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에세이 쓰기란, 속근육을 사용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 밖에서 살아가는 일은 나에게 팔과 다리를 양철 인간처럼 빳빳하게 움직이는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 페르소나라고 하던가, 사회적 가면을 쓰고, 그런 스스로에게 익숙해지는 일은 어쩌면 겉근육을 키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몸에 기름칠을 하고 근육을 과시하는 보디빌더들처럼 남들이 보기에 좋은 몸을 만들고, '옷 핏이 좋은' 상태를 만드는 것은 그저 강해 보이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가 신생아였을 때는, 먹이고 트림을 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남편과 나는 유튜브를 보고 공부해 가며 다양하게 트림시키는 방식을 익혔는데, 내가 남편에게 불만을 가지곤 했던 것은, 아이의 등을 너무 세게 두드렸다는 것에 있었다. 아이의 등은 너무나 연약하고 부드럽고 작았기 때문에 그 큰 손으로 퍽퍽 소리가 나게 때렸다가는 어딘가 부러질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은 자신이 힘을 완전히 뺀 상태라면서 변호했지만, 그저 내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아이는 부드러운 엄마의 손길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다 보면 강한 힘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상황이 있다. 내게는 잠들기 전에 하루를 정리하고 나를 뒤돌아보는 밤의 시간이 그렇다. 그런 시간에는 사회적 가면도, 내가 어때야 한다는 의식도, 내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도 필요 없다. 나를 돌아볼 끝없는 시간만 남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에세이 쓰기는 힘이 된다. 나는 그것이 힘센 근육들을 들어내고 마지막에 남은, 뼈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는 속근육 쓰기라고 느끼곤 한다.
지금껏 필라테스를 배우면서도 가장 잘 가르쳐 준다고 느꼈던 선생님은 호흡을 잘 지도하는 선생님이었다. 팔과 다리와 엉덩이를 그렇게나 움직여도 나지 않던 몸살이, 한 시간 내내 흉식 호흡을 했더니 제대로 나 버려서 이틀을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대체 호흡이 무엇이길래, 호흡을 하는 것만으로 몸이 이렇게 힘들 수 있는 건지 신기했었다.
에세이 쓰기도 그렇다. 하루 내 가졌던 편견들과, 세상에 이미 알려져 나를 잠식하기 쉬운 취향들과, 나를 둘러싼 역할극을 모조리 외면하듯 검은 안대를 두르는 일이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하나의 마음이 보인다. 그것이 가장 알고 싶은 나의 속마음이 되고는 하는 것이다. 가끔은 그런 것에 대해서 쓰는 일이, 몸살을 앓을 만큼 제일 어려운 일이 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