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불과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6층의 소회의실에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들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윌슨과 잠시 눈을 마주친 포어맨은 짧게 목례하고는 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내원이 1층에서 하우스 무리를 안내하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내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하우스가 나올 시점에, 포어맨은 담당 형사와 경비와 짧게 인사를 건네면서 곁눈질로 회의실 안에 들어온 윌슨의 눈길이 처연한 눈빛으로 하우스를 향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하우스를 바라보던 윌슨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들고 온 서류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 같았다.
"...오늘로 결정이군요." 입장 전에 수갑을 체크받던 하우스에게 포어맨이 말하였다. 별다를 것 없는 말이었지만 하우스의 표정을 살피던 포어맨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인지 하우스는 전과 다르게 윌슨의 얼굴을 마주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평소에도 그리 밝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도 더 어두워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자네에게 지금 눈 앞에 있는 일 말고 뭐가 더 중요한가?" 거의 중얼거리듯 하우스가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더 들떠계실 줄 알았는데요."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게." 꽤나 공격적인 태도였지만 포어맨은 그저 하우스가 이 지지부진한 청문회에 이력이 났던 것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애초에 윌슨과 한 이야기라면 하우스가 복직하는 경우라야 발동되는 것 뿐이고, 이 일을 알고 있는 건 기껏해야 자신과 윌슨 뿐이니까. 하우스가 이 점에 대해 알 경우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그런 걸 공유할 정도로 윌슨은 대담한 편도 아니다. 닫힌 책과 같은 두 사람의 관계에 더 신경쓰는 것도 귀찮아져 포어맨은 그 시점에 생각을 닫아버렸다. 하우스는 이전에 청문회에 참석하던 것 보다도 더 힘없는 태도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곁눈질로 윌슨의 모습을 살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까 전부터 하우스의 기척을 느끼는 게 마음에 가시가 찔리듯 아파하며 윌슨은 들고 있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려 애를 썼다. 주변에 조금씩 소음을 내며 자리에 앉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지만 윌슨에게 그런 것들은 하나의 주변 요소에 불과했다. 순간 모든 것들이 하얗게 사라지고 오직 앉아 있는 자신의 맞은 편 의자에 앉는 하우스가 보였다. 고개를 숙였는데도 하우스의 눈초리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우스는 아주 잠시 고개를 들어 윌슨을 바라보았다. 뭣모르게 죄를 지은 것 같은 그 두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뻔하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당연한 사실이다. 자신이 성토하며 내지른 것과 마찬가지로 빌어먹을, 제임스 윌슨은 여전히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그게 어떤 감정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 처럼 강아지 같은 눈으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처럼 자신을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도리어 그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든 건 하우스 자신인데도. 포어맨이 청문회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그 와중에 윌슨의 이름이라도 부를 뻔했다. 그 애처로운 눈동자는 다시금 서류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난 청문회에 이은 추가 재심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포어맨이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하우스는 은연중에 포어맨이 정리하는 서류철과 동일한 색상의 서류철이 베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직감적으로 이 추가 재심사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거라는 감이 왔다. 하우스 자신과 청문회 참석인 몇몇을 빼고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빌어먹을, 아마 그 부검을 진행한 녀석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윌슨도 그 결과를 알고 있을까. 도의상 알 수는 없지만 만일 그 부검을 진행한 사람이 망할 체이스라면 윌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윌슨이 건넨 슬픈 눈빛은 그의 의사면허를 박탈하거나 진단학과 과장직에서 내치는 것보다 더 깊고, 고통스러운 무언가를 담고 있다. 그게 대체 무엇이길래. 재심사에 들어와서 한 거라곤 고작해야 윌슨이 어떤 모습인지, 그의 머리칼이 어떻게 부드러웠고 눈빛이 얼마나 애처로웠는지, 그가 얼마 전 자신을 향해 말들을 내뱉을 때 들썩였던 입술, 고른 치열과 향기, 그리고 그런 시각적인 정보들에 들어간 뜻들을 하나 하나 해석하는 것들 뿐이었다. 포어맨의 말들이 공기중에 흩뿌려지며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되어버린다. 오직 지금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마치 돌아가는 만화경처럼 자리한 주변 참석자들의 사이에 그림처럼 굳어진 윌슨의 모습 뿐이다. 하우스의 두 눈이 슬쩍 찌푸려졌다. 어느 것도 그렇게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읽어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지난 28일 오후 2시경에 베벌리 리처드슨 씨의 부검을 진행했습니다. 부검 결과 베벌리 씨의 사인은 CJD이며, 관련하여 역학조사를 진행한 결과 베벌리 리처드슨 씨의 정확한 발병 원인은 '유전성 크로이츠펠트-야콥 병'인 것으로 확인하였습니다." 포어맨의 말이 이어지면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크게 달라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하우스를 몰아붙였던 변호사 매니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쓸어넘기기까지 했다. 관리팀의 칼은 이번에도 자리를 함께 했지만 적어도 포어맨의 말 중에서 '의인성'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결과는 확실한 것이었다. 드디어 그 비좁은 구치소에서 나와 다시금 병원에서 진단학과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하우스의 표정은 크게 변한 것 없이 윌슨을 향해 있었다. 물론, 그는 스스로 내린 진단이 맞았다는 생각에 잠시 기분이 좋을 수도 있었지만 당장에 이번 결론을 가지고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시금 윌슨에게 찾아갈 구실과 시간이 생겼다는 것 뿐이었다.
"저도 결과를 전달 받았습니다. 모두 예상하시겠지만, 지난 번 말씀드렸던 대로 부검 결과가 의인성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으므로 그레고리 하우스 박사의 복직을 진행하겠습니다. 진단학과를 분리하게 될테니 관련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베스는 말의 끝에 암시하듯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포어맨이 가볍게 목례했다. "상세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의하는 자리를 갖도록 하죠. 일단은 이 시점에서 재심사를 포함한 그레고리 하우스 박사의 청문회를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포어맨의 말로 2차 청문회 - 재심사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포어맨은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하우스의 자리로 돌아왔다. "일단은 서류상 절차를 통해서 확인을 받고난 뒤에 수갑을 풀어드릴 겁니다. 절차라봐야 길지는 않습니다. 잠시 동안만 제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시면 됩니다." 포어맨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좀 더 멀쩡한 모습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우스는 당장에 윌슨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서류를 정리하는 윌슨을 바라보던 시선은 갑자기 관리팀의 칼때문에 가려지고 말았다.
"또 이렇게 구렁이처럼 빠져나갔군요, 안 그렇습니까?" 결과에 불만을 가진듯한 목소리로 칼이 하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하우스는 별다른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포어맨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미 결론이 난 일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주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은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지. 저 암병동 과장과 당신 말이야. 난 그 말 안 믿습니다." 칼의 지적에 자리를 일어선 윌슨은 잠시 멈춰섰다. 난처한 표정이 역력한 채로 하우스와 칼을 번갈아보았다.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쇼. 당신들끼리 짜고 치는 것마냥 -" 칼은 이제 윌슨의 앞으로 다가가 그를 위협하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회의실로 들어선 남자가 칼의 옆에 다가왔다.
"이의를 제기하려면 결론이 나기 전에 말씀하셔야죠. 지금 이러시는 건 불필요한 대화에 불과합니다. 이 모습들도 모두 찍히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장 잘 알겠지만." 체이스는 칼의 옆에서 침착하게 말하였다. 칼은 그 말에 모자를 눌러썼다. "끝나든 말든 제대로 서류를 갖춰서 말씀해주세요. 제대로 된 통로로 문제를 말하는 건 누구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체이스의 말에 칼은 윌슨과 하우스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체이스는 자연스럽게 윌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윌슨은 곁눈질로 하우스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분명 체이스는 청문회가 시작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칼이 윌슨을 위협하는 것을 느끼고는 재빠르게 윌슨을 향해 다가온 게 분명해보였다. 담당 형사와 경비에 포어맨까지 자신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하우스는 그런 것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그의 오감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회의실을 떠나가는 윌슨의 허리춤을 쓰다듬듯이 받치고 있었던, 체이스의 손 뿐이었다. 윌슨의 말 한마디에 무너진 무기력함, 허무함을 불식시킬만큼 거대하고 날카로운 분노가 하우스의 안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예리한 시선으로 그 둘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62.
"하우스는요?"
체이스가 포어맨의 사무실에 들어서며 물어본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두 손을 맞잡은 채로 앉아있던 포어맨은 잠시 기가 찬다는 듯 작게 웃어댔다. "자네가 하우스 박사님의 소식을 먼저 물어본 건 처음이군."
"지난 며칠 내내 우리를 괴롭히던 문제가 그거였으니까요." 체이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였다.
"아까 전에 꽤 능숙하던데. 자네 아니었다면 경비까지 더 불러야 할 판이었어." 포어맨이 거들듯 말하였다. 체이스는 우쭐대지 않으려 애쓰듯 고개를 잠시 숙였다. "앞으로 있을 진단학과 분리를 생각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닐테니까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야." 포어맨은 두 손을 풀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단학과를 분리하면 팀체제로 가려 하는데 말이지. 기존의 진단학과는 1팀으로, 자네가 이끌 팀을 2팀으로 만드려하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체이스는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누가 어느 팀에 들어가는지가 문제겠죠."
"자네도 알다시피 이건 어린애들 농구게임 팀 짜는 게 아니야. 피곤하겠지만 면담을 진행해야겠군. 물론, 내가 진행할 예정이야. 자네와 하우스 박사님은 따로 손댈 건 없어. 늘 그렇듯이 지금처럼 진행하면 되네."
"전 공간분리부터 요청드리고 싶은데요." 체이스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만든다고 하면 정형외과의 남는 공간을 사무실로 만드는 정도가 될거야. 대체 언제부터?"
"당장 지금부터라도."
"그건...끽해야 임시 책상과 의자 정도가 전부일텐데 괜찮겠나?"
"하우스와 한 공간에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뭐라고 못하겠군. 방금 전에 이사진에서 필요한 서류는 모두 정리해줬네. 승인까지 난 상태지. 빠르면 내일부터라도 하우스 박사님은 복귀가 가능해. 자네는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어렵다는 말이군."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다시 돌아온다면 분명 그렇겠죠. 지금 상황을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단지 업무를 미리 분리해두면 편리할 거 같아서죠."
"...자네가 요청하는 건 내 선에서 가능한 것들이니까. 적어도 하우스의 복귀 시점을 늦춰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포어맨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문제라면 진료 대상을 나눠서 배정하는 것 정도겠군. 자네가 좀 쉬고 싶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지만."
"그럴 시간에 차라리 팀원 면담을 진행해주세요." 체이스는 사무실 공간 너머 윌슨의 사무실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부하가 없는 대장이 되는 것도 예상해야 하니까요.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미리 대비는 해둬야죠."
"지나치게 겸손하군." 포어맨은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원한다면 자네 팀을 위한 TO를 따로 빼줄 수도 있어. 그리고 팀원들이 자네에게 부정적일거라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나?"
"사람의 항상성은 무시할 수가 없거든요. 그토록 끌려다녔어도 결국 팀원들은 오래된 대장 아래 붙을 게 뻔하죠. 저는 겸손한 게 아니에요. 현실적인 것 뿐이죠."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체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오후 회의실에서 윌슨에게 다가갔을 때, 무척 오랜만에 하우스가 던지는 뜨거운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그보다 더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윌슨의 태도였다. 윌슨은 가벼운 공황을 겪고 있었다. 이는 칼이 그와 하우스를 지적하며 따지기 시작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늘 그렇듯 윌슨을 흔드는 촉매제는 바로 하우스 그 자체였다. 그 점을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체이스는 기어코 그 인파 속으로 들어가 윌슨을 끄집어내왔다. 윌슨은 뭔가를 숨기고 있다. 만일 체이스 몰래 하우스를 만나러 갔다거나 아니면 하우스와 뭔가 접촉이 있었다 할지라도 지금처럼 동요할 거리가 되던가...? 윌슨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그토록 그가 원했음에도 윌슨은 늘 돌처럼 굳어서 그에게 조금씩의 말들만을 흘려왔었다. 지난 밤의 사랑스러운 모습도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나는 것 같아 체이스는 등 뒤가 시려왔었다. 그런 돌같은 남자를, 시선만으로 그 존재만으로 흔드는 하우스라는 남자가 빠르면 내일 다시 병동으로 돌아온다. 대체 어디서부터 해결해나가야할지 알 수 없었지만 체이스는 조금이라도 더 믿고 싶었다. 그 고약한 약조 때문이건 다른 무엇 때문이건 현재 윌슨은 분명히 혼자이고 그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니까. 그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것도 오직 자신 뿐이니까. 그런 그를 제대로 아는 것도 오직 자신 뿐이니까...모퉁이 술집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던 자신으로 돌아와 체이스는 다시금 그를 찾아가볼 생각을 했다.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그것들에 시선을 빼앗겨서 당장에 혼자가 된 사람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체이스는 자신의 선택에 늘 기준이 있었고 대부분 그 기준에 맞춰 한 선택은 후회하지 않았다. 마음 한 켠이 아린 경우는 많았지만. 아직 그에게는 자신을 연민할 시간이 부족했다.
"바빠요...?"
몇 번의 노크 뒤에 체이스는 윌슨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희미한 호흡 소리와 이따금씩 들이쉬는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그 눈물과 숨들이 얼마 전 그가 놀려댔던 책상 모서리의 눌린 구석으로 몰려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체이스의 눈빛이 다시금 그윽해졌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잠시만 틈을 주면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리는 사람.
체이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무너진 윌슨의 등을 쓰다듬다 그의 울음 소리가 커지는 것 같자 체이스는 윌슨의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입을 맞추지는 않았다. 눈물에 부은 눈동자를 한 윌슨의 얼굴이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엉망인 자신의 얼굴과 달리 체이스의 얼굴은 무척이나 다정해보였다. 그의 기다란 엄지손가락이 윌슨의 눈가에서 눈물을 걷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퉁퉁 부은 얼굴인데도 너무나 부드러웠다.
"...혼자 울지 말아요. 울려면 내 앞에서 울어요." 체이스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윌슨의 날숨이 그 소리들을 삼킬듯이 크게 들려왔지만 체이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이내 책상에 앉아 윌슨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다가오는 머스크향과 부드러운 셔츠와 그 너머 단단한 체이스의 품에 윌슨은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체이스는 아랑곳않고 그런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거 알아요, 박사님?" 토닥이듯이 상냥한 체이스의 음색이 윌슨의 귓가에 들려왔다. "우는 것도 친구가 필요하대요. 웃고 즐거운 시간에만 친구가 필요한 게 아니라...즐거울 땐 누구나 친구가 되죠. 울땐 그게 정말 힘들어요. 아무도 우는 사람과는 친구를 해주지 않거든요." 중간 중간 숨막히는 소리, 끊이지 않는 자상한 시선.
"근데 저는 다 알고 싶어요. 즐거운 박사님 뿐 아니라 이렇게 울고, 힘들어하는 박사님이요." 셔츠가 윌슨의 눈물로 젖어들어가는데도 체이스는 왠지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가는 윌슨이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온통 자신이 만지는대로 디디고 서있어줄 그 모습이 이토록 가련하게 떨고 있던 적이 있던가. 혼자서 오래도록 끌고 온 윌슨의 사랑은 위태롭고 애처롭지만 꿋꿋한 구석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들어서며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윌슨의 사랑은 방황할수록 그 뿌리와 디딤돌을 잃어가고 있었다. 넘어질 때마다 빠져들게 되는 건 결국 체이스가 마련해둔 그의 이런 '자상함'이었다. 그렇게 넘어지는 이유가 하우스 때문이라 해도 결국 윌슨이 넘어지는 바닥은 체이스가 된다. 얼마 전 모퉁이 술집에서 쓰러진 윌슨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렇게 모든 고통이, 슬픔이 당신을 통하고 나면 잔잔한 추억처럼 바스러지는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나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고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바뀌는데도 윌슨의 그 변하지 않는 진심이, 깊숙히 체이스의 가슴을 찌르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의 고양감을 부추기고 있다. 사랑한다는 사실은 이 모든 것들 지나쳐왔음에도 그대로이다. 체이스 자신의 부재에도 당신은 이토록 서럽게 울어줄 수 있을까. 그 때에는 이토록 자신을 품에 안아줄 남자도 없을텐데.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상념에 잠겨 체이스는 그렇게 한동안 윌슨의 들썩이는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63.
[조셉 벨의 메디컬 매거진 95호]
[스트랜드 매거진 174호]
[뉴저지 패션 매거진 78호]
하우스는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집 우편함에 마구잡이로 꽂혀져 있는 각종 물건들을 하나씩 보며 혀를 찼다. 상담은 스몰토크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빠르게 마무리되었고 서류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수감될 때 갖고 있던 물건들이라봐야 다 망가져가는 로드 바이크와 비뚤어진 지팡이 정도라 가지고 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와중에도 하우스의 뇌리를 꼭 붙잡고 있던 것은 아까 전의 그 불쾌한 스킨쉽이었다. 체이스와 윌슨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건 한 두번이 아니지만 그토록 가깝게 있는 모습을 - 특히나 체이스가 윌슨의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두 사람의 관계가 뭔가 바뀐 것이다.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둘의 관계는 어떤 진전을 이룬 게 분명해보였다. 망할, 만일 그 덕분에 자신의 복귀가 결정된거라면 당장이라도 병동을 폭파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를 갈고 있으려니 갑자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221호의 의사양반 아니유?"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옆집의 세실 부인이었다. 몇 년 전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을 출가시킨 그녀는 하우스보다 연배가 높았고 잔소리가 많고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아 오지랖도 넓었지만 적어도 하우스가 윌슨을 불러대거나 콜걸을 불러대는 걸 가지고 뭐라 하는 편은 아니었다. 스몰토크라면 오히려 상냥한 윌슨과 더 많이 해댔으며 그 부작용으로 윌슨을 홀대하지 말라며 하우스에게 몇 번 잔소리를 해댄 적은 있지만. 하우스는 관심 없다는 듯 말없이 목례를 했으나 세실 부인의 수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고생이 많았는가보네..." 세실 부인이 그렇게 말할만도 했다. 방금 전 구치소에서 나온 자신은 필라델피아 학회에 윌슨을 만나러 갔던 그 복장 그대로였기에 멀쩡할 리가 없었다. 청문회에 가기 전에 씻을 시간은 있었지만 그게 어디 멀쩡하겠는가. 하지만 세실 부인의 다음 말이 하우스의 시선을 끌었다.
"윌슨 선생님이 그렇게 신경을 쓴 이유가 있었나보네...뭘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었길래 그런지 모르겠는데, 뭐 집에서 사고라도 친 건 아니죠?"
"...그게 무슨 말이오?"
"열고 들어가봐요." 세실 부인은 대뜸 221호의 현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우스는 변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대로 열쇠로 현관을 열고 들어섰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집 안에서 보이는 물건은 거의 없었지만 뭔지 모를 희미한 코튼 향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에게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기억하게 하는, 그 코튼 향이 감도는 게 뭔가 심상치 않아서 하우스는 바로 현관에 있던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들어온 하우스의 집 내부는 과하다고 할 만큼 깔끔했다. 그가 멋대로 마시고 내버린 맥주캔과 반만 먹고 내다버린 피자박스, 그 외에 그가 종종 야구를 본답시고 꺼내들었던 맥주병, 만들다 실패해서 그대로 둔 라자냐, 주로 시켜먹던 포앤포의 행오버까지...그런 것들이 이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주방이 깔끔했다. 하우스가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는 행거에 요리 집기들이 고스란히 걸려 있는 걸 보니 대충 누구 성향인지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하우스의 집까지 와서 이런 일을 할 인물도 한 명 뿐이긴 하지만.
하우스는 좀 더 내부로 들어섰다. 그가 애덤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휴지며 온통 물건들이 나뒹굴던 거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나뒹구는 난장판이나 그가 그 위에서 기절하듯 고꾸라진 건 어디까지나 그의 기억 뿐이고 거실의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쿠션 몇 개는 새로 빨아서 갈아둔 듯이 깔끔했다. 그가 평소 발을 기대고 있는 갈색 쿠션이 어떤 것인지 모를 정도로. 하우스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집안 구석 구석을 돌아다녔다.
"완전히 새집이 되었네." 어느덧 그를 따라 현관에 들어선 세실 부인이 놀라서 말하였다. "하루 종일 치워대더니 정말 많이도 치워놓았네...이 정도면 보수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밥이라도 사던가?"
"거 참 말 많으시네." 하우스는 짜증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실 부인이 보기에 이 집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건 바로 집주인인 하우스였다. 고르게 정돈된 가구들 사이로 절뚝거리며 돌아다니는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라니. 세실 부인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녀는 도통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놓고...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우스는 지팡이를 빠르게 휘둘러 현관까지 다가왔다. 세실 부인이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하우스는 재빠르게 현관을 닫아버렸다. 세실 부인은 뭐라 몇마디 하는 것 같더니 바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다시 그의 공간이 조용해졌다. 지나칠 정도로.
씻거나 소파에 앉아 가구들을 더럽히는 대신 하우스는 방금 전 돌아다녔던 거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그의 머리에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대략 5년 전이었던 것 같다. 몬스터 트럭을 보고 완전히 고주망태가 된 하우스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윌슨이 열심히 하우스의 바지춤이며 자켓 주머니까지 뒤졌지만 열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날 하우스는 보기좋게 현관 열쇠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여벌 열쇠를 던져준 게 여기까지 파장을 끼칠 줄이야...우편함에 있는 것들을 건드리지 않았던 건 혹시라도 하우스 자신이 보는 것이라도 있을까봐 그랬던 것일 터다. 쓸데 없을만큼 배려가 넘치는 망할 윌슨. 하우스는 쓴 웃음을 흘렸다.
조용히 둘러보던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1인용 소파 뒤 벽에 찢겨져나간 자리였다. 물자국이 그 찢긴 자리에서 몇가닥 흘러나와 벽지를 새로 갈지 않는 한 제대로 메울 수가 없을 것처럼 생긴 그 자리로 하우스는 점점 더 다가갔다. 그 자국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하우스는 알고 있었다. 애덤스의 말들, 순간적으로 병을 던져대던 자신의 힘, 그리고...끝없이 침전한 자신. 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웅켜두고 모두를 적으로 돌리려 했던 걸까. 그렇게 해서 남은 거라곤 이렇게 시시각각 그를 덮쳐오는 윌슨에 대한 생각 뿐인데...그 때 애덤스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면, 윌슨이 눈물을 남기고 간 그 날 밤에 문을 열어주었다면,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 훨씬도 더 오래 전에...몬스터 트럭을 보러 가자는 자리에서, 둘만이 타고 있던 차에서, 혹은 아주 늦은 밤 병동에서 마주쳤을 때...아니, 그 어느 때라도 그 어느 시점이라도 윌슨이 돌아서기 전 어느 시점에 한 번이라도 그를 바라보고 그를 들어주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바뀔 수 있었을까. 달라질 수 있었을까. 맥주병에 할퀴듯 파인 그 자국들이 말하는 듯 하다. 돌이킬 수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것만 같다. 이렇게 찢고 나와서 아프기만 하다면 차라리 몰라도 좋았을 것을. 뒤늦은 마음을 가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차가운 상대의 눈초리와 바라지 않았던 관계들 뿐이다. 자국들을 덮을 듯이 하우스는 그 자국에 손을 짚은 채 젖은 숨을 들이쉬었다. 차단한 조명만이 그의 쓸쓸한 등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