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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May 03. 2021

필명을 정했습니다. 우연 입니다.

필명을 짓게 되었습니다. [우연]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세상은, 단어로 이루어진 넓은 바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에게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주신 [서나연]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아들을 원하는 집에 태어난 둘째 딸이라는 사실 때문에 那(어찌 나) 演(멀리 흐를 연) 한자를 써서, 대는 끊기지 않을 것이다, 뒤에 아들 동생이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이름으로 못 박았던, 그런 의미가 있는 이름인데요.


초등학교 때 이름이 무슨 뜻인지 조사해 오라는 숙제를 받고 부모님에게 물어봤을 때 이 사실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언니는 가을 하늘처럼 맑게 자라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는데, 제 이름은 저를 위한 이름이 아니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남자 동생을 위한 이름이라는 걸 알았을 때에는 내가 나중에 크면 꼭 이름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름이 예쁘다는 이야기는 항상 듣고 자랐기 때문에, 막상 내 이름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도 [서나연]이라는 이름을 떠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음’은 그대로 두고 한자만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찾은 한자는 裸(벌거벗을 나), 然(그러할 연)이었습니다. ‘그러할 연’은 ‘자연’(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이라는 멋진 단어에서 쓰는 한자와 같은 한자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나, 뭐 이런 뜻을 스스로 부여해서 이십 대 중반부터 몇 년 간을 다시 살아낸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거창하게 필명이라는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래퍼에게는 ‘랩 네임’이라는 걸 만드는 과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래퍼는 랩을 할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친구에게 침 한 번 안 튀기면서 말하는 사람도 랩을 할 때만큼은 카메라를 뚫을 듯이 메시지를 응시해야 하고 그런 모습이 멋있다고 읽히는 편이니까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글쓰기 선생님은, 글을 쓰는 사람은 자아가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저는 아직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요즘에 하는 생각은 글을 쓰다 보면 [서나연] 아닌 상태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적은 모든 단어, 모든 문장의 단어를  책임지겠다는 포부는 있을지언정, 문장은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읽히는 편에 가깝저는 독자에게 가서 읽힐  무수히 분열된 상태로 존재하는  같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의 자아가 분열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건지, 어쨌든 저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인상으로 남을지도 모를 문장들을 매일 종이비행기 날리듯 창문 밖으로 날려 보내고 잘 잊은 후에, 다시 다른 가능성을 위해서 책상 앞에 앉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밖에서 사람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라도 다녀오면 내가 했던 말을 곱씹어야 하고 그냥 말을 아낄 걸, 후회하고 마는 제 성격상 이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제 옆에서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조언을 해 주는 선생님이 늘 존재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제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는 빈 종이를 쥐고 어떻게든 싸워봐야겠지요.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그래서 [서나연]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단어를 필명으로 정하고 글을 써 보면 어떨까 생각한 것입니다. 우연은 자연처럼 대단한 단어이기도 하고,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이라는 단어의 뜻도 어쩐지 글을 쓰는 일과 닮은 것 같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발명하는 것이 작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이 쓴 이야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모두 담겼다면 그때는 글을 쓸 필요가 없는 때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꾸 어디서 이야기를 주워듣고 와서는 그게 제 생각인 양 말하게 되는 것 같아서 창피한데요, 적어도 필명을 소개하는 이 짤막한 글 뒤에 쓰게 될 다른 글에서는 조금 더 특별한 책임감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그런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서나연]보다는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쓸 때는 의사가 흰 가운을 입듯 그날의 글에 맞는 자아라는 녀석을 염치없이 갈아 끼우고, 어쩌면 나라는 인간을 문장 뒤로 밀어둔 채 말의 힘을 믿는 마음을 앞세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꿈같은 이야기인데, 매일 써 나가는 행위만이 그 꿈을 꿈이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구글과 네이버에 검색을 했을 때, 글을 쓰는 사람 중 [우연]이라는 필명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정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루트로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일단 그렇게 해본 상태입니다. 혹시 문제가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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