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빵 하나가 먹고 싶었던 날
이것은 하루 중 얼마나 작은 일일까
오늘 낮에는 호밀빵을 사러 다녀왔다. 호밀빵 하나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사 온 지 일주일이 안된 동네라 어디에 빵집이 있는지 몰랐다. 프랜차이즈 빵집 말고, 처음 보는 상호의 빵집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동네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현재 위치로 빵집을 검색해서 호밀빵을 파냐고 물었다. 한 군데의 빵집에서 통밀 식빵을 판다고 대답해 왔다.
호밀빵과 통밀 식빵은 엄연히 달랐는데도 나는 그냥 통밀 식빵 하나를 사러 나섰다.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걷고 싶었고, 햇볕을 쐬고 싶었고, 바람을 맞고 싶었다. 식빵을 사러 가는 일은 그 모든 것이 충족되는 일이다.
사실은 집에서 나선 후에 전화를 했으니 그냥 무작정 나온 셈이다. 나오면 걷게 된다. 새벽 내내 갖가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글을 쓰고 싶다, 책이라도 한 권 내고 싶다, 요가 수업을 하고 싶다, 하고 싶은 건 많았다.
연어 덮밥을 먹는 나에게 시터 이모는 밖에 좀 나갔다 와요, 내가 행복해야 남을 챙기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왜 푹 찔리는 느낌이 들었는지, 나는 네, 대답하곤 정말 밖으로 뛰쳐나와서 걸었다. 통밀 식빵을 팔고 있다는 빵집까지는 걸어서 십사 분이 찍히는 거리다. 이것마저 적당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늘로 가면 바람이 불어 춥고, 햇볕 아래로 가면 바람을 뒤덮을 만큼 더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씨였다. 나는 니트 가디건을 벗어 허리춤에 묶었다가, 다시 입었다가 했다.
브래지어를 안 한 지는 벌써 육 년째가 된다. 길을 걷다 보면 가끔씩 내 가슴팍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을 만난다. 나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편이다. 이 동네에 집을 보러 왔던 날에는 내 가슴을 흘깃거리는 아저씨에게 고개를 거북이처럼 쭉 빼고 눈을 부릅뜨면서 발을 빠르게 굴러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이 구역의 미친년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오늘은 어떤 아줌마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데 왠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호밀 식빵은 투명한 비닐에 1차 포장되고 2차 포장지인 비닐도 상표 없이 완전히 투명해서 사람들은 내가 무얼 사고 걸어가는 중인지 다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내 개인정보를 흔들면서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옷 바깥으로 비치는 젖꼭지보다 그게 더 야한지도 몰랐다.
식빵이 벌거벗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 쓰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벌거벗었던 느낌이었다면서 말이다.
식빵이 나 같고 내가 식빵 같다고 느껴지는 기분은 기묘하다. 마치 시인이 된 기분이다. 요즘에 나는 그런 기분들을 모아서 '에세이 쓰기'에 집어넣는 중이니까 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이런 날 하루를 식빵을 사러 간 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매일의 기도에 가까운 일이다. 나는 매 순간의 행위로 오늘이 정의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곤 한다. 하루가 큰 원이라면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 그냥 작은 원을 만든다. 그러다 보면 우울해진다. 큰 원을 포기하는 것 같아서다. 그러나 큰 원을 만드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큰 원이란 만들어지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그냥 만들어지는 거라고 만들어지고 있는 거라고 내가 만들고 있는 거라고 믿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우울도 연기처럼 날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통밀빵을 먹었다. 아, 호밀 식빵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