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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27화

[작성후기] Another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제 3자'

by 김뇨롱
문제는 이렇다. 체이스의 다리가 마비되고 어느 일천분의 일이라던가 천문학적 확률로 가늠되는 가능성으로 머지않아 다리를 절며 지팡이를 짚고 좌절하여 면도도 하지 않고 다닌다 하면, 그건 분명 그가 하우스화(化)된다 해도 어색할 건 없지만 그 과정을 예상하는 하우스 본인도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제 3자에게 있었다. 바로 윌슨이었다.


들어가며

장장 1년 넘도록 써온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부분도,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많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먼 길을 같이 걸어와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즐겁게 봐주신 부분은 감사드리며,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맨 처음 이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으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7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로서는 지금 분량에서 2화까지의 이야기만 적어두고 더 이상 감당이 되지 않아 닫아두었지요. 그러던 것이 마침 재작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고 적어내려가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레고리 하우스라는 인물만 놓고 보면 윌슨과 맺어질 가능성이랄 게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지요. 시즌 7에서 커디와 연애를 벌이기까지 하고 시즌 8이 되어서야 윌슨에게로 돌아오는 하우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우스가 자신을 돌아보고 싶을만큼 적극적으로 윌슨에게 구애하는 인물이 있다면 어떨까’가 시작이었지요. 다만 그 인물을 찾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 소설 초반부에 많은 분들이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로버트 체이스는 하우스 시리즈의 후반까지 함께 하는 캐릭터이지만 삼둥이 중에서 가장 아이같은 느낌을 주고 있거든요. 포어맨은 원래부터 명석했고 캐머론은 정신연령이 높아보였지만 체이스는 오히려 ‘철부지 공주님’ 포지션이었죠. 순전히 하우스가 그런 점으로 체이스를 놀려먹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요.


체이스를 결정적으로 ‘대적자’로 만드는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은 바로 드라마 시즌 8의 12화였습니다. 제목부터 [Chase](국내 방영명은 ‘수녀를 사랑한 남자’)인 이 에피소드에서 체이스는 무려 환자인 수녀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저에게 중요한 건 이 부분이 아니었죠. 체이스가 담당 환자인 수녀의 X-ray 사진을 가져와 윌슨에게 자문을 구하는 씬. 저에게는 이 장면이야말로 중요했습니다. 복부에 칼을 맞고 다리도 저는데다 수염까지 난 채로 윌슨의 옆에서, 윌슨에게 자문을 구하며 옆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하나의 장면에서 저는 그를 대적자로 만들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기같은 이미지의 삼둥이 막내를 가지고 많은 장치를 동원해서 하우스에 맞먹을 준비를 하게 되었지요.


하우스(One), 그리고 윌슨(Other)의 사이에 끼어드는 또 다른(Another) 대적자로서 낙점된 로버트 체이스는 그래서 교묘하고 계획적이고 치밀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오래도록 놀라운 경력을 자랑하는 것도, 번쩍이는 의학적 추론능력이 있는 것도, 무엇보다 윌슨으로부터 애정을 받는 것도 아니다보니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올만큼 장악력을 가져야 했죠. 하우스의 부재로 인해 힘들어진 윌슨의 감정을 교묘하게 끌어오는 교활함,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주변 상황을 원하는대로 조금씩 조작하는 대담함, 무엇보다 그가 가진 윌슨을 향한 ‘간절함’이야말로 체이스를 어리벙벙한 막내에서 하우스의 대적자로 끌어올릴 강점이었죠. 그래서 만족스러우실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체이스를 같은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진행했었습니다.


그래서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캐릭터는 체이스일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우스가 윌슨을 내치고, 자신 스스로를 괴롭히고 절망하고 머저리처럼 구는 상황 속에서 체이스는 유유히 윌슨의 곁에서 그를 구슬려내고,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내고 포어맨과 작당모의를 저질러야 했거든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정도를 해야 하우스와 동등한 선상에 설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뒤늦게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인 하우스가 반등을 노리고 올라서지만…그 반등이 제가 쌓아올린 체이스의 다양한 계략을 넘어설만큼 강력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파워 밸런싱이 무너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Another 6편에 대한 반응을 보았을 때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하우스가 매정하게 윌슨을 내친 일, 윌슨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데다가 체이스가 뒤에서는 이런 저런 공작을 벌여서라도 윌슨을 손에 넣으려 한(...)일 때문인지 오히려 많은 분들이 체이스에게 더 공감하시는 듯 했습니다. 아무렴 사람 속이라는 게 그렇잖습니까. 자신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지 자신을 내치는 사람을 좋아하기는 어려운 법이지요. 그래서 그 시점에 저는 이미 체이스의 대적자 작업이 오버파워가 되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미 올라간 오버파워를 끌어내리는 건 꽤 쉽지 않았습니다. 보통 성능이 좋은 캐릭터를 너프하면 욕을 먹듯이(...) 체이스의 빈틈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을 작성도 해보았지만 이미 게시한 글을 고치는 일까지 발생시킬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체이스가 후반부에 무너지는 것은 너무 허무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대단한 활약을 한 캐릭터에게는 그에 걸맞은 장렬한 최후가 있어야 하건만…이 부분은 저도 무척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에필로그를 통해서 그 점이 조금이라도 채워진다면 다행일 것 같습니다.


크로이츠펠트-야콥 병

아쉬운 점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아쉬운 점은 소재가 되는 병명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우병으로 유명했던 크로이츠펠트 - 야콥병 - Creutzfeldt-Jakob Disease(이하 CJD) - 은 ‘진단’보다는 ‘부검’이 위주인 질병입니다. 말 그대로 뇌에 구멍이 나서 제대로 된 사고를 못하는 것은 물론, 언어를 구사하지도 못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정신질환이나 치매로 오인하기 쉽지요. 게다가 그 원인도 3가지 종류나 됩니다. 의인성(iCJD), 산발성(sCJD), 그리고 유전성(gCJD/fCJD)이 그것이죠. 사실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을 무심코 고른 것 때문에 제가 알아봐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메디컬드라마로 팬픽을 쓰려는 자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고통이겠습니다만…다행히 유명한 병이라 대응 방안을 적어둔 자료들이 웹에 방대해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진단보다는 부검을 해야 하는 질병을 가져온 것은 저의 크나큰 실책이었습니다. 물론 덕분에 그 원인을 두고 체이스와 하우스가 대립할 수는 있었지만요.


"결과는요?" 애덤스가 다가와 물었다. 체이스는 대답없이 현미경에서 비켜났다. 애덤스는 이내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단순한 치매가 아니었네요."

"그래. 어차피 이 자료 자체는 보고하기도 글렀지만...이걸로 확실해졌군."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끼며 체이스가 대답했다.

"...하우스가 옳았어."


그리고 결과는 뻔했지요. 드라마 명대사 중 하나인 ‘하우스가 옳았어’(House was right)로 마무리가 됩니다. 하지만 이 병의 주요 쓰임새는 이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환자인 베벌리 씨의 사망 그 자체에 있었죠. 체이스도, 하우스도 윌슨과의 갈등으로 인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이 사건의 흐름을 한 번 전환시켜줄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필라델피아까지 가서 결판을 내려는 체이스를 얼어붙게 할 수 있을 갈등, 하우스가 원점으로 돌아올만큼 충격을 주는 갈등 말이죠. 진단학과를 분리시킬 신호탄이자 세 명이 서로에게서 한 번쯤 멀어지게 할 쇼크가 필요했죠. 그래서 늘 밉상으로 일관하는 포어맨이 기어코 필라델피아로 하우스를 추적해 그 소식을 전달해줍니다.


“베벌리 씨 말입니다.” 포어맨의 말에 하우스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체이스 또한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이내 불길한 예감이 그들을 휘감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포어맨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박사님의 담당 환자가 사망했습니다. 진단학과 인원들은 모두 이사진에 회부됐습니다. 송치되기 전에 박사님을 향한 청문회도 있을 예정입니다.” 하우스의 눈동자만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옆의 윌슨은 그보다도 더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포어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포어맨의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병원의 진단학과 과장 직급을 박탈합니다. 대리 권한은 닥터 로버트 체이스에게 일임합니다.”


사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Another는 1부와 2부로 나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부가 하우스의 복귀 이후 체이스의 갖은 노력과 윌슨과의 접점, 그리고 그런 윌슨을 무심하게 내치고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하우스로 이루어져 있다면 2부는 드디어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하우스가 윌슨을 찾아가지만 예상치 못하게 방치된 문제로 인해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하우스에게 다가가던 윌슨은 결국 이 상황으로 인해 체이스에게 다시금 기댈 수 밖에 없게 되고, 하우스는 드디어 겨우 자신의 마음을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수감(...)되는 바람에 뭘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두 사람의 일은 결국 다시 체이스와 포어맨의 손아귀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이렇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저 자신이 글을 쓰며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 있기 때문이었는데요,

바로 마침내 필요한 단 한가지를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이 글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답답함은 바로 ‘하우스와 윌슨 만남의 부재’에 있습니다. 어쩌면 둘 중 한 명이 좀 더 적극적이어서 아주 잠깐의 티타임만 가졌더라도 갈등은 손쉽게 마무리가 되었을 겁니다. 진단학과 분리에서부터 윌슨의 차가 도망간 일까지 모든 오해가 한 순간에 풀려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죠.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한들 윌슨이 바라는 관계라는 건 애초에 이뤄질 수 없었을 겁니다. 극 중에서 나오듯 다시금 윌슨이 하우스에게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하던 '친구 놀이'가 계속될 것이 뻔했으니까요. 체이스는 그런 친구 놀이를 마침내 끝낼 제 3자이기도 하며, 하우스로 하여금 윌슨의 부재를 절감하고 그 스스로의 감정을 한 단계 끌어올릴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하우스에게는 그야말로 '부재의 증명'이 필요했지요.


사실 가장 쓰고 싶었던 부분은 금욕적(...)인 청문회 속, 하우스와 윌슨이 서로를 관찰하며 불꽃이 튀기는 분위기였지만 결코 제가 생각한대로 흘러가진 않았습니다. 와중에 그토록 필라델피아까지 와준 하우스가 고마웠던 윌슨이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하우스에게 뭐라도 말할 수 있었지만 이걸 가로막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포어맨이었죠. 체이스가 제 할일을 제대로 못하자(...) 포어맨이 나서서 윌슨과 약조 아닌 약조를 걸어버립니다. 포어맨 입장에서는 또 다시 하우스든 윌슨이든 감정적으로 이상해져서 병원 주변의 분위기를 흐뜨러뜨리는 게 보기가 싫었던 거죠. 애초에 이사진에 올려둔 ‘진단학과 분리’나 ‘청문회’가 예상치 못한 구석으로 흘러가는 것도 바라지 않았을테고요.


하지만 늘 그렇듯 헛똑똑이 포어맨의 그 방법이라는 게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성공적인 계략을 꾸미는 쪽이 대부분 체이스였다면 사람을 자산으로 몰아가며 망할 게 뻔한 작전을 펼치는 쪽은 포어맨이었죠. 순전히 그의 실력만 보고 체이스를 차기 진단학과 과장으로 꼽긴 했지만 그 외의 부분을 은근 신뢰하지 못하는 것도 포어맨의 성미입니다. 사실상 윌슨이 결정적으로 체이스에게서 돌아설 단초를 제공한 것도 포어맨이었죠. 빠르게 발을 돌려서 커디를 추천한 사람이 누군지 불어버렸으니 말이죠. 그래서 후반에 2연빵(...)으로 펀치를 맞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을 보면 마치 개그물같죠.


사실 저로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갑갑했던 것들이 풀려나가고, 주인공 일행을 괴롭히던 사람이 힘들어지고(포어맨) 그간 계략과 심리전으로 두 사람 사이를 떼어둔 사람(체이스)이 무너지는 연출을 넣고 싶었습니다. 결국 초반부터 태그에 넣었던 것처럼 이 글은 하우스와 윌슨이 결국 맺어지는 이야기였으니까요. 하지만 저로서도 꽤나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우스와 맞붙는 대적자를 만드느라, 로버트 체이스를 너무 펌핑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죠. 그래서 체이스를 위한 에필로그를 쓰게 되는 건 필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법 멋진 악역에게는 그만큼 분량을 내어서라도 배웅을 해주는 것이 도리이겠지요.


셜록 홈즈 코드

House,M.D.(국내명 '닥터 하우스)는 셜록 홈즈 모티브를 가지고 제작된 드라마이지요. 작중에서 왓슨의 '관계적 역할'을 맡은 윌슨도 그러하고 왓슨의 '협력적 역할'을 맡은 삼둥이도 그러하지만 대놓고 드러낸 부분도 있지요. 왓슨과 비슷한 어감의 '윌슨'이라던가 하우스가 머무는 베이커가의 221B 라던가 허드슨 부인을 따다 만든 느낌의 '커디'라던가...Holmse를 Home으로 여겨서 따온 듯한 하우스라는 명칭도 그러하지요. 아서 코난 도일경의 스승이었던 조셉 벨의 서적이 나오거나 하는 등 셜록홈즈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즐기실만한 포인트가 여기저기 포진해있습니다.


그래서 더욱이 이야기의 부분 부분에서는 셜록 홈즈에서 따온 것들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리사 커디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대놓고 '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의 첫 부분을 따온 것이죠.


셜록 홈즈에게 그녀는 항상 '그 여자'였다. 그가 그녀를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의 눈에 그녀는 그 어떤 여성보다도 우월하고 빛났다.

- 2002년 황금가지판 '셜록 홈즈의 모험' - '보헤미아 왕국 스캔들' 중에서
그레고리 하우스에게 있어 그녀는 언제나 '그 여자'였다. 물론 그녀의 이름이며 직책, 가끔은 그녀를 향한 불만으로까지 그녀를 지칭하곤 했지만 하우스에게 있어 그녀는 늘 '그 여자'로 불렸다.

그래서 마지막은 특히나 마치 사건을 조사하러 가자고 왓슨을 깨우는 홈즈의 느낌으로 진행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홈즈에 비하면 영락없는 마이페이스에 고집불통인 하우스이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잠든 왓슨을 음식으로 홀려내(?) 깨운 다음 그가 잠든 틈을 타 자신이 세운 추리와 앞으로의 모험에 대해 늘어놓고 그의 반응을 기대하고는 영락없는 열렬한 반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셜록홈즈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거죠.


You may marry him, murder him, or do what you like with him
그를 결혼시키든, 죽이든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 윌리엄 질렛에게 아서 코난 도일이 보낸 서신 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자네에게 지금 눈 앞에 있는 일 말고 뭐가 더 중요한가?" 거의 중얼거리듯 하우스가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더 들떠계실 줄 알았는데요."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게."

윌리엄 질렛은 셜록 홈즈 역할을 1300번 이상 연기한 것으로 유명한 배우였고, 특히 그의 사냥용 모자는 그를 상징하는 아이템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그가 원작자인 도일 경에게 셜록홈즈를 결혼시켜도 되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를 결혼시키든, 죽이든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말이죠. 나름 엉성한 오마쥬로 윌슨의 차가운 태도에 멘탈이 붕괴한 하우스가 포어맨의 말에 하는 대답으로 갖다 사용하였습니다. 사실 보다보면 꽤 미묘한 대답이죠. 일일이 따지기에도 너무 화가 나서 저런 대답을 하는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하는건지...후자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군요.


기타 등등

선생님 - 박사님 - 닥터

"왓슨 박사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차를 타고 런던의 복잡한 거리를 달리는 동안 스탬포드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박사님은 꼬챙이처럼 마르고 도토리처럼 누렇게 뜨셨군요."

- 2002년 황금가지판 [주홍색 연구] 中에서


현재도 그러하지만 셜록홈즈 시리즈에서 왓슨에 대한 호칭은 종종 '박사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서 의사들을 부를 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의사들이 서로를 부를 때 '선생님'보다는 '박사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게 적절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버릇이 이번에 든 것이 아니라, 하우스 팬픽을 쓰기 시작한 시점부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오죽하면 드라마가 한창 나오던 시절에는 '하박'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애초에 제대로 사용하려면 '박사님'보다는 '선생님'이 더 걸맞았겠지요.


더군다나 미국 드라마 특성상(...) 서로를 부를 때 굳이 닥터를 붙여가며 말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듯 이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존대가 있는 정서상(...) 윌슨이 하우스를 높여 부르거나 혹은 체이스가 윌슨을 높여 부르는 등의 행위가 더 자연스럽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A와 B가 이야기할 때 C에 대한 호칭을 단순히 '박사님'이라고 부르거나 그 와중에 A가 B를 '박사님'으로 부르는 경우에는 상당히 혼란스럽거든요.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주어의 소중함을 말이죠.


'하박'을 생각하면 또 떠오르는 건 '하과장'일 겁니다. 작중에서도 하우스는 진단학과의 과장인데요, 사실 이 진단학과 라는 분야 자체가 생소합니다. 사실 닥터하우스(House,M.D.)의 원본은 버튼 루셰라는 의학기자가 집필한 '의학탐정'이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은 진단학자보다는 '역학 조사관'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말 그대로 역학적인 조사를 실시해서 질병을 진단하는 것이죠. 작중에서 하우스는 종종 '진단학자(Diagnostian)'로 거론되지만 때로는 '감염의학자'라고 거론되기도 합니다. 특정한 카테고리의 구분 없이 그런 호칭을 갖는 것 자체가 생소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실제 미국에서는 흔한 직업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욱 Another에서는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가 가진 흔치 않은 직종과 과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구성하려 노력했습니다. 그에 비해 윌슨의 직업은 상당히 분명하죠. 그는 Oncologist(암 전문의)입니다. 실제 작중에서는 윌슨의 직책이 암병동 과장이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 부분 또한 하우스와 윌슨의 관계가 어디까지나 연령상 차이로 인해 위계를 지닐 뿐 경력상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장치였지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사장과 병원장, 이사진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끼워넣어볼까 합니다.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에서 주로 언급되는 '우두머리' 이미지는 바로 병원장인데요. 사실 Another에서는 이 병원장과 이사진으로 권력 구도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병원에서는 병원장만 존재하는 경우도 있고 이사진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지만 적어도 포어맨이 혼자서 이 모든 권력을 남용하는 것 보다는 중심을 잡아줄 존재가 필요했고 그렇게 이사진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는 가상의 대형 병원이지만 왠지 극중 분위기를 보면 대학병원의 이미지가 강하므로 이사진이 따로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지요.


사이드의 사이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설정도 어느 정도 아쉬움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캐머론의 존재가 그러했습니다. 캐머론은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상황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듯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캐릭터 자체에 대한 매력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말을 더 많이 해대는 캐릭터가 되어버렸습니다. 때문에 후반에는 캐머론을 사용할 만한 좋은 상황을 만들기가 여의치 않았죠. 이미 10화에서 윌슨에게 조언을 해주고 이후 하우스에게 결정적인 말을 한 것만으로 그녀의 역할은 차고 넘쳤습니다. 조연이라고 하기에도 힘들 정도였죠. 반대로 제 역할을 잘 해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닥터 애덤스입니다. 애덤스는 실제 드라마에서 가장 후반에 투입된 캐릭터로 하우스를 만난 장소부터가 감옥병동이었죠. 보통 신규 시즌에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미국드라마 특성상 마주칠 수 밖에 없는 뉴페이스이긴 했습니다만 아름다운 외모, 강단있는 성격에 남부럽지 않은 재력까지…누가 봤다면 영락없는 어떤 작가의 메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한 캐릭터가 하우스를 따라 시즌 8의 관문을 열었지요. 닥터박이 채워주지 못하는 ‘미녀토큰’일지 모르지만 이 캐릭터 자체는 매우 쓸모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남은 하우스 진단팀의 1인이기도 하고 체이스와 비슷한 면모를 공유하면서 한 편으로는 하우스에게 관심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꽤 주요한 역할을 차지합니다. 바로 하우스가 윌슨을 밀어내고 절망 속에서 몸부림 칠 때에 기어코 베벌리 씨의 진단을 맡기기 위해서 그를 확인하러 가는 역할이었죠.


극에서 곧바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윌슨은 이미 하우스의 사고 소식을 듣고 애덤스에게 그의 방문을 요청합니다. 나중에 캐머론의 말을 통해 드러나지만 그건 윌슨이 은연중 갖고 있는 하우스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죠. 애초에 닥터 애덤스가 그런 열망을 이해할 리는 없겠지만…그녀의 그 성격을 생각하면 윌슨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리도 만무하겠죠.


그런 그녀의 성격은 체이스와 대립할 때에도 잘 드러납니다. 애초에 그녀는 올바르지 못한 걸 본인의 뜻대로라도 올곧게 만드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체이스가 벌이고 있다는 일종의 ‘계략’에 걸려들지 않으려하죠. 최대한 냉정하게 말하는 체이스에게 일부분 압도당하긴 하지만 그게 기어코 애덤스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체이스를 대적해왔기 때문에, 환자인 베벌리 씨를 가장 안타까워했던 것도 결국 그녀였죠. 그 마음이 결국 그녀로 하여금 베벌리 씨 부검을 진행하게 만들었고 거기서 보이는 체이스의 다른 모습에 감화되기 시작합니다. 싫어하던 상대의 다른 면모를 보고 생각을 바꿔나가는 장면은 확실히 흥미롭습니다. 애덤스와 반목하고 타웁과도 별다른 친목을 다지지 않은데다 닥터박과는 아예 척을 지다시피 한 체이스는 막상 진단학과 분리가 다가오자 자신없는 모습을 보이죠. 그러나 그런 그의 팀원이 되기로 결심한 건 의외로 애덤스였습니다. 뒤에서 계략을 꾸미는 것과 다르게 하우스를 보며 배워온 그의 실력과 하우스조차 가지지 못한 그의 수완에 애덤스는 그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나 이런 점들이 체이스에게 뭔가를 느끼게 하기도 전에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상 Another는 하우스와 윌슨의 이야기이니 이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풀어내는 공간이 없어 아쉬운 점들도 있습니다. 아마 애덤스는 윌슨과 따로 만나 하우스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테고 혹여나 윌슨이 남모르게 하우스의 집을 찾아간 것 또한 뒤에서 캐머론이 용기를 줘서일 수 있지요. 설레발이 될 게 뻔하지만 커디가 포어맨의 요청에 응해 그를 만나보고 다시 진단학과에 돌아올 일에 대해 이야기했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보다 더 원하시는 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체이스의 이야기이죠. 아마도 그가 필요로 했던 걸 완전히 충족해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극복해내고 마침내 프린스턴-플레인즈보로를 떠나가며 새출발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제법 늦은 시점이지만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서로의 일화 끝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을 맺고 나서도 저에게 이 첫 장편은 무척이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이 곳에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좋아해주셔서 적어나가는 저도 매우 행복하였습니다. 조금 더 편안하게 원하는 후일담 - 이후 하우스와 윌슨의 이야기, 혹은 체이스의 이야기 - 이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적어주셔도 좋습니다.


함께 해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은 다채로운 빛깔을 뿌리고 있었다. 아직 다 물러가지 못한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살들 중 일부는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의 정문에 자리한 몇 개의 벤치 중 하나에 걸쳐진 의사 가운과 그 위에 자리한 명찰을 섬세한 광채로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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