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공항 내부의 사무적인 공기가 금세 뉴저지 거리 특유의 향취로 탈바꿈했다. 있는대로 캐리어를 뒤에 묶은 채 하우스가 자리를 잡고, 그 뒤에 윌슨이 올라탔다. 놀랍게도 하우스 자신이 이죽대던 기억 속의 대화를 꺼내가며 윌슨이 바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해댔지만 바이크 시동을 걸고 나서 어물쩡대던 윌슨의 두 손을 하우스가 자신의 허리춤으로 가져가자 윌슨은 이내 말이 없어졌다. 특유의 곤란함을 삼키는 기침 소리가 하우스의 입가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제법 비싼 바이크에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하우스는 아랑곳 않고 뉴저지 거리를 내달렸다. 노을빛을 받아 불꽃처럼 빛나는 파이어 블레이드가 공항 주변 도로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사라져가고 있었다.
베이커가 221B에 들어서며 하우스는 내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실 부인은 기어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윌슨을 보자 화색이 되었다. 바이크에 묶어둔 캐리어를 풀다 말고 윌슨은 세실 부인의 포옹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우스가 없는 사이에 무슨 작당이라도 한듯 지나칠 정도로 정겨워 보이는 모습에 하우스는 윌슨의 손에서 그대로 캐리어를 끌어내고는 윌슨을 가로채 자신의 집 현관으로 들이닥쳤다. 세실 부인이 뭔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하우스는 대답조차 없이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80.
널부러진 갈색 구두와 회색 나이키 운동화가 마치 교차하는 경주라도 하듯 카펫 위에 제멋대로 널부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마치 신발을 묶듯이 길게 늘어선 넥타이가 놓여 있었고 바로 옆에는 제멋대로 구겨져 접힌 갈색 스트라이프 셔츠가 놓여 있었다. 다소 바랜 청바지는 그 옆에서 마치 허물처럼 벗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윌슨이 잠을 깬 것은 순전히 어떤 냄새 때문이었다. 그 자신의 코튼 향과 하우스의 스킨 향, 그리고 두 사람의 땀내음이 엉킨 미묘한 향기가 어제의 끈적한 행위를 되새겼지만 윌슨을 깨운 냄새는 고소한 커피 향과 버터 향기였다. 여전히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윌슨의 옆으로 하우스가 다가왔다. 트렁크에 반팔 차림이었지만 전에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다. 지팡이를 짚은 채 간단히 아침을 만들어온 하우스가 서서히 일어나는 윌슨의 옆으로 다가와 앉아 그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하우스가 준비해온 아침이라는 것 자체가 - 아니, 애초에 하우스가 자신을 위해 어떤 음식을 해온 것 자체가 생소해서 윌슨은 잠시 그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가?"
"아뇨, 그게 아니라..." 윌슨은 말을 하다 말고 하우스를 안고 입맞추었다. 어느덧 둘 사이에 생겨난 새로운 감사법이었다. "잘 먹을게요, 그렉."
하우스의 볼에 난 자잘한 수염에 볼을 비비고는 윌슨은 그대로 커피를 한 잔 들기 시작했다. 하우스는 그런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먹고 나면 우리 뭔가 거취를 정해야 할 것 같네, 제임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토스트를 한 입 깨물며 윌슨이 물었다.
"지난 밤에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에서 온 연락만 50통이 넘더군. 나 뿐만 아니라 자네도." 윌슨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지만 도리어 하우스를 미소짓게 만든 건 윌슨의 뺨에 묻어나는 토스트 가루였다. 하우스는 본능적으로 웃으며 윌슨의 뺨에 묻어있던 빵가루를 닦아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그러고보니 지금 몇 시에요? 출근까지는 아니더라도 박사님은 - ." 윌슨이 잠시 허둥대자 하우스는 윌슨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곤 말했다. 완전히 잊어버린 자신에게 놀랄 지경이었다. "자네가 그만두었다고 하지 않았나. 나도 어제 그만둔 참이라네." 그렉이라는 애칭을 놓친 걸 갖고 트집이라도 잡을 수 있었지만 당장에 윌슨을 진정시키는 게 중요했다. 윌슨은 순간 숙연해져서는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워서 하우스는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조금이라도 진정하기 위해 그는 고개를 숙였다. 윌슨이 잠든 사이 옆에서 그를 안고 스스로 생각한 작전을 펼쳐낼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그만두었다간 골치아픈 게 따라오겠지. 가석방 심사 말이야." 하우스의 말에 윌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걱정되는 것은 바로 그 건이었다. 포어맨이 완전히 하우스를 놓쳐버릴 수 없는 것. 하우스가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법에 달려 있었다. "가석방 제한 구역을 벗어난 건 아니지만 업무 규약을 지키지 않고 그만둬버린 상태니 언제든 연방 보안관이 쳐들어오는 것도 놀라운 건 아니지."
"...제가 가서 이야기해볼게요." 윌슨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해왔다. 바뀐 관계 속에서도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청문회에서 그를 열심히 변호하던 모습으로 돌아와 윌슨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결연함이 멋지고 감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랑스러워서, 하우스는 최대한 귀여워해주려는 걸 참고 윌슨을 바라봐주었다.
"자네 참 사랑스럽군, 제임스." 말로 터져나오듯 말하곤 하우스는 윌슨을 그대로 끌어당겨 짧게 입맞춤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내게도 패가 없는 건 아니라네. 당장에 진단학과 담당의가 없을 지경이니까."
"그게..." 윌슨은 하우스의 말에 여전히 얼굴이 붉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끈적한 행위는 있는대로 해두고선 하우스가 직접적으로 그에게 '사랑스럽다'고 하니 생경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닥터 체이스는 제대로 업무를 진행하기 어려울걸세. 진단학과야 팀이건 동아리건 상관없어. 애덤스나 타웁, 닥터박까지도 제자리에서 뛰는 걸 못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라서 말이지." 하우스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이죽였다. 그가 허리를 쓰다듬으며 잡아당기는 바람에 윌슨은 더 어떤 말을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가석방 제한은 담당 감시자가 있어야 하네. 이전 경우에는 에릭 포어맨이었지. 말하자면 담당 감시자 반경으로 가석방 제한 구역이 만들어진다고나 할까. 마치 '죽음의 기사들'처럼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나, 제임스?" 마치 열렬한 제자에게 질문을 던져 떠보듯 하는 말이었지만 하우스의 시선은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는 눈빛이었다. 윌슨은 얼떨떨한 마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우스는 이내 윌슨의 이마에 입맞추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좀 더 식사를 서두르게, 제임스. 몬트리올 맥길 대학에서 주최하는 감염의학 컨퍼런스에 가려면 시간이 촉박하거든. 물론 자네가 안아달라면 그깟 컨퍼런스 쯤 물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럼..." 윌슨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았다. 전처럼 제멋대로에 되는대로 살고 망가질대로 망가지는 게 아니라 마치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듯이 하우스가 기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환자의 질병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무심한 듯 매끄럽게 다듬는 모습은 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하우스의 면모였다. 하우스는 이내 윌슨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벽장에서 옷을 가져다 걸치기 시작했다.
"...자네와 나, 둘 다 복직이네." 하우스는 옷을 걸치다 말고 자신의 서랍장에서 곱게 포개둔 옷가지를 꺼내 윌슨의 앞에 두었다. 어느새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윌슨의 집에 놓여있던, 새로 세탁한 윌슨의 옷들이었다. 두 사람이 기억하는 언제나의 그 옷들. "이제부터 자네가 내 '가석방 담당 감시자'네. 어제부로 포어맨과 합의해서 캐나다 몬트리올 맥길 대학에서 주최하는 감염의학 컨퍼런스에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지. 장장 7일이나 말이야." 자신의 옷가지에 놀랄 틈도 없이 하우스가 무심코 던지는 말을 바라보며 윌슨의 눈이 빛났다. 윌슨의 반응을 즐기며 하우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늘 궁금했는데 말이야, 자네 동창회라는 거...어때, 이참에 한 번 소개시켜주지 않겠나?"
"그렉...!"
윌슨은 기쁨에 겨워 옷을 입다 말고 하우스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하우스는 이내 그의 기쁨에 화답하며 웃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 그의 엉덩이를 한껏 움켜쥐었다. 벅찬 기쁨이 끈적한 교성으로 변하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며 하우스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옷가지는 많이 준비하지 말게, 제임스. 어차피 밤은 길테니까 말이야."
- [Another]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