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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24화

Another - 24

by 김뇨롱

75.


"그러니까 그놈의 '동창회'라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러나?"

하우스는 대뜸 윌슨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책상 모서리를 지팡이로 짚어대며 말하였다. 윌슨은 진료서를 살피다말고 잠시 고개를 들어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미묘한 장난기가 그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자칫하면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꾹 참는 얼굴이었다.


"박사님은 안타깝게도 '동창'이 없어서 그런 동창회 같은 거 참가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지만, 전 아니거든요." 윌슨은 말하며 펜을 든 오른손으로 서류를 넘겨대고 있었다. "애초에 몬트리올에 가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어요. 5년 이상 고사하고 있어서 이번에는 꼭 가봐야 해요."


"그거 참 마음이 아픈데." 하우스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는 시늉을 해댔다. "그래서 이렇게 동창도 없는 나를 홀로 두고 훌쩍 떠나버린다 이 말인가?"


"지난 주에 부른 '티파니'라도 다시 부르시던가요." 이제 윌슨의 목소리는 조금 건조해져 있었다. 하우스는 지팡이에 턱을 괸채 물끄러미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야말로 맥길에 두고 온 '티파니'라도 있는 거 아닌가? 연구 목적이라는 불순한 미명하에 월요일 비행을 앞두고 일을 저지르는 건 꽤 위험한 일인데, 아무리 자네라도 말이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윌슨은 이제 서류에서 완전히 눈을 떼고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하우스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미묘하게 다정한 눈빛, 지팡이에 포개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묘하게 윌슨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자네는 참 대단한 교육자라니까. 아니면 대단한 로맨티스트거나 말이지. 대단한 '친구'가 될 생각은 없나?"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요."


"그거 참 안타깝구먼. 보통 그런 건 '주변 사람들'의 말로 얻어지는 거지, 자칭해서는 소용이 없단 말일세."


"정말 주변에 물어볼까요? 감당 못하실 걸요." 윌슨은 이제 서류를 반쯤 접어 정리해서 가방에 집어넣고 있었다. 하우스의 손목에 걸린 해밀턴으로 미뤄보건대 퇴근 시간이 멀지 않았다.


"자네 잘 생각하게나." 윌슨이 가방을 들며 일어나자 하우스도 대뜸 일어나서는 그의 가방 속 서류를 꺼내 자신의 속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주변에 물어봤자 또 자네와 나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떠들어댈게 분명할걸." 하우스가 익숙한 미소로 이죽였다. 서류를 돌려달라고 말하려던 윌슨은 금새 표정을 풀고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두르게. 로드워크로 가려면 벌써 늦었어."


"갈테니까 제발 서류 좀 돌려주시겠어요? 그거 바로 다음 주 월요일에 제출해야 해요."


"자네가 운전석에 타서 벨트까지 매면 생각해보지."


"지독하시네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병동의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76.


잠깐, 밝아온 핸드폰 화면에 하우스는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쓸데 없는 광고성 스팸이었지만 그에게 아침이 되었다는 걸 알려주기에는 충분했다. 잠깐 잠든 사이에 시간이 벌써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바로 윌슨의 사무실 원목 문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미 주변에는 수간호사며 관리실 팀원, 몇몇 환자들까지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젯 밤 내내 윌슨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결국 허탕을 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가 돌아온다면...하우스는 적어도 마지막을 망가뜨리고싶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망가졌다 할지라도 주워서라도 만들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윌슨의 원목 문이 반쯤 망가졌다 해도 좋았다. 어떻게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했다. 이제까지 그를 실제로 맞딱뜨린 그 모든 순간이 후회될만큼 저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하찮아서, 귀찮아서 별볼일 없어서 그리고 그 후로는 너무나 떨려서, 어쩔 줄을 몰라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서...그러나 어떤 걸 붙여도 결국 변명에 불과했다. 윌슨에게는 이런 이유들이 하우스를 찾아올 이유보다 별볼일 없는 것들이었을 터다. 지금의 하우스가 마침내 깨달았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우스는 천천히 걸어 윌슨의 사무실 원목 문으로 향했다. 특유의 따가운 느낌이 없어서 흘낏 바라본 체이스의 사무실 쪽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를 휘감았다. 오래된 습관처럼 지팡이로 윌슨의 원목 문을 한 두번 톡톡 치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몇 번이나 잡아보는 감각인데도 너무나 새롭게 느껴졌다.


이 사달이 나기 전에는 보통 문을 열면서 윌슨이 그에게 반색하며 뭔가 말을 던졌지만 보란듯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슬로우모션처럼, 하우스는 시선을 천천히 끌어 윌슨의 자리 쪽으로 향했다. 간절한 그의 마음과 반대로 윌슨의 사무실 또한 체이스의 사무실처럼 조용했다. 오전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는데도 아직 그는 출근하지 않았다. 아니면 -


하우스는 그 다음의 이야기를 무심코 상상해내고 싶지 않아서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 결과에 오기까지 그토록 그를 괴롭히던 체이스라는 존재가 기어코 그의 머리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구토, 역겨움, 메스꺼움으로 대두되던 그 '감성'이라는 것은 결국 뒤집어 알고보니 윌슨을 독차지하는 체이스를 바라보는 것에 대한 분노 그 자체였다. 알지 못할수록 더 진짜처럼 상상이 되었고 보지 못한만큼 더 생생하게 재현되는 것만 같았다. 어떤 낯부끄러운 수식어를 갖다 대도 지금의 하우스가 느끼는 혐오와 분노를 삭일 수는 없었다. 기어코 그 시점이 오고 말았다. 그 스스로 움직여서 체이스의 집까지 찾아갈 분노가 차오르는 그 시점이. 순간 그가 지팡이를 짚고 있는 병원의 모든 바닥, 구조, 면면의 구석까지 오로지 그가 체이스의 집으로 향하기 위한 하나의 '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공간과 구성물들은 이제부터 하우스가 윌슨을 찾기 위한 어떤 '구실'에 불과했다. 이제껏 얼마나 많은 변명을 거쳐왔던가. 단지 싫어서, 귀찮아서, 더 나아가서는 감옥에 갇혀서, 자신 스스로에게 막혀서, 너무 멀어서, 체이스가 가로막고 있어서...이제 그런 것들은 단순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목적이 분명한만큼 그는 움직일 용의가 있었다. 아니, 이미 얼마 전부터 그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렇듯 자신이 뒤쫓고 윌슨이 도망치는 상황 자체가 생소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것 뿐.


지난 번처럼 닥터박이 남기고 간 보급용 모터바이크가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하우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병원을 나서서 택시에 올랐다. 이미 두 달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체이스의 집주소를 기억하는 자신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늘 그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질환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고 그 사이에 걸린 희귀한 질병을 명명하는 것처럼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평소에 느슨하게 직조되어 있던 사고를 빠르게 헤아려 운용하는 힘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이러한 사고가 어쩌면 최초로 윌슨을 찾아내는 데에 쓰일 터였다.


체이스의 집으로 향하면서, 그는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체이스와 윌슨의 좋지 못한 광경을 덜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과연 그 현관문을 열 때 어떻게 반응할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그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하우스 자신은 어떤 반응을 해야할지...계산해야 할 항목들은 지겨울 정도로 많았지만 그 중 하나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절실하면서 동시에 이토록 상대로부터 응답이 없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렇게 엇갈려서 시작해본 일이 없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그를 너무나 서툴고, 고통스럽고, 낯설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런 그에게 새로움과 설렘과 긴장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 자취만으로 윌슨이 제공하는 그런 감각들에 하우스는 새삼 놀라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놀라는 감각으로 체이스의 집에 들이닥칠 때 볼 광경을 간신히 짓눌러가며 하우스는 조심스레 체이스의 아파트가 있는 층계까지 지팡이로 계단을 딛고, 또 디뎠다.


겨우 도착한 체이스의 집 현관 앞에서 하우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어떤 변명을 들어서라도 침착하고 싶었지만 원하는대로 되질 않았다. 잠시라도 숨을 참고 기다렸다가 하우스는 현관 옆의 초인종을 눌렀다. 불과 몇 달 전, 연락을 받지 않는 체이스를 불러오느라 멋대로 발로 차고 두드려대던 현관문이 이토록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체이스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윌슨 때문이었다. 그 공간 안에 있을 윌슨 때문에.


하지만 그 조심스러움은 손쉽게 다급함으로 변모했다.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자 의아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습관적으로 현관 손잡이에 손이 갔다. 철컥, 하고 말도 안 되게 현관문이 열렸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머릿속에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빠르게 수십가지의 상황이 스쳐지나갔다. 모든 걸 쳐내지도 못한 채 하우스는 문을 밀어냈다. 차단한 공간이 그의 눈앞에 들어왔다. 그토록 진정하지 못하던 손발과 마음이 그에 따라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아니, 그것은 침울함이었다. 그것은 슬픔, 고독과 고통이었고 이내 하우스가 물끄러미 바라본 현관 너머 거실에 무너진 채 죽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는 체이스를 보면 더욱 분명해질 뿐이었다. 하우스는 체이스의 그런 눈을 처음 보았다. 어떤 설명이나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상황을 짐작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가 윌슨과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스스로와 윌슨의 행방을 여전히 찾지 못했다는 다급함을 느끼는 자신이 치가 떨려서 하우스는 이내 홀린 듯 체이스가 무너져내린 거실로 지팡이를 디뎠다. 체이스는 마치 그대로 굳은 것 처럼 눈알만 굴려 그를 응시하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가 그대로 굳어있는 거실과 달리 침실과 세탁실, 화장실까지도 모든 것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윌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하우스는 그제서야 거실로 돌아와 체이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말을 꺼낸 쪽은 체이스였다. 하우스는 별다른 말 없이 바라보다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난 당신이 아니었으니까요." 대답보다는 아까 했던 말의 이유같은 말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우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체이스는 그제야 지팡이를 따라 하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누가 보더라도 그 표정이란 무심하게 떠나버린 사랑을 온 얼굴로 곱씹고 밤을 지새워 한탄한 얼굴에 분명했다.


"...그 동안..." 체이스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며 순간적으로 몇 번이나 감겼다 떠졌다. 이내 양 볼의 붉은 자국으로 늘 그랬다는 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처럼 변해갈 때마다, 윌슨 박사님은 오래도록 절 봐줬었죠."


지고지순한 사랑, 그 미명 아래 가둬둔 혼자만의 사랑을 뇌까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하우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윌슨이 체이스의 곁을 떠나갔다는 게 분명해졌다. "..멍청하게도 당신을 닮아가는 게 싫어서 수염을 밀어버렸어요. 지팡이도 던져버렸고...차라리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수염이라도 더 자라났다면..."


"...그 답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하우스는 여전히 그를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있는 힘을 쥐어짜 말하고 있던 체이스의 두 눈이 크게 떠진 뒤 금새 찡그릴 듯 잠겼다.


"누군가를 흉내내서 받는 사랑이라는 게 온전히 자네 것이 될 것 같은가?" 다소 교훈적인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체이스를 침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체이스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지만 하우스도 그에게서 더 다른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체이스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뭔가 툭, 하고 떨어졌다. 체이스는 자연스럽게 그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하얀 정제 알약이 그의 무너져내린 손 근처 카펫 위에 뒹굴고 있었다. 그는 그 낯익은 알약을 집어 자신 쪽으로 가져왔다. 5|300 문구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반대편 문구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바이코딘..."


"허리 통증이나 볼에 남아 있는 생채기 통증에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군." 자신의 약통을 닫으며 하우스가 말하였다. 체이스는 그 알약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가 마지막으로 하지 않았던 한 가지. 그리고 이제 뒤늦게 얻은 그 한 가지. 윌슨의 부재로 얻은 그 한 가지. 멍청한 짓인 줄 알면서도 체이스는 그 알약을 대뜸 입 안에 털어넣고는 씹어삼켰다. 정제 알약 특유의 바스러지는 매캐함이 그의 입안에 감돌았다.


체이스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이미 하우스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77.


하우스가 포어맨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마침 포어맨은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코 가운데 크게 자리한 반창고가 꽤나 신경쓰였지만 하우스에게 그런 안부를 물을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이미 체이스의 집에 윌슨이 없다는 걸 안 이상 윌슨의 행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봐야 행정적으로 업무를 보는 포어맨 쪽이 정확했다. 주변 수간호사, 심지어 암병동의 맥켄지에게 물어봐도 다들 아는 바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포어맨은 급히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 윌슨이 아닌 하우스를 보는 것 뿐인데도 하우스의 얼굴만 보면 윌슨이 떠올라서 어딘지 모르게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침착하기 위해서 잠시 커피잔을 준비해 머신으로 다가갔다. 하우스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윌슨이 어디 있는지 아는가?"


"그게...저, 지금 이거 안 보이십니까?" 포어맨은 커피를 내리다말고 하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반창고가 자기 주장이라도 하듯 더욱 크게 보였다. "이게 무려 윌슨 박사님 때문에 생긴 상처입니다."


"골절이군. 안 봐도 뻔하지." 하우스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였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포어맨의 태도가 슬쩍 누그러졌다. 하우스는 멈추지 않았다. "윌슨은 코뼈 하나로 끝났겠지만 난 아닐걸세."


"일단..." 포어맨은 다 내린 커피를 한 손에 들고서 그에게 손님용 좌석에 앉기를 권했지만 하우스는 기어코 그대로 서 있었다. 포어맨은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짚더니 그대로 서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포어맨은 두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윌슨 박사님은 그만두셨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우스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 되어서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길래 당장 그만둔다는 소리를 해댄건가?"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하는데 어째 갈수록 엉망이 되는군요." 포어맨은 지쳤다는 듯 이마를 주물러댔다. "윌슨 박사님은 그러니까...최근에 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이마를 짚은 사이로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박사님에 대해서요."


"그러니까, 그게 어째서 윌슨이 그만두는 계기가 된다는건가? 코가 골절되더니 머리도 멍청해졌나보군. 앞뒤중간 잘라먹지 말고 제대로 고해바치란 말일세." 하우스의 강압적인 태도에 포어맨은 짐짓 진지해져서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치밀던 부아가 기어코 뚜껑을 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박사님은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으시군요, 그렇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치소에서 그토록 고생을 하셨는데도 모르시는 겁니까?"


"...아까 전부터 내가 물어보던 건 윌슨과 자네의 그 '이야기'에 관한 거야. 나에 대한 게 아니라."


"정말이지 두 분은 지긋지긋합니다. 제가 원한 건 그저 두 분이 같이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있는 - "


"말 하라고!" 하우스는 잽싸게 지팡이를 후려쳐 포어맨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리쳤다. 하얀 커피잔이 그대로 바닥에 내리쳐져 소란스러운 파열음과 함께 주변으로 커피를 흩뿌렸다. 놀람도 잠시, 포어맨은 금새 분노로 물들어서 하우스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당신과 윌슨이라는 족속은...! 이런 꼴이 싫었던 거라고요! 윌슨 박사님이 기어코 박사님에게 접근하려고 하니까...! 제가 그런...병원에서 그런 더러운 짓을 해대는 꼴을 보게 놔둘 것 같습니까? 체이스가 윌슨 박사님에게 눈이 멀어서 진단학과 분리니 난리를 쳐도 겨우 참았단 말입니다..! 좋아요, 망할 약조를 했습니다. 약속을 했단 말입니다. 윌슨 박사님이 박사님에게 접근하면 박사님의 가석방 조치는 없는 것으로 - "


포어맨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가 참다못해 하우스의 멱살을 잡은 게 아니라, 하우스가 그의 얼굴에 그대로 한 방 먹여버렸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커피가 이제 막 식고 있는 카페트 위로 포어맨이 나뒹굴었다. 어째 몇 달 전과 비슷한 광경에 몇몇 사람들이 달려왔다. 레지던트며 수간호사들이 달려와 포어맨을 부축하려 했지만, 포어맨은 그들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하우스는 무서울만큼 침착했다. 아까의 가격으로 약간의 숨은 몰아쉬고 있었지만 그렇게 지쳐보이지 않았다. 마치 윌슨의 자취를 밟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주변 사람들 부축을 거부하고 있는 포어맨의 앞으로 하우스가 뭔가를 던졌다. 그의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사원증이었다.


"그 동안 '더럽게' 신세 많이 졌군, 에릭 포어맨."


하우스는 그 말과 함께 지팡이를 짚어가며 포어맨의 사무실을 나섰다.



78.


막상 포어맨까지 거쳐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이래봤자 '윌슨이 그만두었다'는 것 뿐이었기에 그는 자신 안에 있었던 인내심이 달해가는 걸 느껴가고 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윌슨이 사라진 적이 없어서 그가 어디로 갔을지 짐작가는 곳 조차도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사라진 것 만으로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하지만 이 부재가 많은 이들을 쓰러트리며 고통스러워지는 걸 보는 것이 - 특히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참을 수 없어져서 하우스는 다시금 병원을 나서며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가 윌슨을 본 장소라봐야 병원, 그리고...


하우스는 대뜸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서둘러서 모퉁이를 지나 일직선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그날, 바이크를 타고 홀린 듯이 찾아댔던 윌슨의 집이 생각났다. 이 때 만큼은 그도 자신의 바이크를 망가뜨린 걸 무척이나 후회했다. 지팡이를 열심히 짚고 가던 찰나, 윌슨의 집 근처에서 눈여겨봤던 모터사이클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혼다? 왜 아예 할리 데비이슨을 타지 않고요.'


'멍청하군, 자네처럼 세심함이 없는 사내들이나 그런 말을 하는거지.'


'잘 알겠으니까 뭐라도 하나 좋은 걸 말해줄래요?'


'나중에 태워주지 않았다고 보채지나 말란 말일세.'


'...저건 어때요?'


혼다 CBR1000RR 파이어 블레이드...


'자네 연봉에 절반 내주면 생각해보지.'


둘만의 작은 농담으로 일관하던 그 주홍빛 배색의 모터사이클이 마침 눈에 들어왔다. 그 당시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바이크가 지금 그에게는 유일한 탈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찾아낸 윌슨이 이 바이크를 보면 그 대화라도 기억해줄까...멍청한 생각이라고 비웃으며 하우스는 그 바이크를 그 자리에서 결제했다. 아직도 사고가 난 당시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지만 온 몸으로 이것들이 그립다고 하는것만 같았다. 그 자취도 분명하지 않은 목적지까지 포함해서.


단지 지금 애타게 윌슨을 찾는 것 뿐인데도 마치 모든 것이 이제야 맞아 떨어지는 기분이 느껴졌다. 거친 배기음이 그의 마음 고동에 맞춰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도로를 가로지르며 하우스는 그대로 윌슨의 집을 향해 달렸다.


아마 윌슨이 있었다면 - 아니 윌슨이 제대로 대답할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하우스가 보낸 문자든 전화에 답을 했겠지만 윌슨은 그대로 대답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하우스가 윌슨의 집에 찾아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창문 너머로 봐도 다소곳하게 정리된 그 집에는 분명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옆집에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이는 노부인이 하우스에게 윌슨의 행방을 묻기까지 했으니 더 알아볼 것도 없었다. 잠시 지쳐서 하우스는 그의 현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마치 하나의 작은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의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노을이 마을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윌슨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우스는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윌슨이라면 어떻게 진료했을지를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오로지 윌슨이 하우스를 생각하며 혹은 그 스스로 원해서 뭔가를 어떻게 할지를 예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고 기껏해야 최근까지 하우스가 윌슨의 행방을 관찰하며 모은 데이터를 살펴보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 일은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다. 하우스는 기어코 다음 목적지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토록 윌슨이 자신의 집보다 자주 드나들고, 하우스를 냉대하면서도 계속해서 찾아왔던...


하우스는 이내 서둘러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오슈?"


바라던 윌슨이 아니라 세실 부인이 웬일로 하우스의 문 앞에서 그를 맞이하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그는 자신의 현관으로 다가와 급하게 열쇠를 꽃아 넣었다. 세실 부인과의 일상 이야기를 나눌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망할, 적어도 자신의 집에는 윌슨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마땅했다. 진작에 생각해내야 했을 이 장소를 뒤늦게 생각한 것이 한심했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쓰기에는 이미 윌슨이 너무도 보고싶었다.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이야기는 나중에 - "


"윌슨 박사님이라면 아까 전에 떠났어요."


현관을 열고 들어서려던 와중 세실 부인이 대뜸 건넨 말에 하우스는 얼굴이 굳었다. 이렇게 뒤틀리고 엇갈릴 수 있을까. 하우스 자신이 병원에서 윌슨을 기다리며 있던 시간 동안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젯밤부터 머물던걸요. 박사님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윌슨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그 장소. 그 목소리, 이야기...윌슨은 자신을 찾아왔다가 그조차 여의치 않자 자신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아마 윌슨이 착각하기에는 충분했을 터다. 커디와 레스토랑에 남은 채 그대로 떠나왔고 그 와중에 밤늦게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 상황 속에서도 윌슨은 -


울컥, 하우스는 눈에서 쏟아지는 걸 참아내려 했다. 눈이 발갛게 충혈되었지만 눈물은 여전히 맺혀있을 뿐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세실 부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윌슨 박사님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군요, 그렇죠?"


"...어디," 하우스는 잠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었습니까...?"


세실 부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이전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던 대로 하우스의 한 쪽 팔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하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마치 자신이 다가가려고 할수록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서 하우스는 지팡이를 꼭 쥐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누구도 윌슨을 찾아가지 않는다. 윌슨을 찾지 않는다. 체이스는 이제 무너져내렸고, 포어맨은 악랄한 수법으로 윌슨을 쥐고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레고리 하우스 그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윌슨을 찾을 수가 없다.


'난 당신이 아니었으니까요.'


체이스가 무너진 채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윌슨 박사님에게는 그 정도가 아니었나보죠.'


'아마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고, 내키면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는 물론 뉴저지를 벗어나 아예 다른 병원에 이직하고 싶었을테지만...그 마음을 이길 만큼 박사님을 - '


무심코 애덤스가 윌슨에 대해 꺼낸 말도 떠올랐다. 세실 부인이 그를 위로하는 이 애매한 상황 속에서 하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리만치 애덤스가 꺼낸 말들 중에서 유독 그 말이 그를 괴롭혀댔다. 뉴저지를 벗어나 아예 다른 -


아예 다른 곳. 하우스는 윌슨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다. 엠버를 제외한 전 부인들의 거주지도 모두 뉴저지 근처였으며 크리스마스 대신 하누카를 기념하는 그의 부모님도 그 근처에 지내고 계신다. 지금 이 순간 그에 대해 이토록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할 지경이다. 윌슨의 입에서 나온 그 수많은 지명들 중에서 유일하게 뉴저지를 '벗어날' 정도로 멀고도 그와 관련이 있는 지역이라면...


하우스는 대뜸 현관을 그대로 둔 채 나서고 있었다. "...어딜 가요?" 세실 부인이 그를 말렸지만 하우스는 대답 없이 키를 세실 부인에게 맡기며 말하였다. "만에 하나라도 윌슨이 찾아오면 그 열쇠로 잠궈서 가둬두던지 하십시오. 그 후에는 저에게 전화 한 통만 주시고요."


세실 부인이 뭐라 대답했지만 이미 하우스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캐나다 몬트리올로 가려면 뉴저지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은 뉴어크 리버티 국제공항으로, 가는 데에 1시간 25분이 걸리며 차로 간다면 7시간에 달하는 장거리였다. 맥길 대학은 몬트리올 피에르 공항에서 멀지 않다. 이만큼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면 차보다는 공항을 선택할 게 뻔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출발 시간이라는 게 따로 정해져 있겠지만 별도로 예약해둔 항공편이 아닐테니 아직 시간이 있을지 모른다. 공항에 윌슨이 있을지도 몰랐다. 달리는 바이크 위에서도 하우스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몇 번 차에 치일 뻔 했지만 지금 그의 정신은 그 어느때보다도 날카롭고 예리했다. 저 멀리 노을이 지는 너머로 공항의 불빛이 들어와 보였다. 얼마 전 필라델피아로 내달리던 때와는 또 다른 아늑한 빛과 걱정, 설렘과 긴장감이 그를 휘감았다. 공항 너머로 떠오르는 비행기가 보일 때마다 불안감이 바이크를 흔들어댔다. 이내 1번 게이트에 도착한 그는 바이크를 그대로 두고 빠르게 내달렸다. 평소 같았다면 생각도 하지 못할 짓이었지만 당장에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는 빠르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윌슨과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저녁이라 공항의 각 게이트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이미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하우스는 그 와중에도 지칠 줄 모르고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공항의 A구역부터 샅샅이 찾아보고 있었다. 이제 거의 C구역 다 와가서 지팡이를 짚는 힘마저 다 되어갈 때 즈음, 하우스는 짐을 부치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소곳이 자켓을 접어 왼쪽 팔에 걸고 셔츠를 말아올린 채 캐리어를 옆에 두고 아무런 미동도 없이 살짝 고개를 떨군 윌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의 채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그를 찾아가며 마주쳤던 모든 것들이 오버랩되었다. 그 뿐 아니라 그런 그에게 윽박질렀던 일, 체이스가 그를 나무랐던 일이나 윌슨이 난생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왔던 일, 체이스를 한 방 먹였던 일, 윌슨이 웃었던 일, 윌슨이 울었던 일, 윌슨이...모든 것들이 그의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제아무리 달리려 애를 써도 그게 쉽지가 않았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겨우 윌슨의 손목을 붙잡았을 때에야 하우스는 멈출 수 있었다. 윌슨의 놀란 두 눈은 너무나 순수해서 마치 방금 전의 이 추격전이 작은 놀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웃음이 날 정도였다.


"...박사님.." 놀라던 눈은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사람들은 불평도 없이 윌슨을 지나쳐 자기들만의 줄을 만들었다. 윌슨은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말을 하지도, 무엇을 묻지도 않았지만 하우스는 그에 대답해줄 의향이 있었다.


"...정말 지독하시네요. 저 나름대로 마무리를.."


"자네 아직도 그런 말을 하나?" 하우스는 짜증이 났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지만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그의 눈매에 스며있는 다정함이라는 게 너무나 낯설어서 윌슨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우스는 이내 윌슨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입맞추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 눈길을 끌었지만 누구 하나 그들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윌슨은 어안이 벙벙해져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흐르다 말고 하우스의 두 손에 고여 있었다. 발개진 얼굴이 당황한 표정은 하우스를 꽤나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자네야말로 참 지독한 사람이군 그래. 꼭 그 말을 들어야겠나...?" 하우스가 이죽였다. 아까는 눈매에만 스며있던 다정함이 이제 그의 얼굴 전체를 차지하고선 윌슨을 향해 하나 둘 추파를 던지고 있다. 하우스는 그런 윌슨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를 사랑한다네, 제임스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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