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체이스가 윌슨의 집에 돌아온 것은 그 날 저녁 8시였다. 애덤스와의 면담을 뒤로 하고 바로 현관문을 연 그는 가방도 채 내려두지 않고 소파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아챈 그는 습관처럼 자연스레 주방으로 가 싱크대와 인덕션, 그리고 마지막으로 냉장고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그의 미간이 우려로 찌푸려졌고 서둘러 침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는 문 틈으로 들어온 빛에 형형한 눈을 하고 있는 윌슨을 찾아내곤 그에게 다가갔다.
“…또 식사를 건너뛴 거에요?”
“…자네가 만들어 둔 아침은 먹었잖아.” 윌슨의 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스는 오히려 안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체이스는 말을 흐리고는 한 손을 들어 옆으로 누운 윌슨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몸에 이상이 있거나 한 건 아니죠?”
“…자네가 보기에는 어때?” 윌슨의 질문에 체이스는 손을 내리고는 그를 마주보았다. “…저에게 그 질문을 넘기시다니 참 너무하시네요.”
무릎꿇은 채 체이스는 한동안 윌슨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눈을 반 쯤 감은 그는 요즘 병동에 ‘장기 연차’를 낸 상태였다. 포어맨과 지역 경관들이 그대로 하우스를 끌고 나갔을 때 결국 윌슨은 체이스에게 잡힌 채 무너지고 말았다. 아마 체이스가 그를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더욱 초췌한 상태가 되었을테지만 윌슨은 당장 체이스의 그런 헌신에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때 자신을 향해 달려온 하우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물론, 하우스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 뿐이었지만 윌슨에게는 그 순간만이 중요하게 맴돌았다. 그런 그를 잡아주던 체이스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호텔에서, 차 안에서, 지금 자신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이 집 안에서 수없이 많은 말들을 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윌슨은 그런 것들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체이스는 파도처럼 그에게 수도 없이 부딪혀왔다. 한사코 마다하는데도 체이스는 윌슨의 무너질 듯한 마음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처럼, 그의 앞에서 애써 웃어보였다. 윌슨을 향한 자신의 걱정까지 삼켜가며 웃어보이는 체이스를 내칠만큼 윌슨은 모진 사람이 되질 못했다. 그 마음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남자가 윌슨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체이스의 셔츠에서는 방금 전의 사무실 향기와, 바깥 풍경의 향기와 그의 체취와 머스크 향이 미묘하게 섞여 풍겨왔다. “…그래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녁 먹을 준비는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체이스가 번쩍 일어났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자켓을 벗은 뒤 윌슨의 침대 발치에 고이 접어두고는 양 팔의 셔츠를 풀어 말아올렸다. 윌슨은 습관처럼 그런 그를 따라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체이스는 짐짓 콧노래까지 부르며 주방으로 건너가 앞치마를 두르고는 냉장고를 살피기 시작했다.
“…매일 집에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윌슨이 힘없이 말했지만 체이스의 재료 손질하는 소리에 모든 것들이 묻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윌슨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재료를 손질하며, 체이스는 잠시나마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고민했다.
“…박사님이 식사를 제 때 하면 제가 조금 마음을 놓을지도요.” 체이스는 냄비를 올리고 불을 피우며 말했다. “…그래도 이런 시간을 저에게서 빼앗는 건 가혹한 일이에요.”
“…진단팀은 요즘 어때…?”
아마 하우스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을 테지만 부러 최대한 돌려 물어본 것일 터다. 진단팀의 일이 곧 하우스의 일이고, 그 결과가 곧 하우스의 결과와 같은 일일테니. 그래도 체이스는 불만을 갖거나 하지 않았다. 진단팀의 일은 곧 자신의 일이기도 했으므로. 마음에 쓴웃음이 일어났지만 체이스는 애써 요리의 연기에 자신의 얼굴을 잠시나마 감출 수 있었다.
“사실 요즘 모두 힘든 게 사실이에요….저까지 포함해서.” 체이스는 말끝에 자신을 끼워넣으며 잠시 윌슨을 바라보았다. 나이트 가운에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그 안쓰러움과 동시에 자신을 따라 거실로 나와준 그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겨나가야죠. 환자의 죽음이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까요. 절차에 따라 베벌리 씨의 검시도 진행할 예정이에요. 고맙게도 닥터 애덤스가 같이 해주겠다더군요.”
“…그렇군.” 예상했던대로 윌슨의 대답은 짧았다. 아마 전해들어가며 상황을 대략적으로 짜보겠지만 역시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병동에 다시금 나갈 준비를 한다는 게 윌슨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우스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난 그날 뒤부터, 포어맨은 물론이고 누구와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체이스와 나누는 대화도 어려워질 지경이었지만...공교롭게도 체이스는 늘 그의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자리를 지켜준 탓에 그런 거부감을 표할 시점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러한 절망의 시간과 타인의 부재가 지금 이 순간 - 저녁에 체이스가 다가와 그에게 저녁을 만들어주는 시간 - 을 소중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었다.
물론, 할 수 있다면 특히나 관리자인 포어맨이 그에게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윌슨이 휴가를 낸 지 이틀에 걸쳐 마무리 되었을 뿐, 이후부터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물론 포어맨에게 있어 윌슨에 대한 컨디션 체크는 온전히 체이스를 통해 전달받고 있었으므로 - 윌슨이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겠지만 - 체이스는 내심 이런 포어맨과의 대화를 통해서 포어맨이 윌슨과 접촉하는 횟수를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AACR에서의 학회 참여든, 평범하게 뇌에서 발견된 병변에 대한 의학적 소견을 내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이것은 달랐다. 윌슨이 지금 고통으로 앓아 누운 이유 자체가 하우스인만큼, 체이스는 이 문제를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 다루고 싶었다. 문제를 자신의 손 안에 들어갈만큼 좁고 작게 만들면, 윌슨이 바라보는 문제도 그에 맞춰 좁고 작아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좁은 통로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체이스 자신 뿐이다. 아마 체이스가 이토록 윌슨의 곁을 지키려는 것은 실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느낀 위기감 때문이겠지만…체이스는 윌슨의 상태를 핑계로 그의 곁을 더 자주 맴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만든 이 작은 일상 속에 윌슨이 순응해주는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시야를 좁히고 싶었던 것은 오히려 자신 쪽이었음에도...윌슨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며 인덕션의 불을 내렸다. 요리가 완성될 참이었다.
이내 체이스가 양 손에 음식을 들고는 윌슨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다가왔다. 그는 익숙한 몸짓으로 윌슨의 앞에 접시를 내려두고는 윌슨의 맞은 편에 앉았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사실 오후 4시 즈음에 가볍게 간식을 먹은 참이지만 체이스는 자신의 접시도 챙겨온 참이었다. 며칠 전부터 윌슨은 자신 혼자서 밥먹는 모습을 지긋이 지켜보는 체이스가 부담스럽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식사라고는 거의 하지 않는 그였지만 늘상 체이스는 윌슨 앞에서 자신의 접시에 음식을 가득 채워 가져왔었다. 그는 살펴볼 게 많았다. 윌슨이 얼마나 제대로 섭취하는지, 혹여 윌슨이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보통은 윌슨이 자신의 할 말들을 하면 체이스가 들어주는 식이었지만 그 날 만큼은 조금 달랐다. 말없이 식기를 드는 윌슨을 바라보다 말고 체이스는 잠시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스푼을 스프에 조금씩 담아가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거 아세요, 박사님?"
윌슨이 대답 없이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텅 비어 있는 눈동자가 신경쓰였다.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죠. 박사님이 저희 집에 오셨을 때요. 왜 제가 박사님을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고..."
윌슨은 순간 멈췄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체이스가 만들어준 수프의 향이 코밑을 감싸자 왠지 모르게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과할만큼 남을 생각하고, 스스로 떠앉는 미련함에...고집은 또 어찌나 센지...넌지시 이야기해도 잘 듣지 않고, 그럼에도 마음을 내비치는 건 잘 숨기지 못해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점이..."
체이스의 말에 따라 윌슨의 주변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듯 윌슨이 볼멘 소리를 했다. "...그런 건 보통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이유 아닌가?"
"...박사님도 비슷했던 거 알아요?" 체이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전부터 스푼을 수프에 그대로 담근 채 입에도 담지 않았던 것 치고는 화사해서 윌슨은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간만에 재미있는 반응을 보이는 윌슨을 보니 체이스도 새삼 입맛이 돌았다.
"있는 그대로 아름다워서 좋아하게 된 건 금방 질리더군요." 체이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어딘가 안쓰럽고 비어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 그건 멈출 수가 없어요. 그걸 채워주기 전까지는. 박사님도 동의하죠?" 체이스의 말이 자신을 관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윌슨은 수저를 잠시 내려놓고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비어있는 것 같다가도 처연해 보이는 그 표정을 체이스는 올곧게 받아들고는 간만에 수프에 담궈두었던 수저를 들고 답하였다.
"...전 그래서 박사님을 사랑해요."
49.
"...정신이 좀 드쇼?" 익숙한 음성에 깨어난 하우스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얼마 전, 그가 경관에게 이끌려서 그대로 들어온 구치소의 한 구석이었다. 일어나기 위해 잡은 간이 침대의 손잡이가 이 곳의 차가운 느낌을 더욱 부추겼다. 꿈결 같던 순간도 잠시, 그에게 말을 건넨 것은 수감 시절에 가볍게 알고 지냈던 해밀턴이었다.
"...자넨 여기 어떻게..."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병원으로 돌아가서 바이코딘만 주구장창 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게 이 결과야." 하우스는 이죽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내 지팡이는?"
"처음 온 사람처럼 구네. 당연히 압수해갔지. 그나마 이 간이침대를 차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란 말이야. 자네가 절름발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잖았으면 방금 전 여길 나간 덩치가 자네를 바닥에 내팽개쳤을거라고."
"망할…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네. 여기 말고도 끌려가야 할 곳이 있는데 일정에 늦지 않았나 모르겠군."
"...3일 후입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하우스는 구치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구치소의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경관은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그 말은 경관이 한 말이 아니었다. 하우스는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3일 후에 청문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청문회 다음 송치라고 하지 않았나? 어째서 날 여기로 데려온 건가? 내가 망할 한니발 렉터도 아니고 말이지."
"전자발찌 훼손에 활동제한범위를 벗어나기까지 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서 말이죠." 하우스는 별다른 변명을 못 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윌슨은...?"
하우스의 질문에 잠시 포어맨은 할 말을 잃었다. 적어도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진단팀을, 아니 적어도 자신이 돌보고 있었던 환자에 대한 이야기라도 해야 하지만 하우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의외의 질문이었다. 필라델피아 학회장에서 그를 체포할 때만 해도 정신이 없어서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우스는 짐짓 많이 달라졌고 그가 윌슨 이야기를 할 때는그 점들이 더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포어맨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고른 뒤 대답하기 시작했다.
"...잘 지내시느냐고 물어보신다면 그리 좋은 대답은 못 드리겠지만...이겨나가고 계십니다. 적어도 청문회 관련한 말을 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환자는 사망했네. 진단팀은 분리되거나 체이스가 이끌거고. 아닌가?" 마치 윌슨 빼고 모든 문제는 알아서 해결될거라는 듯이 말하는 하우스의 태도에 포어맨은 잠시 뭔가 심상치 않다는 기분을 느꼈지만 체이스가 윌슨을 대할 때 느끼던 기분과 마찬가지로 꺼림칙하게 느껴져 최대한 그 기분을 덜어내려 애썼다.
"…제 말은, 박사님 말입니다." 포어맨은 목을 가다듬었다. "이사진에 회부되어서 청문회를 여는 건...아마 박사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박사님의 의사 면허를 취소시킬 수도 있는 큰 문제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줄 거라면 적어도 내가 이런 꼴이 되기 전에 해주지 그랬나." 하우스가 비꼬았지만 포어맨이 그 다음 보인 행동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경관의 옆으로 가 지팡이를 집어 구치소의 창살 너머로 하우스에게 건넸다. 경관은 그 상황 모두를 인지하고 있지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봐, 경찰 양반. 잘 하면 내가 이 지팡이로 옆에 있는 이 놈을 흠씬 두들겨팰 수도 있다고? 막지도 않는 건가?"
"...그럴 기운이 있으면 바이코딘 금단증상에 시달리지도 않을 거라고, 여기 계신 양반이 그러더군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경관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하우스는 이내 포어맨이 건넨 지팡이를 잡아들었다.
"실은, 부탁드리고 싶은 겁니다." 포어맨의 표정이 짐짓 풀어졌다. "저는 적어도 박사님이, 청문회를 조용히 마무리 지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미 박사님 심기를 건드린 문제는 돌이킬 수 없겠죠. 하지만 병원의 입장을 고려해주시길 바라는 겁니다." 팔에 끼고 있던 서류를 건네며 포어맨이 대답하였다.
"뻔뻔하군, 에릭 포어맨." 하우스는 받아든 서류를 들춰보지도 않고 말하였다. "이제 보니 체이스 뿐 아니라 자네도 단단히 망가졌는데. 진단팀에 있을 적의 그 선의는 다 어디로 간 건가? 이제보니 내 앞에 있는 건 그저 닳아빠진 비즈니스맨일 뿐이군."
"도발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포어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박사님이 저를 어떻게 보시건...저는 이번 건이 무사히 마무리 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를 아끼는 만큼 박사님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니까요."
"그 실력으로 제국군을 이끌었으면 분명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반역을 당했을걸. 국가니 기관이니 운운하며 마음 같은 걸 갖다 붙이는 놈 치고 제대로 된 놈을 못 봤네."
"...박사님께서 대항하는 기관에는 저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윌슨' 박사님도 계시니까요." 포어맨의 말에 하우스의 눈빛이 짐짓 달라졌다. 비아냥거리던 시선과 음색은 조금씩 잦아들고, 어둠이 서린 시선이 포어맨을 향했다.
"...윌슨 박사님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주시길 바라는 겁니다."
"빌어먹을, 자네가 윌슨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는건가."
"개인적으로 잘 안다고 할 수는 없겠죠." 포어맨은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그 오만하고 불평불만 가득하며 남을 내리누르듯 하던 사람이 이토록 짜증에 가득 차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미묘한 만족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리는 건 적어도 윌슨 박사님이 고통스러운 처지에 갇히지 않게 하는 겁니다."
'부탁입니다, 닥터 하우스. 한 번이라도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윌슨 박사님을 위한 선택을 해주세요.'
얼마 전 체이스가 자신에게 부탁조로 내뱉은 말이 문득 떠올랐다. 마치 윌슨의 행복을 가로막는 존재가 자신인 것 마냥, 모두가 나서서 자신에게 윌슨으로부터 떨어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하우스는 짜증이 솟구쳤다.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지팡이를 내리쳐 포어맨의 손을 가격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순간 하우스는 조금 더 생각을 다듬었다. 보통 같으면 이 시점에 폭발하던 그의 성미가 보이질 않자 포어맨은 도리어 초조해졌다. 하우스를 도발하기에 가장 유용한 말을 써먹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은 그도 원하지 않던 상황이고, 무엇보다 그 자신도 어디까지나 하우스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기에 그는 조금 방향을 틀어보고자 했다.
"아마 누구라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포어맨의 음색은 전보다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예측 가능한 걸 막지 못하면 '사건'이라고 하고, 예측 불가능한 건 '사고'라고 한다죠."
"사고였다면 난 지금 여기 있지 않았겠지. 만일 그걸 사고라 한다 치더라도 그런 사고를 사건으로 탈바꿈한 건 다름아닌 자네 아닌가?" 하우스는 지팡이를 팔꿈치에 끼운 채 처음으로 서류를 열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포어맨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사람도 별로 없는 구치소에서 하우스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조용히 들려오고 있었다.
50.
"...내일이 며칠이었지?"
의외의 질문에 그를 바라보고 있던 체이스가 짐짓 놀라고 있었다. "그게...26일이요. 근데...왜 그러시죠?"
윌슨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수프 위에 얹은 스푼을 이리 저리 휘저었다. "...우리가 학회에서 돌아온 지도 꽤 되었고...그간 암병동에도 쌓인 일들이 많았을 거야. 실은 오늘 오후 즈음에 캐서린 부인이 호전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거든. 내일부터 천천히 출근해볼까 하고."
체이스는 잠자코 그 말을 듣는 듯 하더니,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윌슨은 들고 있던 스푼을 놓치고 말았다. 체이스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미안해요...이렇게 쑥맥에, 말하는대로 하나 하나 다 반응하는 것도 유치하겠지만...그래도 박사님이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게 저로서는 기쁘기만 해서요."
"늘 하던 출근인데...잠시 쉰 것 뿐이고." 윌슨의 말은 짧았지만 체이스는 끌어안던 것을 풀고는 그의 이마에 입맞춤하였다. "미안해요...내가 너무 흥분했네요. 내일 저녁은 밖에서 먹어요. 내가 대접할게요."
체이스는 확연히 들떠보였지만, 윌슨의 반응은 생각보다 심심했다. 체이스는 윌슨의 그러한 반응이 단지 자신의 흥분에 못이긴 반응과 입맞춤에 얼떨떨해진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간만에 윌슨의 식탁 위 불빛이 오래도록 빛나고 있었다.
"...실은, 좀 놀랍습니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더 박사님을 뵙는 게 어려울 줄 알았거든요." 포어맨은 넌지시 자신의 걱정을 내비쳤다. 체이스가 들어온 것 보다는 훨씬 온화한 내용이었지만 윌슨은 그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간 체이스가 박사님을 잘 돌봐준 것 같군요. 이제는 좀 괜찮으신가요?" 포어맨은 다시금 넌지시 던졌다. 그는 내심 윌슨을 마주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윌슨의 상태보다도 윌슨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윌슨의 입장에서 보자면 포어맨은 하우스를 구속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 사실 때문에라도 윌슨이 포어맨을 좋게 볼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병원의 누군가와 척을 지는 것은 병원장 입장에서는 절대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고 보잘것 없는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한들 한 병동의 과장이나 되는 인물을, 그것도 지금처럼 중대한 시점에 압박하는 것은 이사진에게 자신의 실책을 그대로 떠벌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포어맨은 최대한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고 윌슨을 최대한 자신 쪽으로 데려오는 일은 못 할지라도 적어도 청문회에 참석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자신의 결정에 반하는 인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우스의 실책을 따지는 자리에서 학회장 난입이나 체포, 체이스까지 말려들게 만드는 치정문제로까지 번지게 된다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게 뻔하니까...깔끔하게 당장 사직서를 쓰고 병원을 나올망정, 치욕스러운 일로 망신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 것이 그로서는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간절함을 담은 말에 대한 응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걱정해줘서 고맙군. 자네 말이 맞아. 닥터 체이스가 날 돌봐준 덕에 많이 좋아지기도 했지." 윌슨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틀에 맞춘 것 같은 대답이었지만 포어맨을 안심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포어맨이 습관처럼 맞잡은 자신의 두 손을 쓰다듬던 사이, 윌슨이 다시금 말을 꺼내왔다.
"실은 자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 정확히는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윌슨의 말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서려 있었고 순간 풀렸던 분위기가 다시금 경직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포어맨이 윌슨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입니까, 박사님?"
윌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진단팀을 분리하자는 제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