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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26화

Another - Epilogue

Code : Blue

by 김뇨롱

심폐소생술(CPR)이 필요한 환자가 생길 경우. 대학병원급이면 거의 매일 나오는 방송으로, 코드 블루 발생 시 의사나 간호사들이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전력으로 달리는 소리가 멀리 울려퍼진다. 하지만 오경보가 아닌 이상 코드 블루가 해제될 때의 생존율은 30~40%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른 아침 8시 30분 경에 구조대원이 노인으로 보이는 한 환자를 응급실로 이송해오면서 시작되었다. 새벽만큼 아침에 실려오는 환자들이야 응급실에서 마주치는 경우라면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상태는 독특했다. 복통에 발열, 설사를 호소하다 결국 쇼크까지 왔다는 구급대원의 말을 들으면서도 캐머론은 그 노인의 푸른 얼굴에 집중했다. 그의 코, 귀와 손가락 끝이 놀라울 정도로 파란 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하우스가 있었다면 영락없이 ‘스머프'라는 이름을 달아둘 게 뻔했지만 캐머론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노인의 상태를 완화시키기 위해 위세척과 산소치료를 진행하면서 강심제를 처방했다. 다행히 노인은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이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어느 환자라도 가장 먼저 궁금해할 자신의 ‘증상'에 대해 물었다. 푸른 얼굴을 본다면 누구라도 생각할 ‘가스중독'이 떠올랐으나 자살이 아닌 이상 1명만 걸리는 가스중독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캐머론은 일단 ‘어떤 원인에 의한 일산화탄소 중독' 정도로 일축하였다. 증상은 나아졌지만 특이했던 노인의 모습, 그리고 혹여나 가스중독일 경우 추가 피해자가 발생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기에 왠지 모르게 이 일이 응급실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약 1시간 하고도 59분 뒤에 그녀의 예감은 적중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환자의 증상도 비슷했다. 이후 40분 뒤에는 무려 3명의 환자가 추가되었다. 11시 20분에 추가로 2명, 이후 불과 10분 뒤 1명…12시에 나머지 1명의 환자와 함께 총 9명의 환자가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응급실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가진 공통점이라곤 남루한 차림새 뿐이고 모두 각지에서 다양한 행동을 하다 실려온 게 분명했다. 이미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환자가 범상치 않은 증상을 호소하자 유행병적 특성을 고려한 캐머론은 규약에 따라 보건기관에 빠르게 이 현상을 공유함과 동시에 진단학과를 비롯한 병원장 사무실에 호출을 넣기 시작했다.


애덤스와 타웁이 캐머론으로부터 케이스를 전달받은 것은 그 이후로 약 1시간 뒤였다. 코에 주먹만한 반창고를 붙인 포어맨은 평소보다도 더 우울한 표정이 되어서는 진단학과 사무실에 당도했다. 분명 그의 손에 들려있는 차트를 보아 희귀 케이스를 의뢰하러 온 것이 분명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 손에 들려있는 차트의 양이 상당했다. 포어맨은 대뜸 진단학과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그 차트를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비상사태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차트를 넘겨 받으며 타웁이 말하였다. 마치 카드라도 고르듯 차트를 옆으로 늘어놓았다. 장장 9개나 되는 차트였다. 애덤스도 그 중 하나를 골라 열어보기 시작했다.


“양이 많다고 겁먹지는 말고. 어차피 모두 같은 증상이니까.” 포어맨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하였다. “비상사태는 이 병원과 내 목숨 말하는거야.”


“...청색증…” 애덤스가 중얼거렸다.


“현재는 ICU로 배정되었어. 응급실에 9명이나 두고 있는건 좋지 않을뿐더러 결국 집중 케어가 필요하니까. 더 이상 병동 내의 이슈가 아니게 되었어. 하우스도, 체이스도 없는 상황이지만 부탁좀 하지…최대한 연락해보려고 하고 있어.”


애덤스와 타웁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애덤스가 입을 열었다.


“병동 내의 이슈가 아니란 건 어떤 말이죠?”


포어맨은 그 말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대답했다. “ICU에 가보면 알거야. 어차피 내가 자네들을 인솔해서 거기까지 데려가야 하거든. 보건부의 수석 역학자가 지금 환자들 상태를 체크하고 있어.”


포어맨은 그 날 아침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불과 며칠 전 윌슨에 이어 하우스와 꼴사나운 갈등을 겪고 코는 으스러질대로 으스러져 반창고까지 붙인 마당에 며칠이라도 병동을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떨어질대로 떨어진 명성에 차기 병원장을 뽑으라 한들 당장에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 권위조차도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 고꾸라져 넘어진 걸 가지고 구덩이로 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에릭 포어맨. 좀 더 자신감을 갖도록 하세요.’ 조언인지 힐난인지 모를 이사장의 그 말에 포어맨은 쉽게 그만둘 수도 없었다. 병동을 불명예스럽게 나서는 것 자체만으로 그의 커리어와 자존심에 상당한 스크래치를 내는 일임에는 틀림 없었다.


그래서 그가 그 날 아침, 캐머론의 뒤늦은 연락을 확인하고 급히 사무실로 들어와 불과 몇 분 전 당도한 보건부의 수석 역학자인 ‘에드 베넷’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당혹감과 곤란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테 안경이 차가운 인상을 도드라지게 하는 중년 남성인 에드워드 베넷은 정갈한 정장 차림에 낡은 서류가방을 든, 영락없는 공무원 그 자체였다. 나름 예의를 차린답시고 날씨 이야기를 꺼내듯 베넷이 포어맨의 코에 붙은 반창고에 대해 물었지만 포어맨은 어딘가 부딪혔다는 식으로 말을 얼버무리며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베넷은 그리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레고리 하우스’라는 이름이 그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고, 포어맨은 당장에 하우스의 부재를 어떻게든 만들어내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토록 위급한 상황 - 유행병이 의심되어 정부에서 파견된 사람과 함께 진단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 - 에 하우스가 적법한 방향으로 부재해야 하는 경우라봐야 그리 다양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대답을 꺼낸다 해도 베넷의 심기를 건드리기만 할 뿐이었다.


베넷이 ‘백업'에 대한 문의를 해온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로버트 체이스'라는 이름이 떠올랐으나 포어맨에게는 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연락을 하기 어려운 존재임에는 틀림 없었다. 이번에는 포어맨이 말을 끊어낼 차례였다. 그는 현재 ‘일할 수 있는' 진단학과 인원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면서, 이내 그들을 ICU로 데려와 함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 말하곤 한 편으로는 빠르게 시간을 확보하여 하우스든 윌슨이든 누구든간에 연락을 취해볼 마음을 먹게 되었다.


포어맨이 마지막으로 체이스에게 서른 번째 연락을 하려던 참에 체이스는 결국 의사 가운도 걸치지 않은 채로 포어맨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하우스 쪽은 애초에 전화를 제대로 받고 있지도 않았다. 전화를 받을 거라는 희망조차 없었지만.


그럼에도 찾아온 체이스가 포어맨은 마냥 반갑지가 않았다. 애초에 윌슨에게 체이스의 계략을 폭로한 것도 그 자신이거니와 윌슨과 하우스의 행방을 보건대 체이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 쯤은 가볍게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도 - 체이스의 몰골 그 자체가 그의 상태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의사 가운을 걸쳤더라도 체이스는 분명 초췌한 환자에 더 가까웠을 터다. 하지만 포어맨이 그에게 말을 걸어볼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어느 감염의학자에게서나 볼법했던, 특별한 증상이나 병을 진단할 때에나 보이던 그 형형한 눈빛.


"...자네도 예상했겠지만 하우스도, 윌슨 박사님도 전혀 응답이 없어. 오늘 오전부터 갑자기 동일한 이상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대거 발생했고, 보건부에서 사람까지 나온 상태야. 자네까지 이 자리에 없었다면 꼼짝없이 문제가 터졌을 상황이야. 물론 내 연락을 받은 것 자체가 불쾌할지도 모르지만..."


"...그만 둡니다." 체이스의 단발적인 말에 포어맨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번 케이스가 마무리되고 나면, 전 그만둡니다."


"...두 박사님이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전하지 않았는데." 포어맨이 짐짓 뒤로 빼며 말하였다.


"이제 거기에 제가 더 할 수 있는거라도 있던가요?" 체이스는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포어맨은 뭐라도 더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이미 체이스가 풍기고 있는 인상은 그걸 받아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며칠 간 폐인이 되었을 게 뻔한 인물을 대뜸 불러서 진단을 요청하는 자신의 입장도 그리 떳떳한 건 아니었으니까.


"이제 그만 인정하자구요." 체이스는 문을 열다 말고 뒤돌아 말하였다. 포어맨 스스로 느낀 착각일지 몰라도 체이스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한결 가벼워보였다.


"...우린 실패한 겁니다."


체이스는 그대로 문을 닫고는 사라졌다.




체이스가 ICU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6시가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보건부의 조사가 5시간 이상 이어지고 있던데다 6시 45분 경에 청색증을 호소하는 또 한 명의 환자가 응급실로 이송되는 바람에 더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애덤스와 타웁은 체이스를 보자마자 안도와 함께 상황에 대한 곤란함을 두 눈으로 표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대응하기도 전에 낯선 중년 남자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닥터 에드워드 베넷입니다. 보건부의 수석 역학자입니다.”


체이스는 대뜸 찾아온 남자의 통성명에 당황스러웠지만 걸치고 있는 가운의 무게를 더욱 느껴가며 그의 오른손을 마주잡고는 대답했다.


“닥터 로버트 체이스입니다. 진단학자입니다.”


베넷이 그 다음으로 꺼내든 건 세계적으로 청색증이 얼마나 희귀한 지에 대한 내용과, 그에 따라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미국과 독일에서 겨우 2건, 나머지 세계에서 발병한 건을 취합하더라도 겨우 10건에 불과한 이 '청색증'에 대한 문제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게 되면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의 안위는 물론 보건부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 체이스의 눈길을 끌던 것은 환자가 있는 ICU로 다가서며 불현듯 보이는, 원목 무늬의 목재 문이었다.


"이 10명 중에서 결핵환자를 포함한 5명은 파크 로우 109번지의 여인숙 글로브 호텔에 투숙하던 상태였어요. 나머지 3명은 제임스 가의 3번지 호텔에서 증상을 호소해 실려온 상태이고, 1명은 시티 홀 파크 근처의 폐기된 건물 출입구에서 발견되었어요."


"...나머지 한 명은?" 애덤스의 말을 듣다 말고 체이스가 물었다.


"마지막 환자는 스퀘어 6번지의 이클립스 카페 앞에서 졸도했다는군요." 말을 이어간 건 베넷이었다. "여기 있는 닥터 애덤스로부터 대략적인 브리핑은 받은 상태입니다. 결핵이 심한 고령의 환자 한 명을 제외하면 환자들 모두 가볍게 식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태였는데 이들 모두 동일한 카페를 거론하더군요."


"식중독 증상으로 청색증이라..." 체이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적어도 일산화탄소 중독증은 아니니까요." 베넷이 덧붙였다.


그 사이 ICU가 소란스러워지며 체이스의 호출기가 울렸다. "무슨 일입니까?" 베넷이 물었다.


"자리를 더 마련해야겠군요. 환자가 한 명 더 늘었습니다." 체이스가 대답했다. 일순 모두가 잠시 숙연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잠복기라 치면 너무 짧지 않나요?" 애덤스가 보드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베넷과 체이스, 타웁과 애덤스는 모두 진단실에 모여서 늘 하던대로 증상을 적어가며 떠오르는 병명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다수의 환자가 동일한 경험을 통해서 전이된 증상이라면 보통 '식중독'을 생각하고 계신 건 알겠지만...포도상구균이나 살모넬라균 같은 것보다 더 짧아요. 최대 2시간...아무리 길어도 30분 이내에 발현하는 게 말이 되나요?" 타웁이 덧붙였다.


"오히려 복통 쪽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체이스가 말하였다. "일반적인 식중독 증상이 아닐 수도 있지만...적어도 어떤 섭취를 통해서 전이되었을 경우가 큰 것 같아서요. 일단 중독 증상으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혈액 시료 채취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베넷이 말하였다. "뉴저지 소속 동물학자에게 검사를 부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쪽에는 제가 연락을 취해둘테니 '메트헤모글로빈' 여부를 알려달라 말씀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애덤스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사물들에 적지 않게 영향을 받고 있는듯한 체이스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잘 되었군요. 닥터 체이스, 아마 식품의약국에서 해당 카페에 파견 나와있을 겁니다. 아까 전에 환자들에게서 받은 증언을 토대로 연락을 취해둔 참인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체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가 타웁을 바라보기도 전에 기색을 눈치 챈 타웁이 서둘러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세 사람은 빠르게 병원을 벗어나 뉴저지의 캠든으로 향했다.


"환자들 행색을 보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이런 슬럼가 식당에서의 식사라면 청색증 아니라도 뭐든 걸릴 법 하겠는데요." 유리창 바깥을 바라보며 타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보건의 틈새라고 봐주셔도 되겠죠. 결국 주마다 갖고 있는 방침은 따로 있을테지만요. 모든 상황을 대처할 수는 없지만 모든 상황의 대처를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베넷은 운전대를 잡고 대답했다. "숫자에 예민한 윗분들은 환자의 수가 10명을 넘기자마자 저에게 연락을 취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분들은 보통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민감하셔서요."


"...그러고보니 식사는 제대로 하신 겁니까?" 베넷이 묻는 쪽은 누가 봐도 체이스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느라 대답이 늦었다. 그들이 탄 차가 병원을 나설 적에 잠깐 스쳐지나간 모퉁이 술집이 여전히 그의 머리를 헤집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원래 진단할 때에는 뭘 잘 먹지 않아서요."


"적어도 저보단 더 드셔야 할 것 같은데요. 물론, 이 슬럼가를 빠져 나와서 말이지만." 베넷이 대답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사이 저멀리 기관 차량과 함께 통행 제한을 걸어둔 테이프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마치 이 상황은 살인사건 현장을 방문하는 강력반 형사의 기분처럼 느껴져 뭔가 이상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덩치가 있는 흑인 남성이 다가와 손을 건넸다. 악수라도 청하는 줄 알았더니 그의 손에는 장갑이 들려 있었다. 희귀한 중독 증세가 대량 발발한 곳이니 당연한 처사였다. 그가 건네는 폴리에틸렌 장갑을 손에 끼우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악수를 청해왔다. "반갑습니다. 식품의약국의 위생조사관 스티브입니다."


마스크를 쓴 그들은 이내 카페 이클립스로 들어섰다. 말이 카페이지 거의 스러져가는 건물에 가까운 그 식당에는 내부가 허름한 것과 비례할 만큼 위생상태가 좋지 않아보였다. 식당 가운데 가장자리에는 마치 벌을 서는 듯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체이스는 그들 중 손에 상처가 많고 팔에 털이 적은 남자를 찾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성함이..."


"와인스틴입니다. 이 가게 주방장입니다." 체이스의 추측이 맞았다. "옆의 분은 이 가게의 주인입니다. 아마 금일부로 영업 관련한 처리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이 곳을 운영하지 못하실겁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스티브가 덧붙여 말하였다. 그 와중에 타웁이 주방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체이스는 일단 와인스틴의 옆에서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는 오래된 레트로풍의 탁자와 그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조미료 통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메뉴판에 슬쩍 시선을 던졌다. 오트밀 메뉴가 유난히 신경쓰였다.


"...주방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주방은 어...사실 뭘 많이 뒤져서 사용하진 않아요.." 와인스틴은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만든 음식 때문에 11명 가까운 사람이 병원에 실려간 사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양이었다. "보통은 저 쪽의 프라이 팬과 향신료 쪽은 저 쪽의 양철 통으로 사용합니다. 옆의 통은 귀리가루, 그리고 저 양철 통에는 소금이 담겨져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체이스는 그 말을 듣고 타웁을 따라 주방으로 향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카페의 메뉴가 단순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가격도 저렴하게 받는데다 재료를 떼어오는 곳도 얼마 되지 않을테니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만일 메뉴가 다양했더라면 이 11명 이외의 사람들이 먹은 메뉴까지 고려해야 하고 그 때문에 잠재적인 환자들을 추려내야 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이슈가 따를 게 뻔했다. 방금 전까지 추가된 환자를 생각해보면 이 마저도 다행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체이스는 역시나 타웁이 와인스틴의 말을 어깨너머로 듣고 귀리가루가 든 통을 먼저 살피는 것을 바라보았다. "...역시 오트밀 쪽이 이슈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상온에 가장 상하기 쉬운 식재료이기도 하고...적어도 소금보다는 더 가능성이 높아보이는데."


"메뉴도 얼마 없는 식당에서 오트밀을 섭취한 게 이 11명만은 아닐거에요." 담배연기와 세월에 절은 낡은 메뉴판을 바라보며 체이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적어도 일산화탄소 중독보다는 그럴싸하잖아?" 농담이랍시고 타웁이 던졌지만 체이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주변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고만 있었다.


"...모든 성분들은 가져가서 분석하시나요?" 체이스의 말에 이 가게의 주인에게 15가지 위반 사항을 읊던 스티브가 잠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전담 분석팀이 있어서 그 물품들을 모두 가져가긴 하지만, 분석 결과가 제법 늦게 나옵니다. 보고서 작성 방침이 있어서요." 그 말에 체이스는 잠시 바깥으로 가 수집용 키트를 가져와서 귀리가루 통 옆의 소금을 조금 가져다 담았다.


"...소금은 왜?"


"혹시 모르잖아요."


스티브와 헤어진 뒤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병원에 돌아왔을 때 즈음에는 벌써 오후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애덤스는 진단실에서 그들을 맞이했고, 마침 동물학자로부터 결과를 전달받았다고 전해줬다. 그들이 예상했던대로 환자들의 혈액 시료에서 '메트헤모글로빈' 양성반응이 관찰되었고 청색증은 이 중독증세로 발현된 것이라는 소기의 결론에 도달했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지만 다른 대형 병원에 수납된 청색증 환자 내역은 없다는군." 포어맨이 덧붙였다. "다행히 환자들 증상은 조금씩 호전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실려온 환자 증상이 너무 좋지 않아서 별실로 옮겨둔 상태야."


"일단은 샘플들 검사부터 서둘러야할 것 같군요." 베넷이 덧붙였다. "각자 가져온 샘플에서 특정한 성분이 발견되면 바로 보고하는 것으로 하시죠." 그들은 각자 가져온 샘플들로 검사를 진행했다. 작정하고 가져온 귀리가루 샘플을 서둘러 검사했던 타웁은 난색을 표했다. 오트밀이 분해되며 발생한 가스로 인해 설사를 유도하고 - 아직 제대로 알 수 없으나 청색증까지 발현될 수 있을 거라는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대신 타웁은 상기된 얼굴의 체이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샘플을 검사한 차트를 가져와 사무실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소금이 아니에요."


"소금이 아니라니?" 타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차트를 열어보며 물었다.


"극소량이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이건 소금이 아니라 아질산나트륨입니다." 체이스가 말하였다. 베넷은 타웁으로부터 차트를 넘겨받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질산나트륨이라면 보통 육류의 보존을 위해 사용됩니다. 아마 오트밀과 함께 나가는 고기를 보존하기 위해 사들인 가루를 소금과 헷갈린 것 같군요." 베넷이 침착하게 말하였다.


"5g 이상만 섭취해도 혈중 산소부족으로 청색증을 유발할 수 있어요." 체이스가 말하였다. "원인은 분명해졌으니 처방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을 겁니다."


"소금을 챙겨오지 않았으면 해결이 더딜 뻔 했습니다. 분석팀에서 결과가 나오기야 하겠지만...스티브 씨가 말했듯이 식품의약국 분석팀의 결과는 매우 늦게 나오니까요." 안심했다는 듯 베넷은 체이스를 바라보며 말하고는 바로 보고를 위해 진단학과 사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원인이 되는 성분을 찾은 것도 잠시, 애덤스와 타웁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잠시 휴식을 위해 자리를 떠난 다음에야 오롯이 체이스 혼자 남았다. 그의 집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던 순간의 공기가 익숙하게 그를 찾아왔다. 그제야 그의 곁에 밤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가운을 벗어 한 쪽 팔에 걸쳤다. 탈의실로 가는 대신, 그는 사무실 너머의 진단학과 과장 사무실로 향했다. 잔뜩 긴장해서는 첫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갔던, 검사를 확인받기 위해 들락거렸던, 때로는 맞지 않는 의견을 합치하기 위해, 또 때로는 윌슨 박사님을 홀대한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따져보기 위해 들어섰던 그 사무실이 왠지 모르게 지금은 너무나 좁고, 작고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은연중 거울에 비쳐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그는 짐짓 놀라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거나 다리를 절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 사물을 꿰뚫을 것만 같은 눈동자까지...어느덧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분위기는 영락없는 그 사람의 것이다. 그는 잠시 가운을 그대로 손님용 의자에 걸어둔 채 앉아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님용 의자에 앉은 방향은 여전히 사무실 안쪽을 향하고 있는데도 체이스는 기어코 고개를 돌려서 맞은 편에 자리한 원목무늬 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밤. 이미 오후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다. 차갑고도 텅 빈 이별만큼이나 차단한 등불에 굳어버린 원목 문은 그 존재만으로 체이스를 힘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처음에는 안쓰러움으로, 동정심을 들먹이던 선심이 이내 연심으로, 설렘으로 가득차선 나중에는 그의 욕망을 한껏 가둬둔 그 문이야말로 그를 힘들게 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그가 사직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포어맨이 머릿속으로 꺼낼 수 있는 변명이라면 셀 수 없이 많았겠지만 아마 지금 체이스가 느끼는 감정 같은 건 들어있지도 않았을 터다. 그건 포어맨이 이해할 리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에 분명했다.


사람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주변과 사방에 자리한 것이라면 그를 슬픔으로 내리누르기에는 충분했다.


사건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정신차리지 못하게 만들 사건이. 어떤 문제, 혹은 공식이나 퍼즐이라는 미명이라도 붙여서 지금의 이 공간을, 이 공간에 자리한 자신의 존재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지워버릴 정도의 강렬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무려 11명의 청색증 환자와 더불어 대혼란을 가져올지도 모를 유행병에 대한 공포와 보건부 수석역학자, 식품위생국의 조사관까지 동반한 제법 요란스러운 사건이긴 했지만 그 마저도 지금 이 고요를 깨트릴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무렵, 기다렸다는 듯 체이스의 가운 주머니에 들어있던 호출기가 소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싸한 기운이 그의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코드 블루였다. 신호가 다 가기도 전에 체이스는 호출기를 빼내며 가운을 두르기 시작했고, 바로 ICU로 향했다. 이미 체이스와 타웁이 한 명의 환자에게 매달려있는 상태였다. 환자는 바로 결핵을 지병으로 가지고 있던 고령의 '제임스 밀러'라는 환자였다. 애덤스는 바이탈을 살피고 있었고 타웁이 CPR을 실시하고 있었다. 기어코 자동심장충격기까지 가동했지만 이미 떨어진 환자의 바이탈은 돌아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죽음을 재촉하는 듯한 바이탈음과 옷깃이 스치는 소리, 비명에 가까운 고함 소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체이스는 문득 자신도 모르게 복부의 오랜 상처를 지혈하듯 붙잡고 있었다. 환자에게 칼을 맞고 스스로 쓰러졌던 그 시점에 자신이 그대로 상황을 빠져나왔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우스가 돌아오고 자신의 감정이 무저갱으로 치닫기 이전의 - 윌슨과의 관계가 모든 것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을 그 시점에...온 몸에 땀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환자의 사망을 목격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이 시점을 기해서 그는 스스로를 인정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만일 그렇게 되어서 스스로 사망했다 할지라도, 혹여나 윌슨과의 관계 개선이나 어떤 욕망, 야망을 위해서 윌슨과 하우스와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몇 번이나 시도했다 할지라도, 혹여나 아예 시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언젠가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몇 번이나 같은 결말을 맛본다 한들 그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양한 루트가 있었을테지만 그는 늘 이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씁쓸하지만 분명한 감각이 그의 저변에서 올라왔다. 아득한 절망의 늪에서 솟아오르며 모양을 분명히 해가는 것은 오롯이 자신만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정체성이다. 모든 것이 변했다고 여겨진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가 진단학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미 사망한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질 타이밍을 지나치기 이전에 타웁은 제대로 자제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망 선언을 한 것은 애덤스였다. 애덤스와 타웁 두 사람 모두 체이스가 찾아온 걸 아는 눈치였지만 돕지도 않은 그에게 달리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고령의, 그것도 행색이 남루할만큼 의학적 케어를 받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보통 몸의 한 두 군데는 늘 지병을 달고 살기 쉽상인데다 보통 이런 유행병 - 소규모든 대규모든 - 을 겪게 될 경우 가장 먼저 위급해지는 카테고리의 환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이스에게 이 사건은 다르게 다가왔다. 그가 지니게 되는 그 어떤 절망도, 고통도, 슬픔도..개인적인 것이라면 지금 이토록 아플 수 있을까 싶었지만 다른 그 무엇보다도 - 자신이 돌보고 있던 환자의 죽음만큼 그를 각성시키는 것은 없었다.


"보고는 받았지만...지난 밤에 사망자가 있다고 하더군요." 간단한 브리핑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베넷은 생각보다 그리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숫자에 집착하는 윗사람들' 이야기가 그들 머리에 잠시 스쳐갔다. 애덤스와 타웁, 심지어 포어맨까지도 심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체이스만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일단락 된것으로 보이는 사건을 두고 혼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아 타웁은 먼저 나서서 사망한 환자인 제임스 밀러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진행했다. 추가로 베넷이 카페 이클립스를 영업정지 조치 후에 혹여나 간밤에라도 유사한 청색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주변 대형 병원에 더 들어온 케이스가 있는지 포어맨에게 질문했지만 포어맨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에 들어온 11명의 환자가 유일했으며, 이제 그 수는 10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고보니 이상하군요." 서류가방을 챙기던 베넷은 짐짓 고민에 빠지듯 하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주방장이 '소금'이라고 생각했던 아질산나트륨을 그만 오트밀 요리에 뿌려대는 바람에 지금 사달이 났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그렇다 해도 그 수가 너무 적긴 합니다."


"5g 이상 섭취하게 되면 청색증이 발생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향신료 수준으로 쓰더라도 지나치게 많으니까요." 타웁이 중얼거렸다.


애덤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체이스는 그 와중에도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라도 추가적인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고민해보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할 경우는 아니니까요..." 마치 사건을 정리라도 하듯 그의 서류가방 잠금쇠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잠겼다.




체이스는 병동 가운데 자리한 방문객용 휴게실에 앉아서 실려온 환자들이 늘어선 ICU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의 병동은 가운데 구조가 조금 특이한데, 곳곳에 방문한 방문객이나 보호자를 위해 휴게실을 따로 마련해두고 있었다. 문제는 그 휴게실이 사면이 통유리로 만들어진 공간이며 때문에 각 ICU의 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체이스는 요전에 하우스가 윌슨의 샌드위치를 빼앗은 채 유난히 이 곳에 앉아있기를 좋아했던 걸 상기했다.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체이스는 이제야 하우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자네들은 보기만 하지 관찰하지 않잖아.'


언젠가 하우스가 묵은지 이틀이나 된 커피를 가지고 팀원들에게 내기를 건 일이 있다. 그날 따라 가볍게 윌슨과 아침 인사를 나눠서 기분이 좋았던 체이스는 보기좋게 그 내기에 당해버렸다. 하우스는 진단학과 사무실에 커피 2잔을 놓은 채 어떤 커피가 이틀 묵은 커피인지 맞추라며 보란듯 책상에 50달러를 걸었다. 당시 함께 있었던 캐머론은 각 커피의 색을 보곤 더 짙은 색을 가진 커피가 오래된 커피라고 말했고, 의학잡지에 시선을 빼앗겨 있던 포어맨은 커피의 성분이 오래될수록 거품이 줄어든다는 것을 근거로 거품이 적은 컵의 커피가 오래된 커피라고 말하였다.


두 사람이 대뜸 넘겨짚는 것과 달리 체이스는 눈앞의 컵들에 손을 내밀었다. 하우스가 지팡이로 빠르게 막아서며 ‘커피를 가져가는 건 안 된다'고 했지만 체이스는 그에 반발했다. 어디까지나 커피의 성분을 분석해서 어느 커피가 더 오래된 것인지 알아보는 게 정확하다는 이유였다.


‘자네가 검사를 치루고 결과가 나오는 동안 커피가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이라도 있나?’


갑자기 커피가 환자가 된 기분이었지만 체이스는 쉽게 대꾸를 하지 못했다.


‘눈대중으로 보는 거,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워서 판단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자연사하는 것보다 더 일찍 커피를 죽음에 이르게 하겠지만 말이야.’ 이번에 하우스는 캐머론과 포어맨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인과결과를 생각하고 보지 않으면 결국 커피는 죽어버린단 말일세. 가끔은 검사나 눈대중, 기준을 세우는 것 말고 앞뒤 상황을 살펴봐야 제대로 된 진단을 할 수 있어.’


하우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한쪽 컵을 들어보였다. ‘이 컵은 지난 이틀 간 내 책상 위에 버젓이 놓여 있었네. 자네들 중 누구도 이 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 게다가 이 컵에 특별히 새겨져 있는 마크도 신경쓰지 않았고 말이야. 조금만 관찰했더라면 이 컵이 이틀 묵은 컵인 걸 알았을걸세.’


하우스의 농간에 놀아나 책상 위로 각자 50달러를 내밀며 유치한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유난히 하우스가 뒤늦게 꺼낸 그 말이 신경쓰였다. ‘관찰'이라니. 적어도 이런 탐정노릇을 하려고 의사가 된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히게 되면 체이스는 언제라도 그가 가르치고 핀잔주듯 말해왔던 그 ‘관찰'이라는 것에 집중할 수 밖에는 없었다. 이미 그가 쓸 수 있는 카드는 모두 써보였고 이제 남은 거라곤 오래되고 낡았지만 꽤 쓸만한,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카드 뿐이었다.


"환자들은 모두 알콜중독자였죠." 대뜸 체이스가 말을 꺼내온 것은 베넷이 이제 막 퇴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차를 호출하고 있을 때였다. 베넷은 뭔가 문의하거나 답변을 하는 대신 차 손잡이에서 손을 빼고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가 생각한 추리를 듣고싶어하는 눈치였다.


"주방장이 그 양철통에 든 아질산나트륨을 '소금'이라고 믿었다면 그건 가게 직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점원 중 한 명이 테이블에 서빙할 소금통에도 마찬가지로 아질산나트륨을 넣어두었을 가능성이 커요." 체이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카페 이클립스에는 각 테이블마다 소금과 후추 등 조미료를 넣어둔 통이 있더군요. 환자들 대부분은 알콜중독 증세를 가지고 있었고..."


"보통 알콜중독자들은 더 많은 염분을 섭취하려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그렇네요." 깨달았다는 듯 베넷이 말하였다. 체이스의 두 눈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겁니다. 일반적으로 가게를 들른 다른 손님들은 주방장이 마련한 그대로 식사를 하거나 기껏해야 몇 번 정도 소금을 뿌려 먹었겠죠. 하지만 여기로 실려온 이 10명의 환자들은 달랐던 겁니다. 싱겁다고 느꼈던 나머지 소금통에 들어있던 아질산나트륨을 과도할 만큼 뿌려먹게 된거죠."


"...이걸로 마지막 의문이 풀렸군요. 더 이상 다른 경우를 통해서 환자가 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해도 되고요." 베넷이 만족스럽게 말하였다. "이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저도 솔직하게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병원장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당신이 하우스 박사의 '백업'이라고." 베넷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지만 자신의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체이스는 그리 놀라는 것 같지 않아보였다.


"제가 단단히 착각했습니다. 그레고리 하우스의 백업이라기엔 당신의 실력이 그에 준할만큼 뛰어납니다. 아니, 사실 그의 최근 행보를 보건대 그보다 더 준수한 의사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법 높여주는 칭찬인데도 체이스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프린스턴 플레인즈보로의 '진단의학자'를 '진단의학과'로 만든 이유'...스스로 내뱉은 말이 그의 머리를 비집고 나왔다. 그런 그의 속을 모르듯 베넷은 유유히 말하고 있었다. "이번 보고는 꽤 주요할 것 같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에 발발했던 라크로스 뇌염이 올해는 좀 잠잠해서요. 보통 이런 유행병 조짐은 발발 그 자체로는 위기에 가깝지만 제대로 해결만 한다면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하죠. 괜찮으시다면 저와 같은 역학 조사관으로 박사님을 추천하고 싶은데요. 어떠십니까?"


베넷은 그 말과 함께 차량의 문 손잡이에 손을 넣었다. 괜찮다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냐는 제스쳐였다. 체이스는 잠시 고개를 돌려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눈을 감아도 그려질 것 같은 현관, 피스타치오 빛깔의 로비, 주변을 두르며 층을 이루고 있는 병동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여전히 체이스는 바깥에서도 윌슨의 사무실 위치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사실 자체가 그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지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 머물고 집착하는 게 당연한 처사일 것이다. 그러나 체이스는 이제 오롯이 자신에게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가진, 그 자신으로서의 '진단학자'라면 그가 있어야 할 장소가 반드시 이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일 이유는 없었다. 비록 그가 보고 배워온 사람은 이 곳에 연연할지 몰라도 그가 배워 가져온 그의 실력은 이제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미련이 서서히 녹아 그를 쓸어내리며 흘러갔다. 마침내 그도 천천히 이별해낼 준비가 되었다.


두 사람이 탄 차량은 천천히 주차구역에서 자리를 빼낸 다음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의 정문 구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은 다채로운 빛깔을 뿌리고 있었다. 아직 다 물러가지 못한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살들 중 일부는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의 정문에 자리한 몇 개의 벤치 중 하나에 걸쳐진 의사 가운과 그 위에 자리한 명찰을 섬세한 광채로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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