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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22화

Another - 22

by 김뇨롱

67.


밤.


모퉁이 술집에는 익숙한 손님이 앉아 있었지만 평소와는 무척 달라보였다. 체이스는 손에 들고 있는 잔을 몇 번이나 쓸어보며 벌써 몇 시간 째 말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어두운 분위기에 술집 주인은 물론 그를 눈에 담고 있던 다른 여성 손님들조차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라면 오직 체이스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말하더라도 풀리지 않을 문제였다. 심지어 제임스 윌슨에게는 더더욱.


상황 자체는 그가 바라던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하우스 박사의 복직과 동시에 윌슨과 하우스가 물리적으로 만날 수 있는 점점이 생겼다는 것과 불과 며칠 전 타웁의 아내 장례식에서 그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기어코 하우스는 윌슨과 충돌했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스카치의 향을 빌어 말하자면 - 분명 그건 어떤 '접촉'이었다...그런 접촉만 해도 체이스의 눈이 돌아가기엔 충분했지만 더 큰 문제라면 그건 그 이후 윌슨의 태도에 있었다. 그는 체이스에게 이 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일방적인 소통의 문제가 다시금 체이스의 머리와 마음을 찔러대고 있다. 애초에 이런 것을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홀로 파내리며 내려온 굴의 입구가 보이지 않을만큼 아득해졌을 때에는 으레 추레해진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철부지처럼 육체적으로 엮였다고, 몸을 섞었다고 완전히 하나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체이스에게는 그 이벤트가 필요했다. 물론, 알고 있다. 그건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그를 더 지치게 하고 상처입게 하는 것마저 분명했음에도 체이스는 그렇게 했다. 윌슨이 먼저 손을 내밀어 시작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건 자체가 그를 그토록 즐겁게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우스와의 일을 기어코 함묵하는 윌슨을 볼 때마다 그는 마치 윌슨이 연기하는 또 하나의 윌슨과 연애놀이라도 즐기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열 수 없는 가장 마지막의 그 모습은 오직 하우스에게만 열려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걸 그대로 열어달라 애원할수도, 억지로 열어낼 악의도 없는 그로서는 그저 윌슨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어떻게 추스릴지 고민하는 것 뿐이었다. 이제까지 윌슨을 바라보며 스스로 웅켜온 '서운함'과 '억울함'이 그의 안에서 기어나와 스카치 잔에 담겨 넘실대고 있다. 받아주자면 저 끝까지라도 받아줄 수 있었다. 들여보내자면 밑도 끝도 없이 넘겨줄 수 있었다. 윌슨을 바라보며 수없이 베어왔던 자신만의 감정이라는 것 따위, 스치지만 않으면 언제라도 담아내서 퍼부을 수 있었다.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윌슨은 늘 그보다 더 '위급한' 상태였다. 하우스의 부재가 그러했고 하우스 그 자체가 그러했다. 윌슨이 하우스 때문에 흔들리는 걸 옆에서 몇 번이나 지켜보는데도 늘 그의 '슬픔'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체이스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건 분명 '정상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하우스에게서 윌슨을 끄집어내려는 생각을 한 그 시점부터 정상은 아니었다. 자신이 윌슨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밀었던 '대칭적인' 관계도, '서로 주고받는' 관계도 아니다. 차갑고 무거운 진실이 그를 한없이 내리누른다. 이런 시점이라면 망할 포어맨이라도 옆에 있어서 알짱대며 말이라도 걸어주면 좀 덜할 것만 같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의 뇌리에 남은 거라곤 윌슨을 목적격으로 두는 여러 가지 행동들 뿐이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는지 따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물론, 바라는 것은 있다. 자신이 바라는 사람이 바라마지 않는 행동을 해오며 바라마지 않는 마음을 보인다면 이런 슬픔이나 우울함 따위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상상을 스카치에 녹여내며 가장 어처구니 없이 웃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다.


스카치 잔에 일그러진 미소가 일렁였다.


아직 다 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분명하다. 어그러질거라면 제대로, 이루어질거라면 제대로 이루는 게 맞았다. 이제 그 한 번의 '접촉'. 그 한 번으로 무너지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매몰비용이라는 몰상식한 말을 집어넣어서라도 끝을 보는 게 맞았다.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쓴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늘 그렇듯이 강한 에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동기부여가 필요할 뿐이다. 보통 윌슨에 대한 일이나 윌슨과의 미래를 꿈꾸며 만들어진 그 동기란 이제 그보다는 더 개인적인 것을 담고 있었다. 자신의 인내심이 달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체이스는 내심 속으로 고민했던 가장 최후의 수단을 떠올렸다. 어차피 관객들이 보게 되는 건 장막 앞의 일들 뿐이다. 뒤에서 어떤 일이 돌아가는지는 앞에서 벌어지는 공연 때문에 눈치도 채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애초에 어물쩡 내밀던 '진단학과 분리'에서부터 실제 벌어진 '청문회'와 기어코 벌어진 일들까지 - 늘 하던 방식대로 그는 천천히 머릿속의 취기를 몰아내며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만에 도착한 윌슨의 문자 너머로 체이스의 손이 스카치 잔을 향해 가고 있었다.




68.


엘리베이터 5층에 내리면서 하우스는 진단실 너머 정형외과 자투리 공간에 홀로 앉아있는 애덤스를 바라보았다. 애덤스가 체이스의 팀에 합류하기로 한 것 자체는 그리 충격적인 게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날'에 애덤스가 하우스와 나눈 대화는 기억에 온전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대화 이후 윌슨과의 일은 더욱 선명하고 지독하게 그의 뇌리에 남아 지금까지도 그를 고통에 빠트리고 있었다. 여전히 전에 했던대로 일상을 이어나가는 건 그대로였지만 어째서인지 물건을 자주 잃어버린다거나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가벼운 우울증'운운을 하기 시작한 건 타웁이었다. 그런 그가 차분히 커피를 마시는 진단실 문을 열며, 하우스가 안으로 들어섰다.


"...티타임이라면 좀 늦으셨는데요."


"자네는 잘도 극복해내는군. 아직 아내의 유령은 마주치지 못했나?"


"그거 참 재미있네요." 타웁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하우스를 향해 방금 내린 커피를 내밀었다. "얼마 전에는 외래진료 서류 잃어버리신 것도 알고, 환자 이름을 세 번이나 까먹은 것도 아는데요. 적어도 지금 이 시간만큼은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해서요." 타웁의 말에 하우스는 한숨을 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아내 장례식을 치룬 건 저거든요, 박사님이 아니라."


"...그게 무슨 말인가?"


"이대로 계셔서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는 겁니다." 타웁이 말하였다.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 적어도 며칠 휴가라도 내시던가..."


"이제 자네까지 내 인사문제에 참견하려 드는건가? 이거 참 감동적인데. 그야 자네가 내 남은 유일한 '팀원'이기 때문이겠지. 더 나가다간 자네가 내 자리도 차지하겠는데 말이야."


"일단, 전 박사님의 '유일한 팀원'이 아니에요. 닥터박은 아직 박사님 팀 소속이거든요. 어디까지나 임시라는 건 아시겠지만. 전 그저 지난 며칠 간 있었던 사고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 외에는 어떤 반역이나 도모를 하고 있지 않다고요. 보세요. 전 이제 너무 지쳤어요." 타웁의 솔직한 말에 하우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가 건넨 커피를 만지작대다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얼마 전에 며칠 쉬어봤는데 죽을 맛이더군. 지금 상황에서 그렇게 되어버리면 정말 다 망쳐버릴 것 같은 그 기분을 자네는 아는가?"


"그래요..넘어지더라도 이왕이면 병원 내부인 게 좋겠죠.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타웁은 시선을 내리며 말하였다. "박사님을 걱정한다는 간지러운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지금 이건 정상은 아니에요. 그건 박사님도 아시죠?"


"알고 있다면 자네 기분이 좀 더 나아지나?" 떠보듯 찡그리며 하우스가 말하였다. 타웁은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분명 말씀드리는데, 오늘 하루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셔도 괜찮아요. 진짜에요. 외래진료는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요. 사실 며칠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요."


"역시 믿을 사람은 자네뿐이라니까." 하우스는 이죽거리며 말하였다. 그렇게 던지며 말하는데도 문을 열고 나가는 타웁을 뒤따라 간 시선의 끝에는 윌슨의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그토록 절박하고도 고통스러운 대화의 끝에서 어떤 진전도 없이 더욱 고독 속으로 들어간 그의 생활은 불보듯 뻔하게 타들어가기만 바빴다. 전에 하던대로 콜걸을 부르건, 내키는대로 경기를 보거나 심지어 홀로 운전해서 몬스터 트럭까지 보러 다녔지만 그 어느것도 시원찮았던 것은 결국 그 옆에 있던 윌슨의 부재를 더욱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자주 부른 콜걸이 너스레를 떤답시고 윌슨의 안부를 물어보자 하우스는 그날부로 그 콜걸의 호출을 취소하고 대충 20달러를 쥐어준 다음에 지청구를 먹어가며 그녀를 다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적어도 그런 그의 망가져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세실 부인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마 그와 함께 221B를 찾아올 윌슨을 기다린 모양이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과 같은 하우스의 표정과 며칠 째 계속되는 윌슨의 부재에 단념해버린 듯 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윌슨을 끊어내듯, 하우스 스스로도 그들을 흉내내보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외면한 빈자리가 그토록 길었던 까닭에 결국 그 마음의 끝을 지키는 혼자만이 돌아온 길을 되뇌이며 슬픔 속에서 윌슨이 새겨둔 마음들을 헤아리기만 바빴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진단실에서 약간만 고개를 돌려도 윌슨의 사무실이 빤히 보인다는 점이었다. 할 수 있는대로 가장 크고 분명하게 윌슨에게 자신의 마음에 대해 전했는데도 그 이후 윌슨은 그 어떤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다. 물론, 체이스가 곁에 있어서 어렵다는 것 쯤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애초에 윌슨이 그런 점들에 하나 하나 휘둘리는 편이던가? - 애초에, 하우스 자신이 그를 휘두르는 것 외에 그가 휘둘리는 존재라는 게 있기는 했던가? 그는 무려 자신의 전 와이프 요청에도 하우스를 위해 한걸음에 달려왔고, 밤 늦은 시간에도 음식을 사다 바치지 않았던가. 침묵으로 일관하던 시간 속에 충만하던 그 '지배감'의 한쪽 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자 하우스는 더욱 낭패감을 느꼈다. 물론, 체이스는 자신이 아니다. 윌슨도 그 점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체이스는 윌슨에게 응답할 줄 안다. 이제 겨우 자신이 내민 서툴고 거친 '응답' 같은 거, 이제 윌슨이 신경쓸만한 일이라도 되는 걸까? 되돌려보면 기껏해야 자신이 내밀고 윌슨이 받아본 것일 뿐, 윌슨은 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할 시간이 있기는 했던가?


망할, 차라리 거절이라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하우스는 부러 러버볼을 갖다 윌슨의 사무실 쪽을 향해 던져대기 시작했다. 낯간지러운 배려를 들이밀며 타웁이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사무실을 나서봤자 뭐 하나 되는 것도 없었고, 체이스의 존재나 아니면 - 사실 제대로 들여다보면 그건 윌슨 스스로가 내비치는 거부감이 두려워서이지만 - 윌슨에게 제대로 말을 걸어보지도 못하였다. 타웁 아내의 장례식에서 일어났던 짧고도 갑작스러운 입맞춤은 마치 하나의 작은 소동처럼 느껴지기까지했다. 그 때 당시 윌슨의 입술이 어떤 빛깔이었고, 얼마나 부드러웠으며 붙잡은 셔츠가 미끄러질 것만 같고 눈동자가 가득 감겼다 떠지는 모든 것들이 하우스의 머릿속을 있는대로 휘젓고 있었지만 그딴 걸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 자신이 '저지른 것'외의 어떤 다른 반응이 없기에 그를 허무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할 수만 있다면 -


순간 러버볼이 부딪히는 유리벽 너머, 수간호사와 대화를 하던 윌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보자면 너무 멀어서 지척이라 얼굴도 구분하기 힘들 것만 같은 그 거리에, 윌슨의 시선이 아주 잠깐, 하우스에게로 고정되었다. 밖에서 보면 늘 그렇듯 사무실의 유리문을 주기적으로 충돌하는 러버볼의 진자운동은 꽤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순간, 하우스의 시선이 윌슨의 시선과 마주쳤다. 어린애들이나 할법한 버드키스 - 그래, 분명 그건 그런 입맞춤이었다. 아니, 하자면 길가다 부딪혀서도 벌어질만한 멍청한 접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우스는 자신의 얼굴이 상기되며 지난 그 보잘것 없던 '접촉'이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마주본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무실과 복도, 카운터 너머 얼굴 한 번 마주친 것 뿐인데 이렇게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 수가 있나? 마치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볼 수도 없는 서로를 마주친 것 마냥, 시선이 머무는 찰나 -


"박사님, 이거-"


순간 타웁이 열고 들어오는 문에 부딛힌 러버볼이 그대로 하우스의 이마에 정타로 들어갔다. 고통에 짜증을 내며 하우스는 순간 얼굴을 만지작거렸고, 타웁은 하우스의 이마에 튕겨져나온 러버볼을 보기좋게 잡아냈다.


"이건 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사고라고요. 애초에 박사님이 던지신 거니 제 탓은 아닙니다." 타웁은 러버볼을 탁자에 올려두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자네도 정말 어지간하군...한결같이 사람 열받게 하는 구석이 있단 말이지. 하지만 이번만은 넘어가도록 하지. '반려 장례식'이라는 태그는 이제 자네한테서 떼낼걸세." 이마를 짚은 채 농담을 늘어대던 하우스는 자리에 앉는 타웁 너머로 윌슨이 서 있던 카운터 쪽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윌슨은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69.


"...진단학과 과장 말인가?"


"팀이 분리되었으니 자연스러운 수순이죠." 체이스가 무심하게 던지며 말했다. "겸직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도 하우스도 그런 걸 해낼 정신이 없다는 건 아시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포어맨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하였다. "전에 내가 말했던 TO건은 어디까지나 팀원에 한한 것이었어. 자네 상급자가 될 사람에 대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어차피 분리된 팀을 이끌다보면 보고 체계도, 치료 상황도 체크하는 데에 한계가 올거에요. 결국 그걸 통합해서 진행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나요? 몇 개월 뒤에 채용하건 지금 채용하건 시간 차이만 만들 뿐이에요." 체이스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고 이내 포어맨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자네가 말을 걸어온 건이라면 분명 거기에 추천하고 싶은 인재도 있다는 뜻이겠지."


"실은 생각하고 있는 분이 한 명 있어요." 체이스는 여유롭게 말하다 포어맨이 궁금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눈도 깜빡하지 않고 대답하였다. 포어맨은 다시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체이스가 그 이유를 들어 설명해주자 힘겹게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기록부에 적힌 연락처가 바뀌긴 했지만 다행히 지인을 통해 연락이 닿았고 체이스의 말대로 그녀는 생각보다 흔쾌히 채용 인터뷰에 응했다.



70.


지난 며칠간은 병동 내의 사람들에게 있어 타웁의 아내 장례식이 최근의 가장 큰 일이었겠지만 적어도 암병동 과장인 제임스 윌슨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우스를 위해 청문회에서 벌여왔던 낮부끄러운 변호나 최근 체이스와 있었던 껄끄러운 일 외에 그가 기억하는 가장 충격적인 일이란 바로 최근 하우스가 그를 향해 던져온 시선의 실체가 얼마 전 그의 눈앞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와중에도 당장에 체이스가 두 사람의 입맞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윌슨은 내내 그 상황이 머리에서 재생되는 것을 멈추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하우스의 응답이 자신에게 도착했음에도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할 수 없었던 것은 포어맨의 협박같은 부탁과 체이스 때문이 아니라 윌슨 그 자신에게 있었다. 하우스의 집 앞에서 그에게 무참히 내던져진 때부터 이미 길은 틀어졌음에 분명했다. 좋은 친구 구실이나 멍청한 직장 동료, 조금 더 해봤자 하우스가 원하면 보지도 않을 사이...그 미미한 역할과 자리에 만족하는 법만 수년간 되새기며 그 다음을, 그 너머를 보는 일 같은 건 예상도 생각도 계획도 세워두지 않던 그였다. 그래서 하우스 집 앞에서의 일은 그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오래도록 좁은 공간에 맞춰 마음을 접어두려 애쓰던 그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던 것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하우스조차 모르는, 어쩌면 하우스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주는 그만의 작은 게임은 그 때 완전히 뭉개지고 작살이 나버렸다.


그래서 하우스가 그에게 보내오는 눈빛이란 그조차 모르는 하우스만의 게임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판에 올라 그를 마주보는 것은 오래도록 마음을 억누른 윌슨에게 있어 너무나 부끄럽고, 수줍고, 두려운 일이다. 이미 하우스의 복귀를 걸고 포어맨과 걸어둔 약조때문에 그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워져버린 상황에 이제야 하우스가 다가오는 일이란 애초에 가두고 뭉쳐왔던 마음부터 풀어내야 하는, 너무나 길고 장황한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하우스가 고통스러운 고독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윌슨은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고 그동안 엉켜온 내면의 실들을 풀어내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보통은 자신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어떤 것들이 달라질 것인지 정리하는 정도였겠지만 윌슨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내면에 얽혀있는 대부분 문제의 주인은 바로 '하우스'였고 하우스를 주축으로 그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어째서 그런 표현을 하기에 이르렀는지를 풀어내는 게 그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물론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주축으로 하지 않는 대부분의 문제들이란 결국 그 문제의 장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하다는 것을. 늘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온전치 못하게 흔드는 존재에게 순수하게 그런 걸 물어볼 여력이 생기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면의 마음을 다져둘 필요가 있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제껏 걸어온 억눌린 길을 되새겨 돌아가면서 윌슨은 스스로의 모습에 무척 놀라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우스의 옆에서 할아버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늘상 이제까지의 고리타분한 모습을 유지할 거라 굳게 믿었던 그다.


이제 하우스는 체이스가 오른 궤도와 같은 궤도에 올라 윌슨을 바라보고 있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린 지금, 그에게 선택권을 쥐어준 하우스를 바라보며 윌슨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진정하려 애를 써보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서투른 마음을 숨기기 위해, 짓누른 눅눅한 마음을 그대로 깔고 앉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추악한 진실인 것마냥 드러나 버리고 어수선했던 일들을 지나 결국 하우스를 위해 입을 닫기로 하면서 상황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그런 그를 늘 잡아주던 것은 오래도록 그가 겪어왔던 절망감과 허망감이었다. 갖가지 부정어를 이끌고 돌아온 그 감정들은 늘 그가 하우스의 앞에 진심을 내미려 할 때마다 그를 붙잡아 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들은 꽤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하우스가 그에게 입술을 맞추기 전 까지는.


하우스가 그로부터 어떤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 불보듯 뻔한 사실이다. 그래서 더 다가가기 어려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떤 감정으로 어떤 모습으로 말을 해야 할지 정리도 되지 않은 사이에 그의 앞에 다가갔다간 늘 있던 지난 날들처럼 거스르고 말 것이 분명해보였다. 멍청하게도 둘이서 같이 먼 곳으로 떠나자거나 하는 치기 어린 연인들 같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기껏해야 한 번의 스킨쉽일 뿐인데, 거기 놀아나서 다시금 망가져버리자고?' 늘 그를 차갑게 아껴주던 절망감이 다시금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평소 같았다면 늘 그렇듯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절망감에 목을 메고 하던대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에 그쳤겠지만 이제까지의 자신이 느껴왔던 그대로 자신은 하우스를 향한 감정 같은 걸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무너져내리던 바닥에 다시 한 번 몸이 쓸려 생채기를 내더라도 결국 거기에 다시 걸어보는 것이다. 내칠 거라면 제대로 내쳐져서 차라리 없어져버리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결국 이렇게나 돌아오고 나서야 그도 알게 되었다. 하우스와의 관계같은 게 없다면 이 병동에서 의사일을 해내는 것이란 너무도 덧없고 허물뿐인 모습이라는 것을.


부서지고 무너져내릴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제임스 윌슨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우스의 사무실 쪽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체이스가 자신에게 미묘하게 차가워진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꽤 오래 전, 체이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 스스로도 그처럼 하우스에게 결단을 내릴만큼 강단있으면 했던 점을 상기했다. 아마 그 때에도 스스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하지 않았을 뿐,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란 것을.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다시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지 처음은 조금이라도 가볍게 시작하고 싶었다. 체이스의 눈이 닿는 자리건 아니건 간에 적어도 어떤 '마무리'는 하고 싶었다. 그게 어떤 시작이나 아니면 어떤 대단원의 막이 될지라도. 적어도 이런 구질구질한 우정의 끝에 체이스가 끼어들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 윌슨은 그런 변명으로 체이스의 눈빛을 걷어냈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사무실을 나와 하우스가 자리한 진단실로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 자리한 임시 사무실에서 체이스가 자신을 향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먼 곳을 응시하고 있던 하우스의 시선은 이미 윌슨이 사무실을 열고 나올 때부터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결국 둘은 대화를 하고 말 것이다. 결국 이 애매모호한 상황을 파국에 치닫게 하고 말 것이다. 끝이라면 분명한 끝을, 망가진다면 완전히...


"...윌슨? 제임스 윌슨? 오랜만이에요."


윌슨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중년 여성의 음색에 당황해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굵은 웨이브 머릿결은 늘 고정된 것처럼 완벽하기 그지 없었고 베이지 펄의 우아한 화장이 그녀의 얼굴을 화사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부임 당시보다 더 산뜻한 컬러의 그린 원피스는 그녀가 이곳에 무척 어울리며 한 편으로는 사무적이고 온화하다는 분위기마저 풍긴다. 그녀가 오래도록 원장으로 군림했던 그 시절처럼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워 보인다. 어쩌면 윌슨이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보다도 더. 윌슨은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했지만 그대로 몸과 생각이 굳어버렸다. 라벤더 향기가 흠씬 풍겨오며 그녀는 새삼 윌슨을 반갑다는 듯 안았다. 그녀를 알아온 세월이 그토록 길었는데도 그에게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커디...무슨 일이에요?"


"오랜만에 본 것 치고는 너무 차가운 말을 하네요. 제임스." 커디는 농담을 던지듯 입을 삐죽이며 말하였다.


"아, 커디. 말씀해주셨다면 제가 다시 인사라도 드렸을텐데요." 어느덧 다가온 포어맨이 커디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분명 대상은 커디였지만 은근슬쩍 뒤에서 시선으로 찔러내린 건 바로 윌슨이었다. 윌슨은 시선을 내린 채 잠시 멈춰버렸다. 포어맨은 자연스럽게 커디를 이끌어 하우스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우스의 시선도 어느덧 윌슨이 아닌 커디에게로 고정되어 있다. 그토록 지리멸렬한 연애의 끝에 자신을 감옥으로까지 몰아낸 전 연인이 눈앞에 다가오자, 하우스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감정을 풍기고 있었다. 윌슨은 사무실 바깥에 서서 그 광경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 쪽 손으로 나머지 팔을 감싸가며 상황이 너무나 익숙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체감했다. 고집불통이지만 천재적인 한 진단학과 과장과 병동 원장의 중후한 로맨스. 멍청해진 그의 연애담을 듣는 일도, 무관심하지만 열정은 대단한 남자친구의 자랑인지 욕인지를 들어줄 때에도, 복수를 한답시고 관심도 없는 TV쇼를 같이 봐달라 요청받을 때에도 늘 무심한 척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을 죽이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어떻게든 열심히 정리해서 내놓은 감정들이 급속도로 멍드는 것이 느껴지자 윌슨은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역시...절망감이 다시금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이끈다. 아니, 그건 절망감이 아니었다. 그건 체이스였다. 어느덧 그의 옆으로 다가온 체이스가 마치 그를 부축하듯 그의 어깨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윌슨은 다시금 고개를 떨구고 그의 인도를 따라 하우스의 진단실 앞에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 포어맨을 사이에 두고 커디와 몇없는 재회의 대화를 나누던 중의 하우스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 둘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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