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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May 10. 2021

언어를 다스리는 일은, 감정을 다스리는 일

가끔 그럴 때가 있다. 페이스북 피드를 내리다가 어떤 게시물을 보고 깊게 공감하고 슬픔이랄 것을 느끼는데, '슬퍼요'버튼은 누르지 못할 때 말이다. 나는 그럴 때 차라리 '좋아요'버튼을 누르곤 한다.


'슬퍼요'라는 버튼의 이모티콘을 보면, 사람 얼굴을 한 캐릭터가 실제로 눈물을 흘리고 있고, 눈물은 푸른색으로 처리되어 꽤나 실감 나게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대놓고 슬프다는 뜻의 '슬퍼요' 버튼이 버젓이 있는데도, 정말 슬픔이 느껴질 때 슬퍼요를 누르지 못한다는 것은 어딘지 이상하다.


그것은 아마 슬픈 것을 슬프다고 말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내 성격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깊게 차오르는 감정을 군데군데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강한 감정이 몰아치는 순간에는 어떤 표현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리는 편이기도 하다. 가령 얼마 전에 남편이 과로 때문에 아팠던 적이 있었다. 상처 부위를 방치한 탓에 하반신 마취 후 수술도 해야 했다. 나는 그때 너무나 큰 슬픔을 느끼고 있었지만, 슬프다는 이야기 같은 건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느낀 갖가지 감정을 슬픔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정말 나에게 찾아온 모든 느낌들이 '슬프다'는 말 한마디로 축소될까 봐 그랬던 것 같다. 슬프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다. 사실 정말로 많이 슬펐다. 그런데 슬픔이라는 것은 마치 어떤 감정들의 대장격 표현처럼 느껴져서, 슬픔이라는 라벨을 붙이면 더 이상 열어볼 필요가 없는 감정 상자처럼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열어볼 필요가 없는 것은 그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라지는 것이 된다. 나는 그런 게 아쉬워서 꼭 저장해두고자 하는 감정들이 있다. 그런 것에는 슬픔이나 기쁨 같은 대장격 표현들보다, 약하고 섬세한 표현들, 언제든 지우고 새로 쓸 수 있는 감정 표현들로 꾸며두는 편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물듯 슬프다는 말이 따라오기도 한다. 그제야 나는 슬픔을 받아들이곤 한다.


나는 남편이 얼마나 힘들게 일을 해내 왔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업계 상황이라든가, 직장 내 문제라든가, 그런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쉬라고, 아무 걱정 말라는 이야기도 할 수가 없었다. 수건을 찬물에 적셔다 이마에 얹어 주는 것이나, 잠들지 못하고 뒤척댈 때 간호사를 불러 주는 것, 손을 잡고 함께 새벽을 보내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날의 감정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 한 구석에 구멍이 난 것처럼 아린 기분이 든다.


나는 꼭 그때의 내 감정에 대해 더 자세하게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던 것 같다. 그날 남편의 손을 잡고 그에게 했던 이야기는, 말이라기보다는 눈빛이기도 했다. 수술 후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에게, 그날 나 정말 슬펐어, 자기가 쓰러졌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고백했다. 아마도 남편과 나를 추스르고 나서 이제는 그것이 어떤 과거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우리가 정말 괜찮아졌을 때,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지난 내 감정을 한데 모아 슬픔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전에는 남편과 수많은 대화를 해야 했다. 매일 저녁마다 컨디션이 괜찮냐고 묻고, 수술 부위를 확인하고, 회복에 좋은 영양제와 물을 가져다주면서 말이다.


언어를 다스리는 일은, 때로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 되곤 한다. 그래서 나는 깊은 공감과 슬픔이 차오르는 게시물에 슬퍼요 대신 좋아요를 누르곤 하는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왜 슬픈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에 대해서 나름의 결론이 날 때까지는 슬프다고 섣불리 말하기 싫은 것은 이상한 고집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습관이기도 하다. 저장해둔 감정을 바라보면서 곳간에 쌓여 있는 쌀을 보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지나간 일들을 다시 상기하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소화하면서, 나는 결국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한다. 우스갯소리로,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내 모든 감정들을 다 들여다보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친구에게 말하기보다는 그냥 혼자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신의 게시글에 충분히 공감하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우선은 슬퍼요 대신 좋아요를 누르곤 한다. 나름의 타협이라고 할까. 좋아요 이모티콘은 이목구비 없이 손가락만 있어서, 손가락의 주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상할 수 있기도 하다. 가끔은 그런 손가락에, 슬픈 감정이 더 잘 담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눈물보다 더 큰 슬픔을 내가 상상하고 있다고 느껴서 그렇다.


그런 기대를 해 본다. 우리가 시간을 건너서 만나게 된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내가 내 감정을 알아챌 때까지, 당장은 모조리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당신이 기다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사실은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만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그곳에는 언어를 넘어서는 눈빛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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