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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May 18. 2021

우리 부부의 랜드마크

부지런히 사랑하기

토요일에는 남편이 백종원 레시피로 소세지 볶음을 만들어줬다. 요리도 잘 못하는 사람이 유튜브를 보고 깨작깨작거렸을 것이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양념장 여러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밥상 위에는 소세지랑 같이 먹으라며 김치를 덜어 놓았다. 남편은 내가 뽀뽀 한 번을 해주면 그렇게 좋아한다. 신나서 귀가 팔랑대는 강아지 같다고 말하곤 하는데, 이제는 그런 일상에도 조금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사랑마저 지루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우리 앞에 너무 많은 시간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까 말이다. 아기가 매일 커가는 모습도, 결혼 후 사이좋게 살이 찐 우리 부부도, 그저 뻔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 내가 이미 겪어본 일처럼 느껴지고 나는 모든 걸 아는 신이 되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오만함인 것 같다. 그 안락한 울타리를 부수면 더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것 같은 욕망마저 든다.


의도하는 것인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느새 밀물이 들어오듯, 사랑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은 말이다. 최근에는 아기가 며칠 내내 새벽에 울어대는 바람에 쪽잠밖에 자지 못했다. 남편은 나를 좀 챙기라며 신신당부를 하더니 내가 잠에 들 때까지 종아리를 주물러줬다. 밤에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난 게 얼마만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남편의 손길에, 나는 푹 잠들었다. 그리고 일어났는데, 머리에 산소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수면이 부족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를 잠에 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게 침대에 엎어져 있으면 여기가 침대 위인지, 남편의 품속인지 헷갈린다. 마사지숍에 가서 비싼 마사지를 받는다고 해도 이렇게 안락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누군가 내 무의식을 훔쳐보는 게 두려워서, 술에 취해도 절대 필름이 끊기지 않던 사람이었다. 대학 일 학년 때도 비틀거리며 집에 오고 나서야 침대에 완전히 엎어졌다. 지금에야 예전처럼 술을 마시는 일이 없지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가끔은 누구에게도 취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사람처럼 군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남편 앞에서는 그냥 운다. 화도 낸다. 안겨서 울기도 하고 침대를 주먹으로 쾅쾅 때리기도 한다. 화가 난다며 허공에다가 앞발차기 옆발차기 뒷발차기를 하기도 한다.


남편은, 그 허무한 발길질이 무슨 앞차기냐며 내 발차기를 따라 하고는 한다. 나는 내가 언제 그렇게 했냐면서 따지면서도, 남편의 모습이 너무 웃겨서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렇게 웃다 보면 뭐 때문에 화를 냈는지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진지한 이야기를 해도 이 사람 앞에서는 다 애교로 돌변하는 것 같을 때가 많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싸움을 하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웃음이 나는 통에 잘 싸우지도 못할 때가 많다.


사랑을 지나가는 거라고, 담배연기처럼 곧 흩어져 사라지는 거라고 믿었던 시간이 길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집 앞에, 흐르는 연기 그대로 굳어버린,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상은 나를 지켜주는 랜드마크가 됐다. 집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만큼 높고 위엄 있는 동상이다. 가끔은 그 동상이 하늘을 가리는 것이 시큰둥하게 느껴졌다. 남편이 내게 주는 안락함이란 가끔은 잘 피할 수 없다고 느껴질 만큼 두껍고 무겁다.


그러나 조금 걷다 보면 하늘도, 랜드마크도 내 시야에 적당히 들어올 만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짝반짝 빛나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사랑은 부지런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어떤 황홀한 풍경도 지루해질 때가 올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몰랐다는 사실이, 가끔 밀물처럼 들이닥칠 때가 있다. 그러면 용기를 내서 그 얕은 물속으로 잠기려고 한다. 그제야 물은 아주 깊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말이다.


그냥 그렇게 보내는 날들이 있다. 소세지 볶음을 만들어먹고, 뽀뽀를 한 날. 마주 보고 웃은 날. 가만히, 어떤 울타리가 가만히,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느낀다. 영원할 줄은 몰랐던 사랑, 시간에 흩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뭉게뭉게 피어오르다 어느새 공기 중에 흡수되고 말던, 내가 알던 연기가, 기체가, 동상이 되어 세워져 있다. 동상이 된 절대신이 우리 미래의 사랑까지 미리 훔쳐보고 온 걸까. 어차피 너희는 영원히 사랑할 것이니, 계속 흐르면 간지러우니까, 미리 굳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 절대신은 어쩌면 나와 남편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사랑에 관한 유일한 책임자일 것이다. 랜드마크라고 해서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주 닦아야겠다고, 만지고 먼지를 닦고 끌어안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부지런함이, 밀물과 썰물 없는 동해바다처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낼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내가 이끌어가면 되는 거라고, 정말 나는 우리 사랑의 절대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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