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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18화

Another - 18

by 김뇨롱

54.


순간 정적이 일었다. 칼의 질문을 받자마자 하우스는 윌슨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미묘한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눈치를 보는 것 같았던 포어맨이 입을 열었다.


"...칼, 미안하지만 청문회 대상자 외의 인물을 끌어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포어맨은 하우스의 눈길을 따라 윌슨에게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 "...더군다나 윌슨 과장님은 청문회에 질문자 자격으로 오늘 자리하셨습니다."


칼은 그런 포어맨을 잠시 노려보다 시선을 거두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규정 같은 걸 들먹이시는데, 애초에 윌슨 박사님과 하우스 박사님의 접촉이 줄어든 것이 과하게 눈에 띕니다. CJD인지 크로이츠인지 뭔지도 만일 종양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윌슨 박사님과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두 분이 언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부딪히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이번 일은 이 두 분의 갈등 때문이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칼의 눈빛을 받아낸 것은 하우스였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여기서 당장 어린애들도 하지 않을 유치한 치정 싸움으로 이 자리까지 만들어졌다고 일러바치기라도 해야한다는 건가?


"...아닙니다." 말을 꺼내온 쪽은 윌슨이었다. "어떤 점을 걱정하시는지는 압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크로이츠펠트-야콥 병은 간단히 말씀드리면 뇌에 구멍이 뚫리는 병입니다. 종양과는 아무런 관계도...없습니다." 말 끝에 하우스를 바라보며 윌슨이 마무리지었다. 하우스의 눈에서 뭔지 모를 서운함이 새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사무적으로 어떤 관련도 없다는 걸 말하는 것 뿐인데도 왠지 모를 씁쓸함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그런 사무적인 것 외에 다른 어느 것도..." 칼이 중얼거리듯 말을 시작했다.


"아닙니다,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윌슨이 강경하게 말하였다. 말 끝이 떨리고 있다는 걸 느낀 건 오로지 하우스 뿐이었을 것이다. 윌슨은 그렇게 굳혀서 말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엄숙하게 만들었고 칼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차가워졌지만 오직 그 안에서 하우스만이, 윌슨이 가진 불안감과 슬픔, 그리고 극단적인 자기 부정으로 새어나오는 아픔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라리 어떤 일이 있었고 당장에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윌슨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째서 이런 멍청한 자리에 다다라야만 자네 얼굴을 볼 수 있는걸까.


"크흠." 포어맨은 부러 잔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풀려 했다.


"이야기가 새긴 했지만, 결국 하우스 박사의 근태가 문제였다는 겁니다." 변호사 매니가 다시금 흐름을 전환시켰다. 오히려 그 부분이 하우스와 윌슨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무분별한 자리비움에 보호자 면담을 건너뛴 건 물론이고, 제한범위를 벗어난 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여기에다 예전부터 문제가 되어왔던 바이코딘 남용까지 더하면 심각해집니다."


"바이코딘 남용은 이미 논이슈의 영역입니다. 최근에는 복용 수량이 줄기도 했고요." 바이코딘 복용 내역까지 꿰고 있는 윌슨에게 새삼 감탄하면서도 그가 여전히 자신에 대해 관심을 줄이지 않았다는 것에 하우스는 마음의 저변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그 점이 문제가 될 수는 있겠습니다. 다리괴사를 치료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 없이 진통제 복용이 줄어들면 제대로 된 진단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업무 태만이 단지 진통제 남용을 막아서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까?" 매니는 물러서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감기약을 빼먹고 아프면, 일을 그만둘 수 있습니까? 차라리 상황을 공유하고 휴식을 취해야죠."


"그 뿐 아닙니다. 하우스 박사는 최근에 교통사고를 겪었습니다. 그런 컨디션에서 평소와 같은 업무 능력을 요구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힘든 사람이 그 날 밤에 바이크를 몰고 제한범위도 벗어난 채 66마일이나 되는 길을 달려간단 말입니까?" 매니가 맹렬하게 몰아붙이자, 윌슨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우스는 그 광경을 노려보듯 지켜보고 있었다. "제임스 윌슨 박사. 아까부터 이게 무슨 행태입니까? 당신은 질문을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하우스 박사 대신 대답하는 입장이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윌슨은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잠시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흘깃하고, 가을을 닮은 갈색 빛이 하우스를 스쳐지나갔다. "다만, 청문회는 심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겁니다. 상황을 보지 않고 한 사람을 데려다 화를 내고 책임만 물을 거라면 이 자리가 굳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본인의 주장이 강경한 내용에 모두가 그저 듣고 있었다. 매니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서류로 잠시 부채질하며 재차 물었다. "그럼, 물어봅시다. 윌슨 박사. 당신이 보기에 그 상황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아직, 베벌리 씨의 부검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윌슨이 대답했다. "결국 문제는 베벌리 씨의 사인이 의인성인가입니다. 만일 의인성이 아니라면 병원은 책임을 지지 않고, 프리온 대응 방안대로 베벌리 씨를 장례 업체에 인도하면 되는 겁니다." 윌슨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평소 하우스 박사의 행태를 못마땅해 한 사람들이 저마다 와서 그를 공격했지만, 결국 하우스 박사를 해임시킨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하우스는 그저 윌슨이 강경하게 말하는 것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 대신에 제대로 변호하는 것이 만족스러워서라기보다, 늘상 그의 뒷전에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던 윌슨이 이토록 열심히 자신을 위해 이야기하는 모습은 너무나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진단학과를 되찾건, 환자들을 다시 진단할 수 있건, 그 똘마니 녀석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건...하우스가 되찾고 싶었던 건 그 무엇보다도 윌슨이었으니까.


"문제를 간단히 좁힐 수 있을 것 같군요. 중간에 잡음이 있긴 했지만..." 말을 꺼내온 것은 이사진의 가장 우두머리인 '베스'였다. 그녀는 이제까지 아무런 말 없이 이 청문회를 듣고 있다가 말을 꺼낸 참이었다. 보통 그녀가 말을 꺼내는 타이밍에는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 청문회의 결론을 지을거라는 생각이다. 예상이 빗나가지 않은 듯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천천히 들어보곤 말하였다.


"결론적으로는 사안으로 올라온 CJD가 의인성인지를 체크하는 게 주요 쟁점이군요. 그레고리 하우스 박사는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에 헌신해주었고, 그 능력과 명성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비록 사적인 행태로 인해 가석방 상태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생겨날 환자들을 위해서는 베벌리 씨의 부검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 정도 할애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겠죠." 베스의 말에 모든 사람들, 특히 윌슨이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하우스는 그런 윌슨을 바라보다 베스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좀 더 요약해줄 수 있겠소? 내가 수감되던 동안 아이큐가 좀 떨어져서 말이지." 능청스럽게 내뱉은 하우스의 말에 베스는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았고, 포어맨은 이마를 짚었다.


"베벌리 씨의 CDJ가 의인성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 하우스 박사는 복직합니다. 물론, 가석방 규칙과 더불어 의무 진료 시간에 대한 조정은 뒤따를겁니다. 만일 의인성이라면...더 이야기가 필요할까요, 하우스 박사?"


하우스는 대답 대신 숙연한 표정으로 베스를 바라보곤 이내 윌슨을 바라보았다. 당장에 얻어내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잠시라도 틈을 만들어둔 덕분에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하우스가 바라본 윌슨의 모습은 그렇게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라도 세워져 있는 것 처럼, 다행스러움을 조심스레 내비치는 그 얼굴에 숨어 있는 것은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이었다.


베스는 그 말을 마치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문회가 종료된 것이다. 포어맨은 급히 자리를 정리하며 말을 마무리했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회의실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정리하는 윌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직 빠져나오는 사람들 때문에 바깥의 경비와 경관, 담당 형사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저 다정한 눈빛, 시선은 아래로 떨구고 있지만 온 몸에서, 이미 하우스가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윌슨이 감지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할 수만 있다면 가득 안아주고 싶었다. 얼마 전 AACR 학회장에서 그를 가득 끌어안았을 때 문득 느껴졌던 코튼향이 코에 감도는 것만 같았다.


"...윌슨..." 하우스가 꺼낸 말은 고작 그 뿐이었다. 그는 또 다시 아무런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준비하려던 것은 청문회에서 내밀 멍청한 의학용어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금 마주치게 될 윌슨에 대한 것이었음에도...어째서 어떤 말을 할지 준비조차 하지 않았단 말인가? 망할, 또 이렇게 멍청해지는 건가 싶던 찰나, 서류를 정리한 윌슨이 하우스를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닙니다."


차갑고 냉정한 그의 태도에, 순간적인 충격과 고통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하우스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윌슨은 유유히 자리를 떠나 회의실을 나서고 있었다. 어느덧 그의 주변을 찾아온 경관이 다시금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베스 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포어맨이 하우스의 곁에 다가왔으나 하우스는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결국 다 윌슨 박사님 덕분입니다. 그래봤자 부검 결과가 모든 걸 뒤집겠지만요." 포어맨이 말을 꺼냈지만 하우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포어맨은 말을 이어나갔다.


"재심사가 있기 전까지 호텔에서 지낼 거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다시 구치소에 머물게 될겁니다. 물론, 그 쪽에서 얼마나 조용히 계시느냐에 따라 다른 처우를 해드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망할, 더럽게 말이 많군...어서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게." 거친 말에 포어맨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하우스를 바라보았지만 어느덧 침통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포어맨은 하려던 말을 거두었다. 그는 경관에게 손짓을 했고, 하우스는 그대로 담당 형사와 경관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발을 옮겼다. 방금 전, 세상이 모두 무너진 것만 같았다. 블라인드까지 쳐져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병동 과장 사무실을 향하던 하우스의 눈동자는, 그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윌슨은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무너져버렸다. 수간호사에게 자신이 가진 차트를 넘기지 않았다면, 분명 이 시점에 수간호사가 자신의 사무실로 들이닥쳐 차트를 요구했을 것이다. 겨우 앉은 의자에서 책상에 눈물을 쏟아내며, 윌슨은 이 시점에도 떠나가는 하우스를 바라볼 욕심을 거둔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얼토당토 않은 청문회 동안,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하우스의 눈빛이 떠오를 때마다 마치 그의 눈 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물어보고 싶은 말도, 하고싶은 말도 너무나 많았지만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우스의 복직을 위해 준비해 온 말들을 하는 것과 포어맨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하우스를 차갑게 내치는 것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애초에 하우스가 말한 것이라곤 고작해야 '필요하다'는 것 뿐인데도...저 홀로 날아간 마음을 붙잡고 다시 땅에 묻느라 윌슨의 마음은 이리저리 헤지고 흩어져 버렸다. 그렇게 버리고 주워담는 것을 반복하는데도 여전히 하우스가 병원을 나서서 경찰차를 타는 것이 신경쓰일 지경이다. 그럴 리가, 그럴 수는 없다. 늘 그렇듯 하우스가 자신을 바라본 것은 그저 스스로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타오르는 눈빛이라는 게, 그 안에 든 욕망을 열어보는 것이 두려워 윌슨은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처음 받아보는 눈빛인데도 확신하는 것이 두렵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만간 재심사가 이루어지고 청문회가 열려 결정이 난다면...진단학과가 분리되거나 세상이 뒤집히더라도 하우스는 결국 이 곳에 돌아올 것이고, 그 때 그런 그를 바라볼 엄두도, 그와 멀쩡히 대화를 나눌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저 바라온 것은 별일 없이 그의 곁에 머무는 것 뿐이었음에도...어째서 늘 이렇게 일이 꼬이는 걸까. 윌슨이 눈을 감으면 아까 자신의 차가운 말에 충격을 받은 하우스의 눈동자가 보였다.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하우스가 자신을 내치며 쏟아부은 말들을 듣는 것이, 자신이 내뱉은 차가운 말을 들은 하우스를 바라보는 것 보다 몇 배나 낫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눈물이 비처럼 그의 턱을 타고 책상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55.


"...그게 무슨 소리에요? 재심사라니."


"말이 좋아 재심사고, 결국 결정을 미룬다는 말이야." 포어맨은 당황한 체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이내 지쳤다는 듯 목까지 채운 넥타이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 "...청문회에 재심사가 있다는 건 처음 듣는데요."


"...나라고 알았겠나. 결국 베벌리 씨의 부검이 문제야." 포어맨은 얼굴을 쓸어넘겼다. "이대로 가다간...결국 예정된 대로 진단학과가 분리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요. 이사진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었잖아요." 체이스가 말했다. 포어맨은 그를 찬찬히 바라보다 말하기 시작했다. "...윌슨 박사님은 요즘 어떤가?"


"그야..."


"어제 날 찾아온 건 알고 있나?" 포어맨이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요구하더군. 하우스 박사님을 복직시켜달라고."


"그건..." 체이스는 순간 굳었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설마 그걸 받아주신 건 아니죠?"


"윌슨 박사님은 결국 자네 예상 밖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럼에도 여전히 두 사람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나? 하우스 박사님이야 재심사 전까지 갇혀있기라도 하겠지만...윌슨 박사님은? 암병동을 통째로 걸고 넘어지더군. 내가 어떤 말을 해야하나?"


"....그렇게까지..." 체이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윌슨이 여전히 하우스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가 그토록 절치부심해서 데려간 필라델피아에서도 확답을 주지 못하던 그였다. 그럼에도 슬픔에 몸부림치는 자신을 보며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기다려줄 수 없느냐'고. 체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검 결과에 따라 다르다고요."


"당장은 그렇다네. 자네는 진단학과가 분리되고 하우스가 그대로 돌아와도 괜찮은건가?"


체이스는 고개를 떨궜다. "그게 괜찮았다면 애초에 AACR에 보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체이스는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포어맨은 두 손을 들고 휘젓고 있었다.


"자네가 만일 단순하게 대답했다면 곤란했을거야. 하지만 이번에는 나에게 감사하라고. 윌슨 박사님은 적어도 하우스 박사와 어울리는 일은 다시 없을 걸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네 눈에는 이게 하우스 박사의 난동 때문이라고 보겠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결국 윌슨 박사의 동요가 아니었더라면 오늘 청문회를 끝으로 말끔하게 하우스 박사가 정리되었을테니까. 윌슨 박사님에게 그렇게 말씀드렸지. 하우스 박사의 복귀에 대한 조건으로, 다시는 그와 '엮이지 말아달라'고."


냉정하고 자비없는 말...그러나 체이스의 귀에는 그것이 기회처럼 들려왔다. 비열한 미소를 감추기 위해, 체이스는 고개를 떨궜다. 자칫하면 애덤스의 눈을 피해서라도 부검 결과를 의인성으로 조작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그다. 물론, 하우스가 병원에 돌아오는 경우가 가장 최악이겠지만 그는 당장에 이런 것들을 가려낼 수 있을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 그는 더욱 고개를 떨궜다. 포어맨이 보기에는 영락 없이 그가 윌슨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결국 자네와 내가 생각했던 초안대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진단학과 분리 말이군요." 체이스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대답했다.


"아무튼 부검이나 잘 부탁하고 싶군. 자네라면 그렇지도 않겠지만...괜한 수작 부릴 생각은 말고. 윌슨 박사님을 잘 추스려줘. 다시는 이런 식으로 말바꾸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


체이스가 고개를 들어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슬픔에 잠겨 있으나 결연해 보이는 얼굴을 그는 썩 잘 연기해냈다.




56.


체이스가 윌슨의 집 앞에 다가왔을 때 그는 불현듯 열려 있는 현관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괴한이 습격이라도 한 걸까 싶어 급히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의 코에 부드러운 버터 향이 감돌고 있었다.


"아, 환기 시켜놓고 문을 닫는 걸 깜박했네. 문 좀 닫아줄래?" 윌슨은 여전히 출근 당시 입었던 옷에 앞치마만 걸치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식탁에는 보란 듯이 2인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왠지 모를 푸근한 기분에, 체이스는 스스로가 청문회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숨기느라 꽁꽁 묶어두었던 감정의 리미트가 풀리는데도 막을 수가 없었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걸 느끼며, 체이스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자신의 자켓을 벗어 옆에 걸어두었다.


"...제가 올 줄 아셨던 거에요?"


"내가 힘들 때에는 늘 자네가 와줬잖아." 전과 달리 부드럽고 따스한 대답에, 체이스는 입꼬리가 더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는 더 말을 이어가기 어려워져서 급히 화장실로 향해 손을 씻었다.


"...뭐 도와줄 거라도 있을까요?"


"여기 있는 접시만 식탁으로 옮겨줄래?"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체이스가 바라던 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윌슨이 독단적으로 포어맨을 찾아가 하우스의 복직을 요구한 것은 이제껏 그가 느껴왔던 그 어떤 배신감보다도 큰 배신감을 불러왔지만 포어맨이 만들어 둔 조약은 그를 마음 놓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무엇보다 윌슨의 행태가 그의 마음을 풀어내기에 충분했다. 늘 그 갈증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자신의 마음 끝을 건드려왔던 윌슨이 이토록 알아서 움직여주는 걸 볼 때마다 체이스는 스스로를 감내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든다.


윌슨이 힘겨워할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던 주제에, 체이스는 마치 처음 이 집에 온 사람처럼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앞치마를 두른 채 음식을 담고 있는 윌슨을 보는 건 지나칠만큼 그에게 자극적이다. 둥근 구두코와 허리 라인만 살리고 떨어지는 바지, 그 위를 자리한 갈색 스트라이프 셔츠와 그 목을 금욕적으로 잠궈둔 듯한 푸른 넥타이. 그 모두를 아우르듯 감싸고 있는 연노란색 앞치마는 그로 하여금 불순하고, 잘못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저 앞치마의 매듭은 분명 느슨하다. '서툰 주부'를 위해 만들어진 앞치마의 방수 기능이 매듭을 잘 풀어지게 만들고 있다. 소리도 없이 풀리고 자국도 없이 떨어지겠지. 그 다음은...


윌슨이 그의 앞에 큰 냄비를 두며 그의 상상은 다시금 마무리되었다. 준비해 온 음식이 몇몇 접시에 나눠진다. 일상적인 대화씬으로 돌입할 수 있었지만 둘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체이스는 수행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접시에 음식을 나눠 담았다. 음식에 대해 칭찬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윌슨은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괜찮았어요?"


음식에 대한 칭찬이 아닌 걱정의 말이 체이스에게서 나오자, 윌슨은 은은히 짓고 있던 미소가 풀리는 걸 느꼈다.

"...뭐가?"


"...하우스 박사님의 청문회요." 낭패라는 것을 알면서도 체이스는 확인하듯 물었다. 이런 뭐든지 확인하고 체크하는 자신의 성미에 질려함과 동시에 윌슨의 앞치마에 대한 상상이라도 더 이어나가는 게 좋았을거라 스스로에게 장담하면서.


윌슨은 대답 대신 작게 웃어보였다. "...아직 잘 모르겠어." 말해주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잘 모르겠다는 는 것인지 모르지만 체이스는 거기서 더 캐물을 자신이 나지 않았다. 윌슨이 하우스에 대해 말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신경을 건드리기에는 충분했으니까.


"...그것보다는 자네가 어떻게 오늘 하루를 보냈는지 궁금한데." 윌슨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불과 한 달 전, 체이스는 스스로가 꾸었던 꿈을 다시 눈앞에서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윌슨은 포크도 들다 말고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어, 전...저도 이사진과 잠시 면담을 진행했어요. 진단팀의 모든 팀원들이 거쳐간 것과 마찬가지로...과장으로서의 역할도 이야기했지만 그건 길지 않았어요."


"꽤 고단했겠는데." 당장에 하우스의 걱정밖에 들어차있지 않을 것 같던 윌슨의 입에서 나온 것 치고는 꽤나 공감하는 그 말투에 체이스는 들고 있던 스푼을 놓을 것만 같았다.


"아뇨, 그저...절차적인 거니까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체이스는 자신의 뒷목까지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열일곱살로 돌아간 것 같은 멍청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자네를 믿는 것 같아. 궃은 일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꿋꿋이 이어나가니까." 동료로서 꺼낼 수 있는 칭찬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추켜세워지는 기분에 체이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접시에 코를 박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윌슨이 만들어 준 수프를 들이마시듯 스푼으로 떠먹기 바빴다.


그 순간이었다.


아까 전의 연노란 방수 앞치마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체이스는 그 소리가 자신의 옆으로 점점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윌슨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체이스는 스푼에 담겨 있던 수프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윌슨을 바라보기도 전에 그의 두 손이 윌슨의 허리춤에 거칠게 손을 감았다. 필라델피아 호텔에서 맞닿은 것 이후로 처음. 윌슨은 지독히도 틈을 주지 않았었다. 이런 스킨쉽을 바라고 그를 돌봐온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런 감정을 지닌 채 타오르는 마음을 움켜쥐고 곁을 맴도는 남자라면 모른 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그것을 안다는 듯 윌슨은 그를 제지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말해봐요." 더 이상 수줍은 소년에 머물 수 없었던 그는 윌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베벌리 씨의 부검 때문이죠?" 꽤 많은 단계를 건너 뛴 질문이었지만 윌슨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남은 손으로 체이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살결이 실시간으로 체이스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것 때문이 아냐." 올려다본 윌슨의 표정은 갑자기 처연해보였다. 체이스는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차라리 유혹적인 말이라도 내뱉으면서 끌어안기라도 했다면 그걸 빌미로 그를 안아버렸을텐데.


"...그렇게까지 해서 박사님을..."


"그냥, 날 좀 도와줘." 윌슨은 애틋하게 말했다. "그냥...이제는 너무 힘들어서..."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세요...?" 체이스는 윌슨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남자이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어떻게든 윌슨을 쓰러뜨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토록 지독하게 윌슨으로부터 요청받기를 바라는 그 눈빛이 윌슨을 옥죄고 있었다. 물론, 이는 윌슨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하우스에게 다가갈 수도, 결정적인 한 마디로 이제는 그에게 어떤 말조차 들을 수도 없는 윌슨의 입장에서는 선택지랄 것이 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체이스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입맞춤. 얼마 전 체이스가 윌슨에게 했던 것과는 다른 그 수줍은 입맞춤에 체이스는 자연스레 일어나 허리에 감은 자신의 두 손을 천천히 그의 등 쪽으로 가져가 그의 갈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한껏 망가뜨렸다. 입맞춤은 이내 거친 숨결이 되고, 그의 셔츠를 꼭 다물고 있던 푸른 넥타이는 체이스의 손길에 그대로 풀려나갔다. 하나 둘 셔츠 버튼이 벗겨지고, 윌슨은 당황에 잠시 체이스를 밀쳐내다 결국 식탁에 그대로 누워버리고 말았다. 식기 몇 개가 그 충돌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지만 체이스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윌슨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어 있는대로 그의 살결을 맛본 다음에야 고개를 들어 윌슨을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갈증에 시달리던 그의 두 눈에 형형하게 빛이 나는 불길이 타오르는 정염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당황에 허우적대는 윌슨의 어깨를 잡고, 그의 고개를 잡아 자신에게 향하게 만든 체이스는 그 올곧은 욕망을 그대로 윌슨의 얼굴을 향해 쏟아붓고 있었다. 그의 금발 앞머리가 이마를 타고 내려오며 시야를 흔들었지만 그의 시선은 윌슨에게 꽃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그리고 오랜 밤. 한 남자의 긴 갈증이 한 남자의 외로움을 빌미로 끝없이 끝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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