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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23화

Another - 23

by 김뇨롱

71.


그레고리 하우스에게 있어 그녀는 언제나 '그 여자'였다. 물론 그녀의 이름이며 직책, 가끔은 그녀를 향한 불만으로까지 그녀를 지칭하곤 했지만 하우스에게 있어 그녀는 늘 '그 여자'로 불렸다.


그래서 그가 '의학 공부를 할 시간에 랩댄스를 췄을 것만 같은 여자'라고 커디를 지칭할 때에도 윌슨은 잠자코 있었다. 아니, 사실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하우스가 윌슨의 앞에서 꺼내놓는 여자 이름이라야 너무나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리사 커디도 그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흔히들 무리에서 곧잘 시선을 끄는, 매력적이고 능력이 있는 여성 말이다. 맥주를 들이키는 하우스 너머로 윌슨은 자신의 잔을 들어보였다. 그 때만큼은 같이 시시덕대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자리에 몸을 구겨넣어가며 윌슨은 비소했다. 취기에 비틀려서 헤어나온 모습은 그저 뒤늦은 숙취와 구겨진 넥타이, 그리고 주인을 잃은 텅 빈 시선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윌슨을 당황하게 만든 건 하우스가 아니라 커디 쪽이었다. 별볼일 없이 냉담하기만 한 병원장, 외래진료에 열을 올리는 상사로서의 그녀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존재는 늘 하우스의 의식을 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병원 직원들의 자잘한 불평이야 그렇다 쳐도 '연쇄 퇴사 사태를 막을 이사진 최후의 수단'으로서 그녀는 분명히 행동할 용의가 있었고 그 용의란 하우스가 아닌 윌슨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접근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벤더 향을 풍기며 저녁 식사를 제안하던 그녀가 결국 식사 자리에서는 줄기차게 하우스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을 바라보며 윌슨은 망연자실했다. 물론, 그녀가 갖는 그 '관심'이란 하우스를 다루기 위해 그에게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슷한 연배에 한 두번 즈음 사랑의 아픈 상처가 딱지앉은 중년의 여성이라는 것 따위, 윌슨에게 그토록 신경쓰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 즈음 그는 커디가 하우스와 부딪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말들, 빈정거림, 짜증과 비소가 잔뜩 섞인 공간이었지만 윌슨은 그들의 눈빛 속에서 서로를 향해 일렁이는 불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습게도 그 이후부터는 탁자 아래 붙여둔 시한폭탄마냥 두 사람의 사이가 이어졌다. 요추천자 허가에서부터 바이코딘 처방, 밀린 외래진료에 대한 시비까지 자잘하고 덧없는 다툼은 그야말로 그 둘 사이의 긴장감을 높여주는 수단이라도 되었다. 반대로 그러한 다툼이야말로 다정한 말 한마디나 아침인사, 잠깐의 티타임 혹은 약간의 격식을 차린 저녁식사 제안 등을 사사건건 가로막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윌슨은 늘 마음 한 켠에 두 사람의 연애담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를 해두어야 했다. 알게 모르게 하우스와 커디 둘 다 윌슨에게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해대기 바빴고, 자신의 마음을 누르고 죽여가며 그들을 받아주던 윌슨은 마치 그것이 자기가 짊어져야 할 숙명인 것 마냥 허탈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무서운 일이다. 단지 외적으로 '호기심'을 이끌 대상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리사 커디는 더 이상 그런 존재가 아니라 - 그런 영역은 가볍게 뛰어넘어 - 하우스와의 개별적인 '사연'을 지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전처인 스테이시 이후로 이런 대상은 처음이었고 언제라도 하우스가 심각한 표정이 되거나 애상적인 표현을 하거나 특히 다정해지기라도 하는 날엔 윌슨은 자신의 억누른 마음을 더욱 더 눌러대거나 찢은 마음을 더 가늘게 찢어대기 바빴다. '호감이 있는 여성에 대해 탐구하는 대화'와 '호감이 있는 여성과 마침내 시작한 연애에 대한 대화'는 너무나 달랐으니까.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런 윌슨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사람은 좀처럼 이어지질 않았다. 또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짓누른 윌슨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려 애를 쓸 때에도, 기어코 그렇게 만난 엠버를 떠나보내고 난 뒤 허망감과 절망을 담아 하우스를 노려보았을 때에도, 몇몇 알던 사람들이 병원을 떠나가고 영원처럼 윌슨 그 자신과 하우스가 남았을 때 마저도...시간은 사람을 제법 게으르게 만든다. 제임스 윌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관심을 두고 있는 미모의 병원장에 대한 추잡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의 자리에 만족하며 으레 하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하우스가 자신을 찾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비수처럼 꽂히는 그녀에 대한 묘사나 감정 표현마저도 가루가 될만큼 익숙해질 무렵, 늘 그렇게 늘어대던 '추잡한 이야기'에 항상 하던대로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습관처럼 던져댄 말이 돌아오질 않았다. 멍한 얼굴로 하우스의 응답을 기다리던 윌슨은 이내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일은 그토록 그가 마음을 놓고 가만 두었을 때 교묘하게 다가와 그를 찔러댔다. 바이코딘의 부가적인 증상, 부작용이나 어쩌면 금단증상 혹은 합병증이라도 되었어야 할 그 '망상'은 망상이 아니었고 커디 또한 어느덧 하우스에게 진심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시점, 누구보다도 두 사람의 사이를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도 두 사람 사이를 축하해야 할 입장에 놓인 윌슨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견딜 수 없어 도망쳤었다. '그거 참 잘 된 일이에요.' 병원에서, 심지어는 옆집 세실 부인까지 거들듯 그렇게 말했지만 늦은 밤 포앤포의 행오버 세트를 사들고 온 윌슨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는 그날부로 자신의 마음을 다시 찢어대고, 헤집어대고 망가뜨리고 눌러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호전된 상태의 하우스였다. 그는 마치 전처를 떠나보내기 전처럼 명석하고, 영리하며 침착하기까지 했다. '뒤틀린 단짝친구가 뒤늦게 제대로 된 사랑을 찾으니 샘이 나서 그런 거죠?' 수간호사 중 한 명이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에 윌슨은 제대로 된 답을 하질 못했다. 차트로 얼굴을 가리고 난처한 듯 땀을 닦아대며 그 스스로도 눌러대듯 속삭였다.


'차라리 그런 옹졸한 생각이라면 좋을텐데.'


늘 그를 찾아와 난처한 말을 늘어놓던 체이스와 모퉁이 술집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즈음, 우습게도 일이 이상한 쪽으로 뒤집혔다. 커디가 독단적인 행동을 저질렀고 하우스가 그 일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일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들 연배라면...말 그대로 한 두번 즈음 사랑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는 중년의 여성이라면 할 수 있는 행동이었으니까. '엄마'가 되려는 여자를 막을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윌슨은 커디가 그런 계획을 세우는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문제는 하우스였다. 그는 동년배의 중년 남성들과는 확연히 달랐고 커디가 그런 그에게 지쳐서 이별을 고했을 때 그가 저지른 행동은 중년의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 차를 몰다 사고라도 낸 10대 소년마냥 그는 있는대로 커디의 집에 돌진했다. 커디와 아기는 무사했지만 오히려 다친 쪽은 윌슨이었다. 손목이 골절되어 고통에 얼굴을 찡그린 윌슨을 향해서 하우스는 일절의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그의 눈에 이글거리는 건 오직 어리석은 애정과 비틀린 분노 뿐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길로 오랜 시간 그를 볼 수 없었지만 윌슨은 갑작스레 병원장직을 사임한 커디보다 비참한 표정으로 자취를 감춘 하우스가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빌어먹을 이 길고 긴 사연이 있은 후에도 다시 둘만이 남았다. 이 둘만이 여전히 병원의 공기를 숨쉬고 있다.


단지 그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낮부끄러운 감사를 느끼는 자신이, 윌슨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폐에 대한 문제를 빌미로 오랜만에 보게 된 하우스의 모습은 너무나 수척해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선뜻 물어온 것은 바로 커디에 관한 것이었다. 커디에 대한 일이라면 진작에 포어맨이 전달했을 게 뻔할텐데도. 하우스의 눈에는 윌슨이 마치 연인간의 비밀 이야기를 전해주는 비둘기처럼 보이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윌슨은 침묵했다. 전처럼 그런 모습으로 하우스의 곁에 남아있는 것이 그 당시에는 무척 어려운 것처럼 느껴졌었다. 물론 그건 결국 시간문제였다. 애초에 자신의 자리였던 곳에 주인이 찾아오니 방 자체가 그를 맞이하는 것처럼, 윌슨은 다시 손쉽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몬스터 트럭, 싸구려 패션 잡지 속의 포르노 배우나 직업여성, 모터사이클 등 다시 자질구레하고 멍청한 취미 속으로 하우스는 윌슨을 끌고 갔다. 그는 흔쾌히 그 타락에 응했다. 늦은 밤, 제멋대로 부른 콜걸과 제대로 정돈되지도 않은 집안, 늘 지기만 하는 야구 경기를 보는 일...무엇이라도 좋았다. 적어도 그 안에서 윌슨은 하우스와 함께였으니까. 시간은 무섭게도 이런 것들을 재현시킨다. 커디가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모든 것들을 그 이전의 것으로 완전히 돌려놓는다. 하우스의 너머로 맥주잔을 들어보이며, 윌슨은 다시금 자리잡은 그 좁은 공간에서 안도감을 느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윌슨, 괜찮아요?" 커디의 푸른 눈빛이 그를 향하자 윌슨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미 썰린 고기가 그의 접시 옆에 나뒹굴고 있다. 윌슨은 자신의 손짓을 멈추고 멋쩍게 웃어보였다.


"아, 괜찮아요. 최근에 맡은 환자가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괜찮은 거 맞아요?" 걱정하는 듯 커디가 재차 물었다. 고개 방향은 윌슨을 향해 있지만 눈빛은 은연중에 옆에 자리한 하우스를 향하고 있다는 게 언뜻 보였다. "...레이첼은 좀 어때요?" 윌슨은 화제를 돌리고자 질문을 던졌다. 커디의 얼굴은 금새 화색이 돌았다.


"역시 이런 걸 물어봐주는 건 윌슨 박사님밖엔 없다니까." 커디가 웃어보였다. "믿어져요? 벌써 유치원에 다녀요. 또래들보다 말을 배우는 게 좀 느리지만...걱정되어서 소아과에도 데려가보았는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래요. 요즘은 웬 '토비'라는 강아지에 푹 빠져서 그 책만 읽어달라고 밤마다 조르는 거 있죠."


행복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음성을 들으며 윌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참을만 했어도 하우스가 은연중에 커디를 마주보는 것이 점점 더 참을 수 없어졌다. 제대로 말하자면 하우스의 태도가 아니라 얼마 전까지 그 자신이 하우스에게 고백하려 생각했던 자신의 그 '마음'이 계속해서 윌슨을 찔러대고 있었다. 어떤 정신으로 이렇게 세 사람이 식사를 하기 위해 인근 레스토랑에 온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윌슨은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해댔던 멍청한 말들, 이야기, 속삭임...더 나아가 다정했던 순간들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하자 윌슨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하우스의 두 눈이 윌슨에게로 향했다. 차라리 전처럼 무관심하게 대해주기라도 하면 그나마 나았을텐데...마주볼 것 같아 윌슨은 안간힘을 다해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런 윌슨을 바라보며 커디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윌슨,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급한 일이라도 생각났어요?"


혼란스럽게 눈동자를 굴렸지만 지금의 커디에게 그런 모습 같은 건 힌트조차 되지 않을 게 뻔했다. 당장 이런 상황을 바라는 건 윌슨보다도 커디 자신일테니까. "...급한 용무가 생각나서 아무래도 병원으로 가봐야할 것 같아요. 다음에 더 하도록 해요." 유난히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 촉감, 옷깃까지 윌슨을 고통스럽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대꾸가 없는 커디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윌슨은 다시금 고개를 떨궜다. 그녀가 어떤 감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뻔했다. 하우스의 멍청한 친구 시절이었을 적에도 이 시점에 윌슨은 알아서 발을 뺐을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고통스러운 건 조금 다르다. '사랑'이라는 분명한 말은 없었지만 얼마 전까지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 남자가 보란듯이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자리를 나서려는 순간, 윌슨은 흠칫했다.


테이블 아래에서 하우스가 윌슨의 손을 잡았다. 그 감촉때문에 윌슨은 결국 하우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하우스보다 그의 옆에 자리하고 있는 지팡이가 눈에 띄었다. 멍청하게도 그 지팡이가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울컥, 감정이 밀려오며 윌슨의 얼굴을 상기시켰다. 하우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무엇이라도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상황 속에서 윌슨은 더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커디가 등장한 것 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상처받았으니까. 반복되는 희망과 상처, 고통과 절망 속에서 윌슨은 급기야 모든 걸 놓고싶어졌다. 하우스도, 커디도, 그리고 그런 그를 지독히 사랑하는 체이스까지도. 기존의 패턴이 깨지고 나면 결국 새로운 패턴이 생길 뿐,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증오가 그의 마음에서 새로이 솟아올랐다. 도망치고, 침묵하고 우울해하고 자신을 죽이고 가루로 만들면서 스스로를 눌러왔던 그는 조금 다른 방법을 쓰고 싶어졌다.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으면서 결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망가지는 일 말이다. 하우스에 대해 남은 감정만큼, 지금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이 부드럽고 따듯한만큼, 그동안 그를 기대해왔던만큼, 마지막을 장식하지 못하는 아쉬움만큼, 기어코 이렇게 옹졸한 이별을 해대는 자신에 대한 실망만큼 윌슨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윌슨-"


윌슨은 그대로 하우스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낸 다음 홀연히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윌슨을 걱정하던 커디가 다음 메뉴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자 하우스는 그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윌슨이 앉아있던 자리에 이따금씩 시선을 던졌다. 순간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 눈가에 어린 물기가 떠올랐다. 메뉴판을 만지작거리고 커디가 그토록 가까이 붙어서 라벤더 향기를 풍기는데도 그 이후로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던 건 아까 전 반사적으로 윌슨의 왼손을 잡았으나 뿌리쳐진 자신의 오른손에 그대로 남은 윌슨의 온기였다.




72.


"무슨 일이십니까." 반가운 척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포어맨은 그게 쉽지 않았다. 그는 최근 윌슨이 기어코 하우스와 접촉한 걸 알고 있었다. 하우스의 복귀를 걸고 이야기했던 일종의 '약속'이 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에 포어맨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둬야할 것 같았다. 물론 암병동에서 윌슨을 배제하기보다 그에게 지난 번의 대화를 상기시키는 정도로도 충분할 거라 여겼다. 윌슨에게 하우스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리사 커디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어서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포어맨은 짐짓 뒤로 빼는 말을 했다. 윌슨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야 뻔했지만 당장에 그런 걸 말해줬다가는 일이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병동에서 정신없는 일이 생기는 건 포어맨으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녀를 채용하려던 건 누구 생각이었던거지?"


"특정한 한 명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포어맨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보시다시피 리사 커디 원장님의 재직 전까지만 해도 연쇄적으로 이사진쪽에 퇴사자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태를 해결해주신 분이면서 동시에 현재 인사이동이 많은 진단학과를 케어해줄 수 있는 인재로 적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진에서 논의를 진행했단 말인가?"


"최근에 일들이 많아서 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 모두가 동의한 사안이긴 합니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지만 적절히 얼버무리며 포어맨이 말하였다. 자신의 대답에 만족하던 그와는 반대로 윌슨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제서야 윌슨의 눈가가 부어있다는 걸 깨달은 포어맨이 대뜸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포어맨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윌슨은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침착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인사팀에 제대로 물어봐야 알겠지만 지난 13년 간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에 재직하며 쌓인 연차가 약 20일이더군. 20일은 그대로 내일부터 계산해서 26일에 퇴사하는 것으로 처리하려고 하는데."


"...예?" 잠자코 듣고 있던 포어맨이 놀라 반문했다. 윌슨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지난 번 하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수치스러워하는 얼굴이라던가 무너지는 표정이 아닌 그저 담담하고 텅 비어서 뭐라도 끄집어낼 수 없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포어맨은 극심한 낭패감을 느꼈다. "그게 무슨..."


"...내가 맡고 있는 환자들에 대해서는 진료서를 모두 갱신했고 관련해서 팀원들에게 적절히 분배했어. 주요 보고자인 닥터 말론에게 물어보면 무리없이 진행 가능할거야."


"그게 아니라, 대체 무슨 이유입니까?"


"...자네가 그걸 묻는다고." 이번에는 윌슨이 반문했다. 생각보다 날카로운 반응에 포어맨은 입을 다물었다. "...자네와 했던 약속은 유효하다고 생각해. '더 이상 하우스 박사님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내가 이 병동을 나서면 더 견고해질 것 같지 않나?"


"제가 부탁드린 건 박사님이 이 병원을 그만두는 게 아니었습니다." 포어맨은 억울하다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런 '약속'도 모두가 함께 이 곳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걸게 된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박사님도, 하우스 박사님도 저에게는 모두 소중한 분들입니다."


"소중한 '자원'이겠지, 에릭 포어맨." 윌슨이 대답했다. "자네가 말했던 그 '사적인 감정'때문에 결국 모두 그르치는 것 뿐이야. 나는 그걸 감당해낼 수 있는 인재가 아니었던 거고." 포어맨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윌슨은 이내 자리를 나서기 시작했다.


"커디를 추천한 사람을 말씀드리면, 재고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치 거래를 트려는 사업가처럼 포어맨이 뒤에서 말해왔다. 계산은 간단했다. 진단학과를 이끌 사람은 둘이나 되지만 암병동 과장을 이끌 사람은 하나 뿐이니까. 하우스나 체이스 둘 중 하나를 잃는 것보다 윌슨을 잃는 것이 더욱 막대한 손실이었다. 당장에 다음 주 진료로 잡혀있는 암병동 환자 리스트를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포어맨은 그들의 통원을 지속시켜야했다.


"...결국 아까 전의 말도 거짓이었군." 윌슨은 허탈한 듯 웃어보였다. 포어맨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 점이 윌슨을 더욱 어처구니 없게 만들었다. 꽤 오래 전 과거, 하우스의 똘마니 중 하나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마치 모든 게 비틀어져버린 것만 같다.


포어맨은 자리에서 일어나 윌슨을 응시했다. 쓸데없이 결연한 얼굴, 다짐한 눈초리는 미동도 없었지만 그는 분명 입을 열어 발음하고 있었다.


"닥터 로버트 체이스였습니다."


윌슨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허탈감에 짓고 있던 웃음마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체이스가?"


말하고 난 뒤 후회라도 하듯 포어맨은 침통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커디를 채용하자는 건 순전히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진 모두가 -"


윌슨의 펀치가 날아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한 방 먹은 포어맨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기절할 것 같은 충격이었지만 기절하지는 않았다. 코의 통증과 틀어막은 손의 촉감으로 미루어보건대 코뼈가 골절된 것 같았다. 그가 고통에 고개를 숙이고 진정하려 애를 쓰는데도 윌슨은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고소하려면 알아서 하게. 나는 오늘부로 그만 두니까." 한 번의 주먹질로 모든 이야기를 마친 윌슨은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73.


"...웬일이에요?"


체이스가 반색했다.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윌슨이 그의 집에 왔다. 하우스의 집 앞에서 그에게 내쳐진 뒤로 두 번째였다. 자연스레 체이스는 그 날이 떠올랐다. 의외의 일이었지만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윌슨이 자신을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우스만큼이나 리사 커디의 존재도 윌슨을 흔드는 데에는 충분한 요소였다. 반쯤은 그가 고통스러울 걸 예상한 행동이기도 했다. 대놓고 자신의 분노를 내비치는 대신 체이스는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해야만 다시 혼자가 된 윌슨이 기댈 구석으로 자신을 찾아올 수 있을테니까. 그게 중요하고 주요했다. 하우스와 윌슨의 관계따위, 시간과 장소라도 부족하게 만들어버리면 조금이라도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도 생길테니까. 리사 커디는 적절한 미끼였다. 고통스러운 최후를 선사한 전 연인의 재등장이라니 누가 보면 코미디라고 비웃겠지만 이보다 더 괜찮은 전략은 없었다. 오래 전, '연쇄 퇴사 사태를 막을 최후의 수단'으로 제대로 역할을 해온 것부터 어느 정도 하우스를 리딩하는 능력까지 더하면 포어맨이 아닌 그 어떤 병원장이라도 납득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물론 이는 체이스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한 가지, 그녀의 존재가 체이스에게 윌슨을 되돌려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쯤 침대에서 뒹굴든 바에서 한 잔 기울이든 상관 없었다. 라스베가스로 가서 덜컥 결혼을 해버리면 더 좋을테고. 하지만 체이스는 그보다 윌슨의 슬픔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가 겪는 고통이란 늘 체이스에게 슬픔으로 여과되어 다가왔다.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파둔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상에게 갖는 애상적인 감상이라. 체이스는 그 스스로도 제정신은 아니라며 속으로 잠시 조소했다.


"...닥터 체이스."


'로버트'까지 바란 건 아니었지만 심하게 격식을 차린듯한 그 말에 체이스는 잠시 굳었다. 평소처럼 넘어지거나 울거나 쓰러지거나 망가지는 모습이 아닌 처음 보는 건조한 모습에 체이스는 그대로 당황했다. 불길한 예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런 것들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윌슨은 현관에서 조금도 실내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입술을 옴짝달싹한 건 체이스였지만 말을 꺼내온 쪽은 다시 윌슨이었다.


"...알고 있어."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알고 있다는 것인지 몰라 체이스는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더 따져 물으면 오히려 인정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척 발을 빼는 것도 쉽지 않았다. 리사 커디를 데려오기로 한 게 자신이었다는 사실? 하우스가 필라델피아까지 쫓아올만큼 멀리 윌슨을 데리고 암연구학회 출장을 긴급요청한 게 자신이라는 사실? 애초에 하우스가 윌슨을 찾아온 날, 둘이 만나는 걸 가로막기 위해 핸들을 돌려버렸다는 게 자신이었다는 사실? 하우스는 사실 진단학과 분리 같은 건 말도 꺼내지 않았을뿐더러 애초에 자신이 10분이라도 더 윌슨과 함께 바에서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급조해낸 이야기라는 사실?...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지만 이번에는 그에게 대답을 가다듬을 충분한 시간조차 없었다. 윌슨은 더 이상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진짜였구나." 윌슨이 체이스를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하우스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유사한 고통이 그를 강타했다. 물론, 그는 늘 윌슨이 자신에게 실망할 수 있다는 것을 새기고 있었다. 장막을 세우고 거짓말이 늘어갈수록 감당할 수 없어질만큼 높아졌을 뿐이다. 가지고 있는 모든 마음의 재료를 쌓아올리는 데에만 쓴 탓에 아무런 재료도 없이 추락할 수 밖에는 없었다.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체이스가 윌슨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는 자신이 울고 있는 것도 몰랐다.


"...박사님..." 겨우 빼낸 음성은 기껏해야 윌슨을 불러세우는 것 밖에 없었지만 그 다음 윌슨이 꺼낸 말은 더욱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체이스는 용기를 내어 윌슨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지 말고 들어와서..."


"전에 알고 싶다고 했었지.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지." 윌슨은 체이스를 바라보면서도 마치 먼 곳을 바라보듯 멍한 얼굴이었다. 눈물을 흘리기보다 이미 흘릴 눈물이 없이 텅 빈 표정으로 윌슨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게 속삭이듯 했는데도 어째서 여전히 체이스에게는 오롯이 들려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울먹인 쪽은 체이스였다. "당신을 사랑하니까...당신이 무너지면 받아주고, 혼자가 되면 안아주고 날더러 혼자가 되라 해도 혼자가 되었어요."


"...그럼에도 나는 자네를 사랑해주지 못했잖아."


윌슨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속으로 생각해온 것들이 기정사실이 되는 것 같아서, 그와 함께 보낸 밤이 모두 거짓말이 되는 것만 같아서 체이스는 그걸 붙잡기 위해 윌슨을 붙잡았다. 잡은 윌슨의 두 팔을 쓰다듬듯 헤더듬으며 체이스는 눈물을 삼키고 말했다.


"...차라리 저를 때리세요. 뺨을 때리거나, 주먹으로 치거나...지금 이러시는 게, 저는 더 고통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윌슨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순간 스며있는 다정함, 부끄러움, 다양한 감정을 넘어 이제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자그마한 친절마저 사라진 그 음성은 실시간으로 체이스의 마음을 메마르게 만들었다.


"...그러면 자네를 용서할 것 같아서."


체이스의 두 눈이 커졌다. 윌슨을 눈에 담기 시작한 순간부터, 윌슨과 함께 하고싶어진 그 순간부터 체이스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하우스와 비교해왔다. 하우스는 몇 번이나, 적어도 몇천번이나 윌슨에게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 아니, 용서를 받기는 커녕 윌슨은 있는대로 하우스를 그저 받아주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자신은 이것 하나, 그를 사랑하기 위해 벌였던 이런 저런 일들 중 무엇 하나도 용서받을 수 없었다. 망가질대면 망가질대로 - 체이스는 커디를 언급하기 이전 질주하던 생각의 단편을 곱씹었다. 망가질대로 - 그는 윌슨을 붙잡고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비쳤다. 그것은 다정하고 건실하고 인내하는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 억울하고 서럽고 음울한 외사랑의 표현이었다.


"왜 저는 다른 거죠? 왜 저는 박사님에게 있는대로 인정 받을 수 없는 거죠? 이렇게까지 망가져가면서 박사님에게 모든 걸 바쳤는데...왜 저는...!"


"자네는 자네가 '사랑'하는 것에만 집중했잖아. 그것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윌슨은 조곤조곤히 말했지만 마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체이스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멈칫하던 윌슨은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날카롭고 텅 빈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돌며 두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네는 '하우스'가 아니잖아."


그는 한 번도 그 자신이 자신이라는 것을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그는 스스로를 남과 비교할 때가 있더라도 대부분의 순간에 그 자신을 좋아했다. 하지만 윌슨을 떠올릴 때에는 달랐다. 윌슨의 옆에는 늘 하우스가 있었고 그가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채우려 애쓰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체이스는 늘 마음 한 구석에 하우스를 기준으로 자신이 얼마나 그에 근접한지를 비교하곤 했었다. 멍청한 일이다. 자신 스스로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 어째서 여기까지 오도록 한 번이라도 '실패'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걸까. 리사 커디의 채용에서, 하우스의 청문회에서, 필라델피아의 호텔방에서, 윌슨의 집 앞에서, 모퉁이 술집 안에서, 급기야 첫 면접에서마저도...자신의 진심이 거짓이었던 적은 없었다. 단지 '이뤄질 수 없었을'뿐이지. 최선을 다 한 일에 대해서 '실패'하는 일은 패배라고 칭하지 않는다. 여러 번 시도할 수는 있지만 임계점을 넘어가면 그 일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단순한 계산이다. 애초에 될 수 없는 것을 여러 번 되도록 시도해서 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을 제외한 모두는 그런 상황 속의 자신을 '인정'했을 것이다. 단지 스스로가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머리로는 바로 계산이 되지만 더 이상 체이스의 몸이 체이스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는 서서히 윌슨을 응시하던 두 눈을 내려뜨려 아래로 굽혀버렸다. 그의 몸도 서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껏 여러 시간 동안 그가 쓰다듬었던 윌슨의 몸에 그의 손이 아래로 흐드러지듯 스쳐가며 결국 바닥에 떨어졌다. 말하자면 더 많은 말을, 소리지르고 울먹이고 게워내가며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본래 윌슨은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편이 아니었다. 우회하고 덜고 잘라내서 말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지금 자신에게 이토록 냉정하게 말하는 것은 이 대화마저도 더 이어나갈 의지가 없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화내 물었을 때 만큼은, 체이스도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둔, 자신이 짜둔 세상이 아니었기에 말하더라도 정답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답을 말해준 건 윌슨이었다. 흩뿌려진 시야에서 윌슨의 구두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구두굽이 바닥을 내려치는 소리가 귀를 울리는것만 같았다. 진단학과 분리에서부터 하우스의 냉대, 싸움, 그리고 청문회, 리사 커디까지...이제껏 윌슨을 멈춰세울 변명이라면 넘쳐날만큼 많았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변명들을 생각할수록 체이스는 내면에서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결국 그 '변명거리'라는 것들도 모두 윌슨이 그토록 사랑하던 '하우스'와 관련된 것들 뿐이었다는 것을. 애초에 그 자신이 없는 굴레 안에서 멋대로 판을 짜고 판을 이어나갔을 뿐, 자신은 그에 속해 있지도 않았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나 '로버트 체이스'라는 정체성이란 건 그들의 판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미동조차 없는 이 관계성에 질렸다는 듯 체이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평소 같았다면 - 아니, 애초에 윌슨이 '알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무너져내린 체이스를 감싸주고 안아주었겠지만 지금은 그 조차도 바라지 않았다. 체이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부끄러워졌다. 윌슨이 자신의 모습을 감싸주거나 보는 것 마저도 원치 않았다. 어둠과 슬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공간이 절실했다. 그걸 안다는 듯 윌슨은 현관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74.


하우스가 병원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밤 11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텅 빈 진단학과 사무실에 불을 켜고는 대뜸 자리에 앉아 주변을 응시했다. 그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리사 커디는 가석방되던 당시의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답고, 생기 넘쳐 보였다. 처음엔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해줄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게 아닐까라는. 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이 솔로라는 것을 은근슬쩍 내비쳤다. 내면에 일어날 것 같은 설렘이 잔잔한 감상으로 누그러들자 하우스는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병원에 돌아온 것이 오랜만이라며 즐겁게 말을 이어가는 커디의 뒤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윌슨이 더욱 그의 눈길을 끌었다. 저녁식사를 제안한 것은 커디였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윌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하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자리에서, 하우스는 어느 시점에 윌슨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질지를 보고 있었다. 종종 커디가 그에게 어떤 눈빛을 보내왔지만 당장에 그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윌슨의 얼굴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창백해지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3인 테이블 아래에서, 하우스는 본능적으로 윌슨의 왼손을 잡아끌었다. 잠깐의 접촉, 시선이 마주친 것 뿐인데도 그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갔다. 그가 붙잡은 윌슨의 손에 열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윌슨은 당장에 울것만 같은 얼굴로 자신의 왼손을 하우스에게서 빼내 사라져갔다.


가벼운 식사 자리가 끝나고 커디는 자신의 집에 같이 가겠냐는 말을 했지만 하우스는 응수하지 않았다. "...윌슨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커디는 그제서야 그렇게 하우스에게 물었다. 하우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커디는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떠나갔다. 아까 전, 불현듯 윌슨이 커디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급한 용무가 생겨서...' 잘하면 병원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시가 넘어가는 늦은 시각이었지만 하우스는 지팡이를 놀려가며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5층에서 내렸지만 보란듯이 병동은 조용했다. 이따금씩 응급실에서 온 레지던트들이 주변을 뛰어다녔지만 적어도 암병동 과장 사무실만큼은 어둡고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주인 없는 사무실을 바라보며 하우스는 숨을 들이켰다. 뭐라도 핀트가 나가서 다시 체이스를 찾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즈음 갑자기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윌슨이었다.


"...윌슨...?"


[...박사님.] 윌슨의 음성은 많이 지쳐보였다. 그가 이렇게 지치고 힘들어하는 음성은 몇 번 듣지 못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너무도 기억하고싶지 않은 내용 속에 있다. 쓸데없이 차오르는 기억을 움켜쥐고 하우스는 대답했다.


"...자네 대체 어디인가?"


윌슨이 그 다음에 내비친 것은 허탈감이 섞인 웃음소리였다. 아니, 그것은 마치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미칠노릇이었다.


[저, 아까 전에 박사님을 칠 뻔했어요.] 윌슨이 꺼내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하우스가 잡은 윌슨의 손이 뜨거웠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나자 하우스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게 대체...이제 와서 그걸 말하는 이유가 뭔가?"


[그런데...도저히 박사님을 칠수가 없었어요. 정말 웃기죠? 그렇게 미워하는데도, 결국 박사님을 때릴 수가 없었어요.] 윌슨의 말이 이어질수록 하우스의 두 눈이 그윽해졌다. 윌슨이 갖고 있는 그 '영역'이란 것은 이렇게 그를 가둬둘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이 페이스에 말렸다간 더 이야기를 지체할 것만 같았다.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디 있는지나..."


[...사랑해요.]


한 마디.


전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덧없는 전자음인데도 마치 그 수줍음과 수치심, 고통과 슬픔이 한데 섞여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하우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윌슨을 흔들었던 주제에, 윌슨이 방금 전 던진 말이 너무나 깊고 짙어서 어떻게 잡아 끌어야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을, 머뭇거림을, 감정을 담아서 건네는 전언처럼 느껴졌다.


[...저 정말 꼴불견이네요.] 평소처럼 터지는 웃음인데도 허탈감이 절실히 묻어났다. [이렇게 전화로 이야기하는 거, 정말 멍청해보인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도...] 윌슨은 다시 말을 아꼈다. 그의 말에 압도된 하우스는 자신의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흘러서 그가 잡고 있는 지팡이에 떨어졌다.


[..말하고 싶었어요. 한 번이라도.] 윌슨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우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화면이 암전되자 하우스 자신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윌슨은 늘 그렇게,


윌슨은 늘 그렇게 하우스에게 다가왔다. 오래 전 자신이 내치고 모른 척하고 도망칠 때부터 용기내서 한 마디 말도 못하는 지금의 자신에게까지...윌슨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소리내서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일지라도 - 공연히 다시 그 일이 생각났다. 윌슨의 '사랑'을 처음 성토한 건 다름아닌 하우스 그 자신이었다 - 그렇게 내쳐지기 전에도, 그 후에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정한 목소리로, 수줍은 입술로 몸짓으로 말들로 생각으로 그 모든 것들로 윌슨은 같은 말을 반복해오고 있었다. 구질구질한 취미를 기꺼이 함께 해주고 멍청한 미신이나 속된 이야기, 자잘한 농담 하나 하나까지 같이 공유해주며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심부름까지 도맡아 해주고 늘 뒤에 그를 기다려주던 그의 멍청하고 별볼일 없는 친우. 원하면 보지도 않을 사이.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억지라도 좋으니 부려보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전화기 화면을 켜서 착신 번호 그대로 통화를 걸었다. 시간이 흐르는데도 윌슨은 응답이 없었다. 기어코 음성메시지 수신함 안내음이 들려오자 하우스는 두 눈을 감으며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다시금 어두워진 화면에는 절망과 회한에 빠져 있는 하우스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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