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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19화

Another - 19

by 김뇨롱

58.


해밀턴은 그 날 오후에 구치소로 다시 돌아온 하우스에게 어떤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으나 하우스가 보이는 특유의 눈빛 때문에 말을 붙이기는 커녕 근처에도 앉아있지를 못했다. 흔히들 '맛이 간 눈'이라고, 수감 시절에 본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이다. 오래도록 감방을 주름잡던 히스패닉 마약상도, 간수까지 끌어들여 온갖 물건을 들여오던 시칠리아 놈들도, 무슨 일이든 주먹으로 해결을 보려 하는 흑인 놈들도 곧잘 하우스를 업신여기거나 아예 동네 떠돌이 개마냥 거들떠 보지도 않기 일쑤였지만 아주 가끔가다 몇 번, 그가 저런 맛이 간 눈을 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런 그를 함부로 건드린 누군가가 큰 문제를 겪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기세가 지독해서 누구도 그 기류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해밀턴은 그의 감방 동료였던 만큼 그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의 곁에 가기를 꺼려했는데, 하우스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410호의 제드를 욕실의 비누와 세제, 그 외에 얼마 없는 물질을 동원해 자연사처럼 보이도록 독살할 계획까지 말하는 걸 직접 본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 상태를 보건대 적어도 제드의 경우보다 더 극심하며 - 아니, 이제까지 봐오던 것 중 가장 맛이 간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겨우 늦은 오후즈음 되어서야 남은 한 명의 수감자가 나가고 다시 둘이 남게 되면서 천천히 분위기를 풀어낼 수 있었다.


"이봐, 바로 구속되지 않은 걸 보니 그나마 다행인 거 같은데...괜찮은 거요?"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을 바라보는 하우스의 표정에 해밀턴은 자신도 모르게 의문문으로 말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하우스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그는 보기보다 부쩍 더 울적하고, 슬퍼보였다.


"...이보쇼, 해밀턴." 하우스는 당장에 대답을 미루거나 소리없이 노려보지는 않았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해밀턴은 그의 맞은 편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쫓아다니는 성가신 녀석이 하나 있소." 때아닌 연애담에 해밀턴의 우려는 조금씩 더 불식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침착한 편이 아니었다면 성가신 추임새를 넣을지 모를 정도로.


"...감방 들어오기 전부터 말인가?"


"...감방 들어오기 전부터." 괜한 질문을 했다고 해밀턴이 자책했지만 하우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빌어먹을, 그거 무지하게 오래되었는데...그나저나 너무하는군. 자네 수감시절에 면회도 오지 않다니 말이야." 해밀턴의 말에 하우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생각지 못한 말에서 다시금 윌슨을 모질게 대한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벌이라면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하우스는 생각을 참느라 잠시 이를 갈았다. 해밀턴은 다시 자신이 그의 신경을 건드린건가 싶어 걱정했다.


"...오지 않을 만도 하지." 하우스가 조소하듯 말했다. 해밀턴은 그제서야 하우스가 보이는 맛이 간 눈의 이유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그의 슬픔때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보통 온갖 잡놈들이 몰려든 감방에서 가장 드러내기 어려운 감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슬픔'이었다. 슬픔은 그 자체로 감정적이고, 감정적인 것은 그 사람의 약점이 된다. 그림자로도 시비를 걸어 칼을 맞기 일쑤인 무법지대에서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구치소에서는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해밀턴은 부러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하우스는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냥, 내가 빌어먹을 개자식이었거든. 애초에 그 녀석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빤히 알면서 매번 이용만 해먹고 무시해대기 일쑤였으니까. 면회는 커녕 절연을 해도 시원찮을 정도지." 하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봐, 내가 장담컨대 그거 분명 자네만 그런 게 아니라고." 적당히 응수한다 생각하며 해밀턴이 말을 꺼내왔다. "내 전부인 메리 말이야. 두 남매를 키우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군말 하나 없는, 그야말로 곰같은 여자였어. 내가 술을 먹고 난동을 피워도 잠잠했는데 결국 내가 바람을 피우니 뒤도 보지 않고 돌아서더군.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난 아직도 그녀에게 연락을 해. 이미 나 같은 건 잊어버리고 래리인지 잭슨인지하는 웬 기생오라비같은 중고차 딜러놈과 재혼까지 했지만 말이야...결국 그녀 같은 여자는 없더라고. 그래서 이것 보라고. 지금 내가 여기 갇힌 것도 그녀 때문이야. 아니, 정확히는...빌어먹을 접근금지조항 때문이지."


"...그래, 자네도 어지간히 개자식이군." 하우스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응수하며 말했다. "적어도 자네는 그녀와 사랑이라도 해봤잖은가."


"꽤나 쑥맥같은 말을 해대네, 의사양반." 해밀턴이 말하였다.


"...그 녀석을 때려눕히고 눈 앞에서 소리질렀었어." 하우스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 녀석이 가지는 감정 같은 거 역겹다고, 꺼져 버리라며 소리질렀지."


"그것 참..." 해밀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정폭력이니 마누라와 트러블이 생기는 이야기야 종종 들었지만 이런 류는 새로웠다. "그래서, 이제 와서 자네는 그 일이 신경쓰이는겐가? 어차피 성가신 여자였다면 내치고 난 다음이 후련하지 않은가?"


하우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해밀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어내렸다.


"아이고, 이 미련한 양반아...그렇게 내치고 나서 이제 보니 아깝던가?"


하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밀턴은 그런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보쇼,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이미 늦은 건 늦은 거요. 사람 마음이 어째 내 마음과 같던가? 내가 깨닫기까지 기다려줄 인간이 얼마나 되겠소? 자기 마음을 붙들고 그대로 멈추기라도 하는 게 가능하냐는 말요." 해밀턴이 회유하듯 말했으나 하우스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해밀턴이 지쳐 잠들기 위해 자리를 파했을 때에도 하우스는 앉은 자세 그대로 기억에 기억을 거듭해가며 윌슨을 떠올렸다. 처음 프린스턴 플레인스보로에서 보았던 청신한 모습,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고르던 옆얼굴, 유난히 길었던 속눈썹. 눈. 샌드위치를 빼앗길 때 얄밉다는 듯 살풋이 접히는 보조개. 입술. 그의 앞에서라면 어디서라도 보여주던 그 미소. 눈물. 앰버를 잃었을 때, 그를 바라보던 원망과 슬픔에 찬 얼굴. 지팡이. 그 간절한 눈빛을 뒤로 하고 그를 넘어뜨리던 순간의 힘. 눈물. 다시 마주쳤을 때 낯설었던 윌슨의 모습. 온 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그 표정. 눈물. 취기와 놀라움에 지친 그를 찾아와 문 앞에서 속삭이던 윌슨. 눈물...윌슨을 만나러 갈 때 그를 수없이 부딪혀오던 필라델피아의 바람. 온기. 푸근하고, 아늑하고 생각보다 품 안에 가득 들어오는 윌슨의 온기. 향기. 감정...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닙니다.'


마지막 윌슨의 말은 망령처럼 그가 윌슨을 떠올릴 때마다 뒤쫓아 어디서든 그를 괴롭혀댔다. 그 고통 속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늘 자신만이 윌슨의 감정에 대해 떠들어댔을 뿐, 한 번도 윌슨에게서 그의 감정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꺼냈어야 할 마지막 말은 그따위 것보다도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었어야 했는데...


하우스는 고통 속에서 회한과 함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59.


청문회 다음 날부터 이사진의 요청으로 베벌리 씨에 대한 부검이 이뤄졌다. 프리온 대응 방안을 갖춘 체이스와 애덤스 두 사람은 베벌리 씨의 뇌 조직 검사를 통해 해면상 변화와 함께 병원성 프리온 단백질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벌리 씨의 사인이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남은 것은 이번 청문회의 주요사안인 이 병의 원인 분류였다. 이들은 다시금 베벌리 씨가 생전에 별도로 이식 수술을 받은 전적이 있는지, 또한 이외 수술을 받은 이력이 있는지를 체크했다. 베벌리 씨는 약 25년 전 맹장염 수술을 받은 것 외에는 특별히 큰 수술을 받은 이력이 없었다. 그의 나이대를 고려했을 때에는 이미 이전에 체이스가 주장한대로 산발성 요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베벌리 씨의 나이는 향년 56세였고 산발성 요인을 지닌 환자의 분포는 40대에서 60대까지였다. 그러나 하우스의 주장은 달랐다. 그는 베벌리 씨가 가족력에 치매가 있으며 최근 가까운 친척이 이 질환으로 사망한 것을 근거로 들어 그가 유전성 요인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유전성 요인은 전체 사례에서 5%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희귀한 사례였다. 체이스는 혀를 찼다. 애덤스는 그 신호를 알고 있었다. 결국에는 하우스의 주장까지 체크하고 나서야 베벌리 씨의 발병 인자를 검토하고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으니까. 둘은 서둘러 방역복을 정리한 뒤 자켓을 걸치고는 헬렌 씨를 찾았다.


"...남편의 부검이 마무리된 거 아니었나요? 왜 갑자기 돌아가신 아주버님 일을 여쭤보시는 거죠?" 헬렌 씨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애덤스는 그녀를 붙잡고 대답했다.


"질병의 원인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에요. 그래야지만..."


"그 중년 의사도 같은 질문을 했었죠...하우스 박사님이요." 헬렌의 눈빛이 분노로 물들었다. "대체...당신들은 언제까지 우리들을 붙잡고 괴롭힐 생각이죠? 아무리 질문을 해대도, 검사를 해대도...죽은 제 남편은 돌아오지 않아요...그렇게 당신들이 원하는 퍼즐이 풀리는 것에만 집착하는 게 제정신인가요?"


"...베벌리 씨의 질병은 희귀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진단을 끝내야만..." 애덤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헬렌이 그녀를 향해 손을 들고 있었지만 다행히 체이스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애덤스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체이스는 잡은 헬렌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부인 말씀이 맞습니다. 돌아가신 부군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대답해주시는 것에 따라 추가로 생길 수 있는 환자분의 질병을 예방하거나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부인께선 다른 이들의 고통을 등한시할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토록 정성스럽게 베벌리 씨를 간병한 분이라면, 분명 선량한 마음을 가지셨을 테니까요." 체이스에게 손이 잡혀 그를 바라보던 헬렌 씨의 눈에 문득 눈물이 차올랐다. 극한으로 몰린 사람을 건드리는 일이라는 건 체이스와 애덤스 두 사람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일이었다. 어디 진단학과가 헛발 짚거나 질문해댈때 방어적인 사람이 한둘이었던가. 헬렌 씨는 그대로 무너지듯 체이스에게 기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놀랍도록 능숙하게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애덤스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어넘겼다.


"아시다시피 베벌리는 이 병원의 직원이었고, 사내 복지의 일환으로 돌아가신 아주버님의 안치를 이 병원에서 진행했었어요." 진정이 된 헬렌은 퉁퉁 부은 눈으로 침착하게 말하였다. 안치실이라면 분명 관련한 정보가 남아있을 것이고 친척이니 베벌리 씨의 성과 동일한 '리처드슨'에 맞춰 인물을 색출해내면 금새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체이스는 동조의 뜻으로 잠시 애덤스를 바라보았고 애덤스 또한 체이스와 같은 선상까지 생각이 미친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헬렌 부인." 체이스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애덤스는 그런 헬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힘든 상황에도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헬렌은 그런 그녀에게 아까 전의 일에 대해 사과했고, 그녀는 넉살을 피우며 아까 전의 체이스가 했던 것과 같이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두 사람은 이내 영안실로 돌아와 담당의인 페리에게 기록 체크를 요청했다. 예상했던 대로 금새 관련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이먼 리처드슨. 향년 60세였군요. 사인으로 추정한 건 치매였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교통사고였어요. 당시 보호자가 베벌리 리처드슨 씨로 되어있군요."


"사내 복지를 받기 위해서였을거에요." 체이스는 건조하게 대답하며 서류를 넘겨받아 살펴보았다. "미드타운 공동묘지, 19-1..."


"설마 그 짓거리를 또 하려는 건 아니죠?" 페리가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우린 문의만 한겁니다. 당신은 정보를 주기만 했고요." 체이스가 대답하며 다시 서류를 건넸다. "어쨌든 전 이 일에서 제외시켜 주세요. 안 그래도 베벌리 씨의 프리온 대응 방안 때문에 골치가 아프니까." 그는 두 손을 들며 자리를 나섰고 체이스와 애덤스 두 사람도 이내 영안실을 나섰다.


"...결국 살펴볼 생각이네요." 애덤스가 말하였다.


"뭐가?"


"알고 있잖아요. 진작에 하우스 박사님도 친척의 묘를 찾아 파헤치려 했었어요."


"...자네도 알잖아. 이 방법 뿐이야."


"하우스 박사님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요?"


"그 사람의 방법까지 잘못되었다면 난 진작에 여기 없었겠지." 체이스는 차트를 꽃고 진단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스스로에게 이득이 되는 건 가져가는 게 좋잖아. 너무 단편적으로 보지 말라고." 애덤스는 그 말에 자켓을 가지러 다시 진단실을 나섰다.


체이스는 의사가운을 벗은 뒤 진단학과 과장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자신의 자켓을 집어들어 걸쳤다. 사실상 방금 전 던져둔 자신의 의사가운을 빼면 하우스의 사무실은 무엇 하나 바뀐 게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모두 갈아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를 그렇게 놓아두지 않는다. 남은 정형외과 사무실을 털어서 제2진단실은 만들어줄지언정, 이 사무실을 차지할 방안이란 그렇게 뚜렷한 것이 없었다. 유리문에 새겨진 하우스의 풀네임을 바라보던 체이스는 어느덧 유리문 머지 않은 곳에 자리한 윌슨의 사무실로 눈길을 돌렸다.


부드러움. 윌슨의 살결은 그의 온화한 목소리만큼이나, 저 사무실의 원목 무늬만큼이나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런 부드러움 자체에 대한 감상은 체이스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부드러운 선율을 조금씩 침범해서 비틀어놓는 즐거움이란 곧잘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다.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한다. 기어코 그 흐름을 망쳐버린다. 이끌리는 살결을 움켜쥐고 흔들리는 잔류를 바라보며 지독한 미소를 짓는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윌슨을 집어삼키려는 음모였던 것 처럼 그는 한껏 날카롭고 어둡고 뜨거워진다. 눈. 그 찡그리는 눈에 맺힌 입술을 핥으며 체이스는 입맛을 다셨다. 손으로, 입술로 그를 흐뜨러뜨리고 눈으로 코로 귀로 그를 한껏 들이마시며 반은 정신을 놓은 채로 그를 탐했다. 그 모든 신호가 뇌리를 메스꺼울 정도로 황홀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그 중에서도 백미였던 건 윌슨의 부끄러움이었다. 그것을 맛보는 것은 늘 감질나고 갈증으로 타오르게 한다. 주저할 수 없게 만든다. 한 방울씩 맛을 볼 때마다 더욱 원하게 된다. 물론, 이제까지 그래왔듯 체이스는 시간을 두고 다시금 그를 기다릴 것이다. 그 감미로운 절망감을 음미하는 것 조차도 지금의 그에게는 후희의 일부분이다. 체이스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유리문에 새겨진 자잘한 알파벳들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그 표정이 드러나 보였을 것이다.


애덤스가 진단실 앞으로 다가오자 체이스는 그에 맞춰 문을 열고 로비로 나왔다. 차갑고 냉철한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드타운 공동묘지 앞에서 돌연 부부로 위장한 두 사람은 이내 사이먼 리처드슨 씨의 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고급 안치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실내에 별도 공간을 마련하여 안치되어 있었고, 덕분에 그들은 내부로 들어가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소란스러운 처리가 뒤따를 게 뻔했으므로 묘지기에게 몇푼 쥐어준 뒤 사이먼 씨의 뇌조직을 추출해낸 그들은 곧바로 프린스턴 플레인스보로에 돌아와 조직 검사를 진행하였다.


"결과는요?" 애덤스가 다가와 물었다. 체이스는 대답없이 현미경에서 비켜났다. 애덤스는 이내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단순한 치매가 아니었네요."


"그래. 어차피 이 자료 자체는 보고하기도 글렀지만...이걸로 확실해졌군."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끼며 체이스가 대답했다.


"...하우스가 옳았어."




60.


"...무슨 일이야?" 놀란 윌슨의 말에 일순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체이스는 준비하던 것들을 마저 마무리해 식탁에 올려두었다. "...늦었네요." 체이스가 웃으며 말하였지만 윌슨은 그에 대해 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늘 하던 대로 자신의 자켓을 잘 펴서 잠시 소파에 놓아두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자켓을 잠시 바라보던 체이스는 곧이어 윌슨이 순순히 식탁에 앉는 것을 보고는 시선을 정리했다. 어색한 시간.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체이스가 잔을 들기도 전에 물었다. 윌슨의 표정은 어제 사랑을 나눈 사람 치고는 꽤나 지쳐보인다. 그럼에도 체이스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사실 오늘만큼은 윌슨에게 그의 하루가 어땠는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애초에 청문회 참석자인 윌슨에게 그런 일들을 털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유라면 그 뿐만은 아니었다. 분명 그 소식이 윌슨이 기뻐할 소식이라는 게 자꾸만 체이스의 심장을 찔러댔다. 피차 재심사날인 내일 알게 될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자신만 웅켜쥐고 있는 기분이란 그리 상쾌한 것이 못되었다. 그래서 체이스는 반대로 윌슨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자신이 받고 싶은 게 있다면 반대로 상대에게 줘가며 의사 표현을 할 수도 있을테니까.


"글쎄..." 윌슨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청문회 생각으로 가득 차 있겠지만...체이스는 윌슨이 어떤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도 꺼내서 그런 생각들을 날려주길 바라고 있었다. "뭐가 많지는 않았지. 문제라면 담당 환자 중 한 분이었던 캐서린 부인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오늘 그녀와 오래도록 면담을 진행했던 것 정도야."


누가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고 했던가. 이만큼 좋은 이야기가 있던가? 체이스는 금새 측은한 표정을 하고는 윌슨을 바라보았다. 힘없는 그의 얼굴에서도 어제의 달뜬 얼굴을 겹쳐보는 자신이 이제는 이상해보일 지경이다. "마음 쓰는 일이야말로 정말 힘들죠. 오늘 많이 고단했겠어요."


윌슨이 보인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체이스의 위로에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체이스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퍼져가고 있었다. "고마워, 체이스. 사실 아까는 좀 놀랐었거든. 따로 연락도 없이 자네가 와 있어서."


"이런 말씀드리긴 뭐하지만...저도 오늘 좀 고단했거든요." 체이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쓸어넘기며 말했다. 아까 전 보였던 윌슨의 미소가 그의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만 같았다. 윌슨은 응수하듯 다시 작게 미소지으며 포크로 그가 만들어 둔 라자냐를 집어들었다. 윌슨의 입술 속으로 사라지는 포크를 바라보며, 체이스의 눈은 잠시 그윽해졌다. 아늑하고도 어두운 저녁식사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일 해도 되지 않아요?" 윌슨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 도중에 뒤에서 체이스가 다가와 그를 안았다. 윌슨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긴장감이 거부감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체이스는 그런 감각을 모두 알아채서 대응할 정도의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 해도 조직 검사며 때아닌 도굴까지 해야 했지만 그런 일들을 일일이 말해댈 자신도 없어서 그저 윌슨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기만 하였다. 자연스레 윌슨의 체취를 있는 힘껏 빨아올리자, 윌슨이 당황해서 잠시 그를 밀어내는 게 느껴졌다. 더 힘을 줄 수 있었지만 체이스는 그가 하는대로 물러났다.


"...미안해, 아직..."


더 말을 하지 않아도 체이스는 추궁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남은 빈틈은 그 자신이 메꾸었다. "...알아요. 이만큼으로도 충분해요." 그는 식탁에 있던 그릇들을 가져와 그를 도왔다. 그렇지 않아도 설거지는 금새 마무리될 것 같았다. 체이스는 자신의 욕망을 조금 거둔 다음, 빈 틈을 만든 것 처럼 가볍게 웃었다. "박사님, 저더러 좀 더 뒤돌아 있으라고 해도 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체이스의 저런 가벼움은 미묘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다. 윌슨은 그 점이 못마땅하다 생각하며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볍게 말한 주제에 체이스는 윌슨의 이마에 작게 입맞춤하였다.


"이미 걸어온 길로 좀 더 돌아가서 서 있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일 봐요, 라는 말을 남기고 체이스는 자신이 챙겨온 자켓을 걸쳤다. 윌슨의 제지가 없었다면 그대로 입고 온 셔츠와 바지까지 정리하고는 윌슨의 침실로 들어설 게 분명했지만 윌슨이 바라던 대로 다시금 거리를 두겠다는 일종의 제스쳐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윌슨의 표정이 풀어지는 게 보였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마음을 놓은 그 미소. 그 얼굴이 푸근해서 체이스는 심장이 저변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멀어져야만, 일정 거리까지 떨어져야만 볼 수 있는 얼굴 같아서 일순 서운한 기분이 그를 감싸고 돌았으나 그는 용케 그런 질투심을 자신의 그림자 아래로 밀어넣었다. 그렇기에 정작 그는 알아챌 수 없었다. 그가 문을 열고 돌아선 순간부터 윌슨은 다시금 무너져내렸다. 체이스가 없어서는 아니다. 물론 그는 하우스의 복직 결과를 결정지을 그 검시 결과가 어떤지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의 불길한 예감이 결국에는 하우스의 복직을 말하고 있다. 체이스에게 하룻밤 맡긴 몸의 대화도 그에게는 일절 통하는 구석이 없었다. 체이스가 더욱 들떠서 그를 바라볼 때마다, 그에게 다가올 때마다 윌슨 자신이 가지는 어려움은 더욱 커지기만 하고 이런 모습으로 마주칠 하우스를 생각하면 매 순간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필요할 때에 제대로 끊어내기라도 하면 괜찮았을까. 지금 이토록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 체이스 덕분이었음에도...사실 하루 종일 가장 궁금했던 건 체이스와 애덤스의 - 정확히는 '부검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걸 물어볼 수도 없거니와, 물어봐서 혹여 체이스가 알려준다 한들 윌슨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그토록 하우스가 돌아오길 바랐던 주제에, 이제 다시는 얼굴도 볼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울 지경이라니...부쩍 수척해진 모습, 불안해 보이는 손, 그러나 그 무엇보다...이따금씩 자신에게로 향하는, 타오르는 것만 같은 눈빛. 포어맨과 나눈 약속이 아니었더라도 윌슨은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모를 뜨거운 감정의 후반을 장식하는 것은 늘 그 자신이 하우스에게 건넨 차가운 한 마디였다. 그토록 충격받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강렬한 절망에 휩싸인 채 윌슨은 결국 체이스에게 위로를 받고야 말았다.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하우스를 감당하고 있는 주제에, 윌슨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더 헤집으려는 듯 체이스가 그에게 끼쳐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바라보고만 있다. 어차피 하우스가 바라던 선이란 우정의 선일 뿐, 윌슨 스스로가 바라던 곳 까지 올 수 있는 남자는 결국 체이스 뿐일 테니까. 그토록 차가운 말로 그를 밀어낸 지금, 결국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봐야 체이스 뿐일 테니까. 또 제멋대로 해석하고 제멋대로 아파하느니 처음부터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봐줄 남자에게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마저 남아있던 우정이라는 미명도 스스로 끊어낸 지금. 그는 몹시도 하우스가 그리웠다. 멍청이 역할이든, 바보 친구 역할이든, 차라리 어떤 타인이라도 좋으니 전처럼 그의 옆에서 한없이 가벼운 친구라도 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스스로도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에 윌슨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불과 몇 달 전 하우스가 멋대로 끊어둔 티켓을 가지고 몬스터 트럭을 보러 가던 때가 문득 생각났다.


'아까 그 주차요원 결국 우리를 커플로 오해했어요.'


'하라면 하라고 해. 커플 할인까지 들어가면 이득이잖은가.'


'박사님은 참 태평하시네요...우린 여기 너무 자주 왔다구요.'


'나는 몬스터 트럭을 좋아하고, 자네는 날 따라오는 걸 좋아하잖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아마 정확히 하자면 하우스와 함께하는 것 자체가 좋았던 것 뿐이지만...별 것 아닌 대화 내용이 머리에 감돌면서, 윌슨은 일순 그 보잘것 없는 순간으로 다시 갈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제는 포어맨과의 약조로 인해 하우스가 돌아온다 한들 그와 이야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말해주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지만 이제 더는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 윌슨은 애먼 접시만 계속해서 닦아댔다. 제아무리 접시를 닦고 닦아도 눈물에 젖은 접시는 좀처럼 깨끗해질 생각이 없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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