바이크를 망가뜨렸다. 공교롭게도 다리 괴사가 일어나고 있는 오른 다리에 상처가 생겼다. 오른쪽 뺨에는 생채기가, 왼쪽 손바닥은 쓸려서 타박상이 생겼다. 응급실에 있는 캐머론에게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그녀도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윌슨 박사님이 꽤나 걱정하겠어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는 윌슨의 이름인데 쓰잘데기 없이 푸근했다. 하우스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리가. 나 완전 배신당했잖아." 하우스가 우스꽝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오래 가지 않았다. "녀석이 망할 베프를 찾아서 말일세. 그놈의 꽃구경이 오래 가지 말아야 할텐데."


"...체이스인가요?" 캐머론이 대뜸 물었다. 하우스는 놀라서 대답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종종 윌슨 박사님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물론 그게 우리의 이별 사유는 아니었지만..." 그 말을 마치면서 그녀가 붕대를 강하게 당기는 바람에 하우스는 잠깐 엄살을 부렸다.


"물건은 어디엔가 두면 그 자리에 있잖나. 나는 윌슨도 그런 줄 알았네." 하우스가 무심코 내뱉었다. 캐머론은 아까 전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거두고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차, 기타, 집처럼...너무 오래 머문 물건이 귀신이라도 되듯이 말이지." 하우스의 말을 잠자코 듣던 캐머론이 그를 바라보던 것을 거두고 치료를 마무리했다. "물건에는 주인이 있지만 사람은 아니잖아요." 하우스는 손을 매만지며 일어났다. "애초에 내가 주인인 줄도 몰랐네. 내가 윌슨의 주인이라도 된다는 건가?" 하우스가 빈정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말했다. "아시잖아요." 캐머론은 그런 하우스를 보며 한 마디를 남겨두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선택할 수 없으니까요.'


물건, 물건이라.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하우스는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 처음 만나고 몇 년 뒤까지는 알아서 꺼지거나 제풀에 못이겨 사라질거라 생각했다. 다리 괴사도 그렇지만 윌슨은 늘 그렇게 꾹 참고 견뎌내는 구석이 있었다. 처음에 몬스터 트럭을 보러 가자고 부추긴 것도 사실 부담스러워서였다. 자신과 달리 거칠고, 욕지거리를 해대며 침을 뱉어대는 사내들 사이에 끼여서 우락부락하게 생긴 트럭들이 부딪히는 경기를 보고, 집에서 대충 만든 문샤인을 들이키다 경기장 뒤편 아무데서나 토하고나면 분명 자신을 떠나갈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견뎌내는 표정을 해가며 윌슨은 그렇게 말했다. '이게 그렇게 재미있어요?'라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윌슨은 하우스가 좋아하는 걸 알아가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던거다. 빌어먹을,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있지? 하우스의 생각과 평가는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로 한동안은 아무런 갱신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하루 이틀, 한 달, 1년까지 가면서 쌓여가기만 했다. 하우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취향인 것들을 윌슨이라는 그릇 안에 퍼붓기 바빴다. 윌슨은 하우스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따라나섰고, 이내 이런 데이터가 쌓여서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하우스에 대한 분석이나 하우스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무의식의 저점을 짚어내기에 이르렀다. '편리한 사무실 근처 심리 상담 주치의'. 하우스 옆에 붙어있던 윌슨이 얻게 된 별명 중 하나였다. 도움을 요청하는 그 누구의 손길도 따로 마다하지 않는 그였지만 유난히 하우스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오래 전의 일들까지도 기억하는 그였다. 그래서 하우스는 더욱 윌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 안에서 처리해야 할 감정 정리, 마음의 준비까지도 윌슨을 거치면 금새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까. 새벽에 전화를 걸든, 집앞에 가서 소리를 지르고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가든, 되도 않는 소리를 해대서 병원으로 호출하든 언제든 그 자리에 마치 물건처럼, 윌슨이 있었으니까.


물론, 알고 있다. 윌슨이 하우스에게 보이는 지대한 상냥함의 저변에는 그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하우스는 딱히 그걸 내치고 싶지 않았다. 요컨대 그런 것이다. 손도 대고 싶지 않을 만큼 껄끄러운 상대가 하필이면 가장 갖고 싶어하는 보석을 두 손에 꼭 쥐고 있는 격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레고리 하우스는 지능적인 진단학자일 뿐 아니라 손해를 보지 않는 인간이기도 했고 그런 점이 윌슨으로 하여금 하우스 옆에 작은 자리나마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선사했을 뿐이다. 단지 그 뿐. 귀찮을 정도로 말려들고 모든 것을 부수고 싶어질 만큼 힘들어질 필요까지는 없었는데...허벅지에 난 찰과상이나 손바닥에 난 타박상 같은 것 보다도 더 짜증이 나는 건 그런 부분이었다. 마음이...


하우스는 다시 페이지를 덮어버렸다. 이 페이지를 넘기려는 마음을 먹게 되면서 그가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아마 페이지를 넘긴 뒤의 그는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알게 되는 게 이토록 두려워진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로 모르는 게 맞는 건가? 아까와 같은 힐난이 다시 들려왔다. 하우스는 부러 자신의 손을 주먹 쥐어 고통으로 그 생각을 덮어버렸다.




29.


체이스는 지난 밤에 있었던 마법 같은 일들을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가 윌슨의 인사조차 기대하지 않고 그를 급히 집으로 들여보낸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만 같았고, 적어도 윌슨이 조금 마음을 열어준 그 순간에 모든 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까지 윌슨이 하우스를 향해 보여왔던 차분한 마음만큼 체이스는 윌슨의 호흡에 맞추고 싶었다. 윌슨은 결코 급히 걷는 성품이 아니었다. 하우스가 지나치게 그에게 답변을 해주지 않아서 망정이지.


자신에게 화를 내기는 커녕 되돌려 이마에 압맞춰주고 미안하다고까지 말해준 윌슨이 지금 생각해도 믿겨지지 않았다. 체이스는 그대로 걸어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 위에 앉아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어두운 방의 어느 구석을 보아도 모두 윌슨이 보였다. 그의 이마를 넘실거리며 덮고 있는 다갈빛 머리칼, 왠지 모르게 미안한 기분을 불러 일으키는 짙은 두 눈썹, 생각보다 긴 속눈썹 그 아래 자리하고 있는 맑은 눈동자, 뭉툭하고 귀여운 코 끝, 지적이면서도 금욕적인 느낌의 입술. 그 모든 걸 그렇게 가까이, 그렇게 단숨에 보고 맛본다는 건 확실히 즐겁고도 신비로운 일이다. 그 하나 하나를 음미하고 있자니 마법처럼 빛이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이미 아침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숨도 잠들지 못했지만 그만큼 설레는 출근 길은 처음이었다. 체이스는 서둘러 씻고, 단정하게 챙겨 입은 뒤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병원으로 향했다. 햇살, 나무에 매달려 흔들리는 이파리 하나 하나, 근처에서 흔들리는 들꽃까지 모든 것이 지나칠만큼 선명해 보였다. 그 다음. 영영 없을 것만 같던 중간에 끊긴 그 페이지에 그 다음이 있다. 체이스는 그 다음을 어제 보았다. 분명 그 다음의 다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체이스는 병원 입구를 지나치면서 들뜬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몸을 털었다. 만일 그의 페이스에 맞춰 윌슨을 몰아세운다면 윌슨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질려할 게 뻔했다. 마침 로비에서 수간호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윌슨과 눈이 마주쳤다. 체이스는 지나치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 하지만 주변은 이미 그가 조금 들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윌슨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윌슨은 잠시 당황했지만 작게 눈짓을 하고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마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게 완고한 거절처럼 보였겠지만 체이스는 금세 그 기미를 알아챘다. 윌슨은, 부끄러웠던 것이다. 파일 끝을 잡고 있는 그의 손끝이 유난히 위태로워 보였다. 윌슨이 애써 감추려 한 것을 받아주듯, 체이스도 속으로만 작게 웃고 지나쳤다.


"역시 좀 이상한데." 포어맨이 체이스에게 그 말을 건넨 것은 이사진과 담판을 짓고 온 다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 맞은 편 의자에 앉아 히죽대는 체이스를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건네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뭔가 있었군. 그렇지?"


"여기서만 이야기하죠. 밖에 나가면 또 힘들어져서."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티낸 건 자네잖아. 이제 거의 준비가 다 되어가고 있어." 포어맨은 마치 망을 보듯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필요하면 연방 법원에서 협조도 받을 생각이야. 공교롭게도 이사진의 리사에게 연줄이 있더군. 물론, 하우스를 감방에 집어넣은 것도 그녀 입김이 없었다고 하긴 어렵겠지만."


"그럼 당장 하면 되잖아요? 지금 진단학과 사람들에게 미리 이야기도 해줄 겸 말이죠." 체이스는 관심 없다는 듯 주변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하였다. 아까 전까지의 헤실거리던 표정이 말끔하게 씻겨내려간 얼굴이었다.


"그게...정말, 뭐가 더 있었던 건 맞는 거 같은데." 포어맨이 기가 찬 듯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이 첫 연차라고 하면 믿어지나? 오늘 하우스 박사님은 출근도 하지 않으셨어. 이미 진단학과 애덤스가 전화도 돌려보고 난리를 쳐봤지만 대답조차 없다는군. 뭐 생사확인 정도는 필요하겠지만...아마 그런 게 필요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겠지."


하우스가 출근하지 않은 것도 몰랐던 체이스는 잠시 놀란 듯 하더니 다시 등을 뒤로 뺐다. 관심이 빠르게 식고 있었다. "아프거나 뭐 다른 일이겠죠. 어차피 윌슨 박사님과 말 섞지 않은 지도 거진 한 달 가까이 되어가는데요."


"그건 윌슨 박사님의 경우고, 자네는 아니짆아. 뭐라도 말을 한건가? 지난 번에는 뜸이라도 들이거나, 아예 말을 안한다더니?"


"멘탈 걱정이라면 제 쪽을 해주셔야죠, 하우스 박사님이 아니라." 체이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잊었어요? 그 지독한 진단학과 과장은 그 인간이에요, 내가 아니라. 뭐가 있었다니...아무 일도 없었어요. 뭐 증거라도 있나요?"


"자네가 지나치게 즐거워하는 거 같아서." 포어맨이 턱을 괴며 말했다. "이봐, 난 자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갖던간에 크게 관심 없어. 관심 가지고 싶지도 않고. 다만 내가 원하는 건 같이 지켜줘야지. 그게 우리 둘을 위한 거라는 건 자네도 알잖아. 적어도 답변을 받아내기 전까지는 적당히 해줘. 이쪽도 골치가 아파."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건 저도 짜증나는데...아마 하우스 박사님은 그렇게 쉽게 포기 못 할 거에요. 어떻게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겠죠. 어차피 돌아올 데라고는 여기뿐이에요. 얼마나 더 오래 다니실지는 모르지만."


변화하지도 않고 물건에 새겨진 상처처럼, 그 자리에 딱 붙어 있는 고리타분한 인간.


"자네 말이 맞았으면 좋겠군. 다시 그놈의 수갑을 차고 서명하게 만드는 골치아픈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적어도 인도적으로 행동하자고. 이사진의 이목이 모두 이쪽에 집중되어 있어. 어떤 상황인지는 자네도 충분히 알겠지."


"리사라는 분에게 잘 구슬려보시죠.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는 못 베길거에요. 어차피 그 인간은 퍼즐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럼 저도 이제 슬슬 더 준비를 해볼까요." 체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슨 박사님은 어떤가? 아마 자네에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일지 모르지만."


"하우스를 깨고 나오는 중이죠. 저는 그걸 돕고 있는 중이고요." 체이스가 흐뭇하게 말했다. 너무나 순수하게 미소지으며 말하고 있어서 포어맨은 새삼 놀라고 있었다. 바로 아까 전에 하우스에 대해 힐난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상처 입고, 두려움에 떨고 고통스러워하지만 조금 만 더 길들여주면, 다듬어주고 돌봐주면 그 어떤 것보다 밝게 빛나죠. 저는 그 옆에서 손을 잡아줄 뿐이고요." 마치 어떤 작품을 감상하듯 말해서 포어맨의 경탄은 그 지점에서 미묘하게 그치고 말았다. 물론, 체이스가 윌슨에게 갖는 감정이라는 것의 정체는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소름이 돋은 건 이 시점이 처음이었다. 왠지 더 들추면 피곤해질 것 같아 포어맨은 손사래를 쳤다. "그만 가 봐. 내가 말해준 것만 잊지 말아달라고."


체이스는 손짓을 해가며 문을 나섰다.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체이스는 간만에 윌슨이 가장 좋아하는 바질 샌드위치를 사들고 그에게 찾아갈까 싶어 카페테리아로 향하고 있었다.




30.


"피자는 아래 놓고 가쇼, 우체통에 돈 들어 있으니 그거 가져가고. 팁은 없소. 지난번처럼."


안에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소리에 적어도 생사는 확인했다는 느낌이었지만, 애덤스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병원 사람들이 수근대는 것도 이상했지만 사실 그럴 만 했다. 하우스가 병원에 복귀하고 처음으로 연차를 쓴 것이다. 물론, 그의 출퇴근 시간이야 들쑥날쑥에 외래진료도 하는둥마는둥이었지만 적어도 흥미로운 환자가 있을 때면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양반이 최근 살펴보고 있는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을 마다하고 그것도 한참 요추천자와 분석을 거듭하던 와중에 연차를 쓴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뭔가 일이 있었고 그걸 해결해야 했다. 얼마 전 포어맨과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별다른 소득도 없었고, 이후로 하우스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냥 가끔 저러시는 거겠지'라고, 혹은 '너무 힘들어서 나도 좀 쉬어야겠어'하고 외친 타웁과 닥터박의 의견도 있었지만 닥터 애덤스는 이런 것 자체를 참지 못했다.


'망할, 자네 같은 브루주아들이 갖는 올바르고 정의로운 감정 같은 게 가장 재수없다니까.' 얼마 전 차 수리비를 가지고 옥신각신했을 때 하우스가 내뱉었던 말이 생각났다. 애덤스는 지금, 하우스의 현관 앞에서 그 이야기를 수긍할 수 밖에는 없었다. 대체 뭔지 몰라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적어도 애덤스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저에요! 닥터 애덤스에요. 박사님, 문 좀 열어보세요!" 애덤스는 문을 강하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내 어그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간에는 병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 신문 같은 종이가 쓸리는 소리며 집기들이 여기저기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까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뺨과 손등에는 반창고를 대고, 허벅지에는 붕대까지 감은 하우스가 만신창이 같은 몰골로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한 손에는 버드와이저를 병째로 든 채 어기적 걸어와 있었다.


"뭐야? 피자는?" 하우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애덤스를 지나쳐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피자가 문제에요? 박사님, 괜찮으신 거에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공교롭게도 그 때 마침 배달부가 빠르게 와서 하우스에게 피자를 건넸다. 하우스는 고갯짓으로 애덤스를 가리켰다. 졸지에 애덤스는 피자를 받아든 것도 모자라 피자값까지 줘야 했다. 하우스가 어기적대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게." 애덤스는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일단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옆으로 피자를 두고는 문을 닫았다.


하우스는 바로 근처 거실의 소파로 가 자리를 잡았다. 애덤스가 바라본 하우스의 집안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물론, 하우스의 집을 자주 와본 일은 없다. 그래도 이 정도로 망가진 것은 처음 보았다. 단순히 어질러진 상태라고 하면 그나마 납득할 수 있지만...이건 마치 도둑이라도 든 것 처럼 주변 여기저기가 찢겨 있고, 병을 던진 흔적이며 맥주가 바닥에 뒹구는 건 둘째 치고 빛이라고는 거의 새어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애덤스가 재빠르게 걸음을 옮겨 커튼을 거치자, 하우스가 외쳤다. "이봐, 커튼 거치지 말...그래, 자네 말대로 햇빛이 망할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는군. 이제 만족하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디서 사고라도 나신 거에요?" 애덤스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거실에 앉은 하우스 맞은 편에 있는 작은 스툴을 가져와 앉았다. "그 전에...식사는 했나?" 하우스의 말에 애덤스는 다시 한숨을 쉬며 피자를 가져와 상자를 열었다. "그래, 일단은 식사를 하고 말을 해야 뭐라도 나오는 법이지. 그나저나 자네의 선한 양심이 또 이렇게 일을 벌였구만 그래. 자네는 어쩔 수 없는 사마리아인 컴플렉스라니까." 그 말에 애덤스는 재빠르게 피자 상자를 가로챘다. 하우스가 노려보았다. "치사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장애인은 놀리면 안 된다고 부모님께 배우지 않았나?"


"박사님이야말로 치사하시네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는 계신 거에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뭐 원하면 나는 굿 엔딩에 배드 엔딩까지 다 불어줄 수 있지. 망할 피자만 넘겨준다면 말이야." 진지하게 노려보던 하우스가 빈정대며 말하였다. 애덤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포어맨 원장님과 이야기했지만 제대로 해결된 게 없었어요. 전 단지 박사님과 체이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 외에 뭔가 더 있는 건가요?"


"그래, 알 게 뭐야." 하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문득 햇살이 비쳐오는 주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난히 이 엉망진창인 부엌을 잘 비춰주는 햇살을 보고 있자니 저 부엌의 가운데에서 샐러드를 열심히 만들던 윌슨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빌어먹을, 하우스는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이봐, 자네는 좋은 의사야." 생뚱맞은 말에 애덤스는 하우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인색한 편이네. 웬만한 일로는 칭찬도 하지 않아. 물론, 제대로 일하지도 않았으면 진작에 자네를 잘랐겠지. 하지만 자네는 아니야. 나는 교도소에서부터 자네를 봐왔고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누가 보기에는 별 볼일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는 빠른 상황 판단 대신에 안전한 경로를 찾아내고 환자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에 탁월해. 진단학자 중에서도 독특한 경우지. 보통 나는 환자의 병명에 더 관심이 가서 환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니까."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하우스의 후한 평가보다도 때아닌 답변에 애덤스가 당황하며 물었다. "박사님...정말로 뭔가 일이 있었군요. 그런 거죠?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저도, 타웁도, 닥터박도 너무 답답할 지경이에요. 그 크로이츠펠트-야콥 병 환자는 박사님이 필요하다고요. 보호자는 박사님이 아니면 대화하지도 않겠다고 나섰어요. 모든 게 꽉 막힌 상태라고요. 적어도 이건 아니었잖아요, 박사님. 병을 고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윌슨은..." 이번에도 하우스의 대답은 생뚱맞았다. 애덤스는 점점 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지만 일단은 대답해보기로 했다. "아시잖아요, 몇 번이나 우리 사무실에 찾아오시고, 박사님 행방이나 기분, 상태를 물어보시고...실은 그냥 이렇게 찾아온 게 아니에요. 윌슨 박사님이 간곡히 부탁하셨어요."


자기가 찾아가면 분명 불편해할거라면서...


하우스는 한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 윌슨이, 어제 그토록 자신을 어둠 속에 삼켜두고 꿈 속에서 온갖 생채기를 내던 그 망할 윌슨이 지금도, 여전히, 아직까지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 어젯밤 캐머론의 입에서 새어나온 이름을 들을 때보다 몇 배로, 미묘하게 감미로운 기분이 괴로울만큼 그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늘상 거기서 끝이었다. 그런 간지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윌슨이 주는 것만 받아오던 입장에서는 이런 감정 같은 건 항상 느끼던 것에 불과했다. 매번 마셔오던 에이드가 새삼 달다고 느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타는 목에 들어가니 달다고 느껴질 뿐이지. 하우스는 잠시 눈을 빛냈다. 애덤스는 오랜만에 하우스의 그런 눈빛을 목격했다. 그런 눈빛은 특히 그가 흥미를 가지고 질병을 타진할 때 종종 보여왔던 것이었다.


하우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자네는 좋은 의사라는 거야. 닥터 애덤스. 아마 진단학과가 분리된다 해도 잘 해나갈 수 있겠지. 어쩌면 더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지나칠 만큼 덤덤하게 던진 하우스에 비해 애덤스는 경악에 가깝게 놀라고 있었다. "그게 대체...무슨 말이에요? 기껏 분리할 거라면 어째서 박사님을 감옥에서까지 가서 데리고 나온 거죠? 이제 겨우 몇 개월 되지도 않았어요. 굳이 박사님을 두고 진단학과를 분리할 필요가 있나요?"


"자네 생각에는 내가 얼마나 더 갈 수 있을 것 같나?" 하우스의 날카로웠던 눈빛은 금세 사그러들었다. "자그마치 20년이네. 내가 진단학을 준비한 시간 같은 걸 제외하고서라도 말이지. 웬만한 기업이었다면 대충 꽃 한다발 건네면서 명예퇴직을 시켰어도 남아돌 시간이야. 성격이 좋았다면 중역으로 앉혀놓고 연하장 작성자로 써먹었겠지만 자네가 보다시피 나는 그런 부류도 아니라네. 그간 이 병원과 내 질긴 인연을 보면 자네도 이해하겠지. 내가 하려는 말이 뭔지에 대해서." 하우스는 애덤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앞에서 한없이 현실적으로 변하며 작아지는 하우스를 바라보며 애덤스는 잠시 화가 났던 기분을 누그러뜨릴 수 밖에는 없었다.


"대학 병원으로 크게 범주를 잡더라도 진단학과는 분명 골치 아픈 학과네. 외래진료로 인플루엔자 보균자를 치료한다고 치면 대충 간단한 진단에 약 한 통 들려보내면 바로 돈을 벌어다줄 수 있거든. 진단학과는 그렇지가 않네. 원인불명의 질병을 가진 환자 하나를 두고 오랜 기간 복잡한 퍼즐과 값비싼 시험을 돌려가며 의사와 보호자 둘 다에게 부담만 안겨주지. 누가 그런 학과를 반기겠나.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는 그렇게 했었네. 그리고 나도 그에 응했던 것 뿐이야." 하우스는 자신 스스로 그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다. 분명 애덤스를 바라보며 말을 시작했었지만 어느새 그 시선은 점점 내려와서 자신의 발치에 머물러 있었다. 애덤스가 열어두었던 창문으로 불어온 미풍에 발치에 걸려 있던 휴지조각이 슬쩍 흔들렸다.


애덤스는 잠시 말을 골랐다. 한 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박사님, 정말 거짓말만 늘어놓으시네요..." 애덤스의 말에 하우스는 살짝 밀려오는 짜증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박사님이 그렇게 말하셨었죠.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고. 박사님도 마찬가지에요.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박사님은 베벌리 씨를 치료하려고 얼마 전 장례를 치룬 환자의 무덤도 파헤치려고 했었어요. 그게 불과 이틀 전이라구요." 애덤스는 손짓을 해대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이틀만에 바뀔 수 있나요? 당장도 그런 퍼즐 같은 것에 눈이 안 가신다고 말할 수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박사님은 절대로 자신의 일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그냥, 지금은 당하고 계신 것 뿐이라구요. 그냥...말해주세요.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세요. 저는 박사님에게 따지거나 박사님을 평가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빌어먹을...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우스는 노려보던 것을 거두고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박사님이 정말로 신경 쓰이시는 게 진단학과 분리가 맞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게 있는 건가요?" 애덤스는 이제 하우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맞아요. 저 정말로 남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망할 브루주아라서요. 박사님이 뭐라 하셔도 이제는 물어볼 수 밖에 없겠네요.


윌슨 박사님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 말에 하우스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창가에서 불어온 미풍이 둘 사이를 휘감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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