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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nother 17화

Another - 17

by 김뇨롱

51.


“그게 대체…” 포어맨은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한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단학과 분리를 극구 말리시던 분이…이제 와서 진단학과를 분리하고 싶으시다고요.”


윌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포어맨은 손을 거두고 미간을 잡으며 생각을 정리해보려 애썼다. 그토록 애써서 고민하지 않아도 윌슨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온 이유라면 백 번 천 번 분명했다. 그럼에도…포어맨은 그 말을 입에 담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병원장으로서의 의무감이 그를 말하게 만들었다. “…하우스 박사님을 복직시킬 생각이신 것 같은데,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는 절대 안 됩니다, 박사님.” 포어맨은 윌슨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윌슨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수긍하는 표정이 포어맨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내팽개치고, 무단결근까지 저질렀어요.”


“…바이크 사고 때문에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던 상태였잖아.”


“발목에 묶여있던 추적 장치도 제거하고, 제한 범위 밖으로 벗어났단 말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잖아.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고.”


“…환자가 죽었어요.”


“환자를 잃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윌슨의 마지막 답변에 포어맨은 다시금 이마를 짚었다. “그런 말씀까지 하시는 겁니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박사님이 청문회 참석하시는 게 아니라면, 저는 이 대화에 끼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가 정말 냉혈한이라는 건가? 단지 지금 문제가 되는 게 하우스 박사님이어서가 아니고?” 윌슨은 물러서지 않았다. 평소대로라면 대부분의 일은 너그럽게 넘기던 모습과 너무나 다른 반응이었다.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일 년에, 한 달에, 하루 단위에 사망하는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그 중에는 제대로 진단명을 모른 채 숨을 거두는 사람들도 많아. 수술이 실패하거나, 잘못된 약물이 투여되거나, 단순히 감염 부위가 너무 깊어서 사망하는 환자도 수두룩해.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이번 일에 이토록 열을 내는거지?” 이번에 말을 꺼낸 것은 윌슨 쪽이었다. 포어맨은 그를 힘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는 박사님이야말로, 지금 이러시는 이유가 단순히 ‘하우스 박사님’이기 때문…아닙니까?”


순간 윌슨은 흠칫 굳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을 건드는 것은 꽤 치사한 행동이지만 애초에 윌슨이 이런 부탁을 들고 온 것 부터가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포어맨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병원에 사적인 감정을 들이지 마십시오, 박사님. 박사님 말씀도 맞습니다. 그저 사망한 환자 중 한 명일 수도 있죠. 하지만 문제는 그 담당 과가 진단학과라는 데 있습니다. 수술이 실패하고, 잘못된 약물을 투여하고, 감염 부위가 깊어서 사망한 일은 있어도 담당의가 자리를 비워서 사망한 일은 없단 말입니다!”


감정을 조절하고자 했으나 어째서인지 후반에는 울컥하고 튀어나오는 바람에 포어맨은 다소 격앙된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원장실에 걷혀져 있던 블라인드를 내리치고는 자리로 돌아와 셔츠를 풀곤 휴지로 흘러내린 땀을 닦아냈다.


“…그래서야, 그래서 더 하우스 박사님이 필요하다는 거야.”


“아까부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시는 겁니까?”


“자네는 체이스에게 모든 걸 걸고 있겠지. 진단학과를 분리할 필요도 없이 과장 자리를 내줘도 문제 없을 거라고. 그걸 정말로 확신하는 건가?”


“제가 가지는 확신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실 입장이 아니십니다.”


“내 말은…닥터 체이스가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 아니야. 닥터 체이스는 하우스 박사님이 아니라는 거지.”


포어맨은 땀을 닦던 휴지를 뭉쳐 잡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우스 박사님의 명성까지 들먹이신단 말이죠…맞습니다. 닥터 체이스는 이제 막 시작인 햇병아리 과장이겠죠. 하지만 적어도 하우스 박사님처럼 무단 결근을 하거나 환자를 방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안정해지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 지난 두 달 간 하우스 박사님이 기댈 구석이 존재했던가? 자네 말대로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면, 그만한 심각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던건가?”


“관리자의 자질을 걸고 넘어지실 생각이시군요.” 포어맨은 이제 제법 침착해졌다. 그는 넥타이를 잡아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두 달 간 박사님을 방치한 사람들 중에는 윌슨 박사님도 속해 계신 게 아닙니까?" 넌지시 던지듯 하는 말이었지만 윌슨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포어맨은 자신이 강수를 두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건..."


"박사님도 부정하지는 못하시겠죠. 그 사실에 대해서건, 그 이유에 대해서건." 틈으로 꽃아넣은 검이 서서히 들어가는 것을 느껴가며 포어맨이 윌슨을 바라보았다. "...제가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으셨겠죠."


"...체이스인가?" 마치 배신자를 찾는 눈치로 윌슨이 말하였지만 포어맨은 고개를 저었다. "아시잖습니까. 재채기와도 같으니까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두 박사님 곁을 지켜본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적인 것을 들먹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적어도 이런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병원의 '인적 자원 관리' 차원에서 말이죠." 포어맨은 겨우 다시금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왔다. 윌슨의 눈빛이 포어맨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주변은 여전히 두 사람 너머에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결국 박사님과 같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진료를 진행하는 것을 낭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하우스 박사님은 그런 분입니다. 박사님이 곁에 없어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자원이란 말입니다."


"그래..." 오랜 시간 경청 끝에 윌슨이 꺼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 포어맨은 윌슨이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에 강렬한 수치심을 느끼거나, 혹은 부아가 치밀어서 어떤 말이라도 꺼낼 것 같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가 생소했다. 그는 윌슨이 화가 난 상황을 맞딱뜨려본 적이 없었다. 윌슨이 꺼낸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자네가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나와 하우스 박사님의 관계가 반대로도 성립된다는 사실이야." 윌슨은 의외로 담담하게 말했다. '감정'이라거나 '연심'같은 복잡하고 낯부끄러운 말 대신 포어맨의 시선에 맞춘 인적 자원 관리 차원에서의 말을 꺼내들자 포어맨은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야. 하우스 박사님이 없이는 자네가 원하는대로 '작동'하기는 힘들거라는 말이야. 진단학과는 둘로 쪼개지기라도 하겠지만 암병동은 달라. 이 이상은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자네가 더 잘 알겠지."


틈을 비집고 들어가던 칼이 우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포어맨은 다시금 중심을 잃고 자리에 더욱 깊이 파묻혔다. 윌슨은 앉은 자리에서 다시금 포어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평소와 같이 친절하고 높은 음색이었지만 그 내용에는 무시하지 못할 협박이 스며있었다.


“이해해주길 원해서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제안하는 방향에도 이점이 있다는 걸 설득하고 싶었던 거지.” 윌슨의 말에도 포어맨은 한 동안 대답이 없었다. 손에 쥐고 있는 휴지가 더욱 뭉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일이 꼬이는 것은 골치아픈 일이다. 그 일의 가운데 자신이 있다면 더더욱. 포어맨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자 앉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의 머리에 번득 스쳐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만일 박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일의 청문회는 그저 박사님을 풀어주기 위한 선처쇼라고 해보죠.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포어맨은 뜸을 들이고 윌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우스 박사님과..."


포어맨의 말에 윌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난 두 달간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면 그 둘이 알고 지낸 10년 가까운 시간보다도 더 깊고, 더 많은 것들이었음에 분명했다. 윌슨은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포어맨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가슴 저변에 있는 심장이 그대로 드러난 채 모멸감에 찔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윌슨은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안아든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네."


"죄송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 청문회와 이사진, 그리고 저와 헬렌 씨 까지도...이 자리는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은...박사님의 '개인적인 감정'이 더 이상 하우스 박사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순간 윌슨은 고개를 들어 포어맨을 바라보았다. 분노, 당황, 모멸감...그러나 무엇보다도 깊은 슬픔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넘칠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애초에 감정적인 걸 허락 받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이렇게나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마치 자신 때문에 하우스 박사의 청문회가 발생한 것 처럼 이야기가 흘러가는데도 윌슨은 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하우스에 관한 일이라면 늘 그러했던 것 처럼, 윌슨은 또 다시 자신이 모두 끌어안고 가려했다. 그는 감정을 정리하려 애쓰며 두 눈을 감고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하도록 하지. 그거라면 하우스 박사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는 건가?"


"...깊이 고려해보겠습니다. 내일 청문회에서 뵙도록 하죠." 냉철하고 사무적으로 대답하려 애썼지만, 사실상 포어맨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윌슨의 장기 휴가 기간에 그를 찾아와 윌슨 박사의 상태를 걱정하며 물어본 환자만 해도 벌써 5명이 넘어갔다. 그들 모두가 항암 치료를 받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윌슨이 그들에게 심어둔 '친절함'에 있었다. 그들은 치료 과정중에 윌슨 박사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고, 그러한 유대감이 그들의 증상 차도에 도움이 되지 않았느냐고 하면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윌슨 박사님은 반드시 돌아오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포어맨은 그렇게 말하며 진땀을 뺐다. 놀라울 정도의 의학적 추론 능력이 하우스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라면 상대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공감능력과 친절함이야말로 윌슨을 포기할 수 없는 주요한 이유였다. 그 뿐인가, 하우스 박사와 한 세트처럼, 그의 모든 문제와 단점을 보완하고 보필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가 윌슨 뿐이니...하우스가 없는 윌슨이라면 몰라도 윌슨이 없는 하우스라면 감당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이 점이라면 분명 자신이 케어하지 못한 부분이다. 그간 진단학과 분리에 하우스를 송치하는 것에만 열을 올리느라 윌슨이라는 변수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더 큰 이슈가 있다면 체이스가 여전히 윌슨을 그만큼 제대로 케어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겠지만.


"...생각해줘서 고맙네, 닥터 포어맨."


문을 닫고 나서며 윌슨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문득 그의 뇌리에서 지난 학회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안정감, 포어맨이 꺼내든 카드는 안정감이었다. 그는 하우스가 수감된 그 날 밤에 찾아온 윌슨에게 그 말을 빌미로 하우스의 수감 장소를 알려줄 수 없노라 말했다. 하우스가 필라델피아로 보급형 바이크를 몬채 하룻밤 사이를 질주한 이유가 윌슨 본인이라고 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답하는 포어맨의 얼굴에서 미묘한 불쾌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시점에 윌슨은 포기했다. 하우스를 찾아가는 일과, 당장에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로 돌아와 과장의 일에 착수하는 일을. 무조건 찾아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알고 있다. 다만...그는 알고 싶었다. 하우스가 어떻게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는지...아니면 그냥, 보고 싶었다. 그를 보고 싶었다. 하우스에게서 결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윌슨은 자신의 마음이 늘 그렇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우스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것도 처음이거니와 정작 그가 한 말은 기껏해야 '자네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흐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윌슨은 늘 하던 것처럼 몸을 웅크렸다. 체이스가 건네는 따뜻한 말도, 뉴저지의 자택으로 돌아와 뒤집어 쓴 이불도, 그의 머리칼을 매만지는 황금빛 햇살도 그가 웅크린 틈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 들어오지 못했다. 볼 수만 있다면 완전히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만 있다면 완전히 들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차가운 어둠과 못미더운 미련을 가득 끌어안은 채, 윌슨은 골몰했다.


물론, 관계의 다음을 보여준 장본인은 체이스이다. 윌슨 스스로가 바란 것인지는 모르나 체이스에게는 늘 '그 다음'이 있었다. 그 푸른 눈동자에 고여 있는 갈증이란 바로 그 다음을 향한 것일터다. 윌슨 스스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하우스가 슬쩍 내민 한 걸음이야말로 체이스가 그간 그의 곁을 지켜오며 보여준 것보다도 더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개선된 관계의 '우정'일 뿐.


'사랑한다'고, 그렇게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전에 들은 것은 하우스의 입에서였다. 지금 떠올리기에도 끔찍할 만큼 사나운 얼굴로, 쏘아대는 말들로 하우스는 윌슨에게 그렇게 퍼부었었다.


"자네는 날 좋아하잖아. '사랑'하잖아? 내가 정말로 그걸 모를 줄 아나?"


"제임스, 자네가 필요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들 치고는 꽤나 많이 변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하우스가 내민 손은 어디까지나 끝이 정해져 있는, 그 자신에게만 새롭고 안정적인 관계에의 제안이다. 체이스가 생각하는 발치도 따라가지 못할 이기적이고 고루한 길. 체이스가 자신에게 점점 더 다가오면서 윌슨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그 고루한 관계에 빠져서 허우적댔던 것은 결국 자신 아니던가? 그럼에도...윌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이토록 오랜 기간을 인내하며 하우스의 곁을 견디도록 만든 원동력은 다름 아닌 그의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우스 박사님과...'


저 멀리 카페테리아에 다정하게 앉아있는 환자와 보호자 커플을 바라보며 윌슨은 잠시 멈춰섰다. 물론, 그는 수없이 포기하는 법을 배워왔다. 그렇게 마음에서 놓고 보듬는 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익숙한 것이 편안하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낯선 사랑과 자신만이 매달아 둔 연심의 사이에서 윌슨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애초에 그가 바라던 것은 가루가 되어도 하우스의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이 구차한 마음을 알아챈 뒤에도 하우스는 기어코 그를 찾아와 그런 말들을 내뱉지 않았던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윌슨은 스스로를 위안했다. 자신의 마음 때문에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용할 거라면 얼마든지 이용하고 차라리 곁에 있기를 바랐으니까. 그는 다시금 '친구'가 될 준비를 시작했다. 마음을 덮고 다시 덮어가며 윌슨은 무덤덤해지려 애를 썼다. 하우스가 편안해 마지 않는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는 다시금 시선을 거두고 크게 숨을 쉰 다음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였다. 마음 하나가 다시 저물고 있었다.



52.


"...아직 일하는 중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체이스였다. 윌슨은 간만에 활짝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밀린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네. 자네는?"


"...저와 닥터 애덤스 빼고 모두들 자리를 비워서 한산했어요."


"바빴다는 말을 독특하게 돌려 말하네." 윌슨은 말하며 서류로 눈을 옮겼다. 체이스는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는 윌슨을 바라보았다. 대뜸 그는 윌슨의 책상을 만지작대다가 모서리에 유난히 눌린 자국이 많은 지점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왜 이런 거에요? 혹시 심심할 때마다 여기를 찔러대시는 건 아니죠?" 체이스는 내심 들떠서는 쓸데 없이 말이 많아지는 걸 느끼면서도 궁금증을 참지 못해 말하였다.


"..그럴리가. 글쎄, 이게 어떻게 생긴 건가 싶네." 윌슨이 무심코 그 모서리 부분을 만지작대다 스스로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나저나 이렇게 병동에서 보는 건 오랜만인데."


윌슨이 말을 돌리는데도 체이스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저는 박사님을 늘 봐와서 그리 어색하지도 않은데요. 물론, 나이트 가운이 아니라 의사 가운을 입은 건 좀 새롭네요." 체이스의 눈이 은연중에 윌슨을 훑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윌슨은 말을 아꼈다.


"...저녁은요?"


"그러고보니 시장한 것 같네. 퇴근해야겠어. 자네는?" 윌슨의 말에 체이스가 들고 온 서류가방을 들어보였다. "가운을 입고 온 건 놀리려고 그런 거에요." 그는 나이답지 않게 소년처럼 웃어보였다. 윌슨도 마주 웃으며 자신의 가운을 정리하고 나서 자켓을 몸에 걸쳤다. 자신의 사무실 문을 닫으며, 윌슨은 방금 전 체이스가 만지작거린 자국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몇 번이나 하우스가 그를 부르기 위해 지팡이 끝을 두드리던, 바로 그 자리를.




53.


오후 2시. 6층의 소형 회의실 앞에 한 무리가 다가왔다. 포어맨은 경관에게 부탁해서 하우스의 손목에 걸려 있던 수갑을 풀었다. "이런 장소에서 수갑을 풀어도 괜찮은건가? 한니발 렉터로 치면 뷔페 앞에서 목줄을 푸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어디까지나 인도적으로 청문회 진행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포어맨이 말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회의실 앞에는 경관과 경비, 그리고 담당 형사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포어맨이 그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하우스는 그들을 힐끗 보고는 문이 열린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로 들어서며,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윌슨이었다. 학회장에서 만나고 난 뒤 처음. 그간 구치소에도 오지 않고 - 아마 체이스가 필사적으로 그걸 말렸으리라는 건 짐작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그저 자신을 바라볼 적의 그 강아지 같은 눈이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며 그를 향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다. 적어도 2주 가까운 시간 동안은 볼 수 없었는데도 어째서 방금 전에 만난 것 처럼, 그토록 애틋하고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심 숨기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하우스는 그걸 모른체 할 수는 있어도 몰라볼 수는 없었다. 늘 그렇듯 윌슨은 그런 구석이 있었다. 손을 내밀어 잡고자 하면 언제든 잡을 수 있을만큼 가까이. 자신도 모르게 손이 향할 것 같아 하우스는 스스로 손목을 쓰다듬었다. 누가 보면 영락없이 수갑을 풀어서 홀가분해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기분마저 들었다. 때아니게 내리쬐는 햇살 그 사이를 부유하는 하얀 먼지들이 눈처럼 그의 눈앞에 흩날렸다. 빌어먹을, 윌슨이 이렇게나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던가?


"...박사님, 그레고리 하우스 박사님."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가운데에 자리한 포어맨이 그의 이름을 재차 불렀을 때였다. 하우스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포어맨에게로 옮겼다.


"지금 시간부로 베벌리 리처드슨씨에 대한 진단 건에 대해 그레고리 하우스 박사님의 청문회를 진행하겠습니다." 포어맨은 그 이후로 절차에 맞추어 진단 시작부터 베벌리 씨의 사망까지 이어진 일련의 상황들을 열거했다.


"애초에 베벌리 씨의 진단을 맡게 되신 이유가 뭡니까?"


"우리 진단실을 청소하러 그가 찾아왔을 때, 전형적인 환각 증상을 보였소. 처음에는 그가 조현병 증상을 보이거나 다른 문제일거라 생각했소. 신경정신과에서 검사를 위해 MRI를 찍어보게 되면서 진단을 시작하게 된거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질문을 던진 남자는 안경을 고쳐쓰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베벌리 씨의 벌이와 헬렌 씨의 벌이를 생각하더라도 두 사람은 진단학과의 진단을 위한 검사나 치료에 제대로 된 지불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상황은 인지하고 있으셨습니까?"


"언제부터 진단학과가 진단을 사고파는 가게가 된건지 모르겠군. 그런 문제까지 따지고 싶다면 프론트로 가시오. 차라리 병동 내에 상주하고 있는 변호사를 찾아가는 게 더 빠르겠군." 하우스는 마침 자리에 앉아있는 전문 변호사를 흘낏 바라보며 비아냥댔다. 남자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중얼거리듯 답했다. "CJD는 애초에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는 상태라고 알고 있습니다. 베벌리 씨의 치료를 진행하면서 결국 답도 없는 헛짓거리나 계속해대며 그들을 힘들게 만든 건 결국 진단팀이 아닙니까?"


"결국 CJD도 타입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다를 수 있소. 게다가 애초에 외래를 제외하고 그런 특이한 케이스를 가진 경우라바야 엄마를 동원해서 꾀병으로 벤조디아제팜을 얻으러 오는 청소년이나 우울증이랍시고 암페타민을 처방받으려는 중년 부인이 전부란 말이오." 하우스가 꿰뚫어보듯 하며 말하자, 안경을 쓴 남자는 고개를 떨궜다. 이번에 말을 꺼내온 것은 그 옆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하우스가 말하는 내내 볼펜으로 서류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호의라고는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재미를 위해서 진단을 하시는 게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최근 두 달간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베벌리 씨를 사망에 이르게까지 한 겁니까?" 차가운 음성 때문에 질문이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다. 하우스는 순간적으로 윌슨을 바라보았다. 꺼내자면 많았다. 망할, 그것들을 여기서 꺼낼 수 없을 뿐이지...윌슨의 눈동자가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게 여기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더 오래 바라보면 도리어 윌슨까지 휘말릴 것 같아 하우스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이보쇼, 감옥에서 자그마치 1년 가까이 있었소. 수감되었다가 풀려나서 이제 겨우 몇 달 지난거요. 운동선수들은 적응 기간이라도 있지. 내 경우는 어쩌라는 거요? 게다가 진단실의 의사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소. 우리는 산발성과 가족성 사이에서 계속해 논의하며 치료를 진행했소. 내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이렇게까지 일이 망가진 거라면 애초에 진단학과를 만든 의의부터가 없어지는 것 아니오?"


"...그 점이 문제인 겁니다." 이번에 말을 걸어온 것은 변호사인 매니였다. "왜 의인성에 의한 증상이라는 걸 배제하고 시작한 겁니까? 만일 헬렌 씨가 베벌리 씨의 사망에 대해서 의인성 CJD라고 걸고 넘어지게 되면 이 쪽의 입장은 무척 곤란해지게 됩니다. 베벌리 씨는 이 병동에서 근무하던 관리자였습니다. 그가 청소하던 곳이 진단실 외에도 C구역 전반인 것을 미루어볼 때, 영안실이나 최악의 경우 수술실에서 감염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버린 겁니까?"


"담당 구역만 보고 근무표는 제대로 관찰을 못한 모양이군. 그 자는 지난 몇 달간 장기 휴가를 지낸 뒤 돌아온 상태였소." 하우스는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윌슨 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윌슨 또한 그것을 알아챘는지 난처한 표정을 했다. 윌슨이 저렇게 새초롬한 얼굴도 할 줄 알았던가...? 당장 면허 정지나 재수감될 정도로 위기일발의 상황인데도 하우스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이성을 놓았더라도 금새 멍청한 미소라도 짓고 말았을 것이다. 시선을 돌려서 하우스는 겨우 말을 꺼냈다. "대충 내가 병원에 복귀한 시점과 그가 휴가에서 돌아온 시점이 비슷할거요."


다행히 매니는 하우스의 곤란함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리어 자신이 내놓은 공격이 먹히지 않자 당황한 듯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하우스는 다시 표정을 정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순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질문하는 족족 대답을 내놓는 하우스에게 더 이상 질문하기도 질렸다는 표정들이었다. 하우스가 대충 시시한 농담이라도 던지려는 찰나에, 구석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까지 한 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은 사람인 듯 보였다.


"...요점을 짚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질문드립니다만, 결국 베벌리 씨의 사망에 문제가 되었던 건 그레고리 하우스 박사님의 근무 태도 때문이라고 봅니다. 특히...지난 3일과 4일, 그리고 연달아서 약 일주일 달하는 시간 동안 진단실에 있었던 시간은 기껏해야 일 평균 2시간 정도였습니다." 날카로운 지적에 하우스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회색빛 유니폼에 베벌리 씨와 같은 명찰 색상이 신경쓰였다. "...당신은..."


"관리 팀의 칼입니다. 이번 청문회에는 인사 조치를 위해 저도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칼이 무덤덤하게 말하였다. "칼 씨께서는 병동의 일부 구역, 그러니까 베벌리 씨를 비롯한 진단학과와 암병동, 그리고 정형외과가 자리한 C구역을 모니터링하고 계신 분입니다." 포어맨이 거들듯 말하였다.


"자리를 지키는 시간을 가지고 업무 시간을 논하려는거요?" 하우스가 기가찬 듯 말하였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스캔이며 각종 테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자리를 비우시겠지요. 문제는...그 곳까지도 제 감시 하에 있다는 거죠." 칼은 좀 더 고개를 내밀어 하우스를 노려보았다. "박사님의 동선을 모두 지켜보았다는 말입니다. 박사님께서는 보호자인 헬렌 씨와도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군요. 베벌리의 동료로서, 저는 이 점이 매우 마음에 걸립니다. 단순히 휴가를 쓰거나, 꼬장을 부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평소 같았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병을 고쳐냈겠지요. 늘 그랬듯이요." 칼은 다소 격앙되어서 자신의 음성이 커져가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러나 법적인 문제, 혹은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동료의 사망에 대해 본질적으로 파고드려는 태도는 누구도 쉽게 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우스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저도 이 일을 해온 게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물론, 제가 지켜본 분들은 하우스 박사님 말고도 많이 있지요. 하지만 이번 문제에서만큼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칼은 자신의 벗겨진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내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윌슨 박사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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