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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21화

Another - 21

by 김뇨롱

64.


하우스가 복직한 시점에는 진단팀의 절반 정도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하루 이틀 정도 연차를 냈던 닥터박의 휴가가 가족여행까지 이어지면서 장기화되고 있었고, 타웁의 심각한 개인사가 그 뒤를 따라 진행되었다. '레이첼 타웁'의 부고 문자가 날라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볼티모어의 메릴랜드 교회, 로젠버그 가 87-9. 하우스가 그 문자를 받아본 것은 두 번째였다. 한 번은 타웁에게서, 또 한 번은 포어맨에게서였다. '인사팀에게 요청했지만 아마 박사님에게도 문자가 갔을 거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타웁이 보낸 부고 문자에 덧붙여있는 문구에 하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포어맨에게서 온 문자는 그보다 더 딱딱했다. 아니, 적어도 그 문자의 존재 자체가 하우스에게 반 강제적으로 장례식 참여를 장려하고 있었다. 그는 '돌아온 탕아'였고 적어도 청문회를 통한 이사진의 극진한 배려와 사망한 환자의 보호자인 헬렌 씨의 용서를 통해 복직한 것이므로 앞으로 발생할 크고 작은 자리에는 반드시 참석을 해서라도 보답을 해야했다. 하우스는 혀를 차며 핸드폰을 그대로 꺼버렸다. 그는 자신 진단실 너머의 원목 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가 복직한 날 아침 다행히 애덤스가 진단실을 지키고 있었지만 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애덤스의 볼에 여전히 붙어 있는 생채기가 신경쓰였지만 하우스는 그걸 들먹이는 게 오히려 더 실례일 것 같아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 상처까지도 마치 어젯밤 그의 집 벽의 자국을 상기시키고 곧 그런 기억들과 생채기들 모두가 다시 그로 하여금 윌슨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기에 하우스는 되도록 그런 자극들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다. 마치 자리만 그대로 돌아오고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인 것만 같다. 지독할만큼 예전과 마찬가지인데도 어째서인지 그 진단실의 유리 너머 저 묵직한 원목 문 뒤의 남자만이 그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지난 며칠 간, 윌슨은 무던히도 하우스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는 것만 같았다. 마치 윌슨과의 일들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아끼려는 것처럼 하우스는 애덤스와의 대화도, 포어맨과의 논쟁도, 심지어는 진단실 구석에서 멋대로 환자의 깁스를 풀려는 정형외과와의 갈등도 최소화하고 있었다. 이는 하우스 본인이 인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텅 빈 껍질 같은 나날이 그의 미래를 가득 채워나갔다. 지나가는 구둣발, 애덤스에게, 수간호사에게 가끔 건네는 말, 웃음, 카페테리아에서, 가끔 가다 외래 진료실 문을 지나칠 때의 코튼 향...윌슨은 하우스에게 그렇게 존재했다. 하우스가 몇 번이나 윌슨을 눈으로 쫓았지만 어째서인지 온전한 그의 모습을 마주치는 경우가 없었다. 만일 그가 윌슨을 만나본 적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윌슨을 이 병원에 출몰하는 유령즈음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대신에 그의 눈에 자꾸만 거슬리는 것은 바로 체이스의 시선이었다. 포어맨은 마치 산적 두목처럼 하우스에게 늘어난 외래진료 시간과 환자 진료를 제안했다. 그 시점에도 텅 빈 하우스의 시선에 걸리는 건 바로 자신의 사무실 맞은 편, 정형외과의 자투리 사무실에 자리한 소박한 공간에 있는 체이스의 시선이었다. 우습게도 하우스와 체이스, 윌슨의 사무실은 마치 삼각형이라도 이루듯 5층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고, 때문에 체이스가 자신을 바라볼 때 뿐 아니라 그가 윌슨의 사무실을 핥듯이 바라보는 것 마저도 하우스는 인지할 수 있었다. 불과 한 달 전 차갑게 윌슨을 내친 다음 날이 반복되는 데자뷰를 느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체이스에게 윌슨은 '존재'했으니까. 출근길, 식사, 커피 타임, 자잘한 농담, 별 시덥잖은 자투리 시간까지도 이전에 윌슨이 하우스와 공유하던 그 모든 공간에 체이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보였다. 하우스 자신이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나고 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지루하던 그의 삶이 더욱 깊고 지독한 지루함에 빠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전에 없던 극심한 갈증이 그를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이런 고통스러운 건 지루하다고 하지 않는다. 바이코딘을 제아무리 우겨넣어도, 멍청한 환자들을 제아무리 조롱하고 3일 안에 희귀병에 걸린 환자의 증세를 파악해서 지적 허영을 채워대더라도 그것은 채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더 미치게 하는 것은 이제 그 증세를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시도해볼 수가 없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복직한 지 이미 일주일 이상 지난 시점, 하우스는 자신이 무심코 꺼버렸던 핸드폰 전원을 꾹 눌렀다. 이미 퇴근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사무실을 제외하고 윌슨의 사무실이며 체이스의 사무실, 밉살스러운 정형외과 사무실까지 모두 불이 꺼진 상태였다. 5층의 유일한 등불이 된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며 하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 장례식에 갈 참이다. 물론, 윌슨은 하우스에게 분명히 자기 의사를 표현했었다. 이렇게나 시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하우스의 마음에 남은 윌슨의 마지막 말은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라는 것 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다음이고 뭐고 뭐라도 뛰어넘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윌슨의 이 한 마디가 그를 차갑게 가로막고 있다. 바닥에 넘어지고 제 눈물에 숨이 넘어가던 윌슨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서 다시 재생되고, 반복되었다. 하지만 윌슨의 행동이 그를 자꾸만 뒤에서 붙잡는다. 치열한 청문회에서 결국 그를 변호한 것도,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의 집을 모두 청소해준 것도 결국 윌슨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그 머뭇거리는 눈빛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차갑게 갈라서려는 사람이 그런 눈빛을 보내던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질주하던 생각은 다른 말까지 해대기 시작했다. 윌슨은 늘 그런 식으로 말해왔었다. 그렇다면 하우스 자신의 뜻도 윌슨에게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는 시점 하나 정도는 결론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일방적이지 않은가? - 이제까지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사고방식이었지만 적어도 갈증에 목마른 그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세우는 데에는 필요한 의견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에 하던대로 윌슨에게 그 '시간'을 내밀어보기로 했다. 말보로 레드를 태우며 그의 집앞에 찾아간 것 처럼, '병동'이 아닌 낯선 곳에서, 그 빌어먹을 루틴을 벗어나서, 뉴저지를 벗어나서 윌슨의 손을 붙잡아본다면, 이야기를 해본다면 과연 어떤 말들이 나오게 될까.


하우스는 부고 문자를 만지작대며 윌슨의 사무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독히도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밤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 저변에 윌슨이 이제껏 보여왔던 모습들을 미루어보며 그가 그토록 차갑게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 그렇다. 적어도 윌슨은 하우스가 아니니까.



65.


애덤스는 지친 기색이 역력해서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우스의 복직으로 예상은 했지만 그에 비해서 행정적인 업무가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이 병동에 있었던 몇개월 간 살펴본 바에 의하면 분명 그러했다. 마치 진단학과 분리를 염두에 두고 이번 일을 벌인 것 마냥, 그녀가 출근할 때 흘낏 보았을 때에는 이미 체이스의 간이 사무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제대로 된 명패와 공간도 마련될 터다. 그래서 그녀는 포어맨이 그녀를 호출했을 때 별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포어맨은 칼같은 구석이 있었어도 좀처럼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커피는 이미 마신 건가?" 포어맨은 커피 포트에서 막 커피를 내리던 참이었다. 애덤스는 그가 이미 두 잔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빠르게 대응했다. "아직이에요."


"잘 되었군." 포어맨은 그 말과 함께 자리에 앉으며 애덤스에게 커피잔을 건넸다. 애덤스는 커피잔을 받으며 자리에 마주 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전말을 모른 채 포어맨에게 따지러 왔던 일이 떠올랐다. 괜한 생각에 애덤스는 일단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자네에게 먼저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유감이군. 가능하면 진단팀이 모두 모였을 때 진행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포어맨은 커피를 그대로 둔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째로 전달할 사항은 진단팀이 분리된다는 점이네. 이건 분명히 해야겠군. 하우스 박사님이 맡고 있던 전신은 그대로 유지되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우스 박사님의 리더 권한을 박탈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야. 다만 단위가 팀으로 변하는 것 정도로 생각해주게."


"...그럼 분리되는 쪽은요?"


"전에 대리 권한을 일임 받았던 로버트 체이스가 팀장을 맡게 될걸세. 내용도 복잡하지 않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거지. 하우스 박사님이 맡으셨던 기존의 팀은 '진단 1팀'으로, 닥터 체이스가 맡게 될 곳은 '진단 2팀'으로 분리가 된다는 말이야."


"그렇다는 건..."


"기존 진단팀의 인력 재분배도 고려하고 있어. 그래서 자네를 부른거고." 포어맨이 말하는 걸 애덤스는 그저 지켜보았다. 물론, 이 말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오히려 타웁과 닥터박 두 사람보다 먼저 진단학과 분리라는 화두를 끌어안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고민도 그만큼 오래 해온 상태였다. 다만 그 말을 포어맨에게서 가로채지 않은 것은 그녀 스스로 할 말을 가다듬고 있기 때문이었다.


"...필요하면 추가 인력도 모집하겠지만 자네도 알잖아. 기존에 있던 팀원들 의견을 먼저 존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 아마 이 말로 포어맨은 인정 넘치는 병원장처럼 보이고 싶었을테지만 이미 그런 의도를 눈치채는 순간부터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덤스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포어맨은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도 알다시피 닥터 타웁은 볼티모어에 있고 닥터박도 장기 휴가중이지. 일단은 자네 의견부터 묻고자 하는 거야."


애덤스는 선뜻 대답하기보다 잠시 그를 바라보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닥터 체이스와 함께 일해보고 싶어요. 진단 2팀에서요."


포어맨은 바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스스로 매끄럽게 진행하리라 생각했지만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체이스의 자신 없는 반응, 하우스에 대한 주변 경외심이 그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지만 애덤스는 그에 별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한가?"


"네..." 애덤스는 단번에 대답했는데도 잠시 생각을 고르는 것 같아 보였다.


"그거 참 의외인데." 빠르게 마무리할 수도 있는 면담을 부러 끌어내려 포어맨이 말하였다. "괜찮다면 이유를 좀 물어봐도 되겠나? 실은 얼마 전에 닥터 체이스가 그렇게 말했거든. 모두 자신이 아닌 하우스 박사의 팀에 남기를 원할거라고."


"얼마 전 베벌리 씨의 부검을 진행할 때였어요. 헬렌 씨와 면담을 진행하면서 자칫하면 제가 손찌검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능숙하게 막아주셨어요. 헬렌 씨도 진정되었고요."


"하우스 박사님이라면 분명 그런 건 어렵겠지." 왠지 모르게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포어맨이 말했다. "닥터 체이스에게는 잘 된 일이군. 적어도 진단학과가 분리되었을 때 1명의 팀원 정도는 있을 거라는 말이니까."


"그래도.." 포어맨이 잠시 말문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겠나? 자네가 하우스 박사님 아래에서 일한 게 커리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했을 때 말이야."


"...명성을 얻기 위해 여기 들어온 것도 아니었어요." 애덤스가 대답했다. "전 그저 되도록 많은 환자들을 희귀한 케이스에서 진단하길 원하고 그게 반드시 하우스 박사님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을 뿐이에요."


"자네다운 대답이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이었지만, 포어맨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했다.




66.


타웁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이미 아내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병원을 통해 부고 문자까지 보낸 상태였지만 추모를 위해 교회를 수소문하는 단계에서부터 장모와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애초에 장모는 레이첼의 부고 문자부터 '레이첼 타웁'이 아닌 그녀의 처녀적 성을 따라 '레이첼 겔시'로 표기해주길 바라고 있었고 아직 제대로 이혼절차도 밟지 않은 상태에서 그 점을 허용할 수 없었던 타웁은 장모님과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근무지인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에는 그가 원하던대로 결혼 후의 성을 붙일 수 있었지만 나머지 장모님의 지인들과 그녀의 소싯적 친구들에게는 어떤 성으로 부고문자가 전달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평소 같으면 그 점까지도 꼬집어 따졌겠지만 이미 그 말고도 교회 선정부터 묘지까지 확인하느라 죽을 맛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장례식 날 아침 이른 시간에 교회 자리에 앉아있는 하우스를 보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타웁은 지친 기색이 역력해서 그를 맞이했다.


"...결국 찾아오셨네요."


"고생이 많군."


"..그건 박사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재치있는 농담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내 다른 조문객들이 교회에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라도 티타임 마련해주세요. 저도 엄연히 상황 돌아가는 건 알아야해서요." 타웁의 말에 하우스는 가볍게 손짓했고, 그는 다른 조문객들을 맞이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멀어지는 타웁을 따라 자연스레 뒤를 돌아보던 하우스는 체이스와 나란히 타웁을 마주치는 윌슨을 바라보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이라도 더 지체했다가는 윌슨을 더 뚫어져라 바라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늘 흔적만 남기고 가던 그 남자가 불과 몇 미터 뒤에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어딘지 모르게 고장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지팡이 한 쪽을 움켜쥐었다. 뻔한 일이었지만 윌슨이 이 곳에 방문했다. 저 찰거머리같은 체이스가 그 곁을 지겹도록 지키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우스가 윌슨에게 말을 붙일 구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애초에 그것을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마음을 다지는 하우스의 뒤에서, 윌슨의 은밀한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레이첼의 장례식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눈물을 흘려가며 그녀와의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는 여자도 있었고 평소 그녀가 무척 다정한 동료였다고 말하는 그녀의 상사도 있었다. 타웁은 되도록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앞자리에 앉아 있었던 하우스는 저도 모르게 타웁의 얼굴이 슬픔에 얼룩져 가끔씩 비정상적으로 경련하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따금씩 망설이는 건 분명 자신이 준비해 온 문구 중에 부적절하다 여겨지는 걸 실시간으로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한 때는 그녀를 두고 바람까지 피웠던 남편이 그토록 고통에 떨어가며 그녀를 추억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우스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아려오는 것만 같았다. 얼마 전 자신 앞에서 뒤늦은 후회를 들먹이던 해밀턴도, 이처럼 앞에서 그녀를 추억하는 타웁도 모두 자신과 같아보였다. 한심하고 멍청한 남자들. 아니, 적어도 해밀턴은 떠나간 자신의 아내를 매일같이 찾아가고 타웁도 생을 마감하기 전의 그녀 곁을 지켜주지 않았던가. 한심하고 멍청한 건 자신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우스는 잠시 표정을 정리해야 했다. 그 와중 타웁을 끝으로 장례식에 준비된 절차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조문객들이 조용히 일어나는 소리에 하우스는 천천히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메릴랜드 교회에 바로 마련된 공간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묘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일행은 가볍게 걸어서 그 곳까지 이동했다. 착잡한 표정의 애덤스는 시종일관 타웁의 곁을 지키며 그가 무너지지 않게 애쓰고 있었다. 이따금씩 홀로 지팡이를 짚고 걷는 하우스를 의식하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그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우스에게는 그것이 마치 작은 배려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브루주아같은 성질로 미루어보건대 그건 마치 '어떤 이상이 생기면 튀어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하우스를 감독해야 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포어맨은 그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같이 걷고 있지는 않았다. 전에 비해 부쩍 하우스가 빈정대는 건이 줄기도 했거니와 시야 안에서만 하우스가 움직인다면 포어맨도 별다르게 그를 제재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는 체이스와 윌슨 일행과 같이 걷고 있었다. 아마 최근 결정난 건으로 진단학과 분리에 관련된 이야기겠지만 그 대화가 때마침 윌슨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 망할 대화거리가 타웁의 집에서 진행되는 추모식에도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며, 하우스는 천천히 걸었다.


안치가 마무리되고 일행의 대부분은 그대로 타웁의 집으로 향했다. 하우스는 부러 대열의 뒤에서 그들을 뒤따랐다. 타웁의 저택 주변은 모두 조문객들의 차들로 붐볐다. 가을 낙엽이 수수히 쌓이는 고즈넉한 저택이었지만 조문객들이 하나 둘 도착하면서 울적한 활기가 감돌았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하우스의 시선은 늘 윌슨을 찾아내기 바빴다. 이따금씩 체이스가 자신을 의식하는 것도 같았지만 그런 건 하우스에게 그리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그저 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란과 번잡함이 그가 윌슨과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결국 오셨네요." 타웁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확인한 애덤스가 하우스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지팡이를 짚고 시종일관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하우스는 그녀에게 시선도 던지지 않았다.


"마치 오지 않았을 것처럼 말하는군."


"...그저 평소랑 다르다는 것 뿐이에요."


"요즘의 내가 평소와 같은 구석이 하나라도 있던가?"


"그렇네요, 그걸 인지하시는 건 또 새로운 일이긴 하지만." 애덤스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뭘 하고 계신 거에요?"


"...준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애덤스가 되물었으나 하우스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마침 거실과 부엌 경계의 기둥을 사이에 두고 포어맨과 체이스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로부터 멀지 않은 지척에 윌슨이 있기는 했지만 애초에 타웁의 친척들과는 일면식이 없던 그로서는 별다른 대화 상대를 찾기 어려울 게 뻔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하우스는 자신의 혈류가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반대로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박사님?"


"자네가 말했던 것 처럼, 받아들일 준비 말이야." 여전히 시선은 윌슨에게로 고정한 채 하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침착하게 걸어서 윌슨을 향해 다가갔다. 다행히 체이스와 포어맨이 서로의 대화에 열중한 상태였기에 그들 뒤로 다가오는 하우스를 인지하지는 못했다. 윌슨이 알아채기도 전에 하우스는 그의 오른손을 잡고 그를 이끌었다. 윌슨이 숨을 삼킨것도 같다. 뭐라 말할 수도 있었지만 윌슨은 그러지 않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반쯤 죽어있던 것만 같던 두 눈이 크게 확장되고 고작해야 하우스에게 가볍게 잡혀있는 그의 오른손이 발갛게 달아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적어도 그가 어떤 거부를 하지는 않았다. 하우스는 아까 전 타웁의 저택에 들어서며 보았던 부엌의 뒷문으로 그를 데리고 빠져나왔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바깥의 정경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박사님..." 끌려나온 윌슨이 겨우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막상 그를 끌고온 것은 하우스였지만 그 자신도 당장에 그를 향해 뭔가 말하기가 어려웠다. 마음 속으로는 몇 번이라도 말했던 것들인데 어째서인지 윌슨의 얼굴을 앞에 두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그걸 붙잡듯이 하우스는 윌슨을 붙잡았다. 시시각각 떨려오며 반응하는 윌슨을 억누를듯이, 그 눈의 깜박임, 바람, 입술, 아니 무엇이라도 제발...하우스는 조금이라도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망할 청문회의 밀회가 다시금 여기서 시작되려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다시금 윌슨이 말해온 것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대체 뭐가, 어떤 것을, 어디까지? 그 의아함과 짜증이 하우스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망할, 윌슨...제임스, 자네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윌슨은 대답 대신 하우스에게 붙잡힌 그대로 자신의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박사님, 지금은...아니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대화할 수 없어요, 박사님과..." 울먹이듯 말하는 것 때문에 말들이 뭉그러지고 볼썽사나워졌지만 하우스에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미안해요, 지난 번에...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고 했던 말이..만일 그것 때문에 찾아오신 거라면.."


"윌슨, 자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자신도 모르게 평소처럼 핀잔을 늘어놓으며 하우스가 말하였다. "미안해야 할 건 자네가 아니라 나일세. 아니,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라...젠장, 친구가 아니라니 뭐라니 이딴 말들은 다 집어치우고..."


"알아요, 아직도 불편하신거겠죠..." 윌슨은 기어들어가듯 말했다. 평소와 같이 답답하고 짜증이 솟구쳐서 - 그러나 이제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윌슨에게 쏟아부을 수도 없어서 미칠 것만 같던 하우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눈앞의 남자는 전처럼 내키는대로 발로 차고 괴롭히고 부려먹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가장 소중하고, 애틋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윌슨을 마주치는 그 순간 순간마다 새롭게 느끼고 배워야 할 것들이 그에게 산더미처럼 쌓이는 느낌이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지독한 그의 갈증이 조금씩 채워진다는 게 미칠 노릇이지만.


"자네, 정말...아직도 내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나?" 답답하다는 듯이 하우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우스가 보이는 의외의 모습에 윌슨은 잠시 표정이 풀려나갔다. 이제껏 그가 마음 저편에 몇백번이라도 묻어왔던 감정, 저 멀리를 내다보아도 끝도없이 세워져있을 감정의 무덤들이 조금씩 움트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런 기대를 한 것은 마치 어릴 적 칭얼대던 것을 기억해내는 것마냥 너무나 낡고, 낯설 정도로 오래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며 지금 이토록 애틋한 눈빛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건 윌슨을 너무도 힘들게 만든다. 스스로 만든 기대를 키워나가다 죽여버린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에도 자꾸만 이렇게 부딪혀오는 그를 볼 때마다 윌슨은 마음 속에 웅켜둔 작은 희망을 조금씩 꺼내고 싶어진다. 조금씩 흉내 내보고 싶어진다. 이제 그 상자는 너무도 낡고 헤져서 뭘 어디서 어떻게 열어야할지, 열면 그 순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질지 모르는데도. 만일 이토록 자신을 이끌어서 또 한 번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거라면 이제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절망을 동반한 희망만을 맛본 그로서는 하우스에게 있는 그대로 기댈 수가 없었다. 그런 일도, 그런 경험도 없었으니까. 마치 습관처럼 그는 자신이 쏟아낸 감정을 최대한 다시 접어보려 애를 썼다. 양복 소매로 눈가를 닦아낸 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윌슨의 모습을 하우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도...아니, 복귀한 그 시점 무심하면서도 올곧은 그 표정도, 오늘 아침 말끔히 차려입고 온 양장에 어느 정도 정리한 수염, 자신을 이끌고 가던 그 강한 손길, 지금 자신을 붙잡은 손아귀의 힘, 핏대가 설만큼 심각한 그 표정, 무엇보다 그 갈증에 가득 찬 눈빛, 뭔가를 말할 것만 같은 입술...아니, 그냥 하우스라는 그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도 강렬했으니까. 자신뿐 아니라 체이스를 통해서 끊임없이 체념을 학습해왔음에도 한심할만큼, 하우스는 윌슨에게 중요한 존재였으니까. 더 있다가는 정말로 주저앉을 것만 같아 윌슨은 하우스의 손을 뿌리쳤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반대로 재생하듯, 웅켜 토해내듯 윌슨이 말하였다.


"...미안해요." 습관처럼, 윌슨은 다시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에 뒤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지팡이가 아스팔트 바닥에 내팽겨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 다음 바로 윌슨의 팔을 잡은 것은 바로 하우스의 손이었다. 그는 윌슨을 붙잡고 돌아선 그의 얼굴을 붙잡은 뒤 벽에 밀어붙인 채 그에게 입맞추기 시작했다. 평소 가까이에서 미미하게나마 느꼈던 서로의 향기가 두 사람의 입술 속으로 한 숨에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하우스의 입맞춤이란, 체이스가 벌인 것과는 너무나 다르게 어처구니 없을만큼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짧게만 느껴진다. 그 짤막한 순간에 한 것이라고는 어린애들의 버드키스마냥 입술을 맞대고 있었던 것 뿐인데도 윌슨의 마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짤막한 접촉의 끝에 붉게 물든 윌슨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우스가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망할...이제 좀 알겠나, 제임스?" 혈안이 되어서 말했지만 그 와중에도 윌슨의 당황한 얼굴이 사진처럼 박혀서 하우스는 정신을 가다듬느라 애를 써야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윌슨은 그대로 숨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박사님!" 와중에 들려온 말은 윌슨이 아니라 체이스의 것이었다. 마침 포어맨과 애덤스가 뒤따라 부엌 바깥문에서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체이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달려와 그대로 윌슨을 부축해 일으켰다. 주춤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서있는 하우스에 비해 그대로 주저앉은 윌슨의 모습은 체이스로 하여금 데자뷰를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체이스는 잠시 하우스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윌슨을 데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포어맨은 하우스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가석방 제한 구역을 벗어나는 건 어디까지나 제 감독하에 가능한 겁니다. 더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해주시죠." 위압적인 말과 태도였지만 하우스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포어맨이 움직이자 하우스는 이내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안간 발생한 이 상황을, 애덤스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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