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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Jun 01. 2021

오렌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언제가 행복해?

오늘 친구에게 물었다. 언제가 행복해? 친구는 뾰루지가    턱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했다. 뾰루지로 생각을   아니겠지만 나는 친구의 뾰루지를 보면 피부가 거칠게 느껴졌던 어느 밤에 잠은    잤을까, 건강한 집밥을 먹었을까, 술담배는 줄였을까, 하면서 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친구는 얼굴이 작다. 그 작은 얼굴에 눈이랑 코랑 입이 다 들어가 있어. 그러나 얼굴을 가까이서 보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눈알을 굴려야 할 만큼 친구의 얼굴은 크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란 그 사람을 크게 보는 것이라고. 세상이 이렇게 큰데도 그 사람이 세상만 해 지는 순간이 있다고.


친구가 행복하다고 했던 순간은 이거였다. 마트에 갔는데 작은 소녀가 할머니에게 말하는 순간을 목격했단다. "오렌지다. 먹고 싶다." 할머니는 물었단다. "오렌지 사 줄까?" "응!" 소녀는 오렌지를 샀단다. 이 장면을 목격한 게 행복했던 게 아니고.


그걸 보다가 옆에 있던 애인에게 말했단다. 나도 오렌지가 먹고 싶다고. 애인은 친구에게 물었단다. 센스도 좋지. ㅇㅇ야, 너도 오렌지 사 줄까? 그날 친구는 오렌지를 먹었다. 두꺼워서 껍질이 잘 까지지도 않는 오렌지 한 알을 칼로 잘라서 냠냠 먹었단다. 그리고는 말했다. 오렌지를 먹고 싶다고 했을 때 오렌지를 사 줄까, 물어 주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했어.


재미있는 것은, 오렌지를 사(buy) 줄까의 의미를, 누군가는 오렌지를 사는 돈을 내가 내줄까, 그렇게 들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친구는 오렌지를 자기가 계산했단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다. 네가 나에게 물어 봐 줬으니 너는 나에게 오렌지를 사준 거나 다름이 없다는 거다.


나는 언제나 그런 믿음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면 행복하고 슬퍼진다. 슬픈 건 왜일까. 사람은 사람과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진실. 나에게 오렌지 먹고 싶냐고 물어봐 줄 사람이 누군가에게나 필요하다는 진실. 그건, 슬프게 만든다. 누구를? 그렇게 물어봐줄 사람 없는 사람을. 아니, 사실은 그렇게 물어봐줄 사람 없는 순간의 나를.


누구나 슬픈 순간이 있잖아. 오렌지를 먹지 못하는 순간. 아니, 오렌지를 먹지 못해서 슬픈 게 아니라 오렌지를 먹고 싶은 게 맞냐고 아무도 말해주지 못해서 슬픈 거잖아.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내가 오렌지를 먹고 싶은지 아닌지도 잊게 되잖아.


그래서 그날 마트에는 왜 갔었냐고. 그 소녀가 먹고 싶었던 오렌지가 아니라 네가 정말로 먹고 싶은 건 뭐였냐고. 소녀를 빌려서 얘기하지 말라고. 너를 이야기하라고.

그런 말은 눈물이 글썽이는 친구 앞에서 못 했다. 친구는 초코가 발라진 빵을 몇 입 먹다가 맛이 없다며 그만 먹겠다고 했다. 그런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네가 싫어하는 걸 내가 알게 되는 것. 싫어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어쨌든 네 취향을 내가 알게 되는 것.


그냥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믿어서.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거라서. 그런 친구를 만나서 나는 행복한 날이었다. 너를 만난 게 내 모든 요즘의 행복한 일이었어.


네가 크게 보여서. 네가 말하던 순간에는 정말로 너밖에 보이지 않아서.  아. 이 친구와는 아이를 낳고 나서는 처음 봤다. 나는 아이를 낳았고 친구는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다. 나는 결혼을 했고 친구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너무도 별 것 아닌 차이지만 너무도 극명한 차이다. 환경이라는 것의 차이다.


아니다. 이런 것은 오렌지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오렌지는 먹으면 되니까. 오렌지는 상큼하니까. 상큼한 건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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