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맘 Jul 22. 2021

아이를 낳으면 죽고 싶지 않을 줄 알았다

아이를 낳으면, 죽고 싶지 않을 줄 알았다. 얼마 전 남편에게는, 솔직히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라면서, 사실 종종 죽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은 진지하게 말을 들어주었다. 나는 혹시 내가 죽고 싶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남편이 내 말을 덜 진지하게 들었을 것을 걱정했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를 표현하고 싶은 정도였겠지만, 어쨌든 죽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매일 말이다.


밤마다 드는 이런 마음은, 아무래도 불안이다. 지나간 생을 아까워하듯 하루를 아쉬워하는 기분을 느낀다. 괴로운 일이다. 지나간 것을 슬퍼하는 일이란 다가올 것의 기대감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이 불안감과 싸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불안감은 장군 같고 나는 미물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다툴 필요가 없는 것처럼,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면 그냥 포기하고 싶어 진다. 말하자면, 죽고 싶어 진다. 그러나 죽지 않으면서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역시 불안과 싸우는 일이다. 나는 죽음을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안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냥 불안하기로 마음먹는 즉시 삶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곧 지나갈 거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매일 행복하다. 내가 죽지 않는 이유라고 한다면 이게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죽은 후에도 삶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삶은 행복하거나 불안하고, 편안하거나 그렇지 않아서, 결국 어떤 중립 상태를 지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녁에 자려고 누우면 온갖 감정을 다 겪고 삶의 끝에 도달한 할머니의 마음이 된다. 내게 아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그저 체념하는 마음이다. 그렇게 마음먹어야, 잠에 들 수 있다.


매일의 잠은 역시 매일의 죽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남편은 밤마다 불안해하는 나를 위해 며칠 전부터 명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요가 강사로 일하면서 수년 동안 매일 명상을 지도했던 나에게, 남편은 명상을 가르친다. 첫마디는 매일 이렇게 시작한다. 검은 화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 눈앞의 화면은 검은 색이 된다. 남편의 손을 잡고 나는 기꺼이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보면 아침이 된다.


이렇게 하루를 살아내는 것을, 노하우라고 할까. 죽음에 굴복하는 법이라고 할까. 죽고 싶은 마음을 데리고 살아내는 법이라고 할까. 어쨌든 나에게 죽고 싶은 마음은 언젠가부터 너무 당연한 것이 되었다. 가끔은 그냥 잠에 들고 싶다, 는 말과 혼동될 만큼 말이다.


그러나 이제 팔 개월이 되지 않은 내 아이가 엄마 죽고 싶냐고 물어보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숨기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는 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가끔은 거짓말을 하고 싶다. 지키고 싶은 아름다움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불안함을 사랑하고 싶다. 삶에 대한 불안함이 죽고 싶은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삶에 대한 배반이 아니면 좋겠다. 내 아이에게 가르칠 더 좋은 마음이 없으면 좋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또다른 영역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아이에게는 죽음에 대해서 동화처럼 전해주고 싶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그럴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역시 잘 모르겠다. 삶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뿐인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역시, 삶일 것이다. 사실 내가 싸워야 하는 것은 죽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회의인지도 모르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나는, 처절하게 살고 싶다. 뭐가 먼저냐고 물어 보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죽고 싶다는 생각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 어떤 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에 도달한다. 삶이란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꼭 괜찮을 것만 같다.


사실 죽음은 삶의 그림자가 아닐까. 그림자를 확인하는 것은 미친 것이 아니고 본능 아닐까. 죽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찡찡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말이다. 살고 싶다는 말처럼은 들리지 않더라도, 죽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이혼의 불행을 딛고 결혼의 행복을 찾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