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Another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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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 12

by 김뇨롱 Mar 25. 2025



37.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문자를 보내려다 재차 지워가며 체이스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전화라도 걸어볼까 했지만 몇 번이나 망설인 뒤 걸어본 전화에는 수화음 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결국 체이스는 직접 윌슨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가장 먼저는 암병동 과장 사무실, 그 다음은 카페테리아...하다하다 하우스의 사무실까지 흘겨본 뒤에 체이스는 곧바로 네갈래 난 모퉁이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를 반겨주는 건 바텐더 뿐이었고, 지팡이도 짚지 않고 말끔한 얼굴로 나타난 그를 한 동안 못 알아보던 바텐더가 반색하는 것도 볼 새 없이 체이스는 술집에서 나와 다시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그 다음은...뻔하다. 아니, 순간적으로 윌슨이 체이스 자신의 집으로 찾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생각은 곧바로 자기 자신의 이성으로부터 힐난 받으며 끝이 났다. 윌슨은 자신을 친근하게 느낄 수도 있고 자신이 최근에 윌슨에게 해댄 행동들을 조금씩 '참아줄'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지만 그 마저도 윌슨이 자신을 배려해서 보여주는 모습이라는 것을 체이스 자신은 잊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윌슨이 어디까지나 체이스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체이스 자신의 기준에서는 한참 가벼운 정도였다. 물론, 윌슨이 체이스의 마음과 완전히 같을 만큼 체이스를 원할 수는 없겠지만...체이스 자신은 윌슨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자신의 마음을 늘 눌러야 하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더 원하고 더 바라게 되고 더 밀어붙이게 되면 윌슨은 견딜 수 없어질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기어코 윌슨의 집까지 찾아갔다가 허탕을 치게 된 그 순간,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장 불안한 감각이 그의 저변에서 올라오는 것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온갖 부정적인 말들이 그의 마음 속을 휘젓고 있었지만 결국 그의 마음에서 가장 강하게 드는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지금 당장, 윌슨이 있을 법한 곳이지만 그가 살피지 않은 장소가 단 한 곳 있었다. 체이스는 몇 번이고 부정했지만 결국 자신의 생각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하우스의 집이 있는 베이커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체이스는 베이커가로 향하면서도 몇 번이나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맞는지 생각해봐야 했다. 정작 하우스의 집에 있는 윌슨을 발견하게 된다 한들,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체이스 자신에게는 커다란 사건이었지만 이제 막상 윌슨과 조금씩 스킨쉽을 해본 정도이고, 이제껏 윌슨이 하우스와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모든 경우를 최대한 배제해보려 애를 써왔던 것 뿐이기에...당장에 윌슨이 하우스의 집에 가 있다고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나마 윌슨을 구슬릴 수 있는 가장 멀쩡한 변명거리가 대체 어떤 것들이 있을지, 체이스는 베이커가에 발을 들이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포어맨의 호출이라거나, 혹은 다른 문제가 생기거나...갑작스럽게 어디론가 가야 할 일이 생기거나...물론, 윌슨을 가장 원하는 건 정작 체이스 자신이었지만. 아까부터 이런 저런 변명거리를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사실 체이스가 가장 바라는 건 그가 베이커가에 당도했을 때, '윌슨을 찾지 못하는 것'이었다. 잔인할지 모르지만 하우스의 집에 가 있는 윌슨을 찾느니 차라리 외딴 곳에서 홀로 있는 윌슨을 찾는 게 그로서는 더 수월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구슬리고 어떻게 겨우 바라보게 된 사람인데...다른 그 어떤 면에서는 두려울 것 없는 인간이었지만 단지 윌슨이라는 점 하나에서 그레고리 하우스는 체이스에게 있어 무척이나 두려운 존재였다. 자신이 10년 가까이 공을 들여도 어쩔 수 없는 남자를 한 번에 휘어잡을 수 있는 남자. 그래서 더 다시는 윌슨이 돌아볼 수도 없게 만들고 싶었지만...당장은 윌슨의 마음이 정리되지도, 자신만을 향하고 있지도 않다. 윌슨의 그 망설임이 체이스를 가장 두렵게 만들었다. 윌슨의 무정한 반응들과 그간 그가 보여온 모습들, 그리고 조금씩 바뀌고 있는 윌슨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이 정처 없는 수색 마저도 감미롭게 느껴져서, 체이스는 별안간 자신의 정신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은 기분마저 느꼈다.


그러나 그러던 것도 잠시, 그가 베이커가 221B에 당도하기도 전에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담장에 숨었다. 작게 느껴지는 소리가, 그의 심장을 미칠듯이 두들겼다. 그렇게 작은 소리인데도 귀신같이 체이스는 그 음성이 윌슨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선명하게 들리는 것을 보아 바깥이고, 하우스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말대답이 없었다. 윌슨은 밖에 있고, 혼잣말을 하고 있다. 순간 그것만으로 체이스는 자신의 멍청함을 탄식했다. 물론, 하우스가 집에서 나왔을 경우라면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게 맞겠지만 지금 당장 하우스는 집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집에 있으면서 대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직감은 마지막 결론에 손을 들어주었다. 체이스는 숨을 죽이고 좀 더 다가갔다. 저녁이라 차단한 등불 아래, 양 손에 뭔가 가득 들고서 울먹이기까지 하는 윌슨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토록 애타게 찾던 대상이 제멋대로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그토록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이 사는 집 현관 앞에서 울먹거리며 중얼거리는데도, 체이스는 윌슨이 원망스러운 기분과 동시에 어쩔 수 없을 만큼 안쓰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윌슨이 하우스에게 하는 말 같은 거, 울먹이는 소리 같은 거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이라 체이스의 귓가에는 절절히 들려왔다. 망할 하우스는 그딴 거 집에 없어서 듣지도 않거나 아니면 있어도 제대로 듣지도 않겠지만...어째서인지 윌슨의 마음 속 이야기를 가장 자주 듣고 가장 깊게 듣게 되는 건 늘 체이스 자신처럼 느껴져,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이 처연하게 울려왔다.


하지만 그토록 마음에 두었던 만큼, 윌슨이 하우스의 집으로 찾아간 일은 그를 아프게 만들었다. 하우스라는 인간에게 있어 일말의 망설임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체이스 자신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만큼, 하우스는 변해가고 있었다. 그게 대체 진단학과 분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성가시게도 애덤스가 하우스를 신경쓰는 바람에 진단학과 분리 건이 그렇게 아름답게 이뤄지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다른 어떤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윌슨이 직접적으로 하우스와 닿는 경우라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늘 그렇던 대로...윌슨을 구슬리거나 윌슨을 설득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이끄는 것이라면 언제든 할 수 있었지만 윌슨 본인이 움직이는 건 체이스 자신도 어쩔 수 있는 게 없었다. 단지 그동안 자신이 그에게 해준 것들을 토대로 언제라도 가끔, 이따금씩 자신의 생각을 해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 뿐...세상 그 모든 것들이 날선 채 자신을 향하게 두어도,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날서게 찌르더라도 윌슨에게만큼은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체이스는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현관 바깥에서 울먹이는 윌슨을 무척이나 안아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자신은 두 발이 묶인 채, 화단 뒤에서 그에게 내밀 어떤 카드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조바심을 다른 것들로 바꿔낼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일단, 침착하기로 했다. 윌슨이 마침내 싸들고 온 것들을 조심스레 현관 앞에 두고 밖을 나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런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싶었지만, 대신에 체이스는 현관에서 뒤늦게 나온 하우스를 노려보며 자신의 주머니에서 포어맨의 번호를 찾았다. 윌슨이 사라진 이상 그는 더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고, 새삼 슬픈 표정의 하우스를 뒤로 하고 체이스는 빠르게 움직여 윌슨과 동선이 겹치지 않는 곳으로 서둘러 향하기 시작했다. 윌슨에게 문자를 보내려던 것을 용케 참아낸 자신에게 감탄하며, 체이스는 포어맨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밝고 화려하던 하늘이 그의 어깨 위로 어둡게 내려앉았다. 세상 그 어느 것도 그의 눈 앞에서는 살아있지 않았다.



38.


"용건이라는 게 뭐야?" 포어맨이 잔을 들기까지 아무 말이 없던 체이스는 그 말에 잠시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왠지 텅 비어 보이는 눈동자에 포어맨은 잠시 주춤했지만, 동요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모퉁이 술집에서 만나 말끔한 모습의 체이스를 바라보자 신수가 훤해졌다는 둥, 나이가 다섯 살은 젊어졌다는 둥 농담까지 건넸는데, 정작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튀어나오라고 한 장본인은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보였다. 때문에 포어맨은 데이트도 집어던지고 체이스를 찾아온 것에 대해 불평을 할수도 없었다.


"이 성지에 나를 다 초대해주다니 이거 영광인데." 포어맨은 부러 기세좋게 말했다. "여기는 자네와 윌슨 박사님의 공간 아닌가? 오늘은 데이트가 없었나보군."


"쓸데 없는 소리 말아요." 체이스가 입을 연 것에 오히려 포어맨은 안도했다. "필라델피아 암연구학회에 보내주세요. 저와 윌슨 박사님으로."


"AACR(American Association for Cancer Research) 말인가? 지금처럼 정신 없을 타이밍에 왜..."


"마지막 정리가 필요한 거 알고 있잖아요." 체이스는 일단락했다. "윌슨 박사님이라면 암병동 과장님이니 자격은 충분할거고, 저 또한 앞으로 맡게 될 진단학 관련해서 도움이 될 자료들을 접할 수 있을 거에요. 이 정도라면 이유가 될까요?"


포어맨은 잠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체이스는 포어맨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지막 정리...' 그 말이 꽤나 의미심장했다. 아마 포어맨 스스로가 어떤 준비를 하고 있고 이사진과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으며 '리사'가 어디까지 뒤를 봐주고 있는지 체이스가 속속들이 알 수는 없겠지만 요는 이렇다.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는 현 진단학과 과장보다 미래에 진단학과 과장이 될 사람의 이야기가 더 중요해지는 법이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일이 있었지만 포어맨은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일정은?"


"당장 내일부터 가는 걸로 잡아주시죠. 전달은 직접 해주세요. 제가 이야기하면 다르게 반응할지도 모르니까."


"이런 때에는 병원장 명함이 필요하다 이 말이군." 포어맨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내일 오전에 제대로 맞춰 온다면 그렇게 해주도록 하지. 다만 자네도 알다시피 진단학과 팀원들의 심기는 알아야 하네. 그들도 지금 모두 베벌리 씨의 치료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까."


"잠깐의 출장이야 크게 뭐라 할 수는 없겠죠. 그리고 아직 과장님은 제가 아니잖아요." 체이스가 말하였다.


"생각보다 진단학과 분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군." 포어맨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네의 가장 큰 목표는 윌슨 박사님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AACR에 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체이스가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마치 그 오래 전 진단학과에 처음 들어왔을 적 청신한 얼굴이 그대로인 체이스가 이상해보일 지경이었다. "저는 시작 지점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적어도 윌슨 박사님과 만드는 시작 지점 근처에 하우스가 없기를 바라고 있어요." 체이스는 잔을 만지작댔다. 늘 옆에 있었던 윌슨의 향기가 없는 것이, 이제는 그에게도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저는 온전히 저로서 시작하고 싶어요. 하우스의 부하 직원이나, 하우스의 제자나, 하우스 관련된 그 어느것이 아니라요." 체이스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대충 상황 파악이 되었지만, 포어맨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기울이는 그의 잔에서 유난히 지독한 스카치가 향을 끼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39.



체이스는 한 두번 정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뿜었다. 결국 윌슨은 어젯밤 내내 체이스에게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 무정한 사람...체이스는 울먹이며 하우스의 현관 앞에 있었던 윌슨의 모습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밝고 아름다운 곳에 있는 것 마냥 행복했던 순간들이 검은 물감에 오염되듯이 까맣게 타버리고 말았다. 포어맨과 앞으로의 일까지 이야기했는데도 여전히 그의 마음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윌슨과의 일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한 편으로는 윌슨을 더 밀어붙일까봐 걱정하는 자신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되는대로 저질러버리고 싶은데도 어느 한 순간에서는 윌슨과 오래도록 안정적인 사이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부딪혀오는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윌슨이 하우스를 찾아갔던 일 자체를 커다란 일처럼 생각해버리면 그게 윌슨에게도 더 위기처럼 보일지 몰랐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 자신은 침착해야 했다. 윌슨이 저지른 행동처럼 자신도 돌발적인 행동을 저질렀지만 그 마무리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포어맨에게 이야기했던대로, 적어도 하우스가 없는 곳에서 체이스는 윌슨과 제대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으며 자신 주변의 진단학과 사무실 정경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하우스는 오늘도 출근하지 않았다. 진단학과 사무실은 그에 비해 소란스러울 정도로 활발했다. 베벌리 씨의 증상이 차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툭하면 하우스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도 보통은 포어맨에게 찾아가면 보다 쉽게 승인을 받을 수 있었고, 몇 번의 삽질이 있기는 했지만 하우스와 함께 한다고 해서 그런 삽질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던지라 닥터박과 닥터 타웁은 꽤나 열정적이 되었다. 애덤스는 체이스를 바라볼 때마다 경멸 섞인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이런 바쁜 분위기 덕에 모두가 그런 기척을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눈치채도 신경쓰지 않았다. 텅 빈 진단학과 과장실을 바라보며, 체이스는 윌슨이 포어맨의 사무실로 찾아가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잠시 후면 그는 자연스레 자신을 찾아와 필라델피아 출장 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고, 체이스는 그 때 최대한 어제의 일을 잊어버리며 윌슨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이제는 자신에게 진단 상담을 시작한 베벌리 씨의 아내 헬렌과 대화하면서도 체이스는 내내 그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며 마음의 정리를 해야 했다.


"...어제 답장 못 해서 미안한데..." 윌슨이 체이스를 찾아온 것은 체이스 혼자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의학 잡지를 보고 있을 때였다. 체이스는 부러 윌슨을 찾아가지 않았다. 어젯밤의 그 충격과 서운함에 선뜻 윌슨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윌슨은 윌슨 나름대로 어제의 일을 마치 자신이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처럼 체이스에게 선뜻 말하지 못한 채 곤란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윌슨의 곤란함이 느껴지자, 체이스는 금방이라도 표정을 풀어버린 채 윌슨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싶었던 것을 꾹 참았다. 심통이 난 걸 티 내지 말자고 할 땐 언제고, 내면의 자신과 유치한 다툼을 해가며 체이스가 시선을 잡지에 고정하려 애쓰는 동안 윌슨은 자신의 커피잔을 들고 그의 맞은 편에 자연스레 앉았다.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를 잠시 휘감았다.


"...꽤나 말끔해졌는데." 체이스가 잡지를 거두며 얼굴이 드러나자 윌슨이 그렇게 말했고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만지작댔다. 그러고보니 면도를 하고 지팡이를 접어 둔 뒤 윌슨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건 사실 순전히 윌슨 입장이었고, 체이스는 어젯밤에도 버젓이 윌슨을 바라보았지만. "혈전 문제도 많이 좋아졌다고 닥터 타웁에게 전해 들었어. 그래서 지팡이도 짚지 않는다고..." 윌슨은 그렇게 말하며 평소 체이스가 테이블에 지팡이를 걸어두던 곳을 바라보았다. 수염을 정리하면서 더 말끔해진 얼굴 때문인지 푸른 체이스의 눈빛이 더 투명하게 윌슨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미묘한 긴장감이 윌슨을 휘감았다. 그럼에도 아까부터 체이스는 제스쳐를 취할지라도 대답은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어제의 일을 들킨 것만 같아 윌슨은 더욱 주눅이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체이스는 부러 차갑게 말하려 했지만, 윌슨을 마주하자 자연스레 나오는 미소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윌슨은 조금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포어맨의 말로는 자네와 함께 필라델피아 암연구학회에 다녀오라고 하던데." 윌슨은 말을 꺼내놓고 잠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체이스는 부러 아무 말이 없이 윌슨을 바라보았다.


"일정이 빡빡하던데...자네는 괜찮겠어?" 분명 자신을 향해 물어보는 게 아닌 뜻인데도 윌슨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체이스는 부러 시선을 피했다. 왠지 계속해서 바라보다가는 자신의 마음을 모두 말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외부 출장을 미루고 미뤘다가 제발 한 번이라도 가라고 성화라서요." 체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내며 살풋이 웃었다. 윌슨이 그 표정에 조금 안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박사님은...일정상 어려우신가요?" 윌슨의 일정 같은 거야 빤히 알고 있는데도 체이스는 반문했다. 질문에 답을 고르는 윌슨을 바라보며 오히려 더 떨리는 것은 체이스 그 자신이었다.


"...아니." 별다른 핑계를 댈 수 없는 윌슨이 마침내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학회 참석이 뜸했던 것 같아서...포어맨이 강력하게 말하더군. 자네와 함께 다녀오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야." 그닥 반기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윌슨도 순순히 가겠다는 말에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풀리고 있었다. "...오늘부터라는 건 전달 받으신 건가요?"


"그래, 오늘부터 출발이라더군. 학회 참가 신청도 준비되었다고 해서 꽤 놀랐거든. 괜찮다면 내 짐이랑 지네 짐까지 같이 실어 간다면 괜찮을 것 같아. 자네 집부터 들러서 준비하면 될까?"


왠지 모르게 신혼여행이라도 준비하는 것 같은 말투에, 체이스의 기분은 한껏 더 풀어졌다. "괜찮을 것 같네요. 이번에는 제 차로 모시죠." 체이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야 더 이야기하고싶었지만 일단은 그가 필라델피아 출장에 동의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나머지 하고 싶은 이야기라면 차로 가면서, 필라델피아 학회장에서, 필요하다면 호텔 안에서라도 할 수 있었다. 하우스만 없다면야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대로 판을 이끌어갈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속마음의 내용은 조금 달랐다. 체이스는 윌슨에게 좀 더 투정을 부리고 싶기도 했다. 그가 원하는 이야기나, 적어도 윌슨이 어제 연락을 받지 않은 이유를 풀어놓는답시고 하우스를 찾아간 이야기를 듣고싶지는 않았다. 오로지 자신과 윌슨의 이야기로만 체이스는 앞으로의 시간을 채워나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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